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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 30분, 세상을 깨우는 도량석 소리가 법당 가득히 울려 퍼지면서 아침 일정이 시작됩니다. 스님께서는 오늘도 여느 대중들보다 이른 시간에 법당에 내려오셔서 개인 기도를 하셨습니다. 5시에 종성이 끝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집전자의 목탁이 또르르 구르며, 새벽예불과 천일결사 기도가 이어집니다. 스님께서 함께 하시니 대중들의 기도 소리도 어쩐지 더 우렁차게 느껴집니다.
아침 청소가 끝나고 발우공양에 참석하신 스님께서는 퇴수통의 퇴수물이 맑지 못하다며, “여기 새로운 사람이 없고 오래 된 사람들만 있는데 이렇게 퇴수물이 더러워서 되겠느냐. 이것은 여러분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며, 발우공양 시간에도 깨어있어야 한다고 다시 일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4월 주말 일정에 대해 가볍게 논의하셨습니다. 이번 주말에 서울 공동체 성원들은 청년정토회의 경주 역사기행에 참여하고, 저녁에는 스님의 강의를 잠깐 듣다가 벚꽃 야경이 절경인 보문단지에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청년 정토회 역사기행에는 스탭들 포함해서 370 여 명이 참가한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서울 공동체 대중들은 그 꽁무니에 뒤따라오면서 느긋하게 벚꽃 구경이나 실컷 하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 날엔 아침 일찍부터 탑곡 수련원에 가서 농사 준비를 좀 해두고, 오후에는 그 뒷산을 등산하거나 작천정에 가보자고 하십니다. 스님께서는 일요일 저녁에 문경 공동체 대중들과의 일정이 있어서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저녁 늦게까지 충분히 야경을 구경하고 서울로 올라가라고 권하셨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도 두북 수련원에서 오전에 포살을 하고 오후에는 운력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도 일부러 그날은 운력하는 일정으로 잡으시고 일거리를 모아놓았다고 하셨습니다. 운력을 마치고 스님과 잠깐 시간을 보낸 뒤 다음날은 용성조사 열반일이어서 죽림정사에 같이 가자고 하셨습니다. 죽림정사 앞산에 진달래꽃이 또 그렇게 장관일 수가 없다며 진달래꽃구경을 하자고 하십니다. 용성조사 열반일 참석보다 진달래 꽃구경이 우선인 것처럼 들려서 대중들이 ‘와아~’ 하고 웃었습니다.
스님께서 제안해 주신 봄소풍 소식만으로도 서울 공동체 대중들의 얼굴이 더욱 환하게 밝아보였습니다. 발우공양과 대중공사를 마치고 스님께서는 원고를 교정하신 후, 곧 통일학교 강의를 준비하셨습니다.
오후 2시부터 통일학교 네 번째 강의가 시작됐습니다. 통일학교 두 번째 시간에는 상고사를 살폈고, 세 번째는 민족사가 한반도로 축소된, 동북아에서 주도국이 아닌 변방으로 전락한 역사, 그 가운데서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기 전 100년의 근대사와 민중의 고통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늘은 광복이 되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지난 70년이 어떻게 전개돼 왔는가, 그간 통일을 위해 어떤 노력들이 있었는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현재 분단된 상태로 남북한은 어떤 과제를 안고 있는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올해가 분단 70주년입니다. 2차 대전 후 분단된 나라가 여럿 있어요. 먼저 독일은 침략국이니까 다시는 침략을 못하도록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4개 연합국이 분할통치 하기로 했습니다. 전후에 세계가 미, 소 양 진영으로 나뉘니까 미, 프, 영 3국이 분할 통치하던 지역은 합쳐서 서독이 되고, 소련이 통치한 지역은 동독이 됩니다. 베를린도 그렇게 해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으로 나뉘죠. 일본은 침략국임에도 미국이 단독으로 지배를 했고 이탈리아는 일찍 항복을 했으므로 분할을 면했습니다. 일본은 미국이 무장 해제시키고 만주는 소련이 무장 해제시키고, 한반도는 38선을 나눠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들어와 무장해제하면서 분할 지배를 하게 되요. 이게 분단의 시작이죠.
우리는 해방이 되니까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다 들어오고 국내에서는 여운형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가 자발적으로 형성돼서 일제로부터 모든 행정을 인수받으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미군이 직접 통치를 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일본군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서 미·소군대가 남북한에 들어와 있었는데 미, 소, 영 3국이 모스크바에서 3상회의를 열어 미군과 소련군이 행정을 맡아 3년간 한반도를 신탁 통치하기로 결정한 거예요. 우리 국민들은 여기 반대해서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일어났죠.”
이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려옵니다. 침략국은 일본인데 왜 침략의 피해국인 한반도가 분할통치의 희생자가 돼야 했는지, 냉엄한 국제정치가 비정하게만 느껴집니다. 스님께서는 담담하게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당시 국내 상황을 보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세력 중에 공산당 조직이 가장 강력했습니다. 왜냐하면 공산당은 소작농 해방이랄지 토지개혁 같은 생활에 밀착된 주장을 하니까 민중 가운데 존재하기가 가능한데, 그냥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운동하자는 것은 아주 깨인 사람이 아니면 참여하기 어려워 세를 확대하기가 힘들었어요. 종교 지도자들이나 개별 지사들, 또는 개별 명망가들 정도가 있었죠.
먼저 북한을 볼까요? 해방 후 북한은 조선 공산당, 중국 연안파, 소련 유학파, 김일성의 갑산파 등이 연합하여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소련 입장에서는 소련 유학파 중에 명망가가 없었으므로 소련과 연계도 있고 국내에 명망도 있던 김일성을 지원키로 결정합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중심이 돼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지주계급은 원한을 가졌겠지만 절대다수의 소작농과 농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이 먼저 1948년 5월10일에 단독으로 선거를 실시한 뒤 8.15에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합니다. 북한도 이에 8월에 선거를 거쳐 9.9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합니다. 형식상 자주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외세에 의해 강제 됐던 분단이 내부적으로 고착됩니다. 단독정부가 수립된 1948년을 분단 원년으로 볼 수도 있겠죠.
이제 북쪽에서는 김일성이 수상이 되고 조선공산당 당수였던 박헌영과 벽초 홍명희가 부수상 자리에 오릅니다. 남쪽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해서 정부가 구성되는데, 일제 식민시대 관료들을 그대로 등용하니 인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데다 단독정부에 반대하던 김구 선생이 1949년에 암살당하면서 민심이 매우 뒤숭숭해집니다. 농민을 중심으로 토지개혁을 주장하면서 빨치산 투쟁이 일어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니까 북한은 이를 통일의 기회라 보고 남침을 감행하여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합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참전하고 또 나중에는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전쟁 중에 남북은 서로 한쪽은 적화통일, 또 한쪽은 승공통일을 주장하죠. 결국 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맺어지는데, 북한은 이날을 승전기념일로 기립니다. 북한이 통일을 목표로 했다면 이것은 실패한 전쟁입니다. 그러나 자기 체제를 지켜낸 측면에서 보면 승전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 전쟁은 남북한 군인과 유엔군, 중국군, 민간인 다 합해서 280만 가량이 죽고, 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이 생기면서 민족사의 최대 비극으로 끝납니다.
전쟁 후 북한에서는 전쟁에 대해 책임 질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전쟁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다는 점과 미국의 첩자라는 명목을 들어 박헌영을 숙청합니다. 또, 56년에 종파주의자들을 숙청한다면서 연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하면서 김일성 독재체제를 강화해 나갑니다. 이문제로 인해서 소련과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북한은 50년대 후반부터 천리마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50년대 후반과 60년대에 이르러 소위 대동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룹니다.
이 무렵 소련과 중국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소련은 이미 사회주의 체제가 수립된 지 오래되어 생산성이 정체되니 인센티브를 주기 시작했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수정주의라고 비판합니다. 북한은 양쪽을 살피다 72년에 주체사상을 표명하면서 완전히 김일성 유일사상체제로 바뀌어요. 그러면서 70년대 저성장, 80년대 정체에 이어 90년대에는 쇠퇴국면에 들어갑니다. 92년에는 맑스레닌주의를 헌법에서 삭제하고 98년에는 공산주의도 헌법에서 삭제하면서 주체사상, 선군정치, 백두혈통을 주장합니다. 사회주의로 시작했는데 김씨왕조체제가 돼버린 거예요. 이렇게 되니 자발적 지지가 아니라 억압과 통제로 통치되니까 정치적으로 취약하고 또, 경제적으로 취약하다보니까 안보위기를 느껴서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거예요. 늘 통일을 주장해왔으므로 지금도 통일을 말하기는 하지만 현재 내적으로는 자기 체제 유지에 몰두해 있습니다.
이렇게 북한이 급격하게 쇠락한 것은 자신들의 잘못도 있지만, 약소국의 운명이 배후의 강대국에 좌우되기 때문이에요. 2차 대전 후 사회주의가 확대되는 분위기에서는 경제적으로는 미국이 컸어도 경제 발전 속도에 있어서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가 훨씬 빨랐습니다. 그러다 70년대 이후 미국의 기술력이 높아지면서 기술과 생산성에서 소련이 밀리게 되고 사회주의 전체의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북한도 그런 데서 영향을 받습니다. 90년대 들어서는 소비에트가 해체되고 동유럽이 붕괴되고 미국의 경제봉쇄로 북한 경제는 무역 통로를 잃습니다.
북한이 겪게 되는 경제위기의 원인은 첫 번째, 외환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외환이 없으니 에너지 자원인 석유를 사올 수 없고, 에너지 부족으로 전기 생산이 줄어들고, 전기 공급이 안 되니 모든 산업이 순식간에 멈춥니다. 트랙터니 비료니 농자재 공급이 안 되니까 농업생산량이 떨어집니다. 북한은 황해도, 평안도가 곡창지대여서 여기서 생산한 곡물로 노동자들에게 배급을 줘야 하는데 생산량이 떨어져 배급할 식량이 부족하니 동쪽의 함경도 쪽과 노동자층이 먼저 위기를 겪습니다.”
스님께서는 지난 1990년대말 고난의 행군 시기에 사단법인 좋은벗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시기에 약 300만 가량의 북한 주민이 식량난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300만이면 6.25전쟁의 희생자보다 많은 수입니다. 스님은 식량난으로 막대한 인명피해가 있었으나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 소리 없이 죽어갔다고 하셨습니다. 조용한 전쟁 하나가 일어났는데 아무도 바깥으로 아우성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고통을 대변해서 한국 사회와 국제 사회에 알려내려고 좋은벗들을 설립하고 활동에 나섰노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북한 식량난 실태에 대해 많이 알려졌지만, 근래에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비극을 다시 듣노라니 마음이 아파옵니다.
“북한은 이런 위기에 처하면서 경제, 사회적으로는 붕괴 직전에 놓이지만 정치, 군사적으로는 잘 조직되어 그대로 통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두고 어떤 사람들은 북한이 내일 망할 거라고 하면서도 또 내일 쳐들어올 거라는 모순된 주장을 하는데, 북한은 경제사회적으로 피폐해서 장기적으로 보면 생존하기 힘들지만, 정치군사적으로 잘 짜여 있어서 단기적으로는 붕괴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이제 남한을 볼까요. 45년에 해방이 되고 건준위가 구성되어 활동했으나 인정받지 못 받고 여운형이 암살됩니다. 48년 단독정부 수립 후 김구 선생이 암살됩니다. 내부적으로 정치적인 혼란이 많았습니다. 6.25 전쟁중 우리정부가 부산에 피난가서 겨우 유지되던 시기에 이승만이 헌법을 개정하여 정권의 연장을 꾀합니다. 휴전협정 후 전국토가 피폐화되고 미국이 주는 구호품으로 간신히 유지가 됩니다. 경제적으로도 약하고 군사적으로도 미군에 의해 체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이승만은 부정선거로 장기집권을 꾀합니다. 부패가 만연하고 국민적 저항에 부딪치니,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마산에서 희생자가 발생하고 학생들이 의거하지요. 그 후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쿠데타의 주역들이 정부에 참여하면서 집권합니다. 이때부터 정치는 강압통치, 경제는 계획경제를 가동하면서 80년대 들어 마침내 고도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67년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3선 개헌을 시도하지요, 엄청난 국민적 저항이 있었지만 3선에 당선되고 72년도에 유신헌법을 통과시키면서 유신체제를 정립합니다. 79년에 10.26 시해가 있고 전두환의 12.12사태가 일어나면서 80년 광주항쟁으로 이어집니다. 80년대 학생들의 격렬한 저항과 함께 시민참여가 늘어나면서 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맞이합니다. 현재 우리헌법은 87년 체제로 당시는 독재를 막자는 데 핵심이 있었으므로 변화된 상황에 맞게 헌법을 개정하자는 움직임이 현재 있는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내부적으로만 보면 남한이, 혹은 북한이 그때그때 잘했다고 평가하겠지만 외적으로 보면 미, 소가 팽팽할 때 분단이 되었고, 소련이 우위에 있을 때 북한이 우위를 점하고, 미국이 절대 우위에 있을 때 남한이 우세했던 걸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상황을 냉철히 판단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통일을 위한 노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통일을 위한 노력 가운데 첫째는 신탁통치 반대와 단독정부 수립반대를 들 수 있습니다. 또 6.25전쟁도 무력 통일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남침통일이나 북진통일은 군사력을 불사하는 적극적 통일운동으로 양쪽 다 자기식의 흡수통일을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우리가 겪어서 잘 알지 않습니까. 요즘 한국 내 극우세력이 주장하는 힘에 의한 흡수통일은 6·25때 북한이 저지른 오류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며칠 만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전쟁은 승패에 관계없이 엄청난 피해를 야기하기 때문에 다시는 무력통일을 거론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4.19 후 학생들의 통일 운동도 있었습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 아래 통일의 의지를 펼쳤지만 5.16쿠데타로 제압당했습니다. 1970년대 들어 양쪽 다 이제 흡수통일은 어렵다는 인식하에 7.4 남북공동성명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는 외세를 끌어들이지 말고 자주적으로 하자, 군사력을 사용하지 말고 평화적으로 하자, 민족대단결로 하자는 세가지 원칙을 합의합니다. 그러나 공동성명 얼마 후 남쪽은 유신체제, 북쪽은 주체 체제로 각각의 독재를 굳히는 방향으로 갑니다.
남북합의는 노태우 정부 때 제일 진전이 있었어요. 1991년도에 남북 기본합의서를 체결하면서 상호불가침, 상호체제 존중, 유엔 동시가입, 교류협력에 대한 합의를 하게 되죠. 다음 김영삼 정부는 94년에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했는데 갑자기 김일성이 타계합니다. 이 때 조문을 가고 그랬으면 잘 풀렸을지도 모르는데, 김일성이 사망하니까 북한이 곧 망하겠다고 판단해서 조문도 안가고, 가겠다는 사람도 못 가게 하니까 악감정이 생겨서 아예 남북교류가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김대중 정부 들어 6.15공동선언이 나오면서 남북한의 교류협력이 굉장히 증대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 통일론이 논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체제를 인정한 위에 통일정부를 구성하는데 북쪽은 통일강도를 높이자하여 연방제, 남쪽은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즉 연합제를 주장했어요. 연합제는 유럽 연합처럼 완전히 독립국가로 유엔도 따로 가입하고 군대와 외교권도 독자적으로 갖되 긴밀히 협력하는 것이고, 연방제는 미합중국연방처럼 결합의 정도가 높은 거예요. 6.15 선언에서는 남한에서 주장한 연합제가 북한주장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공통점이 있다고 합의하죠. 이것은 사실상 남한의 주장에 북한이 합의한 것이죠. 남북한에 적대감정이 없어지면 연합제로는 쉽게 갈 수 있어요. 서로 왕래하고 경제교류를 확대하고, 국제경기 공동출전하고 문화교류하고 1년에 몇 차례씩 고위급 회담 진행하고, 이렇게만 해도 상당히 자유로워져요.
노무현 정부에서는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균형자 외교론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을 너무 일찍 내세운 거예요. 말은 맞는데 미국의 영향력이 아직 강한 상태에서 미국의 우려와 경계를 사고 맙니다. 마치 갑신정변이 조급하게 진행되면서 오히려 개혁을 후퇴시킨 것과 같은 결과를 낳았죠.
이명박 정부는 역대 정부 중 가장 친미 일변도의 정책을 폅니다. 한국도 이 정도 국력이 되면 한미가 동맹을 하되 자주성이 있어야 하는데, 완전히 종속적으로 가면서 남북관계가 파탄 나고 한일군사정보교류 협정까지 비밀리에 맺으려다 들통이 나서 국민들의 공분을 사죠. 박근혜 정부에서 얼마 전에 한일군사정보교류 협정을 맺었는데도 국민이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지나갑니다. 요즘 뉴스에 오르는 AIIB도 그렇고 사드도 그렇고, 미국의 요구에 따라 미국 요구 들어주고, 중국 요구에 따라 중국 요구 들어주면서, 강대국의 요구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어요. 자기가 중심을 잡고 가야 하는데 중심 없이 내몰리고 있어요. 조선조 말에는 국력이 없어서 그랬다 치지만, 현재는 국력이 충분한데도 역사의식이 없고 애국심이나 결단력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지금 남북은 교류협력이 다 중단되고 적대감이 분출되고 안보가 불안정해서 통일은 고사하고 평화도 보장하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고 있어요. 남한 안에서 언론이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고 민족통합은 말도 꺼낼 수도 없고 통일과 평화를 말하면 오히려 공격받는 상황입니다. 민주주의도 후퇴하고 자주성도 후퇴하고 있어요. 우리가 옛날보다 경제적으로 잘 산다는 것 빼고는 민족사의 관점에서 볼 때 올바르게 발전한다고 상황으로 가고 있어요.”
스님께서는 역량으로 보면 남한이 통일 중심세력이 되어야 하는데 통일의지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과거 통일운동 세력이 사라진데다 북한은 자기체제유지에 급급해서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고려한 만큼 지도자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지도자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고 북한까지도 통합해서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고통 받는 북한 민중을 구제하고 민족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정말 그런 사고를 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면 한결 신명이 날 것 같습니다. 스님은 이어 현재 북한 사회의 과제는 무엇이고, 남한 사회의 과제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 질문을 던지시는 것으로 다음 강의를 이어가셨습니다.
“북한은 안보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국제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돼 있습니다. 이렇게 안보위기에 처해 있으니까 모든 관심이 거기 쏠려서 오직 체제유지를 위해 핵을 개발하고 생화학무기 등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니 국제사회에서 더욱 비난받고 고립되는 겁니다.
심각한 에너지 위기가 발단이 된 경제 위기 상황도 아직 회복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면에서는 인민의 민심 이탈이 심해지고 감시와 처벌 위주로 나가니 인권이 침해되어 민심은 더 떠나는 상황입니다. 사회면에서는 모든 게 통제중심으로 가다보니 자유와 활기가 없습니다.
북한이 개혁개방을 못하는 이유는 안보위기 때문이에요. 미국에게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적대시 정책을 포기하라는 게 북한의 요구예요. 미국은 핵개발을 포기하고 개방을 하라고 요구하지만, 미국과 협상했던 이라크나 리비아가 붕괴하는 전례를 보면서 더욱 폐쇄적인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작게 보면 북한이 잘못하는 것 같지만 크게 보면 분단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적대관계가 해소되어 안보 문제만 서로 보장돼도 인권문제가 상당히 개선될 수 있어요. 북한 지배세력은 통일의지가 없지만 북한 인민은 우리보다 더 통일에 대한 원이 간절합니다. 남한은 능력은 있지만 통일에 대한 관심이나 의지가 없어서 통일이라는 민족의 문제가 방치된 상태입니다.
남한은 역사적으로 통일의지도 적은데다, 지난 50년간 통일하지 않고도 잘 살아왔는데 지금 통일할 필요가 뭐 있느냐, 못사는 북한과 통일하면 손해 아니냐는 생각이 많습니다. 기성세대는 북한에 대해 적대적이면서도 통일에 대해 호의적인 면이 있었는데 젊은이들은 적대도 호의도 없이 아예 관심이 없어요. 젊은 세대가 통일을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려면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통일의 당위성만으로는 부족하므로, 현재 통일이 우리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려주어야 합니다.
남한은 남한대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경제성장의 동력이 소진됐어요. 외적으로는 우리를 둘러싼 국제 사회의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한국을 둘러싸고 미·일·러·중 4강이 충돌하는 게 백 년 전과 꼭 같은 양상입니다. 강대국의 이해가 충돌할 때 내부적으로 단결돼 있으면 뭔가 해볼 수가 있는데 남북이 분단되어 적대하고 있는 상태하에서는 아예 선택지가 없어집니다. 아무런 미래의 희망이 없는 길로 가는 거예요.”
스님께서는 국제적으로 우리의 위상을 찾기 위해서도 통일이 유일한 길이라며 통일된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통일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셨습니다.
“결국 높은 수준의 문명이 되려면, 보다 민주적인 사회시스템과 높은 창조성이 발현돼 훌륭한 문학작품, 예술작품, 위대한 사상가들이 나와야 합니다. 창조력을 키우려면 창조경제라고 말만 한다고, 또 강압적으로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연구하고 도전하도록 열어줘야 합니다. 이게 과제인데, 이 모든 것이 다 분단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단과 밀접하게 관계돼있습니다. 개인의 살 길이든 나라의 발전이든, 남한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나 북한 민중을 돕거나 국제정세 속에서 국가의 위상을 찾기 위해서도 통일이 유일한 희망일지 모릅니다.”
통일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라는 당부 말씀으로, 오늘 강의를 마치셨습니다. 어제보다 10분 늦게 끝났습니다. 스님께서도 점점 길어진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으시고는 “시간 맞추는 게 잘 안되네. 나중에 영상 편집을 잘 해 달라”고 주문하시고는 또 웃으십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참가 대중들도 나누기를 급히 마치고 종종 돌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오후 6시에는 평화재단에서 최상용 교수님과 저녁식사 일정이 있었습니다. 최상용 교수님께서는 오늘 평화리더십아카데미에 강사로 오셔서 ‘중용의 민주주의를 말하다-정의는 중용이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실 예정입니다. 강의 전에 스님께서 교수님을 맞이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요즘 저녁을 드시지 않기 때문에 최상용 교수님 부부만 식사를 하시면서 불교의 중도와 유교의 중용, 플라톤의 중용에 대해 담소를 나누셨습니다.
최상용 교수님을 강의 하실 수 있도록 청중들에게 소개하시고 스님께서는 이기혜 대표님의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들르셨습니다. 간단히 문상을 한 후 상주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신 후,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님의 어머님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현대아산병원에 들러 문상을 한 후 정토회관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문상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시니 벌써 밤이 늦었는데도, 스님께서는 바로 주무시지 않고 정토회관 집무실에서 내일 있을 통일학교 강의를 준비하시며 하루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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