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3.22 한국 귀국 및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


▲ 가을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 

 

안녕하세요. 스님께서는 어제 오후 인도를 출발하여 오늘 새벽6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셨습니다. 곧바로 문경정토수련원으로 이동해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 법문을 해주신 후 두북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어제 오후 2시50분에 인도의 가야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바라나시를 경유해서 밤 9시30분에 방콕공항에 도착한 후 1시간 30분 동안 방콕 공항에 머문 후 11시 10분에 출발해서 밤새 5시간을 비행하여 오늘 새벽6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 인천공항에 내리기 전 비행기에서 바라본 하늘

 

스님께서는 비행기 안에서 앉은 채 자다 깨다를 반복하시다가 인천공항에 내려서는 곧바로 문경정토수련원으로 이동하셨습니다. 오전10시부터 정토불교대학생들을 위한 특강수련 법문이 예정되어 있어서 혹시나 법문 시간에 늦어질 것이 염려되어 잠시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공항까지 따라온 SBS 촬영팀은 이런 스님의 스케쥴을 보고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 인천공항에 도착한 스님 

 

다행히 오전 9시 30분경 정토수련원에 도착한 스님께서는 세면을 하시는 등 정비시간을 가지신 뒤 10시15분부터 작년 가을에 입학한 정토불교대학생들을 위해 즉문즉설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정토불교대학생들은 어제 오후3시부터 이곳 문경정토수련원에서 특강수련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 시간에는 그동안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궁금했던 점에 대해 스님께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입니다. 이렇게 이번 주말에는 영남권과 중부권 불교대학생들이 이렇게 스님과 수련을 하고, 다음주 주말에는 수도권 불교대학생들이 이렇게 수련을 할 예정입니다.   

 

스님께서는 즉문즉설 법문을 통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무엇인지, 정토불교대학을 다니면서 수행, 보시, 봉사를 함께 해야 하는 이유, 불자로서 사회적 역할을 다해야 하는 이유 등에 대해 소중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총 8명이 그동안 불교대학에 다니면서 궁금했던 점들을 질문했습니다. 

 


▲ 가을 정토불교대학 특강 수련 

 

“부처님은 도를 이루기 전에 마왕 파순에게 ‘나는 전생에 셀 수 없는 많은 보시를 했다”고 하고, 정근과 희사의 시간에는 “다겁생래 지은업장 지금 내가 참회하니” 이런 구절들을 보면 전생과 내생을 불교가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전생과 내생이란 없다는 것이 불교의 교리라고 배웠는데, 업을 지으면 내생에 과보를 받는다는 이런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춘다는 부처님 법문을 듣고 한번만에 깨쳤다고 나와있는데 우리들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었을까요?”

 

“지난주 근본불교 1강을 들었는데 윤회란 없다고 하셨어요. 맞나요?” 

 

“천일결사 기도에 입재하였는데 108배 안하고 마음나누기만 올리면 안될까요?”

 

“부처님의 세력이 커지면서 왕이나 귀족들의 탄압이 있었는지요? 제가 속한 조직이 보수적인 공무원 조직이라 정토회라는 것을 밝히면 불이익이 있을 것 같은데 밝혀도 괜찮을지요?”

 

“명상을 하면 이 생각 저 생각이 많이 납니다. 정상인가요? 명상의 의미와 알아차림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천일결사 입재식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간염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어서 새벽에 일어나 108배 하는 것이 혹시 무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할까요?”

 

“정토회에 나오게 되면서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분단 문제와 통일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하나 같이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얘기합니다. 정말 통일은 힘든 걸까요? ” 

 

이렇게 다양한 질문 중에서 두번째 질문인 참 나는 무엇인지에 대한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공부를 하면서 잘 모르는 부분인데 오늘 스님께서는 쉬운 비유를 들어주시면서 명쾌하게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고정된 ‘나’는 없다고 배웠는데요. 업식과 까르마도 진짜 나의 모습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럼 참 나는 어디에 있고 어떤 것일까요?”

 


 

“자기가 자기 엄마를 만나면 자기를 뭐라고 불러요?” 

“딸이요.” 

 

“아이는 자기를 뭐라고 불러요?” 

“엄마요.”

 

“남편은 자기를 뭐라고 그래요?” 

“아내요.”

 

“가게에 가면 자기를 뭐라고 그래요?” 

“손님이요.” 

 

“택시 타면 자기를 뭐라고 그래요?” 

“승객이요.”

 

“학교에 가면 자기를 뭐라고 그래요?” 

“학부모요.”

 

“절에 가면 자기를 뭐라고 그래요?” 

“신도요.” 

 

“이렇게 열번 스무번 물을 때마다 불리는 이름이 같아요? 달라요?”

“달라요.” 

 

“그럼 자기는 그 중에 무엇이예요?” 

“전부 다요...” 

 

“엄마 노릇을 오래 하면 내가 엄마라고 착각하기 쉽고, 아내 노릇을 오래 하다 보면 내가 아내로 착각하기 쉽죠. 아내 노릇을 오래 하다가 남편이 죽으면 ‘나는 남편이 없는 아내(미망인)인가’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이것은 자기를 아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으면 자기는 아내예요? 아내 아니예요?” 

 

“아내 아니예요” 

 

“남편이 죽으면 더이상 아내가 아닌데 아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남자랑 다시 손을 잡아야 아내가 됩니다. (대중들 웃음) 남편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아내가 아니예요. 그래서 ‘남편이 죽은지 얼마 안되었는데 내가 벌써 다른 남자를 만나도 될까’ 이런 생각은 다 헛된 생각이예요. 남편이 없는데 자기가 아내라고 착각하는 이것이 ‘자아’ 입니다.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서 규정되어 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원한 것이예요? 일시적인 것이예요? 일시적인 것입니다. 하루든 열흘이든 십년이든 백년이든 천년이든 그것은 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관계가 바뀌면 바로 다른 것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루에 열두번도 더 규정이 바뀌지요. 이것이 존재의 본질이예요. 그런데 그 어떤 것으로 나를 삼을 것인가? 그 무엇도 ‘나’라고 규정할 것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시때때로 그 무엇도 될 수가 있는 거예요. 나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그러나 시공간의 한 순간과 한 입장에서는 그 무엇도 될 수가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무아’입니다. 

 

그런데 ‘이것 빼고 또 나는 무엇이냐?’ 이런 생각을  왜 또 해요? ‘참 나’ 라는 말은 ‘나’라는 것이 있다는 전제 위에 나온 생각입니다. ‘이것이 나다’ 해서 따지고 보니 ‘나 아니네’ 이렇게 되니까 그럼 ‘진짜 나는 무엇인가?’ 이렇게 엉뚱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있다’는 전제를 깔아놓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짜냐 진짜냐 따지는 것입니다. 가짜냐 진짜냐 하는 것은 없습니다. 진짜 나가 있다고 하면 “그렇지 않다” 이 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무엇도 아니고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아요? 옛날에는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 국민이여야지 중국 국민, 미국 국민이 될 수 없었죠. 그런데 요즘 시대에는 한국에서 태어났는데도 중국 사람, 미국 사람이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옛날에는 한번 결혼하면 남편이 죽어도 영원히 한 남편의 아내여야 했는데, 요즘은 남편이 살아있어도 헤어지고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이 가능하잖아요. (대중들 웃음) 

 


 

만주벌판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고구려 사람이었다면 지금도 다 한국 사람이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다 중국 사람이 되어 있죠. 한국 사람들이 다 죽고 중국 사람들이 늘어나서 중국 사람이 되었을까요? 뇌 속에서 한국 사람이라는 생각이 중국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바꾸어 버린 것일까요? 육체적으로는 그대로이지만 생각이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또 양반과 쌍놈이 다 죽어서 양반과 쌍놈이 없어졌어요? 양반이다 쌍놈이다 하는 생각이 없어졌어요? 생각이 없어진 것이죠. 

 

‘나’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있느니까 죽으면 옮겨 다니면서 이것이 되었다가 저것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아트만관에 따라서 윤회니 전생이니 이런 사고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아트만은 없다’ 고 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고립된 단독자는 없고 모든 것이 다 연관되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 물체가 세 개 있습니다. 이 두 개 중에 어느 것이 더 큽니까? 

 


 

이렇게 하면 이 컵이 커요, 적어요? (커요) 

이렇게 하면 이 컵이 커요, 작아요? (작아요)  

그렇다면 이 컵은 큰 것이예요? 작은 것이예요? (웅성 웅성) 

 

그러니 첫째, 크다 작다는 언어를 갖고 대답을 하면 이 컵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둘째, 크다 작다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답하면 그냥 그것일 뿐입니다. 크냐 작냐 열두번을 물어도 ‘그냥 그것일 뿐이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셋째, 이것을 철학적인 용어로 ‘공(空)’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큰 것도 작은 것도 아닌 이것은 또 뭐예요?” 이렇게 묻습니다. 왜 꼭 그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이 두개만 비교하면 작은 것이 되지요. 그런데 영원히 작은 것입니까? 이 조건에서만 작은 것이지요. 다른 조건에 가면 큰 것이 됩니다. 그러니 이것은 크다 할 수도 있고 작다 할 수도 있고, 새것이다 할 수도 있고 헌것이다 할 수도 있고, 신선하다 할 수도 있고 부정하다 할 수도 있고, 그 무엇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아닙니다. 이것이 연기법이고, 이 연기법에 따라서 ‘무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차근차근 사실적으로 접근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고, 살펴보고, 있는 그대로 보면 진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얼핏 보기 때문에 “그건 큰거야”, “그건 작은거야” 이렇게 말 하고 말죠. 즉 사실은 이 컵이 크고 작은 것이 아니라, 크다 작다고 하는 것은 인식 작용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가 다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존재의 문제가 아니고 인식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의 논리로 말하면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 됩니다. 크다 작다고 규정되는 것이 ‘색’이고,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공’입니다. 그러니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고 교리다 뭐다 온갖 것을 다 배우면서도 항상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실체가 있고 불변하는 것이 있다는 사고인 ‘아관’과 ‘상관’이 무의식 속에 깔여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을 배워도 항상 그 틀로 인식을 합니다. 그러니 지식으로는 그 용어를 아는데, 다가오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를 외우는 것입니다. 말로는 불교는 무아이고 무상이다 하지만, 실제 삶은 아관과 상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 교리를 굉장히 연구해서 박사 학위를 따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교를 가르치는 사람도 아내 때문에 괴로운 경우가 있겠지요? 이것은 그냥 불교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지 붓다 담마는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불교 철학을 공부하러 왔어요? (아니요) 

종교로서의 불교를 공부하러 왔어요? (아니요) 

과학을 공부하러 왔어요? (아니요) 

 

우리는 진리로서의 불교인 ‘붓다 담마’를 공부해서 고뇌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붓다 담마를 공부하면 내가 병이 안나게 될까요? 내가 병이 나도 웃을 수 있게 될까요? 이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병이 안 나는 게 중요하지 웃을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러나 현대 사회로 올 수록 점점 붓다 담마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시험에 걸리고 안 걸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부처님은 왕위를 버리고 출가를 하셨는데 여러분들은 지금 왕이 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기도하잖아요. 부처님은 왕이 되어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고 아셨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찾아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저한테 자꾸 찾아와서 왕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하잖아요. 그러면 저로서는 얘기하기가 굉장히 어렵죠.” (웃음)  

 


 

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큰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굉장히 철학적으로 어려운 내용이였지만 스님께서는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어가며 명쾌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즉문즉설을 통해 인생 상담을 하면서도 그 속에 불교의 핵심 교리를 쉽게 설명해주셨는데, 불교 교리에 대해 질문을 해도 이렇게 쉽게 설명해 주시니 불교대학생들도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8가지 질문에 대해 무려 3시간 15분 동안 쉬는 시간도 없이 열정적으로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답변을 모두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왜 수행, 보시, 봉사를 해야 하는지 한번 더 강조하시면서 이렇게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정토행자라면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라면 앞을 내다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개인도 착하고 성실해야 하지만, 주위 사람에게도 이익이 되는, 그리고 미래에도 이익이 되는 약간의 선지자적인 요소도 있어야 역사 속에서 존경을 받습니다. 자기끼리만 노력해서 자기들 세력만 키우고, 그래서 큰 절 하나 짓고 큰 교회 하나 짓고 자기들끼리 만족한다면, 그래서 세계 최대의 불상이니 세계 최대의 교회를 짓는다는 것은 그 교회 밖에서 볼 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토회는 첫째 개인 수행을 하고, 둘째는 대한민국에 태어났기 때문에 정토회를 넘어서서 대한민국이 잘 되는 일을 해야 하고, 셋째는 대한민국을 넘어서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봐도 참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을 갖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필리핀 민다나오에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인도에서도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한테는 잘하지만 환경한테는 못하면 결국 사람한테도 해가 되잖아요. 그래서 환경까지 고려해서 살아가는 것이 정토회입니다. 

 

이런 일을 하려면 첫째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경비가 들겠죠. 인도에서 좋은 일을 한다고 하지만 다 돈이 들지요. 정토불교대학이 각 도시마다 있어서 좋다고 하지만 법당을 유지하려면 다 돈이 들겠지요. 정부나 재벌이 지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결국 누가 이 돈을 다 내야할까요? 우리가 이 돈을 다 내야 합니다. 그래서 둘째, 보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기 위해 월급을 주는 사람을 고용하면 일시적으로는 효과적이겠지요. 그러나 부처님이 말을 타거나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전법하고, 장자들에게 절을 지으라고 시키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걸어다니고 나무 밑에서 살으셨죠. 어떻게 보면 그 당시 사회에서 얼마나 비효율적이였습니까. 그러니 우리도 불법의 원칙에 어긋나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은 이 법이 좋아서 법문을 듣고 공부하지만, 여기서 월급받고 일하는 사람은 저와 수행자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사장과 종업원의 관계가 되잖아요. 그럼 우리가 회사를 운영하는 게 되잖아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모든 운영을 수행자들이 와서 역할분담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청소도 하고 방석도 깔고 하는 봉사를 해야 하는 겁니다. 저희 정토회에서는 일체 월급을 주거나 하인을 부리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능한 반찬과 도시락을 집에서 싸오고 그릇도 집에 가서 씻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 이유를 이제 아시겠어요? (네) 

 


 

우리는 이곳에 수행하려고 모였죠? 첫째, 수행을 해야 합니다. 둘째, 보시해야 합니다. 셋째, 봉사해야 합니다. 정토불교대학을 다니면서 교리 강의 듣고 부처님 일생만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예요. 이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전체 학사과정의 50%도 안됩니다. 마음나누기를 하면서 자기 체험화해야 하고요. 그리고 천일결사 입재해서 매일 아침 수행을 해야 하고요.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데 깨달음의 맛을 봐야 하거든요. 교리를 이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고뇌가 해결되네’ 이렇게 맛을 봐야 정체성이 딱 잡힙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장도 다녀와야 하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든 작든 형편따라 보시를 해야 이 모든 것들이 유지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봉사를 해야 유지가 됩니다. 이곳에는 월급 받고 일하는 그 어떤 사람도 없어요. 여러분들이 주인이예요. 이곳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정진해가시기 바랍니다.”

 

수행, 보시, 봉사를 함께 해나가야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음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한국에 도착하자 말자 시차 적응도 없이 곧바로 연이어 강행군을 하셨지만, 조금도 피곤한 기색없이 열정적인 법문을 해주신 스님께 불교대학생들은 다시한번 큰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정토수련원 대수련장을 나오신 스님께서는 곧바로 대기해 있던 차를 타고 경주로 가셨습니다.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문경까지 따라와서 촬영을 하던 SBS PD님은 막 차에 타려고 하는 스님께 “지금 공항에서 오자마자 3시간 동안 강연을 하신 것 같은데요. 어떻게 이런 일정이 가능하시죠?” 라고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냥 웃으셨습니다. 

 

중부권과 영남권 가을 불교대학 특강수련을 마친 후 스님께서는 경주에서 갑자기 일정이 생기셔서 바로 경주로 이동하셨습니다. 경주일정을 마치신 후 다시 경주 남산으로 향해서 앞으로 있을 불대생들의 경주남산순례에 필요한 답사를 하셨습니다. 더불어 약 20일간 인도에 계시면서 듣지 못한 한국의 봄소식을 산을 오르면서 몸으로 직접 봄을 느껴보기도 하셨습니다.

 


 


▲ 경주 남산

 

경주 남산에는 노란 산수유가 피어있고, 진달래도 양지 바른 여기저기서 꽃망울을 터트리며 봄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꽃들과 나무들도 연두빛깔을 잎을 드러내며 봄을 알리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내려오는 중에 멀리서 용장사 3층 석탑을 보며 잠시 참배를 드리기도 하였고, 용장골을 거의 다 내려와서는 목이 없는 절골 석조여래좌상을 보기 위해 다시 옆길을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남산순례코스 중 용장골 코스가 제일 짧아서 한군데 더 볼 곳을 답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이 없는 부처님은 약사여래불이신데 어떤 연유인지 목은 없고 아름다운 무늬의 몸만 덩그렇게 있었습니다. 원래 이곳은 절터였으나 무너지고 절터의 기단들만 남은 채 부처님은 땅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곡 여기저기에 탑의 잔재들, 절터의 잔재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이 부처님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약 5.5km의 산행을 끝으로 어제밤 비행기를 탄 이후로 기나긴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내일은 아침 경주 남산 추가 답사와 평화재단에서 회의와 외부인사 만남이 있을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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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없는 부처님 ..참 가슴이 아프네요 ㅠ <여러분들이 주인이예요. 이곳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이 말씀 한마디에 정토회의 모든 것이 이해가 됩니다^^스님의 그 깊으신 속도^^*

2015-03-31 00:58:21

봄선

거룩한 마음에 합장 올립니다..._()_...

2015-03-26 07:49:48

김선화

()()() 스님! 감사합니다 스님덕분에 집에앉아 인도여행하고 많은 가르침 배우고 마음에작은 실천의씨앗 심어봅니다 늘 건강하셔서 오래도록 법을주소서()()()

2015-03-25 20: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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