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오늘은 세계 100회 강연 중 65번째 강연이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Indianapolis)에서 열리는 날입니다.
인디애나 주(State of Indiana)는 미국 중부에 있는 주로서 주도는 인디애나폴리스(Indianapolis)이며, 인디애나라는 이름은 "인디언의 땅"이란 뜻입니다. 주의 인구는 약 657만 명(2013년 추계)이며 이 중 한국 교민은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 약 13,000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중부에서 공화당 성향이 가장 강한 주로서, 주요 산업은 농업이며, 특히 옥수수와 콩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공업으로는 자동차와 트럭 등의 부품 제조업이 성하고, 인디애나에는 현재 토요타 현지공장이 있습니다. 주요 도시로는 주도인 인디애나폴리스가 있고 대학교로는 블루밍턴(Bloomington)의 인디애나 대학교와 라피엣(Lafayette)의 퍼듀(Purdue) 대학교, 예수회 계열의 사립대학인 노트르담 대학교가 있으며, 인디애나주의 주립대학인 Ball state University도 근처에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치안이 좋지 않은 도시이자, 마이클 잭슨이 태어난 고향인 게리도 인디애나 주에 있습니다.

▲ 오늘 이동 거리 : 콜럼버스 -> 인디애나폴리스, 201마일(323km)
오늘 강연이 열리는 인디애나폴리스(Indianapolis)는 시카고 동남쪽 약 300㎞에 있는 공업도시로서 인디애나 주의 중앙부, 화이트강 연안에 위치합니다. 인구는 약 84만명이고 광역도시권 인구는 약 200만명이며, 유학생을 포함하여 한국 교민은 약 3,000-4,000여명 되는 것 같습니다. 중서부 지역 대부분이 그렇듯이 원래 아메리카 원주민이 드문드문 살던 곳이었으며, 연방의 수도 워싱턴 D.C.처럼 처음부터 행정중심지를 목적으로 건설된 계획도시입니다. 워싱턴 D.C.를 본따 직교방사형의 정연한 시가를 이루고 있습니다. 원래는 주도인 행정중심지로 건설된 도시지만, 교통 상의 이점으로 다양한 산업이 발전하면서 제법 큰 도시로 발전했으며, 최근 디트로이트가 몰락하면서 중부 지방에서는 시카고 다음가는 큰 도시로 뛰어올랐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도시권 중 하나로 손꼽히고, 쇠퇴한 도시가 많은 중부에서는 비교적 잘 살아남은 도시이기도 합니다.
오전 7시에 콜럼버스 정토회의 오봉산 김종필 부부 댁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7시 30분에 인디애나폴리스로 출발했습니다. 두 부부께 하룻밤 잘 묵고 간다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사인을 한 인생수업 책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 콜럼버스정토회 오봉산 김종필 부부
인디애나폴리스로 가는 도중에 미주 중부 지구장인 하일숙님의 집이 있는 데이톤에 들러 점심식사를 하며 짐 정리를 하고 가기로 했습니다. 남편인 하주영님의 직장이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어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고, 스님께서는 원고교정 등 업무도 보셨습니다.
▲ 하일숙 지구장님 집에서의 점심 식사
오후 2시 30분에 짐을 챙겨 인디애나폴리스로 출발하여 오늘 강연장인 Unitarian Universalist Church of Indianapolis 에 도착하니 5시 10분이 되었습니다. 강연장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스님께서는 도시락으로 준비해온 밥과 김치로 간단히 저녁요기를 하시고 대기실에서 원고 교정 업무를 보셨습니다. 인디애나 주로 들어오니 기온이 뚝 떨어져서 찬 기운이 많이 돌아 스님 건강이 염려되었습니다.

▲ 강연 전 업무를 보고 계신 스님
강연장인 Unitarian Universalist 교회에 도착하니 벌써 콜럼버스정토회의 고창미 전 총무님, 현명진님, 엄학수님이 미리 도착해 지역 봉사자들과 함께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 오늘 강연장, Unitarian Universalist Church of Indianapolis
입구부터 깔끔하게 포스터를 붙이고 안내판을 준비하며 자원봉사자들 모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오늘 자원봉사자들은 인디애나 대학교, 퍼듀 대학교, 볼스테이트 대학교 등에서 온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특히 볼스테이트 대학의 교수님 한 분도 함께 강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활짝 웃으시며 봉사자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오늘 인디애나폴리스 강연에는 자원봉사자들까지 포함하여 약 9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인근 지역의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많이 왔고, 또 젊은 직장인들이 많아서 밝은 분위기였습니다. 한 젊은 부부는 밖에서 아기를 안고서 강연을 들었는데 그 모습도 참 보기가 좋았습니다.
7시가 되자 스님께서는 큰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 오르셨습니다.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십자가 앞에서 잠시 기도를 하셨습니다.

▲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시는 모습
그리고 인디애나폴리스에는 처음 와보셨다고 반가운 마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여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날씨가 조금 쌀쌀해졌죠. 저는 인디아나주도 처음이고 인디애나폴리스도 처음 와 봅니다. 35년 전에 필라델피아에서 LA까지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지나간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피츠버그는 기억이 나는데 여기는 지나갔다는 것만 기억이 나네요. 시카고를 가면서 비켜 지나가고, 얼바나 샴페인의 일리노이대학교에도 가고 했는데 여기에는 처음이라 정말 반갑습니다.
이번 세계 100회 강연을 유럽에서 먼저 시작했는데 매일 매일 한 나라씩 옮겨 다니고 처음 가는 나라들이 많아서 그 나라의 역사나 문화를 탐방도 하다 보니까 몸에 조금 무리가 갔어요. 그래서 속된 말로 죽을 뻔 했어요. 그런 고비를 넘기고 아직 목소리도 회복이 안 됐고요. 건강도 아직 완전히 회복이 안 됐지만, 일단 강의하는 정도는 가능한 상태입니다. 제가 특별히 전할 메세지가 있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니에요. 제 강의를 유튜브나 팟캐스트를 통해서 듣는 분들이 몇 십 만 명이 되는데 그 분들이 직접 현장에서 얘기하고 싶다고 하시지만 너무 멀어서 어려우니까 제가 이렇게 찾아가서 대화를 해보자는 취지로 마련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얘기하실 분이 있으면 얘기하시기 바랍니다. 대화의 소재나 주제에는 전혀 제한이 없습니다. 뭐든지 자기가 살아가면서 고뇌하거나 궁금한 것,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거나 하시면 마음껏 얘기하셔도 좋습니다. 자, 시작해봅시다.”
그러면서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총 6명이 스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미국 투자은행에서 근무하는 신입사원인데 한국인 고객에게 전화가 오면 투자자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교회에 왔으면 하는 얘기를 해서 이런 사람을 만나야 할 경우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묻는 분, 한국에 있는 남자친구와 2년째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고 스님 말씀처럼 사랑 받으려 하지 않고 사랑을 줄려고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 지금 많이 지쳐있는 상태인데 남자친구에게 서운해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묻는 분,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자신이 실망스럽고 미래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지 않고 답답하다며 스님께 조언을 구하는 분,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두 사람을 만났는데 두 사람을 모두 잃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상처도 주었는데 어떻게 마음을 잡고 살아야 하는지, 주체적으로 살고 싶은데 아버지가 가부장적이고 강해서 힘을 가지거나 나이가 있는 분이 얘기를 하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는 분, 세월호 참사로 큰 상처를 받았고 갑자기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뭐라 위로할 수 있을까 아무 말도 생각이 안 나는데 불평등한 사회 안에서 느닷없이 가족을 잃은 이분들에게 스님은 어떤 위로를 하실 수 있는지 묻는 분 등 직장, 연애, 종교, 사회 등 다양한 질문에 대해 스님께서는 지혜로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금강경의 사구게에 대해 질문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이 많은 감동을 주었기에 자세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어려운 불교 교리이지만 스님께서 쉬운 생활 용어로 답변을 해주시니 참석자들이 공감하면서 웃기도 하고 유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42년 살고 있습니다. 유학생으로 여기에 왔고요. 내년이 칠순이고 천주교 신자입니다. 저는 과거에 30년 가까이 시간이 날 때마다 불경을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무비스님의 금강경을 두 번 읽어보고 도올 선생의 금강경도 공부했는데, 책으로 독학하면서 불경을 공부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일생에 스님을 만난 것이 법륜스님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기쁜 마음으로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금강경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시구에 대해 설법을 청합니다. 제가 글로 읽었기 때문에, 무비스님이나 도올선생이 설명하신 내용은 대충 알지만 이 내용이 너무 중요한 것 같아서 상세히 스님께 설법을 듣고 싶습니다.”
“그분들이 한 얘기를 질문자가 이해한 수준에서 요점 정리해서 얘기해보시겠어요? 들어보고 그 정도면 되었다 싶으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고, 부족하다 싶으면 더 얘기를 해야 하니까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금강경에 나오는 그 내용이 ‘무릇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기 때문에 그 허망한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 상태가 결국 여래, 즉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글귀를 해석하면 그렇게 되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어떤 욕심을 낸다던가, 허욕을 부린다던가 하는 그 자체가 존재하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즉 무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좀 넘어서서 자기 자신이 조금 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할 수도 있다는 뜻 같습니다. 이 내용을 이해한다면 더 좋은 불자가 될 수 있다고 저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질문자의 삶이 조금 바뀌었습니까?”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성서를 미국 성경 전문가 강의로 독학으로 오래 공부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서 마음의 문을 열고 불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공부해도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앞에 바구니 두개와 접시가 있는데 보이십니까? 그럼 제가 질문자에게 여쭤볼 테니까 본인 생각대로 얘기하세요. 가운데에 있는 노란 바구니와 흰 바구니를 봤을 때 노란 바구니가 큽니까? 작습니까?”
“크죠.”
“그럼 이 노란 바구니와 이 모래를 담아놓은 그릇하고 비교하면 노란 바구니는 커요? 작아요?"
“작죠”
“질문자는 지금 이 바구니를 두고 한 번은 크다고 했고 한 번은 작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이 바구니 하나만 두고 생각했을 때 이 바구니는 큽니까? 작습니까?”
“중간 사이즈입니다.” (청중들 웃음)
“우리가 중간 사이즈라고 하든지, 크다고 하든지, 작다고 하든지 간에, 머리 속에 어떤 다른 것 하나를 연상해서 그것과 비교해서 ”크다“ 혹은 ”작다“ 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무언가와 비교해서 말하는 것을 ‘상대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한다면 상대적으로 크고, 상대적으로 작고, 상대적으로 중간사이즈이지요. 크다고 할 때에는 다른 작은 것을 연상한 것이고, 작다고 할 때에는 다른 큰 것을 연상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게 인식은 상대적인 것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보지 않은, 절대적인 차원에서 이 바구니 자체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존재하지 않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니요? 이렇게 눈 앞에 있는데요. (청중들 웃음) 그럴 때 언어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처음에 질문이 ”큽니까, 작습니까” 였죠? 질문의 언어를 빌리는 방법으로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습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닐 비(非)자를 써서 ‘비대비소’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닐 불(不)자를 써서 ‘불대불소’라고 할 수도 있어요. .
만약 상대적인 용어를 하나도 안 쓰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한 물건”이라고 합니다. 즉, ‘그것은 다만 그것일 뿐’이다.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그것은 그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일 뿐이지 큰 것도, 작은 것도,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새 것도, 헌 것도, 짧은 것도, 긴 것도 아니고 다만 그것은 그것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선적인 언어라고 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아는 글로 말하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만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대승불교의 철학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공(空)이다’ 라고 표현합니다. ‘공’이라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공’이라는 말은, 누군가가 ”크다“고 한다면 ”큰 것이 아니다“, ”작다“고 한다면 ”작은 것이 아니다“, ”새것이다“ 라고 한다면 ”새것도 아니다“, ”헌 것이다“ 라고 한다면 ”헌 것도 아니“라는 뜻이예요.
‘실상(實相)’ 즉, 실제 모습이 어떤가, 즉 진실상을 표현할 때 이런 여러 가지 언어표현을 사용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이런 언어마저도 써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물건이라고 해도 옳지 않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옛날에 어떤 제자가 산 넘고 물 건너 스승을 찾아와서 ’스승님께 여쭤보면 바로 깨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인사를 하고 질문을 해야지 하고 문을 열었는데, 두 발이 다 들어가기도 전에 스승이 벽력같이 고함을 쳤어요.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고요. 쉽게 얘기하면 “너 누구냐?” 이 말이에요. 그렇게 물으니 그 제자는 대답을 못했어요. 만약 금강경 구절을 물었거나, 법화경 구절을 물었거나, 교리를 물었으면 청산유수같이 대답을 했을 텐데 말이에요.
이럴 때 “법륜입니다”하고 대답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은 제 이름이죠. 그렇지만 이름을 물은 게 아니잖아요. “네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면 “법륜입니다”가 맞았지만 “너 누구냐?” 라고 물었지요. 또 “스님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직업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직업을 물은 게 아니잖아요. 이런 것 같이 그 제자는 “너 누구냐?” 하고 물으니까 딱 막혀버렸어요.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요.
그래서 이 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했어요. 내가 어떤 것을 물을 때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묻는다는 것 자체가 웃긴 것 아니에요. 그 사람은 그 고생을 하고 찾아와서 방문을 열고도 한 발도 못 들어가고 멍하게 있다가 그냥 문을 닫고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화두라고 합니다. 이게 무엇인가? What is this?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Who am I? 그래서 그 사람이 7년을 참구하다가 다시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절을 하면서 “스승님, 설령 한 물건이라고 해도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가 이미 이 본질을 깨우친 줄 알기에 인가를 해주었습니다.
금강경의 그 글귀는 이런 것과 같은 얘기입니다. 우리가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리니, 있니 없니 하는 것은 다 주관 즉, 자기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긴지, 짧은지, 새것인지, 헌것인지, 넓은지, 좁은지 하는 것을 객관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객관이라고 생각하는 ‘크다’나 ‘작다’는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인식하는 문제입니다. ‘크다’고 인식하기도 하고, ‘작다’고 인식하기도, ‘중간 크기다’라고 인식하기도 하는 등 인식 상에서 나타나는 것이에요. 존재 자체는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고, 새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헌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네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우리는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내거다, 네거다, 새거다, 헌거다, 더럽다, 깨끗하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를 두고도 사람마다, 같은 사람이라도 경우에 따라 인식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주관을 객관화시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식을 할 때 이것을 ‘크다’고 인식을 했다고 합시다. 우리는 존재 자체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크다고 인식했다고 생각을 하지 않고, ’이것 자체가 크다‘, ’이것이 크기 때문에 크다고 내가 인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주관을 객관화시킨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인식한 것을 다른 사람은 달리 인식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실제가 그렇다고 자기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만약 눈에 빨간 안경을 끼고 저 흰 벽을 바라보면 저 벽이 빨갛게 보이겠죠? 그럴 때 나는 ‘저 벽 색깔이 붉다’고 착각을 합니다. 사실은 저 벽 색깔이 빨갛다고 하면 안 되고 내 눈에 빨갛게 보였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죠. 그런데 나는 저 벽 색깔이 붉기 때문에 내가 붉게 인식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푸른 색깔의 안경을 끼고 있는 사람이 저 벽을 보면 “저 벽은 푸르다”고 할 거 아닙니까?
‘상‘이라는 것, 즉 ’모양 짓는 것‘은 자기가 주관적으로 인식한 것을 객관적으로 바르게 인식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즉, 주관을 개관화시키는 것을 ‘상을 짓는다’고 합니다. ‘너를 보니까 내 감정이 나쁘다’인데 ‘네가 나쁜 놈이다’라고 하는 거에요.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인데, 그 사람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착각한단 말이에요. 이것을 상이라고 합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에서 ‘범소유상 개시허망’은 무릇 내가 지은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다는 뜻입니다. 이때 허망하다는 것을 허무하다고 이해하면 안돼요. ‘허망하다’는 것은 ‘실체가 없다’, ‘진실상이 아니다’, ‘사실이 아니다’, ‘실제가 아니다’, ‘환영이다’ 라는 말입니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는 만약 모든 상은 상이 아님을 안다면, 즉 크다 작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렸다 하는 것을 크다 할 것도 없고, 작다 할 것도 없고, 옳다고 할 것도 없고, 그르다고 할 것도 없고, 맞다고 할 것도 없고, 틀리다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이는 부처를 아는 것이다. 즉, 그것이 바로 부처이고 깨달음이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물잔이라고 하죠. 어떤 것은 커피잔, 어떤 것은 포도주잔, 소주잔, 정종잔, 이렇게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명칭이 붙으면 정종잔에는 정종을 마셔야 하고, 물잔으로는 물을 마셔야 하고, 커피잔에는 커피를 마셔야 하잖아요. 그래서 커피 좀 달라고 하면 “아이고, 우리 집에 커피잔에 없어서” 이렇게 말한단 말이에요. 이것은 상을 지었기 때문이에요. 즉, 이 존재는 커피잔, 물잔으로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아요. 그것을 놔버리면 무엇이든 담을 수 있습니다. 물잔이라서 물을 담는 것이 아니고 물을 담으면 물잔이 됩니다. 물을 담으면 물잔이 되고, 커피를 담으면 커피잔이 되고, 술을 담으면 술잔이 되고,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국을 담으면 국그릇이 되고, 애가 오줌을 쌀 때 얼른 받으면 요강이 되고(청중들 웃음)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걸림 없이 자유로워지잖아요.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불교의 핵심사상인 ‘공(空)’사상을 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한 것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청중들 박수)
“그러니까 여러분들과 즉문즉설을 할 때에도 바탕에 이런 관점이 잡혀있는 거예요. "애인이 있는데 다른 사람을 만나면 안 되지 않느냐?" 고 하는데 ‘안되지 않느냐’하는 생각을 놓아버리면, 즉 상을 짓는 것을 놓아버리면 자유로워진다는 얘기예요. “그렇다면 여기 잔에다가 아무거나 받아먹어도 되나요?” 한다면 “그렇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생각해보세요. 우리 집에 소주잔도 있고 커피잔도 있고 물잔도 있고 포도주잔도 있는데도 굳이 이거 하나만 가지고 밥도 여기다 먹고, 국도 여기다 먹고 하면서 ‘모두 공이니까’ 하는 것은 또 공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공이라고 하는 상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활 속에서는 이것을 물잔으로 쓸 때에는 그냥 물잔으로 쓰는 거예요. 다른 것은 다른 데에 쓸 데가 있으니까요. 없으면 이걸로 커피잔을 써도 되고, 포도주잔으로도 써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서울 가는 길은 어느 방향입니까?” 하고 누가 물어본다면 어느 방향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걸 가지고 무유정법(無有定法) 즉, ‘어느 방향이라고 정해놓은 법은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서울 가는 방향이 없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정해진 것이 없으니까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말일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공이라는 말은 ‘텅 비었다’, ‘없다’고 표현하지만 없다는 뜻이 아니고, 있고 없음을 넘어선 의미예요. 인천 사람이 물어보면 “동쪽으로 가세요” 얘기하겠죠, 그것을 누가 듣고 ‘동쪽으로 가면 되겠구나,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야’라고 생각하고 춘천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었을 때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그 사람은 동해 바다에 빠져 죽어요. 춘천 사람이 물으면 “서쪽으로 가세요”, 수원사람이 물으면 “북쪽으로 가세요” 해야죠.
그렇게 해서 제법이 공한 줄을 알면, 인연을 따라 그 사람의 위치와 시공간이 정해지면 정확하게 동이면 동, 서이면 서, 남이면 남, 북이면 북, 동북이면 동북, 서북이면 서북으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또 정해진다고 해서 절대화시켜도 안 되고요. 언어를 절대화시키면 상을 지은 것입니다. ‘절대화시키면 안된다’, ‘공이다‘라고 해서 아무 것도 방향을 잡을 수 없다든지, 잡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다시 공에 빠진 거예요. 이것을 ’공상을 지었다‘고 말해요. 그래서 ’어느 방향이라고 특정한 방향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은 동시에 인연을 따라서 ’어느 방향이라도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렇게나가 아니라 인연을 따라서 말이에요.
무언가가 상을 지은 것을 불교용어로 ‘색’이라고 하고, 상을 짓지 않는 것을 ‘공’이라고 해서, 색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색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하죠. 여기서 ’색즉시공‘이라고 한번만 말하면 되지, 왜 똑같은 말을 바꿔서 ’공즉시색‘이라고 또 할까요? 수학에서 ’A=B임을 증명하라‘고 하면 먼저 ’A이면 B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하는 것을 증명하면 ‘A는 B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라고 말하죠. 그리고 다음 ‘B이면 A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하면 ’A는 B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 고로 1), 2)에서 ’A는 B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고로 ‘A=B이다’라고 하는 거죠. 달리 말하면, 두 개가 같다는 것이 성립하려면, 그 역도 성립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라고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은, 즉 현상과 본질이 동시에 어우러져있는 것입니다. 현상은 엉터리이고 본질만이 진실이라고 보는 것은 또 진실의 절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크냐 작으냐”고 물었을 때, 항상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하면 안 돼요. 구체적인 조건에서 물어봤을 때에는 “크다”고 얘기해야 됩니다. 이것이 ‘색’이예요. 이 상황, 이 인연에서는 크다, 이 인연에서는 작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인연을 떠나서 절대적으로 물으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이다” 또는 “공이다” 라고 얘기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원리가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거예요. 도가 트면 윤리 도덕도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늘 윤리, 도덕을 맞춰서 살지만 때로는 윤리나 도덕이 인간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할 때에는 과감하게 윤리, 도덕을 부정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인간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지, 윤리나 도덕이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도, 예수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예요.
중심은 인간을 행복하게, 자유롭게 하는 데에 있고 그 길로 가기 위해서 이런 저런 방법이 있는 것인데, 지금 방법을 절대화시키고 거기에 인간을 끼워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피부가 검은지 흰지로 차별했지만 지금은 피부 빛깔로 인간을 차별할 수 없습니다. 남녀는 성별로 차별할 수 없고요. 신체가 건강한지 장애가 있는지에 따라 차별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성적 취향으로 차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런 문제는 어려운 문제가 아닌데, 자꾸 카르마, 자신의 업식, 윤리관, 관습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스님의 쉽고 명쾌한 답변에 청중들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습니니다. 질문자도 즐겁고 기쁜 표정을 짓습니다. 오늘 스님의 답변을 들으며 동래법당에 다니던 시절 들었던 스님의 금강경 강의가 생각났습니다. 그때 스님의 금강경 강의 중에서 특히 32분에 나오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역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이 참 좋았습니다.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아침이슬 같고, 번갯불 같으며, 응당 이와 같이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상과 무아를 참으로 시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이 표현들보다 더 아름답고 완벽하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의 마음이 오늘 다시 생각나면서 많은 분들이 스님의 지혜를 나눠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들었습니다.
답변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스님께서는 진리란 무엇인지 강조해 주시면서 이렇게 정리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재미있으셨습니까? 진리는 재미도 있고 유익해야 해요. 오늘 강연이 거기에 조금 근접한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재미가 있다는 것은 지금 좋다는 뜻이고, 유익하다는 것은 나중에 좋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지금에도 좋고, 나중에도 좋아야 합니다. 나중을 위해서 지금을 희생하거나, 지금 좋다고 나중을 희생하면 안 돼요. 또 나에게는 좋고 남에게는 손해이면, 그 사람이 반격을 하기 때문에 오래 못갑니다. 반대로 그 사람은 좋은데 내가 손해이면, 세상에서는 희생이라고 굉장히 칭찬하지만 희생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참는 데에도 한도가 있기 때문에 이것도 지속적이지 못하지요. 그래서 지속적이려면 나도 좋고 너도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고, 나도 좋고 너도 좋아야 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인생을 산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나날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마무리 말씀까지 마치니 2시간 40분 동안 열정적인 강연을 해주신 스님께 참석자들이 큰 박수를 보냅니다.
돌아가시는 분들께 오늘 강연이 어땠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한 분은 “스님께서 이곳까지 방문해 주신 것이 정말 좋았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새겨야 할 주옥 같은 인생지침이 많았다” 며 보람 있어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생활 용어로 쉽게 말씀을 해주시니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질문을 한 고등학교 학생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좋아하였습니다. 또한 많은 분들이 “공사상에 대해서 명확하고 깔끔한 설명이 참 좋았다”고 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책 사인회가 마련된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한분 한분과 인사를 나누며 사인을 해주시고 함께 기념촬영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행사의 총괄책임을 한 권효석님께 수고 많았다고 하시면서 사인한 인생수업 책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 오늘 인디애나폴리스 강연 총괄을 맡아준 권효석 학생
또한 콜럼버스정토회 전 총무이면서 오늘 열심히 행사를 도와준 고창미님께도 인생수업 책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어제와 오늘 사회를 보는 역할로 자원봉사 해주신 엄학수님께도 인생수업 책을 선물로 드리고 수고 많았다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 콜럼버스정토회 자원활동가들입니다.
그리고 자원봉사자 전체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봉사자들 모두에게는 한국에서 선물로 가지고 온 단주를 손목에 끼워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아직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여 뒷정리를 하는 봉사자들에게 인사만 하시고 먼저 숙소로 출발하셨습니다. 숙소인 Inn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치고 돌아오니 10시 30분이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잠시 내일 일정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원고교정업무를 늦게까지 보시다가 일과를 마무리하셨습니다.
뒷정리를 모두 마치고 자원봉사자들은 묘덕법사님과 함께 마음나누기를 하였습니다. 총괄 책임을 맡은 권효석 학생이 개별적으로 문자도 보내고 적극적으로 연락도 해준 덕분에 자원봉사를 하러 오게 된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내일 시험인데도 불구하고 와서 자원봉사를 했는데 다들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Ball State 대학교의 교수님도 자원봉사를 신청하여 함께 했는데 후속모임도 가지고 싶다고 하고 마음공부 모임을 하고 싶은 분들도 몇 분 계셔서 앞으로 모임이 활성화 될 것 같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내년에도 강연이 이어져서 스님께서 이곳을 방문을 해주신다면 그 때도 또 봉사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권효석 학생은 “3시간 30분 거리에 콜럼버스 정토법당이 있어서 든든했고, 이번 행사를 위해 콜럼버스 정토법당까지 방문할 수 있게 되어 참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 묘덕법사님과 마음나누기를 하고 있는 봉사자들
이렇게 오늘도 많은 분들의 정성과 자원봉사로 65번째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강연도 잘 마쳤습니다. 내일 66번째 강연은 오전에 일리노이 대학교 얼바나-삼페인에서, 67번째 강연은 저녁에 켄터키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립니다. 그럼 내일은 얼뱌나-삼페인의 일리노이대학교와 켄터키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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