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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높고 청명한 6월 현충일 아침, 천안지회 도반들은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으로 향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대전충청지부 지회 단위로는 첫 역사 기행입니다. 목적지는 윤봉길 의사 생가지와 사당, 기념관이 모여 있는 덕산면이었습니다. 이른 시간에 방문객은 많지 않았고, 주차장 옆 태극기가 바람에 조용히 흔들렸습니다.

10시가 되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나타났습니다. 실천활동담당 김순자 님에게 이 자리를 마련한 사연을 물었습니다.
"천안지회는 천안에서 서천까지 넓은 지역에 퍼져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교과서에서 스쳐 가듯 배우는 독립운동가잖아요. 반면 사람들은 그의 정신, 농촌 계몽운동 등은 잘 모릅니다. 이번 기회에 더 자세하게 알면 좋겠다는 취지로 시작했습니다.“
천안 주변에는 이순신, 유관순, 김시민, 이동녕, 홍대홍 등 걸출한 인물이 많습니다. 누구나 윤봉길 의사를 잘 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모른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출발점이며 예산군 덕산면을 택한 이유입니다.
첫 마음 나누기를 마칠 무렵, 월진회 회원인 해설사 김선자 님이 도착했습니다. 월진회는 윤봉길 의사가 직접 조직한 농촌 개혁단체입니다.
"여기서 해설하는 동안 정토회 회원들이 많이 다녀갔어요. 그래서 저도 법륜스님 팬이 됐습니다."
웃음 섞인 말 한마디에 회원들의 어깨가 풀렸습니다.
"아이랑 같이 오신 사람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는 그냥 두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듣고 갑니다."
해설사의 말 속에는 아이도 어른도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가져갈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세 개의 문과 계단을 지나면 충의사가 나타납니다. 법의 법사님이 대표로 향을 올리는 동안, 도반들은 고요히 묵념했습니다.

충의사 옆문을 나서는 길에 분수 연못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앞이 배용순 여사의 무덤입니다. 해설이 조용히 이어지는 가운데, 발걸음을 잠시 멈췄습니다.
"남편과 따로 모셔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남편 사당이 여기 있으니 내가 잘 지키겠다'라는 유언을 남겼거든요."
남편을 먼저 보내고, 곁에서 지키겠다고 다짐한 여인. 잘 깎인 봉분이 말없이 그 아픔을 대신하는 것 같습니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을 가득 채운 글자가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장부출가생불환 (丈夫出家生不還)’ 은 장부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김선자 님은 전시된 대들보 앞에 서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울림 때문인지 목소리가 한층 커졌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가로 알려졌지만, 이전에 농촌계몽 운동가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오치서숙이라는 서당을 찾아 한학을 공부했어요.“
어느 날 윤봉길은 공동묘지에서 여러 개의 묘표를 손에 들고 헤매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글을 읽지 못해 아버지 무덤을 찾지 못한 청년은 누군가에게 물어볼 생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 장면이 윤봉길 의사를 바꿨습니다. 무지가 나라를 잃게 한 원인이라 생각하고, '지식과 깨어있는 의식이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사연은 충의당 사랑방 야학으로 이어졌습니다. 작은 촛불 하나로 시작한 배움의 자리는 점차 커져 부흥원 건립으로 계승되었습니다. 대들보 상량문에는 당시 관례이던 일본 연호 대신 단기 '조선 개국 4,261년'이라고 써넣었습니다.
"이런 부분도 윤봉길 의사의 대범함이 느껴지지요."
해설사의 말에 회원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듬해 윤봉길은 농촌 개혁운동 단체인 월진회를 조직했고 지금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농촌계몽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이 이어질 수 없다"라고 판단한 윤봉길은 거사를 택합니다. 떠나기 전 아내 배용순에게 물 한 잔을 부탁했지만, 차마 얼굴을 보고 떠나기가 힘들어, 그냥 집을 나섰습니다. 그가 남긴 문장, 장부출가생불환에 모든 결의가 담겨 있습니다.

윤봉길은 예산군 삽교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칭다오로 건너간 후, 장사하며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날 일본군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상해사변 전승식을 거행한다는 첩보를 입수합니다. 김구 선생을 만나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고, 김홍일 장군이 주선한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을 지니고 단상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폭탄은 정확히 떨어졌고, 윤봉길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됩니다. 5월 25일 사형 선고, 같은 해 12월 19일 아침 미간에 총을 맞고 순국했습니다. 향년 스물다섯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 중국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 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라고 말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파장은 훗날 카이로 회담까지 이어집니다. 설명을 끝내자, 주변이 잠시 고요해졌습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지만 기념관에서 들으니 그 시절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해방이 되고 윤봉길 의사 유골을 수습하고자 김구 선생님이 수습단을 꾸렸는데,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수소문 끝에 당시 교도소 간수였던 분의 협조를 얻어 위치를 찾았는데, 공동묘지 입구 계단 밑에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매장했다는 거예요. 14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밟고 다녔다는 거지요.“
말이 끊긴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습니다. 아직도 손뼈 7개는 수습하지 못한 채 일본 암장지에 있습니다. 지금은 서울 효창공원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으며, 예산군 덕산면과 서울, 중국 상하이에 기념관이 있고, 일본 가나자와 공동묘지 입구에도 기념비와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많은 나라에 흩어진 그 흔적들이, 윤봉길 의사의 삶이 얼마나 넓은 세상에 큰 울림을 주었는지 말해줍니다.
기념관을 나와 약 300m를 걸으면 저한당과 광현당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건지겠다는 신념을 품고 사람들과 함께 글을 읽던 작은 초가집! 해가 잘 드는 마당을 둘러보며, 아직도 글 읽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도중도(島中島)는 삽교천 상류의 물길이 바뀌며 생겨난 '섬 안의 섬'입니다. 회원들은 그늘에 자리를 잡고 점심 공양을 함께 했습니다. 그동안 들은 윤봉길 의사 이야기를 떠올리며 복습 겸 퀴즈 게임을 펼쳤습니다. 무엇보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6월 현충일이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저물어갑니다.


지회장 박은숙 님에게 오늘 역사 기행의 의미를 질문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기회가 많이 줄었어요. 모둠 활동으로는 만나지만, 지회 단위로 함께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자리가 더없이 소중합니다. 온라인이 너무 익숙해진 지금, 이렇게 자주 만나고 즐겁게 지내다 보면, 더 많은 분이 자연스럽게 함께하지 않을까요.“
정토회 일정이 워낙 촘촘하고, 오랜 온라인 생활이 몸에 밴 탓일까? 소수의 참여 인원으로 시작한 발걸음이 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역사 기행은 함께 걸으며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이야기를 듣고, 같은 감동을 나누는 경험이 되고 그것이 쌓이면서 지회는 단단해지고, 도반의 의미는 더욱 깊어집니다.
윤봉길 의사의 생을 따라 걸으면 한 가지 선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폭탄을 던진 사람이기 전에, 글을 모르는 이웃을 보며 마음 아파하던 청년이었습니다. 지식으로 사람을 깨우고, 깨어난 사람들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야학을 열고, 작은 초가집에서 함께 글을 읽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윤봉길 의사를 거사로 이끌었고, 그의 희생이 임시정부를 살리고, 카이로 회담에 영향을 미치고, 평화의 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글을 읽고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그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사는 곳입니다.“
글, 사진_김종호(대전충청지부 천안지회)
편집_여수연(서광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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