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실천

통일
왕도 버린 나라를 구한 의병의 길을 따라 걷다
경남지부 의령,진주 역사기행

6월 7일, 경남지부에서 '경남 의병활동 사적지' 역사기행을 진행했습니다. 연휴 가운데 날이기도 하고, 많은 회원들이 사흘 전 죽림정사에서 열린 ‘용성조사 161주년 탄신일’ 기념법회에 참석하여 피로감이 높아 참석률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습니다.
이른 아침 적당한 구름과 바람이 햇볕을 가려 크게 덥지는 않겠다 싶었습니다.
버스로 이동하여 의령의 의병탑 앞에 도착하니 이미 86명의 회원들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의병활동 사적지, 의령으로

사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의령과 진주가 있지만, 망개떡이나 육전, 유등축제나 알았지 그 자세한 사실은 잘 몰랐던 터라 이번 역사기행을 기대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자료집 파일을 살피니 ‘의병(義兵)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봉기하거나 소집에 응한 병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외국군 뿐 아니라 국내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일체의 군사 행동도 모두 의병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의병’이라는 말의 뜻은 ‘의로운 군병’ 또는 ‘의를 위해 일어난 군병’으로, 거기에는 자신은 의롭고 자신이 대적하는 상대방은 불의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고 써져 있었습니다. 되짚어 보면 의병이란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 자발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설자 이승용님의 안내로 역사기행을 떠나 보겠습니다.

6월 1일은 의병의 날입니다. 곽재우 장군만큼 의병 정신에 투철했던 분이 또 없었습니다. 그 분이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경남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 바로 '의병의 날' 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의병탑을 보면, 가운데 흰색으로 18개 고리가 있습니다. 이 고리는 곽재우 장군을 비롯해서 함께 활동했던 장수 17명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의령군 세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학문과 무예에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과거 시험에서 차석을 할 정도로 학식이 높았습니다. 다만 적어낸 답안이 임금에 대해 비판적 내용이 있어 관직에는 오르지 못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만큼 집안이 부유하여 세속적 욕심이 적었고, 당시 조선 사회의 혼탁함에 실망해 관직을 멀리했습니다.

일본의 침략

곽재우 장군의 배경 설명에 이어 임진왜란의 시대적 배경 설명이 이어집니다.

1392년 건국된 조선은 200년간 큰 전쟁없이 아주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점점 국방력이 약화되었고, 임진왜란 발발 쯤에는 이름난 큰 장수도 없고, 장수가 되어야겠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100여 년 간 치열한 내전을 겪었습니다. 그 내전을 끝내고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생각합니다. 자기 아래 어마어마한 무사들과 병력이 있으니 만약 전쟁을 한다면 바다 건너 조선과 명나라까지 이길 승산이 있지 않을까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자기 밑에 탁월한 장수가 너무 많아 한 번만 삐끗하면 그 중에 누군가가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권력을 빼앗을 수도 있겠다는 데에서 연유합니다. 그러니까 본인의 정치적인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 아래 많은 병력을 내보내 바깥으로 관심을 돌려야 되는 시기였던 거죠.

허울뿐인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빌미로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바로 1592년 4월 13일 입니다. 대마도를 떠나 부산 앞바다에 상륙하죠. 4월14일 부산진에서 전투가 벌어져 정발 장군 이하 성내의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이 전멸당합니다. 4월15일은 동래성과 다대포성을 함락시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곽재우 장군은 의령 세간리에서 의병을 조직합니다. 4월 22일, 마을 입구에 있는 600년 된 느티나무에 북을 걸어 치며 주민들을 모아 의병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연설과 설득으로 10여 명의 의병을 결성했고, 자신의 재산을 바쳐 의병과 그 가족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곽재우는 보름 정도 훈련시킨 의병들을 거느리고 5월4일과 6일,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기강 강바닥에 말뚝을 박습니다. 이 말뚝으로 일본군 배의 진로를 막고 기습하여 격파하였는데 이 승리가 임진왜란 때 조선이 처음으로 거둔 승리였습니다. 3일 뒤 이순신 장군이 옥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이어 정암진 전투 등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의병 세력은 약 3,000명으로 확대됩니다. 곽재우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지역 의병장과 병력을 통합하며 경상도 일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의병장으로 성장했습니다.

설명을 마치고 대중들은 삼삼오오 무리지어 오랜만에 만난 소회를 나누면서 충익사와 의병박물관을 둘러 보았습니다. 충익사는 곽재우 장군과 휘하 장군17명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잘 가꿔진 잔디밭과 수목이 시원하게 눈을 식혀주는 곳이었습니다. 500년 된 모과나무와 한반도 지형의 인공 연못이 순국선열의 평온한 쉼을 도와주는 듯 했습니다. 참배 후 기념관을 돌아보고 바로 옆 의병박물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의병박물관은 크게 고고역사실과 의병유물전시실로 나눠져 있습니다. 고고역사실에는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까지 의령 지역의 유물과 문헌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의병유물전시실에는 곽재우 장군과 휘하 장군들 관련 유물, 임진왜란 당시 조선관군 및 의병 유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청각자료로 정암진전투 안내 영상도 볼 수 있습니다. 설명을 듣지 않고 왔다면 그냥 스쳐지나갔을 전시공간이었는데 설명을 듣고 돌아보니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작가 유홍준 님의 말씀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가 딱 맞는 것 같았습니다.

의령의 국가수호 위인들

자유 관람을 마치고 실제 정암진 전투가 치러진 정암루 일대로 이동했습니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아침의 선선함은 사라지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놓이니, 오후 일정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스와 개인차량으로 약 10여 분 이동하여 솥바위에 도착했습니다.

이 곳은 정암(鼎岩), 바위가 솥처럼 생겼다고 해서 우리말로 솥바위로 불리는 곳입니다. 삼성, LG, 효성그룹의 창업주들이 모두 이 솥바위 주변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의령에서는 이곳을 '부자'솥바위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의령 출신 인물 중에는 곽재우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도 있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대단한 부자였다고 합니다. 부친께서 두 번 결혼하셨는데, 두 분 모두 외동딸이셔서 그 집안 재산을 물려받으셨죠. 그런데 나라에서는 칼 한 자루, 군복 한 벌 줄 돈조차 없었기에 장군은 자신의 모든 가산을 털어 의병 활동을 이끌어 나가셨습니다. 정작 말년에는 자기 가족들이 굶주림에 시달릴 정도였다고 하니, 그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죠.

시간이 흘러 일제강점기, 백산 안희제 선생은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고 독립운동을 하려면 백성들의 삶이 넉넉해야 하는데, 다들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형편인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무력이나 교육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 산업이 튼튼해지지 않으면 늘 일본 자본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신 거죠. 그래서 민족 자본을 키우기 위해 백산상회를 여는 데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신기하게도, 안희제 선생님이 태어나신 곳이 곽재우 장군이 태어난 곳 바로 옆 동네입니다.

홍의장군, 곽재우


솥바위에서 남강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갑니다.

지금 보시는 곳이 바로 남강입니다. 이 강을 따라 배로 이동하던 일본군은 주로 보급 부대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약했을 수 있습니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왕을 사로잡으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왕을 잡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경주, 영천, 상주, 문경새재, 충주를 거쳐 한양으로 최단 거리로 쳐들어갔습니다.

일본군이 워낙 빠르게 연전연승하며 북상하자, 조정에서는 신립 장군을 충주로 보내 막으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일본군은 정말 빠르게 한양으로 진격했지만, 이미 선조 임금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평양과 의주로 피난한 뒤였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의 보급선은 지나치게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일본군은 수군을 이용해 서해로, 내륙에서는 강을 통해 보급선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과 곽재우 장군이 이를 효과적으로 차단했던 것입니다.

첫 기강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의병이 50명 정도로 늘어났을 때, 곽재우 장군은 의령 앞 정암루에서 또 한 번의 전투를 벌였습니다.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던 일본군은 선발대를 보내 남강을 건널 수 있는 얕은 강변에 말뚝을 박아 표시해 두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강 너머 이쪽은 벼랑과 모래밭이어서 군대가 강을 건너기 마땅치 않은 곳이었죠. 곽재우 장군은 정찰병을 보내 이를 파악하고, 그 말뚝들을 뽑아 뻘밭으로 옮겨 박아 넣었습니다. 밤에 일본군 2,000여 명이 말뚝을 따라 강을 건넜다가 뻘 속에 갇혔을 때, 50여 명의 의병들이 일제히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쟁 초기, 이 두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일단 전라도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곽재우 장군 밑에는 나날이 의병들이 늘어나, 한때는 2천 명에서 3천 명에 달하는 대군을 거느릴 정도로 의병을 운영했다고 합니다.

곽재우 장군은 정식으로 전쟁을 배우거나 군사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찰력이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 의병을 모았을 때 인원이 많지 않았기에, 속도를 굉장히 중시했습니다. 무조건 선제 공격하고 빠르게 빠지는 소위 게릴라 전술을 펼치신 것이죠. 그리고 항상 붉은 옷을 입고 선봉에 서서 의병들을 이끌었습니다. 혼자만 입은 것이 아니라 여러 장수에게도 붉은 옷을 입혀, 일본군에게 심리적인 위축감을 주었다고 합니다.

자, 이제 아래 숲길을 따라 정암루로 올라가 보고, 정암철교도 건너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남강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산길을 올라 정암루에서 잠시 휴식도 취했습니다. 정암철교를 따라 회원들과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강바람도 시원해서 더 좋았습니다. 단체 사진 촬영 후에는 관문공원 숲 곳곳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지회별로 준비한 여러 음식들을 나누어 먹으며 식사를 마친 뒤, 진주지회에서 준비한 망개떡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 진주대첩

차량을 타고 진주성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진주성 입구에 모여 서장대로 올라 진주남강 일대를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1592년 10월,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가는 길목에 있던 진주성은 일본군에게 반드시 넘어야 할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일본군 3만 명이 진주성을 공격했을 때, 성 안에는 김시민 목사가 이끄는 3,800명의 병력만이 있었습니다. 수적으로는 절대적인 열세였지만, 김시민의 뛰어난 지휘와 군관민의 필사적인 항전 덕분에 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의병 부대가 성 밖에서 일본군을 포위하고 공격하며 힘을 보태주었습니다. 이렇게 모두 힘을 합친 결과, 5일 만에 일본군을 물리치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는 한산도 대첩, 행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손꼽힙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593년 6월, 일본은 1차 전투의 패배를 되갚기 위해 9만 명이라는 훨씬 더 많은 대군을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공격해왔습니다. 이때 성을 지키던 군관민은 1만 5천 명이었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이 전투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훗날을 기약하며 부대를 보존하는 길을 택해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성벽이 무너졌고, 안타깝게도 수많은 의병장과 백성들이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했습니다. 기생 논개가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도 바로 이때의 일입니다.

서장대 설명을 마치고 진주성 내에 있는 국립 진주박물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동하는 길에는 강바람이 불어와 선선하기도 했지만, 햇볕이 워낙 강해 더위가 느껴졌습니다. 다들 조금 지친 표정으로 박물관에 들어섰고, 시원한 실내에서 자유 관람을 즐겼습니다.

국립 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에 특화된 전시물로 꾸며져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의 다양한 화포와 복장, 문헌 자료는 물론 시청각 자료까지 있어서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시원한 실내 덕분에 참가자들의 상기된 볼도 어느새 식어있었습니다.




옷 한 벌, 거문고 한 개, 낚시배 한 척

박물관 관람을 마친 후에는 성벽을 따라 촉석루로 이동했습니다. 촉석루의 너른 마루에 앉아 다음 설명을 이어 들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안타깝게도 의병장들은 조정의 시기와 의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특히 전라도의 의병장 김덕령은 뛰어난 무예로 명성이 높았지만,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받고 결국 20일간의 혹독한 고문 끝에 옥사했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나는 공이 없어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같이 잡혀있는 의병들은 나가서 싸울 수 있게 해달라’는 가슴 아픈 유언을 남겼습니다.

가장 이름 높던 의병장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을 지켜본 곽재우 장군은 정치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조정에서 무려 29번이나 벼슬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대신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는다는 뜻의 '망우정(忘憂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거문고와 낚시를 즐기며 청빈하게 살다가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남긴 것은 옷 한 벌, 거문고 한 개, 낚시배 한 척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을 참배하고,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희생하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올렸습니다.

직업으로 천한 신분에 옭아매인 백정

이어서 북쪽 성벽을 따라 걸어 차량에 탑승한 뒤, 마지막 기행 장소인 ‘형평운동기념탑’으로 이동했습니다. 최근 ‘어른 김장하’라는 영화를 통해 새롭게 알려진 형평운동에 대해 안내를 시작하기 전, 먼저 조선 시대 신분제 붕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양반이 전체 인구의 약 30%에 불과했습니다. 즉, 나머지 70%는 평민이나 그 이하 신분이었을 것입니다. 초기 조선 시대를 기준으로 본다면,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서도 열 분 가운데 일곱 분 정도는 평민이나 그 이하 신분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신분 개념이 사라졌고, 국민이라면 누구나 평등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양반과 상놈이 나뉘어 살았는데, 어떻게 불과 100여 년 만에 이렇게 큰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바로 형평운동과 같은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원래 우리나라는 엄격한 계급 사회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천민 계층, 특히 백정은 가장 낮은 신분으로 여겨졌고 다른 계층과 어울리기 힘든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백정'이라는 용어가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일반 평민을 가리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가장 낮은 계급으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지되었던 계급 질서가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임진왜란 첫 해, 일본이 쳐들어온 시기가 음력 4월이었습니다. 한창 모내기와 씨뿌리기를 해야 할 시기에 전쟁이 터졌기에, 대부분의 남자들이 전쟁터에 동원되어 죽거나 다쳤습니다. 그 해 가을부터 수확이 변변치 않았습니다. 전쟁 2년차부터는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우리 역사상 아주 드물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기록까지 등장할 정도로 힘겨운 시기였습니다. 물가는 폭등했죠.

하지만 전쟁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기회를 주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적장이나 적군을 죽이는 전공을 세우면 천한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관직에 오르기도 하면서 신분 상승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전쟁 후 양반의 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반면, 변변치 않은 살림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 양반들은 몰락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남의 족보를 사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천민 계층에서도 전주 이씨 족보를 사서 자신들이 전주 이씨라고 주장하면, 이를 밝혀내기 어려웠습니다. 아마 이렇게 하면서 30%에 불과했던 양반의 수가 점점 늘어나 조선 후기에는 양반이 크게 늘어났지만, 백정만은 직업 때문에 여전히 천한 신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양반의 무게와 백정의 무게가 다르더냐

역사의 변곡점에서 이루어진 형평운동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갑오개혁을 통해 여러 가지 근대적인 개혁 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법적으로 모든 신분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과부의 재혼이 허락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가 일어났죠. 하지만 법이 바뀌었다고 해서 국민 의식이 하루아침에 쉽게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백정은 여전히 천한 계급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898년에 백정 출신인 박성춘이 만민공동회에서 용기 있게 연사로 나섰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 백정들도 이제 나라와 국가를 위해 정말 잘 쓰이고 헌신하고 싶다"고 외쳤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를 차별하지 말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인식은 여전히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1909년, 바로 이 곳 진주의 한 교회에서, 특히 젊고 진보적인 라이얼 선교사는 교회 안에서 백정과 일반 신도들을 차별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전에는 백정 신도와 일반 신도 예배 공간을 분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해, 백정 신도가 와서 의자에 앉자 뒤늦게 온 일반 신도들이 다른 자리로 자리를 피했습니다. 사실상 외면한 것이나 다름없었죠.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젊은 선교사는 계속해서 "이제 이 나라에 계급은 없다. 누구나 다 평등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자 일부 신도들은 "말씀은 옳지만, 수천 년을 그렇게 지내왔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뀌겠느냐"며 앞으로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는 이야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결국 백정 신도들이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다시 옛날처럼 한쪽에 따로 앉아 예배하겠습니다." 하고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법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지 이미 15년이 지났음에도 사회 인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었죠.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차츰차츰 서로 화합하고, 함께 예배를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차별 사례가 반복되던 가운데, 1923년 진주에서 강상호 선생을 중심으로 형평사(衡平社)라는 조직이 결성되었습니다. 형평(衡平)은 '저울대처럼 평평하다'는 뜻을 의미합니다. 백정들이 고기를 달 때 쓰는 저울처럼, 이 저울 위에 양반이 올라가서 재나 백정이 올라가서 재나 무게가 달라지지 않듯이,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때 형평사 창립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으며, 양반 계층에서도 이러한 계급 해방 운동에 동참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결과 형평사는 빠르게 전국 조직으로 성장하여, 창립 직후 80여 개의 지역 조직이 만들어졌고 불과 5년 만에 160개로 늘어났습니다. 형평사는 인권 운동을 펼치고 민주주의 의식을 고취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독립운동 조직과 연계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었고, 결국 조직이 만들어진지 약 10년 만에 운영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노력과 사건들을 통해 평등 의식이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그 결과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백정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할지언정, 그것 때문에 차별하는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계 인권 운동사에서 앞서 나갔고 인간의 천부인권을 주장했던 영국에서조차도 아직까지 계급 의식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형식적으로는 신분제가 없어졌지만, 사회 곳곳의 인식 속에 그러한 문화가 남아 있는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불과 100여 년 만에 이러한 계급 해방 운동을 통해 모든 계급이 사라지는 매우 선진적인 문화가 정착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민주주의 의식이 외부로부터만 들어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일찍부터 유교 사회의 영향으로, 임금은 백성을 잘 교화하고 가르치며 살피는 존재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한편, 인간의 권리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주장하신 분 중 한 분은 바로 동학을 창시했던 최제우입니다. 그는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인간 존엄을 강조했습니다. 최제우는 깨달음을 통해 인내천 사상을 펼치며, 자신의 집에 있던 여자 노비 두 사람 중 한 명은 딸로 삼고 다른 한 명은 며느리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는 정말 계급 의식을 완전히 극복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에, 오늘날 우리나라는 계급 의식 없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살아가게 된 것은 바로 이분들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을 기념하고, 특히 형평 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되었기에 이곳에 기념탑을 세운 것입니다.




긴 시간 함께 해주신 해설자 이승용 님과 지회별 사진도 찍고 인사도 나누면서 기행을 마무리 했습니다.


오랜 평화로 침략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던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자, 왕은 국경 변으로 서둘러 피난하며 위급 시에는 명나라로 넘어가 살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텅 빈 나라를 지킨 것은 다름 아닌, 평소 주인 대접을 받지 못했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곳곳에서 나라와 가족을 구하고자 나섰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역사의 모순을 느꼈습니다. 곽재우와 김덕령, 그리고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의병들은 나라가 가장 어려울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희망의 불씨를 되살렸습니다.

또한, 자신의 처지에 체념하거나 순응하지 않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이야기하며 변화를 이끈 형평사 운동을 보며, 그 숭고한 희생과 불굴의 정신은 통일의병을 지향하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집에 있었다면 그저 평범한 하루로 흘러갔을 테지만, 이승용 님의 해설로 회원들과 함께 한 오늘은 가슴과 머리가 가벼워지기도, 뜨거워지기도 한 날이었습니다.

글과 사진_박진현(경남지부 김해지회)

전체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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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광 변상용

다시 한번 역사에 무지한 저를 봅니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신 분들에 비해 나는 뭘 하고 살았나 돌아보게 됩니다.
역사를 잘 알고 나아지는 방법을 알아 내어 작은 힘이라도 되어야겠다 다짐해 봅니다.
점점 가 볼 데가 많아지네요 ㅎ

2025-06-20 19:14:47

천광명

참여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넉넉한 사진과 함께 이렇게 상세히 글 올려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2025-06-20 11:24:54

최지은

그날의 감동이 다시 떠오릅니다. 기억할 수 있도록 글로 잘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2025-06-20 08: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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