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조장이 뭐 어려워? 팀장도 아니고 조장인데!.’라며 자신만만하게 인도 성지순례를 떠난 안영숙 님. 그러나 몸무게가 5kg이 빠져 돌아온 공항에서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고집 세고 반듯했던 사람이 "표정이 편안해졌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요?
결혼할 때 남편에게는 이미 아이가 둘 있었습니다. 친정 부모님은 크게 실망하셨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라며 결혼했습니다. 두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어서 제 아이는 낳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봐 사정을 숨기려고 이사까지 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도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움츠리며 살았습니다. 또한 시어머니를 ‘모신다’기 보다는 ‘같이 산다’라는 생각으로 20년을 함께 했습니다. 그때 저는 '우리는 남들보다 더 바르게, 더 잘 살아야 한다'라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한번 정하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도 악착같이 일했습니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둔 아들이 큰 금전 사고를 쳤습니다. 우리 부부에게는 정말 큰돈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라며 실망과 원망이 올라왔습니다. 그 돈을 왜 썼는지는 지금도 묻지 못했습니다. 물으면 제가 더 힘들 것 같았습니다. 괴로움에 빠져 있다가 문득 질문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괴로워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법륜스님 책은 오래전부터 읽고 있었습니다. 특히 《기도》를 읽고는 불교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습니다. 마침, 코로나 때라 온라인 불교대학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공부를 꼭 해야겠다는 절실한 마음에 바로 신청했습니다.

경전 대학을 마치고 전법 활동가 실습을 앞둔 봄이었습니다. 남편이 다리에 힘이 없다며 쓰러져 입원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손자는 두 다리가 부러져 수술했습니다. 정년퇴직하고 1년만 놀겠다던 남편은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흔들렸습니다. '지금 전법 회원을 해도 될까?' 그때 남편이 말했습니다. "하고 싶은 거 해. 당신이 안 했어도 생길 병이야."
그런데 건강했던 남편이 환자라는 사실을 저는 자꾸 잊었습니다. 받아들이기 싫었나 봅니다. 믿음의 모양도 달랐습니다. 남편은 자기만의 기도방에서 복을 빌고, 저는 새벽에 정진하며 제 마음을 봅니다. 토요일마다 봉사를 나가면 "꼭 가야 해?"하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같은 불교인데 왜 이렇게 안 통할까? 답답했습니다.
그러다 새물정진1점검 시간에 법사님이 말했습니다. "상대는 그럴 수 있습니다.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정토회 공부를 한다면서 남편에게는 '그러면 안 된다'라며 시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남편이 무슨 말을 하든 속으로 말합니다. '그럴 수 있지. 당연하지.' 제가 바뀌니 남편도 호응하여 저를 많이 이해해 주고 있습니다.

인도 성지순례에서 조장을 맡았습니다. 출발 전 100일 동안 매일 300배를 했습니다. '정토행자들이 가는 길인데 뭐가 어렵겠어. 조장이 뭐 어려워, 팀장도 아니고 조장인데.'라고 생각하며 자신만만했습니다.

출발한 날부터 눈물이 났습니다. 조원들은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버스가 못 떠나고 방송으로 사람을 찾기도 하고, 같은 조의 두 도반은 크게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저는 점점 지쳐 갔습니다. 회사에서 휴가받고, 남편이 "더 아프기 전에 다녀와" 하며 보내줬는데 이 귀한 시간을 이렇게 쓰다니!. ‘도반들은 왜 내 마음을 이렇게 몰라줄까.'라고 분별했습니다. 열반당에서 도반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도 '왜 울지? 정토행자 맞나, 부처님 앞에 설 자격이 있나'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 분별은 사실 저에게 향한 것임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한번은 참견하기 좋아하는 한 도반과 크게 부딪혔습니다. 그 모습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보니 '내 일이 아니면 안 하고, 일은 원칙대로, 반듯하게 한다'가 제 업식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 원칙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못 참았습니다. 회사 직원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습니다. 나중에 그 도반이 울며 미안하다고 했고, 우리는 함께 울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통일의병 행사를 같이 가자고 제가 먼저 신청을 권했습니다. 그 도반이 제 스승이었습니다.
'다 내려놓고 3년 전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하자.' 그렇게 마음먹고 돌아왔습니다. 몸무게가 5kg이 빠졌습니다. 공항버스에서 남편을 보자마자 펑펑 울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새벽 정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엎드려 있던 어느 날 눈물이 나다가 웃음이 났습니다. '내가 베푼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받고 있었구나. 내가 나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구나.'라는 깨우침이 있었습니다. 인도성지순례가 20년 직장 생활보다 힘들다고 하며, 그 짧은 시간에 혼자 난리를 친 제가 우스웠습니다. 정진이 없었다면 다시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3년 하면 바뀐다더니, 3년을 해도 안 바뀌네.”라며 속으로 투덜댔습니다. 그런데 소임을 바꿔 가며 새 경험을 하고 계속 몸을 엎드리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숙여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의 일을 보며 '이런 어려움이 있어서 그러시구나' 하고 이해합니다. 회사에서도 제가 보물처럼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나눕니다.
저의 앞으로의 3년 수행 과제는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감사한 일이다'입니다. 요즘은 감사하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아들의 사고도 그렇습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저는 제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들이 저를 만들어 준 셈입니다.

〈깨달음의 장〉2에서는 오랫동안 숨겨 온 아이들 이야기를 처음 당당하게 꺼냈습니다. 가슴이 후련했습니다. 그 뒤로 숨기지 않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얼마나 숨이 막혔을까.' 아이들에게 참회 기도를 했습니다. 아이들을 품어 주신 시어머니께도 감사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을 한 발짝 떨어져서 봐 주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압니다.
새벽 3시 40분에 일어나 300배를 합니다. 불교대학에 입학하며 시작한 천일결사 정진을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 왔습니다. 요즘 회사 사람들이 말합니다. "표정이 편안해지셨어요." 처음엔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의 저는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혼자 온 것이 아닙니다. 새벽마다 정진방을 지켜준 어르신 도반들 덕분에 저도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투덜대면서도 곁을 지켜준 남편에게도 너무 감사합니다.
힘들고 흔들릴 때마다 정진은 저를 제자리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정진을 놓지 마세요. 정진은 언제나 나를 돕습니다."

인터뷰 내내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안영숙 님은 "작은 삶"이라며 겸손해했지만, 그 속에는 풍부한 이야기와 감동, 웃음이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후련하다"라며 웃던 모습이 오래 남습니다. 정진을 놓지 말라는 그의 마지막 말이 새벽마다 제 마음에도 울릴 것 같습니다.
글_희망리포터 박지훈(서울제주지부 송파지회)
편집_윤정환(인천경기서부지부 안양지회)
전체댓글 0
전체 댓글 보기정토행자의 하루 ‘광명지회’의 다른 게시글
다음 글이 없습니다.
이전글'재앙이 복'임을 깨닫게 해 준 백일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