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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지부 용인지회 '지부 불교대학 담당' 소임을 하고 있는 김혜련 님은, 2010년 9월 5일 처음 천일결사에 입재했습니다. 2012년 3월 불교대학 입학, 이듬해 졸업 후 3월에 경전대학 입학하였으나 졸업하지 못해서, 2017년에 다시 경전대학 입학했지만 바쁜 생활로 마치지 못했습니다. 2021년 3월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경전대학에 다시 도전하여 10년 만에 졸업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정토회와 끈을 놓지 않고 지금까지 오게 된 이야기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굉장히 무서운 엄마였습니다. 별명이 '사감 선생님'일 정도로 엄격했고,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동네에서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다른 엄마들의 시선도 신경 쓰였습니다. 저는 집안에서 중심을 잘 잡고 아이들을 도덕적으로 반듯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자로 잰 듯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던 저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잘 키울 수 있을지 늘 고민했습니다.
결혼 초부터 남편과 다툼이 많았습니다. 큰아이가 다섯 살 무렵,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빨리 회복하려고 여기저기 돈을 빌려 다시 시작한 일이 사기를 당해 가진 것을 모두 잃었습니다. 결국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시부모님 댁에 얹혀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돈을 벌어야 했고, 아이들도 책임져야 했고, 집안일과 시부모님 봉양까지 도맡아야 했습니다. 겉으로는 씩씩한 척했지만,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온통 해결해야 할 문제들만 가득 차 있었고, 그것들을 감당하기에 제힘은 너무 부족했습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남편과의 불화였습니다.

‘왜 저렇게 행동하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많았습니다. 작은 일에도 불같이 화내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런데 올해 1월,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비로소 남편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인생에서 한 번도 큰 실패를 겪지 않았고, 승승장구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인생의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이 왔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성지순례 중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남편을 이해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언니와 두 남동생 사이에서 자란, 샘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전형적인 둘째였습니다. 맞벌이하던 어머니를 대신해 네 명의 외손주를 키우느라 힘드셨던 외할머니, 늘 예민하고 기준이 엄격했던 아버지, 누가 뭐라 해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하던 어머니까지, 일곱 식구가 한집에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성격이 무던해서 아무리 힘들어도 화를 내거나 힘들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화나 짜증도 없었지만 푸근한 사랑도 표현할 줄 몰랐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어머니는 지금의 저보다 어렸습니다. 어머니 또한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제야 이해합니다.

외할머니는 장손 집안의 큰며느리였습니다. 아들이 없어 작은집 첫째 아들을 장손으로 호적에 올릴 만큼 아들에 대한 애착이 아주 강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외할머니의 장녀였습니다. 저의 언니는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아파 가족들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습니다. 둘째인 저는 뱃속에서부터 태동의 움직임이 활발했습니다. 아들이라 기대했는데 딸이어서 할머니의 실망이 컸습니다. 그러다 남자 손주 두 명이 연달아 태어나니 할머니에게 그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였을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덤벙거리고 욕심이 많았던 저는 할머니에게 자주 꾸중을 들었고, 그때마다 쌈닭처럼 대들었습니다. 어릴 적 할머니에게 동생들과의 차별과 비난하는 말을 들으며 자라서인지 사춘기 때는 자존감이 낮았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두려웠습니다. 늘 위축되어 있었고, 소극적이고 내성적으로 지냈습니다. 이런 상처들이 무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한동안 외할머니에 대한 원망과 설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할머니의 상황이 이해되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많이 힘드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 마음의 응어리를 풀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이고 가장 잘한 일이었습니다.

남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자 저의 모든 관심은 아이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늘 싸우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불안과 상처를 안고 있었고, 사춘기가 되면서 학교생활까지 힘들어했습니다. 그때 친구의 소개로 법륜스님을 알게 되었고, 즉문즉설을 들었습니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원인을 해결하면 결과도 달라진다.”라는 스님의 법문을 듣는 순간 한 줄기 빛이 보였습니다. ‘원인을 해결하면 되는 거구나’ 그토록 찾아 헤매던 문제의 해답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천주교 신자였지만 천일결사 기도에 입재했습니다. 기도만 하면 절실히 해결하고 싶었던 문제들이 풀릴 것만 같았습니다.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던 저는 기도문을 ‘남편 덕분입니다’로 정하고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이었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했지만, 남편 덕분이라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 문제가 바로 해결될 것 같았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나는 잘하고 있는데 당신이 문제야’라는 생각이 커졌고, 남편을 더욱 차갑게 대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동네에서 논술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학생 수도 많았고 제법 이름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힘들어하고 방황하는 것을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수업을 접고 아이들을 데리고 2~3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어느날 친구와 같이 절에 머물렀습니다. 숙소에서 아침 기도를 마친 저에게 친구가 말했습니다.
“남편 덕분이라는 너의 말 속에 화와 분노가 가득 들어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습니다. 제게는 남편한테 숙이는 마음과 남편 덕분이란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데 당신도 뭔가 변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것이 제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별거를 시작했습니다. 시부모님도 이혼을 권유했지만, 남편은 절대 이혼은 하지 않겠다며 거부했습니다. 남편은 말했습니다.
"보통 여자들과 다르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지만, 내가 너를 좋아하기 때문에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어."
떨어져 살면서 서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정리할 시간을 가지면서 부부관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1년 후 다시 합쳤습니다.

지금 남편은 퇴근 후 제가 회의나 불교대학 수업, 법회 참석으로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해도 알아서 차려 먹고 설거지합니다. 새벽기도 알람을 듣지 못하면 깨워주기도 합니다. 주말에 실천 활동으로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거나 회의 등으로 바쁠 때면 집안일도 도와줍니다. 가끔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지만 다투는 횟수도 줄고, 갈등의 강도도 점차 약해졌습니다.
돌이켜보면 저의 노력이나 수행으로 갈등을 극복한 게 아니라 남편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자신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깨우친 덕분입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기도는 내가 했는데, 수행은 남편이 한 것 아닐까?’
정토회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바쁜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들과 딸, 가족들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학사 소임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것은 학생들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처음 불교대학 입학할 때는 드러나지 않아도 저마다의 어려움을 안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두운 표정과 경직된 모습이 수업이 거듭될수록 환해지고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손짓, 몸짓에서도 한결 여유가 느껴집니다. 비대면 화상 수업에서도 그런 변화가 고스란히 잘 보입니다. 졸업할 때가 되면 “너무 행복하다. 이 공부 하길 잘했다” “내 인생의 정말 중요한 경험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입학할 때와 졸업할 때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정말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변화를 지켜보며 제가 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고, 세상 모두를 위한 일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 마음도 뿌듯하고 즐겁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는 중요한 일이기에, 다른 도반들에게도 학사 소임 봉사를 꼭 해보라고 권합니다.

도반들과 활동할 때 ‘하기로 한 일은 해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약속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별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반들이 “너무 힘들다”고 말을 하니 고민하였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못하게 될 수도 있는데, ‘저 사람은 지금 어떤 상황일까?’ 하고 이해하거나 상대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그제야 저에게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차가운 업식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후론 제 기준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려 연습하고 있습니다. 일을 할 때 상대의 마음을 잘 보듬어 주지 못하는 점이 제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라, '따뜻한 사람 되기'를 수행 과제로 정했습니다.
2017년, 그 해에도 경전대학에 입학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스님의 법문을 녹취하는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숨소리까지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듣고 기록하는 일을 일주일에 한 번씩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일도 바빴고, 우울증이 심하게 온 상태였습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매주 법문 녹취 봉사를 하고 새벽 정진 108배도 꾸준히 했습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점차 가벼워졌습니다. 그렇게 삶의 방향을 찾게 되었고, 우울증에서 벗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소임 활동하면서 저의 모습은 많이 변했습니다. 많이 웃고,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깊이 고민하지 않고 가볍게 하고,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가족 간에 따뜻함이 생긴 것입니다. 남편과 아들, 딸 모두 부처님의 바른 법을 만나 자기 삶의 주인으로 가볍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지도 법사님 법문 중 “힘들어도 매달려 있어라.”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김혜련 님의 이야기 들으며 알 수 있었습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 것은 거센 바람이 아닌 따뜻한 햇볕이라는 우화가 생각납니다. 행복은 거창하거나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과 따뜻한 온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간절함이 있었기에 스스로 선택한 수행자의 삶을 꾸준히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한 경험으로 가족 모두 부처님 법 만나 함께 행복하길 응원합니다.
글_이재선 희망리포터 (대경지부 동대구지회)
편집_최미영 (국제지부 한국호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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