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구미지회
성형 중독 어머니에 대처하는 며느리의 자세

막상 인터뷰하려니 부끄럽고 물러서는 마음이 든다며 수줍은 표정으로 말문을 연 구미지회의 박길자 님. '수행은 꾸준히 했지만, 삶의 굴곡이 별로 없는 내가 이런 인터뷰를 해도 되나?' 하는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길자 님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이런 이야기야말로 대부분의 정토행자의 인생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이들 눈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인생이지만, 자신만의 업식에 걸려 계속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수행하며 조금씩 나아가는 모습. 박길자 님의 이야기에서 나 자신이 엿보였던 이유입니다.

뿌리 깊은 분별심

“어머니, 어디 편찮으세요?”
퇴근 후, 시댁으로 가니, 시어머니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습니다. 저녁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고, 세 살과 네 살인 두 아들은 배가 고픈지 내 옷자락을 잡아끌었습니다.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신가? 다치신 건가?' 걱정이 되어 방에 들어가니, 성형수술을 받은 거였습니다. 어이없고 화가 났지만,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시아버지와 시동생들을 위해 부랴부랴 밥과 반찬을 준비해 저녁을 차렸습니다. 설거지까지 하고 두 아이를 챙겨 집으로 돌아오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시어머니가 가족들 식사 준비도 나 몰라라 하고, 성형수술을 하고 누워 있는 것은 내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것 같아 속상했고, 육체적으로는 힘이 들었습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시어머니에게 마음의 문이 닫히고, 한편으로는 '그래선 안 된다.'는 마음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시어머니는 회갑, 저는 30대 초, 중반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그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저는 어머니를 미워하는 마음을 숙제로 안고 있습니다.

2024년 크리스마스 JTS 거리 홍보 활동 (왼쪽에서 두 번째 박길자 님)
▲ 2024년 크리스마스 JTS 거리 홍보 활동 (왼쪽에서 두 번째 박길자 님)

성형수술 좀 그만하세요.

“네가 결혼을 안 하고 있으니 내가 화병이 날 지경이다.”
친정엄마는 스물아홉이 되도록 미혼인 저를 닦달했습니다. 그때 저와 가장 친한 친구의 엄마가 친척의 아는 사람이라며 남자를 소개했습니다. 나는 지방교육청 행정직 공무원이었고, 남자는 시청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었습니다. 같은 지역에 살고, 같은 공무원이니 '그 정도면 됐다.'라고 여겨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했습니다.
2월에 결혼하고 바로 3월에 첫아이가 생겼습니다. 남들보다 늦은 결혼을 만회라도 하듯 12월에 첫아이를 낳고 15개월 터울로 둘째까지 낳았습니다. 결혼, 임신, 출산이 휘몰아치듯 한꺼번에 일어난 겁니다. 집안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 하고, 직장까지 다니느라 정신 차릴 틈 없이 바빴습니다. '이런 게 결혼 맞나? 이렇게 사는 게 맞나?' 고민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여행, 단양 이끼터널 앞, 활짝 웃는 모습
▲ 친구들과 여행, 단양 이끼터널 앞, 활짝 웃는 모습

남편은 4형제의 맏이로 집안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자랐습니다. 시아버지는 셋째 아들인데, 두 형님 댁에 자식이 없었고, 시아버지도 결혼 3년 만에 아들을 얻어 눈이 빠져라. 손주를 고대하던 할머니가 남편을 애지중지했다고 합니다. 자라는 동안 라면도 직접 끓여 먹은 적이 한두 번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집안일을 전혀 도울 줄 몰랐습니다. 시청 쪽은 업무가 많고 바빠서 야근과 주말 근무가 잦다는 것을 알기에, 남편에게 원망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세 살, 네 살 되었을 때 시댁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혼자서 직장 일과 두 아이 육아를 하기 벅차 시부모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퇴근하면 시댁에 가서 저녁을 같이 먹고 애들을 데리고 집으로 오는 생활이었습니다. 힘이 들어도 남편 도움 없이 그럭저럭 지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시어머니가 성형수술을 한 겁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몇 번이나 계속되었고, 얼마 전에는 87세의 고령에 또 수술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설 명절에 성형수술을, 그것도 상안검 하안검 수술을 한꺼번에 하는 바람에 눈이 안 감기는 모습을 보니 또 왈칵 화가 났습니다. 정토회 만나 수행하면서 '시어머니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고자 했어도 여전히 어머니를 미워하는 업식을 씻지 못했구나!' 싶었습니다.

다만 다를 뿐인데

“박길자 님은 시어머니를 욕받이로 하고 있네요. 다른 사람한테 화난 것을 시어머니한테 풀고 있어요.”
이번 정일사 수련 때 시어머니와의 이런 문제를 이야기하니, 법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저는 시댁을 친정과 비교하고 이해되지 않는 시댁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다 시어머니 탓으로 돌리며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2남 2녀의 막내로, 봄에는 딸기밭으로 소풍 가고, 가을에는 단풍놀이도 가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직장인이었고, 어머니는 온화하고 순종적인 가정주부였습니다. 자라면서 돈 때문에 힘든 일을 겪어본 기억이 없을 만큼 넉넉한 살림이었습니다.

2025년 봄 불교대학 홍보활동 중(맨 왼쪽 박길자 님)
▲ 2025년 봄 불교대학 홍보활동 중(맨 왼쪽 박길자 님)

시댁은 시아버지가 연좌제 때문에 경제 활동을 전혀 못 했고, 시어머니가 화장품 장사를 해 살림을 꾸려갔습니다. 시어머니 혼자 벌어서 일곱 식구, 즉 시할머니와 시아버지, 아들 넷을 부양했습니다. 그러니 살림은 늘 쪼들렸습니다.
저는 집안 경제를 책임지는 것이 아버지의 당연한 의무인 집안에서 자라 경제 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 있는 시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빠듯한 돈으로 가정을 꾸리느라 한번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절대 쓰는 법이 없는, 내 눈에 인색해 보이는 시어머니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친정어머니는 밑반찬을 미리 여러 개 준비해 두었다가 식사 때는 국이나 찌개를 끓여 상을 차렸는데, 시어머니는 밑반찬 없이 그때그때 한두 가지 반찬을 만들었습니다. 이 방식이 저와 맞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가 미리 밑반찬을 준비해 두면, 퇴근하고 온 내가 저녁 준비하기가 수월할 텐데, 그런 것에 무심한 어머니에게 자꾸 분별이 올라왔습니다.

어머님이 보살입니다.

2023년 봉화 수련원 연등 철거 봉사 후 (왼쪽에서 세 번째 박길자 님)
▲ 2023년 봉화 수련원 연등 철거 봉사 후 (왼쪽에서 세 번째 박길자 님)

“지금 2019년 불교대학 모집 중인데 한번 공부해 봐요. 좋아요.”
어느 날 직장 동료가 권했습니다. 정토회가 어떤 곳인지, 뭘 배우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았고, 저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얼마 전 어머니와 찾은 절에서 불교 예법을 몰라 당황했던 기억이 떠올라 한번 배워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2019년 3월 봄 불교대학에 입학했고, 일주일에 한 번 퇴근 후 법당에 가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직장 특성상 2, 3월이 한창 바쁜 시기이고, 가정 살림과 시부모를 모시며 불교대학에 다니니, 솔직히 법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하면 좋겠지, 하는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았고, 그해 9월에는 천일결사 입재도 했습니다. 이번에도 천일결사가 뭔지, 입재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바빴지만 이걸 놓으면 안 되겠다, 나에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입재를 빠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에 전환점을 만들 수도 있을 거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봉화 거리 JTS 홍보 활동(오른쪽이 박길자 님)
▲ 봉화 거리 JTS 홍보 활동(오른쪽이 박길자 님)

백일을 채우지 못하고 70일, 80일 기도하며 입재를 이어가는 동안, 시어머니를 보는 시각이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그냥 어머니가 있는 그대로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목소리도 매우 크고 규모도 큰 남자 성향이었습니다. 섬세한 면은 없지만, 대신 자잘한 걸로 잔소리하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시아버지가 치매로 요양 병원에 2년 있다가 돌아가신 뒤에도 80세까지 화장품 장사를 하며 혼자 생활을 꾸려갔습니다.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반찬을 해 드려도 “나는 반찬 안 해줘도 된다. 너희들 맛있는 거 먹고 네 살림 살아라.” 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니 시어머니가 보살이었습니다. 성형수술은 어머니가 자신을 위한 유일한 사치였습니다. '화장품을 팔기 위해 외모를 가꿔야 했고, 첫 수술 후 효과가 좋다고 느껴 빠지게 되었구나'라고 이해했습니다.
“동서, 난 이제 어머니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기로 했어. 다 내려놨어.”
그러나 업식이 하루아침에 씻기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보살이다, 감사하다' 기도하다 어머니가 몸이 아파 우리 집에서 두 달 정도 지냈을 때, 제사 준비를 하지 않아 내가 퇴근해서 제사 음식을 차리면 곧바로 분별심이 올라왔습니다. 어머니는 120살까지 살고 싶다 하니, 나의 수행도 그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조건 “예”하고 맞추는 연습

불교대학에 다니고 코로나가 와 경전대학은 온라인으로 졸업했습니다. 전법활동가 교육을 받고, 불교대학 진행을 두 번 하고, 경전대학 돕는 이도 하고 제2차 만일결사 때 온라인으로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공부도 다시 했습니다. 법문을 다시 들으니 처음 공부할 때는 몰랐던 것들이 이해되고 내 삶에도 하나하나 적용해 보았습니다. 특히 금강경에 나오는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란 문구가 가슴에 꽂혔습니다. ‘무릇 상이 있는 것은 실체가 없다.’라는 법문을 마음에 새기며, '이 공부를 끝까지 놓지 않겠다!'라고 다짐했습니다.

2024년 영주 모둠활동, 정토사회문화회관 기념 촬영(왼쪽에서 세 번째, 박길자 님)
▲ 2024년 영주 모둠활동, 정토사회문화회관 기념 촬영(왼쪽에서 세 번째, 박길자 님)

그 무렵, 남편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리며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둘째 아들은 코로나로 바깥 활동을 못 한 채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밤낮 게임만 하고 있었습니다. 제게는 좋은 수행 과제가 생긴 것입니다. 남편과 아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남편에게는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함께 조기 퇴직하여 건강을 되찾자고 하고, 저는 57세, 남편은 58세의 나이로 3년 전에 명예퇴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루 종일 한 공간에서 지내는 것이 힘들었지만, 남편이 원하는 것을 받아주는 연습을 통해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남편이 세 끼를 집에서 먹자고 하면 집에서 식사 준비를 했고, 외식 가자고 하면 외식을 했습니다. 남편에게 무조건 “예” 했습니다. 때론 싫은 감정도 있었지만, 싫고 좋음도 내가 짓는 것이라 정진하며 알아차리니, 집에서 식사하면 경제적이어서 좋았고, 외식을 하면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 좋았습니다.

2019년 봄 불교대학 때 경주 남산순례
▲ 2019년 봄 불교대학 때 경주 남산순례

엄마, 아빠가 퇴직하면 직장을 구하겠다고 약속했던 아들은 1년이 지나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한 발짝만 나가면 될 텐데’ 하는 마음에 이래라저래라 간섭도 하고, 공무원 공부를 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있는 그대로 봐야 자식이 자립할 수 있다’라는 스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는 걸 두려워하고 힘들어하는 아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자랄 때 내가 엄마로서 해준 게 없었구나, 아이들이 엄마가 필요할 때 내가 집에 없어 아이들 마음에 허함이 많았구나, 스무 살이 넘었지만, 내가 맛있는 음식으로 그 허한 마음을 치유해 주고자 마음먹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워크넷에 들어가 아들이 다닐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 양계업 쪽에 일자리가 있어 아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습니다. 달걀을 유통하는 일인데, 아들은 한번 다녀보겠다며 2년째 잘 다니고 있습니다.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준 보람이 있어 뿌듯하고 고맙습니다.

며느리도 언젠가 시어머니 된다.

봉화에서 평화 모둠활동(왼쪽이 박길자 님)
▲ 봉화에서 평화 모둠활동(왼쪽이 박길자 님)

퇴직 후 마음 편히 정토회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올 3월에는 이전 모둠장이 3년 임기를 마치고 회향하면서 제게 그 소임이 왔습니다. 처음 맡을 때 마음가짐은 '전임 봉사자보다 잘해야지' 했는데, 막상 해보니 당장 들어오는 일을 그때그때 처리하기에도 바빴습니다. '불교대학 진행 때보다 컴퓨터 쓸 일이 적어 쉽다.' 하면서 열심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며 컴퓨터로 해야 하는 업무보다 아도모례원 농사 돕기나 공양간 봉사 등 몸으로 하는 게 맞습니다. 지금은 모둠장 소임을 하니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해 안동에서 공무원을 하는 큰아들이 곧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알아서 제 앞가림하고 잘 살고 있는 큰아들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내가 시어머니가 된다'라고 생각하니 살짝 걱정도 됩니다. '시어머니가 보살이구나'라고 여겨도 경계에 부딪히면 다시 분별하는 제 업식을 해결하지 않으면, '나도 며느리에게 그런 시어머니가 될까?' 하는 걱정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으니, 앞으로도 저는 계속 행복한 수행자로 정토회와 함께할 생각입니다.


박길자 님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시어머니에 대한 양가적 감정, 엎치락뒤치락하는 이야기가 중심 이어서 흘리듯 슬쩍 지나쳤지만, 남편과 둘째 아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한 부분은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시어머니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도 아름답고요. 이렇게 정토행자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저도 용기를 얻어 계속 수행할 힘을 얻습니다. 소중한 이야기 나누어준 박길자 님 감사합니다.

글_김옥자 희망리포터(서울제주지부 양천지회)
편집_박선희(강원경기동부지부 수원지회)


2025 9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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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고

감동적인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며느리도 시어머니가 된다는 말이 콕 들어오네요

2025-08-14 08:08:27

현광 변상용

많은 것이 나중에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하는데 당시엔 절대! 이해가 안 되기 마련이죠. 그래도 그런 시어머님과 잘 지내셨네요.
도반님은 성형중독이 아니시니 훨씬 더 좋은 시어머니가 되실 거에요 ㅎㅎ
앞으로의 멋진 수행도 응원하겠습니다~

2025-08-13 17:45:01

"욕받이" 라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나도 그런 상대가 있구나. 감사기도를 계속해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5-08-13 13:2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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