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워싱턴
1.5세 해외교포 한승원 보살님의 감동적인 수행담

오늘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입니다. 희생되신 많은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 정토행자의 하루에서는 워싱턴정토회 1.5세 교포 한승원 보살님의 진솔하고 감동적인 수행담을 소개합니다. 해외교포들의 삶을 좀 더 깊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정토행자님들, 응원합니다!  


[미주동남부/중남미 워싱턴정토회]
부처님 법 만나 거듭나게 된 삶, 한승원 보살님 수행담

오늘은 해외정토회 영문 번역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승원 보살님의 수행담을 소개하려 합니다. 내용은 좀 길지만 한 줄 한 줄 본인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 여러 도반들과 함께 나누려는 한승원 보살님의 진심이 잘 전달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참고로 올해 정토회 달력에는 법륜스님의 희망편지가 실렸는데, 한글 옆의 영문이 바로 보살님이 소속된 번역팀에서 작업해준 것이랍니다. 덕분에 저도 달력 여러 개를 외국인 친구들에게 선물하여 부처님 법이 조금이나마 세상에 번져가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번역팀은 달력 외에도 스님의 단행본 [기도], [특별한 선물 :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열가지 방법]을 영문으로 번역하였고, 매달 [월간정토]에 번역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법 만나 거듭나게 된 삶
-미국에서 한국 교포로 산 40여 년의 삶을 돌아보며 (한승원)

얼마 전에 희망리포터인 민윤기 법우님으로부터 1.5세 교포인 나의 이야기를 정토행자의 하루에 실으면 여러 도반들의 수행에 도움이 될듯하고, 특히 해외에 살고 있는 도반들에게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며 수행담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게 하여 지이다.’라는 수행문을 매일 아침 되새기며 기도를 하고 있으니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러겠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수행담을 쓰려하자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는 인터넷에 나의 이야기가 올라간다는 것이 싫었고, 또 내가 진짜 정토행자인지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글쓰기를 계속 미루면서 이런 부탁을 한 상대를 원망하고 있는 나, 싫어도 싫다고 말을 못하고 강요받아서 억지로 한다고 느끼는 나의 업식에 대해서도 다시 보게 되었다. 수행하면서 많이 소멸되었다고 생각했던 업식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한번 약속한 것은 꼭 지키려고 노력하는 업식도 있기 때문에 두 업식이 충돌을 일으키며 마음이 불편했다.  

법당에 다니며 나누기를 통해 마음을 내놓는 연습을 꾸준히 해왔던 덕분에, 용기를 내어 민윤기 법우님에게 이런 내 마음의 갈등을 솔직히 내놓았다. 법우님은 화를 내거나 실망하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된다.’며 ‘정토행자의 하루’에 대한 본인의 입장과 생각을 긴 편지로 써서 이메일로 보내줬다. 법우님의 진솔한 마음이 담긴 글을 읽으며 내가 나의 수행담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놓기 싫어하는 이유는 여전히 나의 상을 어떤 틀 안에 가두어 두는, 나 혼자 만들어 놓은 장벽 때문임을 깨달았다. 

다시 마음이 가벼워지자 이제는 진심으로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된다면 내 수행담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왔다. 이런 기회를 준 민윤기 법우님에게도 각별히 고마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 기쁜 마음으로 정토행자로 수행한 지난 5년과 함께 이제까지의 나의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항상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어리석음 안에서 열심히 살아온 결과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열심히 사는 것과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겉으로 볼 때는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여도 한 생각 잘못해서 무지에 눈이 가려져 버리면, 안 좋은 과보를 가져올 인연을 본인 스스로 매일 조금씩 짓고 있는 줄도 모르며 살게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바로 내가 그렇게 살아온 장본인이다. 

나는 평생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딸로서, 그리고 아이들을 열심히 키우며 평범하지만 성실한 전업주부로서 나의 삶을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나한테 닥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면서 내 힘으로는 더 이상 내 삶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를 경험하게 되었다.

나는 1976년 중학교 1학년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외국회사에서 여러 나라에 다니며 일을 하셨던 친정아버지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어떤 인종의 사람과 결혼해도 괜찮다고 하셨는데 결국 내가 남편으로 선택한 사람은 한국남자였다. 그것도 고향이 경상북도 예천이고, 친할아버지께서 서당 훈장을 하셨던 토박이 경상도 남자였다. 결혼 전 내게 보인 그 사람은 과묵하고 신중하며 점잖고 따뜻한 남자였다. 외국 남자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들과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정체성에 대한 열등의식이 있었던 나와는 달리 남편은 고등학교 때 이민을 왔는데도 자기가 누구인지 확실히 아는 것처럼 보였고, 또한 안정되고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시작하자 남편은 유교사상을 고스란히 받드는 조선시대 선비 같이 답답했고, 재미가 없었다. 격주 주말마다 장거리 12시간을 운전하며 시부모님을 방문하는 남편과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나는 남편과 시집식구들을 원망하며 오직 아들 둘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남편한테는 시댁에 가기 싫다는 말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울상을 지으며 살았다. 친정아버지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사는 친정어머니는 내가 이상한 집에 시집을 갔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고, 나 역시 대학교 때 여성학 수업을 들으며 여성의 권리에 심취했었는데 왜 이리 살고 있는지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론 항상 억울하고 화가 나 있었다.

10년이 넘게 이렇게 살다가 아이들이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갈 나이가 될 때쯤, 남편이 직장을 옮겨 서부에서 동부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드디어 시집에서 해방된 것 같아 정말 좋았고, 신나게 아이들을 키우며 행복해 했다. 남편은 일에 전념해서 내가 아이들을 어떻게 양육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시댁의 전통을 무시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아이들을 키우며 마치 그동안 힘들게 살아온 세월을 보상받는 것처럼 착각했던 것 같다. 남편에게는 여전히 허심탄회하게 말을 하지 못했지만, 엄마역할이 너무 즐거웠고 그렇게 살아도 아무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큰애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반항하기 시작했다. 공부, 운동, 악기 등 뭐든지 뛰어나게 잘하던 큰애가 고등학교 때 여자 친구를 사귀면서 내 말을 안 듣기 시작한 것이다. 큰애가 나와 멀어지는 느낌이 들자 나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여자가 되어버렸다. 어른인 내가 17살 난 똑똑하고 예쁜 큰애의 여자 친구를 미워하고 질투하며 큰애와 소리까지 질러가면서 자주 싸워서 우리 집은 평화스러운 날이 거의 없게 되었다. 남편은 조용한 집에 들어오고 싶다며 큰애와 나를 보고 머리 나쁘고 고집 센 두 애들이 싸우고 있는 거 같다고 한심해 했다. 차라리 남편이 바람을 피웠더라면 나의 이런 반응이 스스로에게 이해가 되었을 텐데 사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창피했고, 어디에 가서 어떻게 도움을 받아야 될지 몰라 괴로웠다. 게다가 둘째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다른 주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어 집을 떠나자 더 외롭고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법륜스님의 글을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다. 반항하는 아이를 둔 엄마에게 ‘남편한테 참회하라.’고 조언을 하시는 스님의 말씀이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는 너무나 달라서 관심이 갔다. 큰애와 함께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혼자 속을 태우던 터라, 아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뻐서, 남편한테 기꺼이 참회를 하겠다고 스스로 결심했다. 

2010년 2월, 큰애가 18살이 되던 생일날부터 남편한테 참회하는 내용을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장에 썼다. 하지만 솔직히 참회가 무슨 뜻인지도 잘 몰랐고 나의 상황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면서 몇 달이 지났는데 또 우연히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중국 식당 입구에 붙어있는 행사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불기 2554년 부처님 오신 날 기념 한반도 및 세계평화 기원 행사에 여러분을 초청합니다.’라고 쓰여 있는 포스터에서 글로만 보던 법륜스님의 모습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것이 2010년 4월, 지금부터 딱 5년 전의 일이다. 워싱턴디씨 시내에서 열리는 이 행사에 찾아가보니 사람들이 잔디밭에 모여 앉아 장구도 치고, 노래도 부르는 것이 이상한 종교집단처럼 보였다. 다 같이 연등을 들고 행진하자고 할 때는 그냥 집에 갈까 했으나, 김밥 한 줄 얻어먹은 값은 해야 할 것 같아서 같이 행진을 했다. 그리고 교회로 자리를 옮긴다고 해서 또 따라갔다. 스님께서 즉문즉설을 해주셨다.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여기까지 왔는데 하며 용기를 내어 질문을 드렸다. 그 당시 나는 참회의 글을 쓰면서도 심적으로 많이 괴로워 혼자서 여기저기 다니며 성모마리아, 예수님, 또 부처님께 빌고 있었다. ‘제가 한국 성당도 가끔 가고, 동네 미국 성당도 가고, 또 여러 인종이 다니는 티베트 절에도 가는데 괜찮은가요?’하는 질문에 스님께서 가게주인 입장에서는 단골손님이 좋지만 소비자는 자기 좋은 데 찾아다니는 거라고 하시며 그렇게 해도 아무 상관없다고 말씀해 주셔서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또 몇 달이 지났다. 큰애마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멀리 떨어진 대학에 가게 되자, 애들 없는 빈집에서 사는 게 외롭고 허전했다. 음식 챙기며 아이들을 여기저기 바쁘게 라이드하던 저녁시간이 되면 어딘가로 급하게 가야할 것 같고,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멍하게 앉아 있곤 했다. 혼자 황망히 나서서 목적지도 없이 막연히 운전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던 중 스님께서 워싱턴 지역에 해외순회강연을 오셨다. 밤에 혼자 운전을 해서 강연회장을 찾아갔다. 이번엔 아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상관도 하지 않고 즉문즉설 시간에 제일 먼저 손을 들어 애들이 나를 찾지 않는데 어떻게 하냐고 여쭈면서 울먹였다. 스님은 어미 새들도 새끼들을 날려 보내는데 애들을 떠나보내라고 말씀하시더니, 보시를 많이 하라고 하셨다. 

그때는 난데없이 웬 보시인가 했는데, 나의 살아 온 날을 되짚어 보니 언제나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다 받으려고 하면서 남을 위해 베푸는 일은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에서 열리는 공짜 공연이나 전시회 및 박물관을 아이들을 이끌고 쉴 새 없이 다녔지만 단 한 번도 행사장 앞에 놓인 기부금 상자에 1불짜리 지폐 한 장 넣어본 적이 없었다. 

순회강연이 있던 그 날 조만간 워싱턴법당의 개원법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며칠 후 개원법회에 찾아갔다. 비로소 정토행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스님 말씀에 3년은 수행을 해야 자기 업식이 좀 바뀐다고 해서 3년은 해보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때 내 나이가 47세였는데 3년 열심히 수행해서 50살이 될 때는 새사람이 돼서 행복해지고 싶었다. 

위싱턴법당에 다니는 게 편하거나 특별히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3년만 참고 버티자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수행했다. 사실은 여러 가지 분별심이 부글부글 올라왔었다. 방석 깔고 바닥에 앉는 것도 의자생활만 해왔던 나한테는 불편했고, 유학생이나 성인이 되어 미국에 온 사람들이 한국 정치 이야기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고, 통일에 대한 이야기도 공감이 가지 않았으며, 천일결사 백일기도비를 하루에 1불로해서 회향할 때 적어도 $100은 꼭 내야한다는 것도 강요당하는 것 같았고, 수행일지를 제출해야 하는 것도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일기장을 검사하기 위해 걷어가는 것 같아 싫었다. 커피랑 도넛만 간단하게 먹고 집에 가서 밥을 먹으면 되는데 왜 번거롭게 회관에서 점심공양을 함께해야 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모든 분별심 속에서도 도반들과 나누기를 하는 것이 정신치료를 받는 것처럼 나한테 큰 도움이 되어 법당을 계속 찾았다. 계속되는 나누기를 통해서 내가 얼마나 편견이 많고, 또한 내면에 얼마나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억눌려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괴로움의 원인들이 단순히 남편, 시집, 큰애뿐이 아니고 더 오래전부터 시작된 엄마와의 관계와 이민 온 후로부터 생겨난 나의 외로움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민 후 나의 삶은 무엇을 해도 진짜 내 인생 같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나만 어딘가 혼자 먼 곳에 떨구어진 것 같아서, 형언할 수 없는, 아무리 씻어 없애버리려 해도 오히려 더욱 강하게 인식 되는 외로움 같은 것이 있었다. 

가족이 모두 함께 이민을 왔지만 나는 부모님과 떨어져 이모네 집에서 살면서 학교를 다녔다. 백인 이모부가 유명한 법대를 나온 변호사였는데, 부모님은 내가 정식으로 고급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이모네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하신 것이다. 나를 위해 이모 부부에게 돈까지 주며 나를 맡기신 터라 나는 열심히 영어를 배우며 공부했다. 나는 부자동네에 있는 좋은 고등학교에 다녔고, 나한테 특별히 잘해준 선생님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 혼자만 동양학생이라는 것이 나를 항상 위축시켰고, 나한테 관심을 주는 사람들,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한테 아예 관심 없는 사람들 모두가 나는 다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한번은 학교버스를 타고 견학(field trip)을 가는데 너무 재미가 없었다. 혼자서 머릿속으로 ‘한국에서 수학여행 가는 길에 기차 안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상상을 하며 이민 오기 전에 한국에서 유행하던 70년대 초반의 대중가요를 속삭이듯 조용히, 주위의 미국 친구들 귀에 들리지 않게 불러보았지만 노래가사가 끝까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지금 내가 한국에서 친구들과 정말로 수학여행을 가는 거였으면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한국에서 친구들이 보내준 편지를 받으면 ‘나도 한국에서 수학여행도 가고, 길거리에서 친구들과 군것질거리를 사먹으며 마음대로 버스를 타고 서울 시내를 다니고 있을 텐데….’ 하며 한국친구들을 그리워했다.  

그렇지만 이런 나의 마음을,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자식들을 위해 미국에 와서 외롭게 사시는 부모님께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항상 밝고 명랑한 척했다. 미국에 사는 것이 좋은 것처럼 행동했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도 있었고, 친한 백인 여자 친구 집에서 자고 오기도 하는 나를 보며 부모님께서는 내가 공부도 잘하고, 미국 친구들과도 잘 지낸다고 흡족해 하셨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냥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었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느낌은 뭐를 해도 진짜 내 인생 같지가 않았다. 그냥 항상 구경하고 관찰하는 손님 같은 기분이었다. 오직 가족하고 있을 때만, 특히 엄마하고 있을 때만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이 외로움인지도 몰랐고, 내가 외롭다고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었다. 사실 우리 가족 모두가 미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 외로웠지만, 마치 경치 좋은 휴양지에 여행을 왔다가 집에 못 가고 있는 사람들처럼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아이가 없는 이모는 나한테 설거지도 한번 안 시키고 잘해주셨다. 그런데 내가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싫어하는 것 같아서, 이모 몰래 엄마한테 전화를 하곤 했다. 부모님 집이 30분만 운전하면 갈 수 있는 거리였는데도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한국처럼 쉽게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없었고, 차도 없을 뿐더러 운전도 못했다. 그래서 언제나 주말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보통 교포들의 생활이 주말에는 한인교회에 모여 친목을 다지곤 하지만, 부모님들이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 나는 다른 교포들과의 교류도 없이 가족하고만 시간을 보내며 살았다.

가족과, 특히 엄마와 있을 때만 비로소 편안한 마음이 들었던 나는 대학에 가서도 친구들과 놀지 않고 주말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서 부모님들과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미국생활을 외로워하시고 나도 엄마가 그리워서 그랬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되던 해에 부모님이 다시 한국으로 역이민을 가셨다. 하지만 그 후로도 30년 동안이나 나는 엄마와 자주 전화통화를 하며 모든 일을 엄마와 상의하고 엄마의 조언을 따르며 살아왔다. 

그런데 8년 전에 내가 류머티즘을 심하게 앓은 일이 있었다. 정작 엄마의 따뜻한 손길이 그립고 가장 위로가 필요했던 그때에 나는 엄마에게 아프다는 말을 선뜻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엄마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음을 깨달았다. 

그 후부터는 엄마와의 관계가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정토회에 다닌 지 1년이 넘도록 엄마가 이상한 종교단체에 다닌다고 싫어할까봐 거의 매일 통화를 하면서도 얘기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엄마와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해지면서 엄마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항상 무거웠다. 엄마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고 싶은데 죄책감과 여러 가지 감정들로 뒤엉켜진 내 마음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몰랐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이 실타래를 풀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즈음 또 스님께서 오셨을 때 ‘1년이 넘도록 정토회에 다니면서도 엄마한테 이야기를 하지 못했는데 어찌하면 좋을지’ 여쭈었다. 스님은 도대체 왜 말을 못하냐고, 그냥 하면 된다고 너무나 간단명료하게 말씀하셨다. 더 물었다간 여러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당할 것 같아 그냥 알겠다고 하고 자리에 앉아버렸다.

그 후로 4년이 지난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엄마와의 관계가 많이 편해졌다. 엄마에게 내 속마음 여는 것이 그리 쉽게, 그리 빨리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행했다. 그 중간에 한번은 서울의 부모님 댁에 갔는데, 한밤중에 이유 없이 엄마에 대한 원망심이 불처럼 일어나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가 부모님이 주무시는 방문을 향해 한도 끝도 없이 절을 하며 참회를 한 적도 있었다. 이제 나는 내가 번역한 스님의 책을 어머니께 권해드리는 자유로움과 힘이 생겼고, 어머니도 서울에서 스님 법회에 다녀온 이야기를 나에게 하시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 모녀는 서로의 삶을 존중해주며 정을 나누는 건강한 관계가 되었다.

4년 전의 그 즉문즉설에서 스님께 종이쪽지에 익명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질문도 하였다.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용감하게 직접 손을 들어 스님께 질문을 하던 내가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종이쪽지에 쓴 걸 보면, 내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 자체가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소수민족으로 살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자존감이 낮아져 있었던 것이다. ‘인종차별을 당했을 때 법적으로는 해결을 해야 또 다른 피해를 막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가해자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 수행자가 취해야 하는 모습’이라는 스님의 명쾌한 답변을 듣고 몇 십 년 동안이나 풀리지 않던 답답함이 풀렸다. 미국친구들과 있으면 재미가 없고 오히려 옛날 외로웠던 기억이 나서 싫었는데, 스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소식을 끊고 지내던 고등학교 때의 백인 친구와 연락해서 다시 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큰애는 대학교에 가서 컴퓨터게임에 빠져 학교공부에 소홀해지더니 결국엔 용돈까지 쓰고도 남을 많은 금액의 여러 장학금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진로에 대해 방황하고 있다. 처음엔 장학금이 너무나 아까웠지만 대학에서 공부하라고 준 돈이니 다 빼앗긴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아들이 장학금을 잃게 된 것이 옳은 일로 느껴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예전 같으면 괴롭고 원망스럽기만 했을 텐데 이제는 이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큰애 덕분에 불법과 연을 맺게 되어 고맙기도 하다. 

지금은 어딜 가든지 기부금 박스를 보면 일단 멈추고 지갑을 꺼내서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집어넣는 습관이 생겼다. 5년 전 내가 정토회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간의 세월을 어떻게 버텼을까? 지금의 이런 행동은, 이런 행복감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 뵙는 법륜스님은 통일이야기나 한국에서 방황하는 청년들만 걱정해주시지 해외에 살고 있는 교포들에게는 관심이 없으신 것 같았다. 해외순회법회에도 유학생들만 찾아오고 우리 가족과 같은 1.5세나 2세 교포들은 스님의 손길이 제대로 닿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러던 차에 인도성지순례에 참가했다가 버스에 내려서 잠깐 쉬는 동안 스님께 다가가 해외 교포들은 걱정이 안 되시냐고 여쭈었다. 스님은 ‘그럼 어떻게 하겠어? 이제 내가 영어를 배울 수도 없고….’ 하시며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스님이 다른 급한 일들이 너무 많아 신경 쓸 겨를이 없으신 것이구나.’ 혼자 생각했었다. 그런데 스님께서 작년에 그렇게 고행으로 해외 100강을 하시는 것을 보며, 스님의 깊은 뜻과 함께 한없는 자비심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이렇게 좋은 스님의 법문을 한국말이 서툰 내 아이들에게도 듣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이전부터 나는 어떻게 하면 교포들에게 부처님 법을 전하는 일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2012년 5월부터 위싱턴정토회 총무인 유주영 법우님의 권유로 해외정토회 번역팀에 들어가서 스님의 책을 번역하는 봉사를 해오고 있다. 그 전에 법당의 봉사는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며 분별심을 냈었는데, 번역봉사는 집에서 혼자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고 책 읽는 것도 좋아해서 별 생각 없이 하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막상 해 보니 법당에서 설거지 한번 하는 것이 훨씬 쉬운 봉사였다.

번역을 하기 전 우선 내 스스로가 스님의 말씀이 완전히 채득될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며 사유하고 고민해 보았다. 보왕삼매론을 번역할 때는 열 번째 덕목인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마라’는 말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아 몇 날 며칠을 전전 긍긍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는 이치가, 맞춰지지 않던 퍼즐이 척 맞아 떨어지듯 확연해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이렇듯 번역을 하며 스님 말씀이 하나하나 다시 정리되고 내 의식에 영구적으로 새겨지는 것 같아서 희열을 느낄 때도 많았지만, 번역팀 도반들과 손발을 맞추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기도 했다. 이 봉사를 하면서 내가 얼마나 나의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인지 확실히 알았다. 일이 진행되려면 팀원들과 화합을 해야만 하는데 내 고집을 내려놓기가 정말 싫은 순간들이 있었다. 동네를 걸으면서 큰소리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내 속의 화를 가라앉히고 난 후 다시 일을 한 적도 있다. 이렇게 몇 년을 같이 일한 덕으로 이젠 팀원들과 손발이 척척 맞는다. 나의 번역 봉사는 내가 잘 쓰일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었고, 또 미국에서 외롭게 보낸 나의 유년시절을 모두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지금 수행담을 쓰면서 돌이켜보니 나는 정말 정토회와 법륜스님께 너무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 새삼 느껴진다. 나처럼 뭐든지 합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며 법적으로 해결하는 교육을 받은 교포들에게는 정토행자의 수행방식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을 것이다. 거의 40년을 미국에서 살아온 나는 처음 2~3년 동안은 끊임없이 분별심이 올라왔었다. 어떤 분별심은 내 마음이 짓는다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정토회 자체의 문제가 확실한 것 같아서, 몇 달을 법회에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수행의 끈은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스님이 나의 법명을 금강행이라고 주시며 다른 사람들은 남편, 스승, 종교 다 바꿔도 되지만 나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셔서 할 수 없이, 또 내 선택이 아니고 강요당해서 3년만 다니려고 했던 정토회를 계속 다닐 수밖에 없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아직도 이렇게 오랜 세월에 굳어진 업식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올 때도 있지만, 강요당해서 억지로 내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선택도 내가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내가 지는 내 인생의 주인이 나임을 이제는 확실히 안다. 나는 더 이상 엄마, 남편, 애들을 탓하지 않으며, 스님의 말씀을 할 수 없이 들어야 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토행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도 안다. 여러 도반들의 도움 없이는 이렇게 많이 밝아지고 잘 쓰이고 있는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위싱턴정토회 도반님들께도 정말 많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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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다해 수행담을 적어주신 한승원 보살님의 진솔함과 애정이 느껴져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보살님은 차가 없는 저에게 교통편 보시를 많이 해주는데, 일요일에 함께 법당 가는 길에 일주일간의 수행을 이야기를 하다가 빠져나가야 할 고속도로 출구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깔깔 웃으며 “아이고 또 출구 놓쳤네.”하며 오히려 출구를 놓쳐서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좋아하기도 했답니다. 언제나 부처님 가르침을 생활에서 실천하려 하고, 자신이 놓친 부분은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참회하며,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을 도반들에게 보여주는 한승원 보살님에게 두 손 모아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민윤기 희망리포터 
 

▲ 2013년 9월~수계와 법명을 받고 스님과 함께~*^^*

2026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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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덕

다시 읽어도 감동입니다. 해외 교포들의 외로움에 공감하면서 수행의 끈을 놓지 말아야지 다짐합니다. 한승원보살님 감사합니다.

2015-05-28 17:09:18

박경혜

한승원 보살님 진솔한 수행담 나눠주셔서 감사드려요. 일요일날 뵈요.

2015-05-23 09:59:28

졸업을하자

보살님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보살님의 솔직한 수행담을 읽고 공감되는 내용이 무척 많았고 덕분에 많이 감동받고 크게 치유받고 갑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려요..♥

2015-05-21 11:4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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