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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정초기도 3일째, 마지막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한 후 정초기도를 하기 위해 두북수련원 방송실로 향했습니다.

오전 10시 정각에 정초기도 3일째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화상회의 방에 정토회 회원들이 모두 입장하자 생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로서 3일간의 정초기도를 모두 마치게 됩니다. 대중들은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회향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정초기도 마지막 날을 맞이하여 수행자의 간절함이 나 한 사람의 절박함을 넘어 전쟁, 환경,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정초기도 3일째,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가 ‘간절하게 염원한다’ 이런 말을 할 때 우리는 무엇을 두고 간절하게 염원해야 할까요?
첫째, 생명이 위협받을 때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내가 죽어갈 때는 살고자 하는 염원이 절박해집니다. 가족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나 형제, 아내나 남편, 자식이 불치병으로 죽어가거나 교통사고로 위험에 처하면,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그 간절함이 깊어지면 ‘내가 죽더라도 아들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까지 일어납니다. 그래서 '부처님, 이번에만 우리 아들을 살려주시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하며 약속을 쏟아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절박하고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자기 생명이며, 더 나아가 모든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제1 가치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생명을 해치는 가장 대표적인 행위가 전쟁입니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고, 생존에 필요한 재물을 파괴합니다. 전쟁 중에는 성폭행 같은 인격 침해도 만연해지기 쉽습니다. 이렇게 전쟁은 수행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제1 가치인 생명, 제2 가치인 재산의 보호, 제3 가치인 인격의 보호를 매우 쉽게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전쟁을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폭력은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일이기에, 수행자는 폭력과 전쟁을 반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는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해 가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며, 전쟁을 부추기는 분위기까지 조성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분명하게 ‘전쟁은 안 된다’, ‘폭력은 안 된다’ 하는 관점을 가지고,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생명이나 내 가족의 생명에 대해서는 염원이 간절해지지만,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 하는 염원은 그만큼 간절해지지가 않습니다. 특히 수많은 생명을 죽이는 자연 파괴를 막는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간절함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런 활동들은 쉽게 흐지부지되곤 합니다.
그래서 둘째, 우리는 전쟁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을 무차별로 파괴하는 난개발을 결코 지지해서는 안 되고, 자연환경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을 간절하게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CO₂를 많이 배출하는 과도한 소비를 멈추거나 줄여야 합니다. 여기에 더해 오늘날 큰 문제로 떠오르는 것이 미세플라스틱입니다. 미세플라스틱이 바다로 흘러가 물고기가 먹고, 우리가 그 물고기를 먹으면서 결국 미래의 생명을 위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플라스틱 사용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꼭 써야 한다면 한 번 쓰고 버리지 말고 가능한 한 오래 사용해야 합니다. 사용이 끝났다면 반드시 수거해 재활용하고, 무분별하게 바깥으로 폐기되는 일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안 쓰면 가장 좋지만, 플라스틱은 유용성이 매우 높아 실제 생활에서 완전히 끊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능하면 안 쓰고, 썼다면 반드시 수거한다’는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환경 보호는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니, 마땅히 간절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간절함이 부족하기에, 결국 행동이 느슨해지고 활동도 흐지부지되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성추행을 당했거나, 사기를 당해 재산을 잃었거나, 모함을 당했을 때 그 억울함을 풀고 싶을 때 간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물론 내 억울함을 풀어야 할 때는 저절로 간절해지지만, 타인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에는 그만큼 간절하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차별은 차별받는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가장 억울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등 그 어떤 차별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요즘 인터넷 댓글 등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신체적·인종적·국가적 차별 발언을 쏟아내며 악을 쓰듯 감정을 표출하곤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에서 벗어나 ‘평등’을 지향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크든 작든, 생김새와 색깔이 어떻든 관계없이 모두 각자의 다양성을 인정받아야 하며, 각각의 존재가 존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관점을 갖는 것, 여기에 우리의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수행자라면 첫째, 청정한 계율을 지키는 데 간절해야 합니다. 둘째, 마음의 들뜸을 가라앉히고 고요함을 유지하는 선정(禪定)을 닦는 데 간절해야 합니다. 셋째, 삶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지혜(智慧)를 증득하는 데 간절해야 합니다. 이러한 간절함으로 부처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계의 향기(戒香)’, ‘정의 향기(定香)’, ‘혜의 향기(慧香)’를 공양 올린다고 말합니다. 수행자는 스스로 인격을 닦아 그 인격의 향기를 부처님께 올려야 합니다. 이렇게 머리를 조아리며 간절한 마음을 낼 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지키고 유지하는 일에 간절해야 합니다. 생명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또한 사람의 생명이 유지되려면 최소한의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 등 생필품이 필요하니, 그것을 빼앗거나 훔쳐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사람은 짐승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모독해서도 안 되고 차별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기본 계율이며, 우리는 이 계율을 지키는 일에 간절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국 평화를 가져오고, 괴로움 없는 세상, 곧 불교의 이상인 ‘열반’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는 목적은 결국 나와 우리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간절함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갈등 없는 세상, 최소한의 삶이 보장되는 세상을 염원합니다. 성별, 계급, 인종, 신체 장애, 성적 지향 등으로 인한 차별이 없는 사회를 원합니다. 차별과 고통, 빈곤이 없는 세상을 우리는 ‘불국정토’라고 부르며, 이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모인 것입니다. 나 스스로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것은 물론, 우리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즉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불하기를 바란다’는 염원은 전통 불교 안에도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제대로 모르면 ‘나만 잘되면 된다’, ‘나만 편하면 된다’, ‘나만 잘 먹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수행자는 10만 원이 있을 때 10만 원짜리 좋은 음식을 혼자 먹는 것보다, 만 원짜리 10인분을 사서 10명이 함께 먹는 데 더 큰 의미와 기쁨과 보람을 둡니다. 어떻게 돈을 쓰느냐는 개인의 자유이지만, 무엇에서 삶의 보람과 주인의식을 느끼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동 양식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좋은 담배’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값이 비싸더라도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담배를 살까’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담배를 사는 데 돈을 쓰지 않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은 돈이 생기면 더 좋은 마약을 사는 데 씁니다. 하지만 마약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은 그쪽에 돈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술이나 담배, 마약 같은 것들뿐 아니라, ‘취향’이라는 이름으로도 쉽게 중독됩니다. 마시는 차에 취향이 꽂힌 사람은 다른 데는 아껴도 수천만 원짜리 차를 사 마십니다. 자동차에 집착이 있는 사람은 수억 원짜리 자동차를 삽니다. 커피에 취향이 꽂힌 사람은 수백만 원짜리 커피를 찾고, 술에 취향이 있는 사람은 몇백만 원짜리 술을 삽니다. 그리고 그것을 즐기며 남에게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수행자는 그것을 보고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돈, 같은 능력이 주어졌을 때 ‘나를 자유롭게 하고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길’에 가치를 둡니다. 전쟁을 막는 평화, 자연 파괴를 막는 환경운동, 가난한 사람을 돕는 복지 활동, 봉사활동 같은 일에서 더 큰 보람을 느낍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 곧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정진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정진이 간절하지 않은 것은 이런 ‘원(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것’, ‘나만 잘되면 된다’는 작은 자아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만 간절해집니다. 돈이 급하거나 병이 나거나 위기에 몰리면 매달리고, ‘도와만 주시면 다음에는 뭐든지 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치솟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면 금세 나태해지고, 관심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신심이 났다가 식었다가를 반복하며 마음이 죽 끓듯 합니다.

하지만 원(願)이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내가 배고파 보니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알게 되고, 내가 헐벗어 보니 옷 없는 사람의 심정을 알게 됩니다. 내가 병들어 보니 병든 사람의 고통을 알게 되고, 내가 차별을 받아 보니 차별받는 이의 아픔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알게 되면, 내 고통을 극복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설령 내가 차별받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차별받지 않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사회를 바꾸는 일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전쟁이 없는 나라에 살고 있더라도, 전쟁 속에 있는 나라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그곳에도 전쟁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우리 문제’에는 매우 집중하면서도 세상의 문제에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시야가 좁아져 관심이 오로지 ‘우리만 잘되면 된다’는 데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가자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해 온 현실 앞에서도, 우리는 외면하고 침묵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부당함을 말하는 것 자체를 꺼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그러한 폭력을 두둔하기도 합니다.
내가 소중하다면 남도 소중한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가족이 소중하다면 다른 가족도 소중한 줄 알아야 하고, 우리나라가 소중하다면 다른 나라도 소중한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차별받기 싫다면 나 역시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를 살펴 상대를 살피고, 동시에 상대를 살펴 나를 돌아보는, 곧 ‘나와 상대를 구분 짓지 않는 연기적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를 위한 염원’을 함께 품어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면 그것을 막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전쟁이 나면 모두가 다 도망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나만 피난 가면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먼저 전쟁을 막는 일에 가장 힘써야 합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막지 못했다면 희생을 최소화하고 확전을 막으며, 하루빨리 평화를 되찾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복구에 힘써야 하고, 포로들의 귀향과 부상자들의 치료도 도와야 합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그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끝내 막지 못했다면 전쟁이 더 커지거나 길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상황이 더 어려워질수록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전쟁을 막지 못했다고 포기해 버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염원’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살아야 하고, 살아 있는 동안 작은 일 하나라도 나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실천을 이어가야 합니다.
이런 간절한 염원을 담아 일상에서 꾸준히 기도하면, 앞으로 닥칠 재앙을 미리 막을 수가 있습니다. 어려울 때만 하는 기도는 사후 처리에 머물기 쉽습니다.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제 ‘예방하는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재앙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평소에 꾸준히 정진해야 합니다. 그래야 혹시 어려운 일이 다시 생기더라도 즉시 대응할 힘이 길러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토행자들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평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뭇 생명을 살리기 위한 환경 활동도 하고, 절대 빈곤에 처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기 위한 빈곤 퇴치 활동도 합니다. 차별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배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린 개구리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을 지냈기에, 어린아이들의 처지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을 무조건 두둔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라는 뜻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가난했던 시절을 겪었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의 절망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전쟁을 겪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전쟁을 겪는 사람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다시 떠올려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 개인이 ‘마음의 평화’, ‘자유와 행복’에 이르는 기도를 하면서도, 동시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정착시켜야 하고, 자연 생태계가 회복되도록 지속 가능한 개발로 전환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절대 빈곤이 없는 평등한 사회, 차별이 없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더 나은 세상을 염원하며 실천하는 수행자를 우리는 ‘정토를 일구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회향 기도는 여러분들이 이런 관점에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를 넘어선 연기적 관점으로 우리 사회와 세상을 향해 간절한 마음을 내어 기도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회향 법문이 끝나자 대중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염불하며 마지막 300배 정진을 했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마음이 고통받는 이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데 닿기를 기원하며, 한 배 한 배 정성껏 절을 했습니다.

정진을 마치고 모둠별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여 마음 나누기를 하며 다른 도반들은 정진을 하며 무엇을 느꼈는지 서로 교감한 후 정초기도 법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어제 오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스님의 목 상태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스님은 오늘도 휴식을 했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서울로 이동해서 오전 8시에 영어권 회원들을 위해 담마토크 생방송을 한 후 오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열리는 정토불교대학과 경전대학 합동 졸업식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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