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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장수 죽림정사에서 백용성조사기념관 개관식이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5시 30분에 서울 정토회관을 출발하여 전라북도 장수로 향했습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아침 해가 떠올랐습니다. 3시간 30분을 달려 오전 9시에 죽림정사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오늘 개관하게 되는 백용성조사기념관을 미리 한 바퀴 둘러보았습니다.

1층은 편안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카페와 다양한 행사가 가능한 다목적 강당으로 꾸며져, 방문객들이 여유롭게 머물며 쉼을 누릴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2층은 불심도문 큰스님께서 평생에 걸쳐 수집하신 소중한 자료들과, 용성조사님의 위대한 업적을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전시 공간으로 마련하였습니다.

개관식 때 내빈들을 안내할 때 어떻게 안내하면 좋을지 전시물과 이동 동선을 확인한 후 요사채로 향했습니다.

요사채에 계신 불심도문 큰스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삼배로 인사를 드리자 큰스님이 평생 보관하고 있던 용성조사님의 유품을 전해 주었습니다. 꽁꽁 묶은 보자기를 풀자 큰스님이 유품에 대해 직접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용성조사님이 생전에 쓰시던 단주와 염주입니다. 이것은 동헌조사님이 쓰시던 단주와 염주예요. 이것은 도문법사가 쓰던 단주와 염주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사리가 든 병입니다. 미얀마 쉐다곤 대탑이 지진으로 무너졌을 때 나온 사리의 일부를 제가 보관하고 있었던 겁니다. 부처님의 사리이니까 잘 보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잘 보관하겠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새로 지은 백용성조사기념관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오늘 개관하는 기념관은 교육하고 홍보하는 목적이 커서 주로 디지털 자료와 영상 자료를 전시했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유품은 아직 제대로 전시를 못했습니다. 오늘 주신 유품들을 포함해서 기념관 안에 전시실을 새로 마련할 계획입니다.”
큰스님은 미안한 마음을 거듭 내비쳤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오래 사는 바람에 법륜스님에게 신세를 너무 많이 지게 되어 버렸어요. 일만 저질러 놓고 끝까지 뒷받침을 못 해 주고 떠나게 되니까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이제 그런 말씀은 그만하십시오. 일을 저질러 놓아 주셨으니까 저희들이 그걸 계승할 수가 있죠. 큰스님께서 씨앗을 심어 놓아 주신 덕분에 저희들은 이제 그걸 가꾸기만 하면 됩니다. 천룡사도 복원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낙성식을 할 때 큰스님이 오셔서 법문을 해 주셔야 해요. 그래서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 합니다. 절을 지었는데 큰스님이 안 계시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용성조사님의 유훈이 실현된 곳에 큰스님이 하루라도 주무셔야죠.”
“예, 알겠습니다.”

큰스님이 쉬시도록 해드린 후 스님은 죽림정사를 찾아온 내빈들을 맞이했습니다.

대각회 이사장 장산 스님도 오셔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대각회에서 많은 스님들이 참석하려고 했는데, 동안거를 시작하는 결제일이어서 못 왔습니다. 날짜를 잘 잡지 그랬어요?” (웃음)
“죄송합니다. 날짜를 잘못 잡았네요. 국회 의원들도 어제가 12.3 비상계엄 사태 1주년이라서 여러 일정들이 겹쳐서 참석을 많이 못 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대신에 어제 제가 국회에 가서 강연을 했는데 국회 의원 20여 명이 찾아와서 오늘 행사에 못 오게 되어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아무튼 용성조사님의 대각사상 선양 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대각회를 대표하여 큰스님께서 오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잠시 후 기념관을 지을 수 있게 많은 지원을 해준 국가보훈부 차관 강윤진 님, 전라북도 도지사 김관영 님, 장수군수 최훈수 님을 비롯하여 민병덕 의원, 박희승 의원 등 많은 지역 인사들과 내빈들이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참석한 내빈들이 모두 불심도문 큰스님에게 인사를 올리도록 안내했습니다.

내빈들이 삼배를 하자 큰스님은 팔리어로 삼귀의를 외우며 환영했습니다.

“나모다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붇닷사.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스님은 내빈들에게 용성조사님이 남기신 업적과 큰스님의 집안이 전재산을 바쳐 용성조사님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용성조사의 업적과 기록들은 안타깝게도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자료가 남아 있지 않고 대부분 소실되었습니다. 도문 큰스님의 증조부 임동수, 조부 임정준, 부친 임철호로 이어지는 임 씨 문중의 독립운동과 자금 조달에 관한 구전 기록과 용성조사, 동헌스님, 도문스님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 구전 기록만이 상세히 남아있을 뿐입니다. 이를 안타까워한 도문스님은 평생 백용성 조사님의 유훈을 받들고, 백용성 조사님의 행적을 쫓아 조각난 기록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설명을 듣고 나서 장산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제자를 잘 두셔서 기념관도 세우시고 뜻하신 바를 이루셨네요.”
큰스님도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저 때문에 제자가 고생이 많죠. 저희 스승이 분황사 조실로 계실 때 당시 고등학생이던 법륜스님을 보고 ‘수운 최제우 대신사는 백 년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저 학생은 천 년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이니까 꽉 붙잡아서 중을 만들어라.’ 하고 지시를 내리셨어요. 그래서 다른 스님들은 자발적으로 절을 찾아와서 중이 되었지만, 법륜스님은 억지로 출가를 했습니다.”
도지사님도 기념관 건립을 계기로 뜻깊은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 덕분에 용성조사님의 뜻을 잘 이어 가게 되었지 않습니까. 저희들도 이런 뜻깊은 일에 동참하게 되어서 큰 영광이었습니다. 큰스님이 아니었으면 용성조사님이 대한민국을 위해 이런 큰일을 하신 줄을 몰랐을 겁니다. 기념관이라도 지어서 그 점에 대해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함께 차담을 나누다 보니 개관식 행사를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 함께 행사가 열리는 용성교육관으로 향했습니다. 날씨가 영하 10도까지 떨어져서 야외에서 행사를 하지 못하고 실내에서 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빈들을 포함하여 대중 400여 명이 자리한 가운데 오전 11시 정각에 백용성조사기념관 개관식을 시작했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국민의례, 애국가 제창, 호국 영령에 대한 묵념을 차례대로 했습니다.

이어서 대한민국 불교의 길을 새롭게 열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용성조사님의 일생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다음은 죽림정사 주지 유수 스님이 참석한 내빈들을 소개했습니다. 불교계 스님들, 종교계 원로들, 사회 원로들, 각계 기관장, 전라북도와 장수군 관계자들, 국가보훈부 관계자들, 기념관 건축에 힘써준 건설 관계자들까지 내빈 100여 명이 자리해 새로운 공간의 탄생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큰 박수로 내빈들을 환영한 후 백용성조사기념관 건립 사업에 대한 경과보고를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2018년 계획안이 제출되어 2020년 승인되었으며, 총 사업비가 70억 원으로 대지 4577㎡, 연면적 994.78㎡ 규모의 지상 2층 건물이 오늘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영상이 끝나자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백용성조사 기념사업회 이사장인 법륜스님이 참석한 내빈과 대중을 향해 인사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 독립운동가 백용성 조사 기념관을 개관하고,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과 그 기쁨을 나누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불심도문 큰스님께서는 평생의 원력으로 백용성 조사의 사상을 널리 알리고, 조사께서 남기신 10가지 유훈을 실천해 오셨으며, 그 유품을 보관하고 관리해 오셨습니다. 이러한 큰 원력으로 백용성 조사 탄생지에 죽림정사를 건립하고, 유언에 따라 경주 남산 천룡사, 신라 불교 초전법륜 성지 구미 아도모례원, 창원 봉림사지, 서울의 백제 불교 초전법륜 성지 대성사 등 수많은 불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와 같은 불사를 새로 시작하려 했다면 엄두도 못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스님께서 이미 60년 전부터 큰 원력을 세우시고 용지를 마련해 두셨기에, 오늘날 후대인 우리가 그 일을 하나하나 이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이곳은 용성조사께서 태어나신 곳은 전라북도특별자치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입니다. 불심 도문 큰스님께서는 흔적조차 사라졌던 조사님의 탄생지를 찾아 죽림정사를 창건하시고, 작지만 기념관과 교육관까지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용성 사상을 널리 전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판단 아래, 저희는 큰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용성교육관, 연수원, 기념관 등 더 큰 불사를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그 첫걸음으로 강 건너 물빛공원에 용성기념관을 건립하였고, 앞으로 이곳에 연수원을 세워 백용성 조사님의 애국 사상을 국민들에게 교육하는 장소로 활용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 장수군은 장수군이 낳은 인물인 백용성 조사를 위해 누구보다 큰마음을 내주셨습니다. 백용성 조사는 세계적인 인물이지만, 그의 출생지가 전북특별자치도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북특별자치도에서도 큰 힘을 모아 주셨습니다. 또한 용성조사님께서는 3·1 독립운동의 숨은 공로자로서,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 토대를 마련하셨기에 국가보훈처에서도 함께 힘을 모아 주셨습니다.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에서도 일부 자부담해서 이렇게 1차 사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재단법인 대각회는 용성조사님이 건립한 서울 대각사를 중심으로, 용성의 불교 혁신 사상과 애국 사상을 계승·전파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대각회 이사장님께서 참석해 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 삼보일배로 잘 알려진 수경 스님께서 몸이 불편하신데도 저희 요청으로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종교 간의 교류를 하고 있는 박남수 교령님, 박경조 주교님, 김대성 교무님, 김홍진 신부님 등 여러 이웃 종교 지도자들께서도 참석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과거 3·1 독립운동을 종교 연합으로 진행했듯이, 앞으로도 국민 화합과 남북 평화를 위해서는 종교 간 연대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오늘 자리에 함께해 주셨습니다. 제가 일일이 거명을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늘 정말 많은 내외 귀빈들이 용성기념관 개관식에 함께해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조금 허전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는 아마도 세대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젊은 세대는 디지털 중심의 전시를 선호하다 보니, 모든 것을 영상으로 볼 수 있도록 시설을 꾸렸습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 세대에게는 눈에 보이는 실물이 적어 뭔가 공간이 좀 빈 것 같은 허전함이 있습니다. 제가 그 말을 전했더니, 세대 차이 때문에 그렇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웃음)

용성조사님께서 남기신 유물들은 아직 충분히 전시되지 못했습니다. 홍보와 교육 목적에 중점을 두다 보니, 아직 유물 전시가 다소 미진한 상태에서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유품 대부분은 절에서 보관하던 것이 아니라, 용성조사님의 도반이자 후원자였던 임동수 거사님의 가문에서 대대로 보관해 내려온 것들입니다. 임동수 거사님은 가족이 가진 3만 석 전 재산을 독립운동과 불교 혁신을 위해 모두 사용하셨습니다. 상해 임시 정부 청사를 구하고 운영하는 데, 3·1 독립운동에, 또 보이지 않는 독립 자금을 지원하는 데 쓰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불심도문 큰스님의 증조부이십니다. 그런 인연으로 용성조사님의 유품은 큰스님 집안에서 보관해 오시다가 죽림정사를 짓고, 기념관을 지어 일부를 전시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기념관이 너무 작아 조사님의 유품을 충분히 전시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번 증축을 통해 더 많은 유품을 전시하고자 했지만, 유품의 전시보다 조사님의 사상을 전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에 따랐습니다. 들어가 보시면, 대부분 디지털로 되어 있어서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요즘은 수장고에 유품을 보관하고 복제본을 전시하는 방식이 일반적인데, 유품 전시 작업은 말씀드린 이유로 인해 아직 덜 진행된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런 불사를 할 수 있도록 구십 평생을 용성조사님의 유지를 받들어 우리에게 전해 주신 불심 도문 큰스님께 다시 한 번 큰 감사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모두 박수)

평생을 바쳐 스승 한 분의 사상과 유훈을 전파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이 조금만 성장해도 자기 이야기를 하기 쉬운데, 큰스님께서는 평생 입만 열면 용성조사 이야기뿐이셨습니다. 그만큼 조사님의 애국 사상과 불교 사상을 외롭게 지키고 전해오신 큰 원력이 오늘의 결실을 이루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함께해 주신 대각회 역시 용성 사상을 널리 전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이므로, 앞으로 함께 힘을 모아 용성 조사님의 애국 사상과 불교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는 대각 사상을 널리 전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저는 오늘날 불교 사상이 불교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국민에게 유용하게 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용어나 형식을 넘어, 국민의 행복을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생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데 잘 쓰이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길을 가장 먼저 여신 분이 바로 용성조사님이십니다.

조선 500년 동안 불교가 탄압받아 천하게 여겨지던 그 시절에 ‘불교의 지성화’를 내거셨고, 절이 산중에 고립되고 경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대중이 불교 사상을 알지 못하던 시절에 불경을 한글로 번역해서 누구나 불교를 알 수 있도록 ‘불교의 대중화’를 주창하셨습니다. 나아가 불교가 사회 속에서 활동하면서 국민의 존경을 받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며, 애국 운동과 여러 가지 사회 실천 운동에 참여하는 등 ‘불교의 생활화’를 앞장서서 이끄셨습니다.
오늘날 정토회가 하고 있는 이 모든 일은, 결국 용성조사님께서 뿌려 놓으신 씨앗을 가꾸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큰스님께서 마련하신 용성기념관을 확장하는 뜻깊은 오늘이, 우리 모두에게 큰스님의 은혜와 용성조사님의 사상을 나라와 국민을 위해 더욱 널리 전하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용성조사님이 탄생하신 성지 이곳 장수의 행정 책임자인 최훈식 군수가 환영사를 해주었습니다.

“사실 저는 용성조사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법륜스님께 용성조사님 이야기를 대여섯 번쯤 듣고 나서, 이분이 우리 민족사에서 정말 큰 인물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전라도, 그것도 바로 이 장수군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이제는 이 일을 불교계만의 몫이 아니라, 장수 군민 모두가 함께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기념관을 넘어 연수원과 교육관까지 건립하여, 더 많은 분들이 이곳을 찾고 용성조사님의 뜻을 배울 수 있도록 장수군도 군민들과 함께 적극 협조해 나가겠습니다.”
이어서 참석한 내빈들의 축사가 이어졌습니다. 먼저 대각회 이사장이신 장산 스님이 축사를 했습니다.

“큰스님의 뜻을 받들어, 이 물빛공원에 백용성조사기념관을 세워 오늘의 새 역사를 만들어 주신 모든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특정한 이들만의 믿음과 깨달음이 아닙니다. 마치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한글이 모든 백성이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도록 한 것처럼, 용성조사님의 가르침과 업적 또한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백용성조사기념관은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공간입니다. 이곳은 지역 주민은 물론 대한민국의 미래 세대에게도 큰 가르침과 울림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국가보훈부 차관이 축사를 했습니다. 이번 기념관 건립에 국가보훈부에서 많은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런 해에 독립운동가이신 백용성조사님의 기념관이 개관하게 되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불교는 물론 기독교, 천도교가 중심이 되고 원불교, 천주교 등 모든 종교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았습니다. 그 정신을 오늘 이어 가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하신 원로 여러분과 불교계를 비롯한 여러 종교계에서도 민족혼을 바로 세우고,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국가보훈부도 그 뜻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을 더욱 튼튼히 만들어 나가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이어서 죽림정사가 있는 이곳 전라북도의 발전을 이끌고 있는 김관영 전라북도 도지사가 축사를 했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역사를 바꾼 분입니다. 조사님의 정신을 우리가 잘 이어받아서 후손들에게까지 잘 전달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용성조사님은 죽림리의 자존심, 장수군의 자존심, 전라북도의 자부심입니다. 앞으로는 용성조사님이 대한민국의 자부심이 될 수 있도록 저도 더 많은 분들과 손잡고 여건을 조성하여 뒷받침하는 일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속해서 여러 내빈들의 축사가 이어졌습니다.

박남수 천도교 전 교령님은 백용성 조사의 3·1운동 참여가 민족운동의 정통성을 세운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강조하며, 그 역사를 밝혀온 불심 도문 큰스님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어 박경조 대한성공회 전 주교님은 법륜스님과 도문 큰스님을 통해 용성조사를 알게 되었다고 밝히며,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꾼 조사님의 정신이 오늘날에도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고 소감을 전했습니다.

김홍신 작가님은 역사 속 ‘만약’을 떠올려 보면 백용성조사님의 존재가 대한민국의 정신을 지탱한 핵심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며, 그 뜻을 이어온 스님들과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박희승 국회 의원은 남원 출신인 백용성조사가 독립운동과 국민 화합을 위해 남긴 발자취가 지역의 큰 자랑이라고 말하며, 기념관 운영과 관련 유적 복원에 국회 차원의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병덕 국회의원은 용성조사님의 공훈이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며, 유품 보존과 역사 정리가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회에서 책임 있게 나서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각계 인사들은 용성조사님이 남긴 가르침과 정신을 우리 사회가 함께 계승해야 한다는 뜻을 밝히며, 기념관 개관이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여러 내빈들의 축사를 들으며 독립운동가 백용성조사기념관 개관을 힘차게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듬뿍 받았습니다.
이어서 전주 판소리 합창단이 축하 공연을 해주었습니다. 우리의 전통 판소리를 현대적인 합창 형식으로 아름답게 재해석해 온 전통 합창단인데, 오늘은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이육사 시인의 대표작 ‘광야’를 새롭게 재해석한 곡을 불러 주었습니다.

어둠과 절망 속에서도 민족의 자주정신을 지키고 다가올 해방을 그리며 희망을 노래하는 가사를 들으며 용성조사님의 업적과 삶을 다시 새겨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용성조사님의 법맥을 이어 오시며 평생을 수행과 자비행으로 살아오신 불심 도문 큰스님을 모시고 오늘 기념관 개관의 뜻을 새겨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큰스님은 주장자를 세 번 내리친 후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안이비설신의로 구성된 지적 알음알이를 벗어나 견도를 하시고, 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수도를 하셔서 무학도의 경지에서 진실의 지견이 열리어 오도를 하시고, 보림을 하시어 중생 교화를 하신 대도인이십니다. 용성조사님의 견도송을 읊어 드리겠습니다.
오온산중심우객(五蘊山中尋牛客)
독좌허당일륜고(獨坐虛堂一輪孤)
방원장단수시도(方圓長短誰是道)
일단화염소대천(一團火炎燒大天)

'오온산인 몸 생각 뜻 가운데서 심우 불성을 찾는 나그네가 텅 빈 집에 둥근 달이 훤히 비치는데 홀로 앉았도다.
모나고 둥글고 길고 짧은 이것이 누구의 도이랴 일단 '이뭣고'의 불꽃이 대천 번뇌를 티우는 도다.'
이런 용성조사님의 깨달음을 온 겨레 전 인류가 받들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곳 물빛공원이 용성조사 탄생 공원이 되도록 하여 세계 불교 청소년 교육의 전당이 되도록 하여 주시기를 여러분께 당부드리며 설법을 마치겠습니다.”

큰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며 사홍서원으로 개관식 1부 행사를 마쳤습니다.

내빈과 대중 모두 새로 건립한 백용성조사기념관으로 이동해 현판 제막식과 컷팅식을 진행했습니다. 죽림정사를 출발하여 다리를 건너자 넓은 물빛공원 안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백용성조사기념관이 나타났습니다.

먼저 오늘 개관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현판 제막식을 하기 위해 내빈들이 현판 앞으로 올라왔습니다. 불심 도문 큰스님, 법륜스님, 유수스님, 그리고 강윤진 국가보훈부 차관, 김관영 전라북도 도지사, 최훈식 장수군수가 양편에 나눠 자리하자 400여 대중이 이 카운팅을 시작했습니다.

“하나, 둘, 셋!”
박수와 환호 속에서 ‘독립운동가 백용성조사기념관’이라는 현판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다음은 개관 커팅식을 진행했습니다. 내빈들이 많이 참석한 관계로 총 두 번에 걸쳐 커팅식을 했습니다. 첫 번째 커팅은 방금 현판 제막식을 한 귀빈들과 불교계 스님들, 종교계 원로, 그리고 사회 원로들을 모시고 진행했습니다.

“하나, 둘, 셋!”

두 번째 커팅은 각 관계기관장님 및 전북특별자치도, 그리고 장수군 의원님들, 마지막으로 기념관 건축에 힘써주신 건설 관계자분들과 함께 진행했습니다.
“하나, 둘, 셋!”

이상으로 독립운동가 백용성조사기념관 현판 제막식과 테이프 커팅식을 마치고, 이어서 바로 기념관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휠체어를 탄 불심도문 큰스님을 모시고 1층부터 2층까지 기념관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보았습니다.

1층 현관을 지나자 용성조사님 동상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이했습니다. 동상 하단에는 굵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백용성 조사, 기미년 1919년 3.1 독립운동의 막후 기둥이시며, 독립 선언 민족 대표 33인 중 불교 대표로 2년 2개월간 옥고를 치르신 불교계의 선지식”
동상의 양 옆으로는 강당과 카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용성조사님에 대한 세미나,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되기도 하고, 방문객들이 편하게 쉬었다가 갈 수도 있는 다목적 공간입니다.

2층으로 올라가자 가장 먼저 용성조사의 법명인 ‘진종’을 상징하는 범종이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서문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도문 큰스님은 직접 종을 치며 종송을 염했습니다.
“문종성 번뇌단 지혜장 보리생...”

범종을 지나자 용성조사님의 업적을 정리한 시청각 자료들이 펼쳐졌습니다. 입구에는 사진 한 장이 크게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법륜스님이 직접 사진을 가리키며 설명했습니다.

“1945년 12월 12일 백범 김구 선생과 임시 정부 요인 30여 명이 백용성 조사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 종로 대각사에 방문한 사진입니다. 여기 김구 선생님과 이시형 선생님이 보이네요.”
2017년 2월 26일 불교 신문에 이 사진이 실리게 되면서 100여 년간 전해 내려오던 백용성조사의 독립운동에 관한 증언과 임시 정부 수립에 기여한 구술 내용들, 도문스님이 찾아낸 조각난 기록들이 비로소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홀의 중앙에 들어서자 용성조사님의 일생을 표현한 영상이 상영되었습니다. 참석한 내빈들 모두 숨을 죽이고 조용히 영상을 감상했습니다.

영상이 끝나자 큰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이어서 전시관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습니다.
전시관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향해서>, <최후의 일각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 <오직 부처님, 바른 가르침>이라는 제목의 4개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유수 스님이 각각의 공간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 주었습니다.


마지막 구역에서는 독립운동의 기록자인 불심도문 큰스님을 인터뷰한 영상이 상영되었습니다. 나중에 큰스님이 돌아가시더라도 큰스님의 구술 자료를 영상으로 고스란히 남겨서 후대에 길이 전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입니다. 큰스님은 전시관을 모두 둘러보고 감사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다들 애쓰셨어요. 감사합니다.”
전시관 관람을 마친 후 다 함께 요사채로 향했습니다.

요사채에는 참석한 내빈들 50인 분의 점심 식사 상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정토회 대전충청 지부와 경남 지부에서 많은 봉사자들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불심도문 큰스님이 소심경을 외웠습니다.

“불생가비라 성도마갈다 설법바라나 입멸구시라.”
소심경이 끝나자 다 함께 식사를 하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국가보훈부 관계자들과 함께 한 상에 앉아 식사하며 그동안의 노고를 격려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내빈들은 모두 불심도문 큰스님을 찾아와 차례대로 인사를 한 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스님도 큰스님에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큰스님은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제가 법륜스님을 못 만났으면 용성조사님 유훈 실현은 물거품이 되었을 겁니다. 이렇게 뜻을 계승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유훈을 실현하기 위해 땅을 샀던 돈 중에 절반만 법륜스님을 지원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게 항상 미안합니다.”
스님은 큰스님이 오래도록 곁에 있어 주실 것을 당부했습니다.
“아닙니다. 큰스님께서 그때 땅을 사두셨기 때문에 지금 저희가 유훈 실현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천룡사 복원하는 것까지 꼭 보셔야 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3년은 더 수명을 연장해야겠네요.”
큰스님은 미소를 머금으며 합장으로 인사했습니다.

죽림정사를 떠나는 큰스님을 배웅한 후 스님은 서울에서 내려온 버스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막 출발하려는 버스에 올라타서 참석한 내빈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바쁘신데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행사였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저희가 감사했습니다.”
내빈들을 태운 버스가 서울로 출발하자 스님도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오후 2시에 장수 죽림정사를 출발하여 고속도로 위를 3시간 30분 동안 달렸습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해가 저물고 달이 떠올랐습니다.


오늘은 평화리더십아카데미 동문들이 모여서 해마다 송년회를 갖는 날입니다. 평화리더십아카데미는 2009년 9월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원장으로 모시고 첫 문을 열었고, 2016년까지 15기, 총 668명의 동문을 배출했습니다. 평화리더십아카데미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고자 마무리를 하게 되었지만 동문들은 <새로운 100년을 열어가는 통일의병>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한반도 평화 운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동문들은 매년 스님을 초청하여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주제로 강연을 듣고 일상 속에서 작은 실천을 이어 가고자 다짐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행사 장소인 관훈클럽 정신영기금회관에 도착하자 평화리더십아카데미 동문회 멤버들이 스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밤이 되자 서울에는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창밖으로 첫눈이 펑펑 내리는 가운데 친교와 만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만찬을 마치고 저녁 6시 30분부터 송년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먼저 동문회가 걸어온 길에 대한 경과보고와 더불어 동문들의 근황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특별한 축하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북한이탈주민으로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인 ‘미스트롯’에 출연하여 결선에 올라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김소연 님이 시간을 내어 찾아와 주었습니다.

김소연 님은 11살에 탈북하다가 잡혀서 감옥 생활을 한 이야기부터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인생 스토리를 잠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고향을 생각하며 ‘풍악을 울려라’, ‘오늘이 젊은 날’, ‘두만강’ 등 노래 세 곡을 애절하게 불러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다음은 법륜스님을 모시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큰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단상 앞에 자리한 스님이 먼저 평화리더십아카데미 동문들을 격려하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방금 탈북자 출신 가수 분이 애절한 노래를 부를 때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온 수많은 북한 난민들과 그들을 돕던 좋은벗들 활동가들이 중국 감옥에 갇혀 오랜 시간을 보낸 일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 남의 나라에서 고생하면서, ‘고향의 봄’ 같은 노래를 부르며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6.25 전쟁 이후에는 천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기면서, 추석 때만 되면 휴전선 가까이에 가서 북녘 땅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하곤 했습니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약 3만 5천 명의 북한 사람들이 남한으로 와서 살면서 또 다른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가 이들의 아픔을 자기 아픔처럼 느낀다면, 모든 문제에 우선해서 이 일을 해결하려 하겠지요. 그러나 자기가 겪어 보지 않은 일이면 그렇게 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미얀마에서 지진과 홍수가 발생했을 때 지원하면서 보니까, 그곳에서는 지진, 홍수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내전이었습니다. 물자를 보내 돕고 싶어도 군인들이 그 물자를 옮기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태국의 메솟, 치앙마이 같은 곳에는 미얀마에서 넘어온 난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고통도 매우 컸습니다. 하지만 북한 난민들이 중국에 넘어와서 겪는 고통에 비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죠. 왜냐하면 태국에서는 강제로 체포되어 자국으로 송환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난민촌을 돌아보면 어느 정도 보호를 받고 있긴 하지만 자유가 없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갇혀 살아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국가 지도자나 정치 지도자가 그들의 권력 투쟁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이 생기는 줄 알면, 권력을 잡으려고 싸우는 일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에 더 이상 이런 아픔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평화리더십아카데미, 여성리더십아카데미, 그리고 청년리더십아카데미를 만들었습니다. 평화리더십아카데미를 만들던 당시에는 중국이 점점 부상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앞으로 미국과 중국이 패권 경쟁을 하게 되면, 과거 미국과 소련이 패권 경쟁을 하던 때의 6.25 전쟁처럼 또다시 우리가 강대국의 하수인이 되어 남북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이 부상하기 전에 남북 문제를 해결하고, 과거의 전쟁을 청산하여 다시는 전쟁 없는 평화 체제를 구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통일을 이루어 두 번 다시 그런 불행을 겪지 않도록 평화재단은 열심히 연구와 교육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때보다도 상황이 더 나빠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절망적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왔습니다. 동학혁명 당시의 엄청난 학살, 일제 강점기의 고통, 6.25 전쟁의 아픔 뒤에 이어진 절대 빈곤, 그리고 군사 독재를 겪으면서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 하고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우리도 한번 자유롭게 살아 보자!’ 해서 투쟁하여 민주주의를 이루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기적’은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조선 말기보다 낫고, 일제 강점기보다 낫고, 6.25 전쟁 이후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 생각에 지금은 상황이 나쁘다기보다는, 우리가 너무 살기가 좋아서, 또는 너무 많이 배워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생겼고, 그 안주가 결국 체념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정세라는 것은 늘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변화를 위한 준비를 하면서 기회가 오면 순식간에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상황이 벌어지면 그제야 뛰어다니지, 미리 준비해서 기회를 포착하는 것은 어려워합니다. 현재 우리는 통일의병으로서 당장 할 일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나 기회가 온다면 그 기회를 포착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준비한 일이 1~2년 안에 일어나면 쓸 일이 생기는데, 늘 준비만 하면서 실제로는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으니 정신 상태가 해이해지고 준비가 흐지부지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년 같은 암울한 시기에도 장수 죽림정사에서 6.13 만인대법회를 개최하여 평화 통일과 국민 통합을 기원했습니다.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다행히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이들의 자충수가 오히려 평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천하의 운세를 예측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좋은 의도로 한 일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게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나쁜 의도로 일을 벌였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기독교 신자라면 이게 바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웃음)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보면, 우리가 평화 통일의 꿈과 희망을 쉽게 포기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남아 있습니다. 그 아픔을 우리가 해소하고 해방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여러분 모두가 각계각층에서 꾸준히 준비하는 자세로 임했으면 좋겠다는 당부 말씀을 드립니다. 어려운 가운데 오늘 이런 뜻깊은 자리를 마련해 주신 회장단께도 감사드립니다.”
이어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누구든지 손을 들고 궁금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다섯 명이 스님에게 고민을 말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사랑하는 언니를 잃은 뒤 삶의 의욕을 잃고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작년에 언니를 잃었습니다. 언니를 떠나보낸 후 실망감이 너무 커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고, ‘다시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여행도 다니고 시간을 보내면서 공허함을 많이 느꼈고, 집안 사정까지 겹쳐서 더욱 힘들었습니다. 문제는 지금 다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예전처럼 에너지가 올라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내가 절실함이 없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제가 올해 66세라서 ‘젊었을 때 너무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는 일을 안 하고 살아도 되지 않나?’ 하는 마음도 듭니다. 눈으로는 내가 필요한 곳이 보이는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스님, 해결 방법을 알려주세요.”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마음이 안 움직이면 안 하면 됩니다. 그게 무슨 큰일이에요? 10대 중학생도, 20대 대학생도, 40대 직장인도 아닌 66세잖아요. 이미 은퇴할 나이이고, 은퇴 이후에는 마음이 내키면 하고,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때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갈등이 아주 많습니다.”
“어떤 갈등인가요?”
“저 일은 분명히 제가 손을 보태야 제대로 성사되고 발전이 될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아, 이제는 안 보고 살래.’ 하고 돌아서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도 다시 보면 ‘저걸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이 회사 일에서도 자꾸 올라옵니다. 회사도 아들에게 많이 넘겨 주긴 했지만, 문득 언니도 그렇게 바쁘게 살다가 허망하게 떠났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그건 습관의 문제입니다. 안 보는 게 제일입니다. 눈에 보이면 자꾸 과거의 습관이 나오니까요. 그래서 아예 안 보는 게 상책입니다.”
“하고 싶은 마음과 안 하고 싶은 마음의 갈등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고 싶을 때 해 보고, 안 하고 싶을 때 안 해 보면 됩니다. 했다가 안 했다가 하다 보면 결국 교통정리가 돼요.”
“일은 한 번 시작하면 그렇게 했다가 안 했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서요.”

“일을 한 번 시작해서 그만두지 못하면 계속하면 됩니다. 그러다가 ‘너무 힘들어서 죽겠다.’ 싶으면 그만두면 되고요. 요점은 앉아서 생각을 만 번 해봐야 결론이 안 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누운 채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고 백 번을 각오한들 일어나지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일어나야지!’ 하는 각오와 결심은 누워 있을 때 하는 거예요. 아무리 각오하고 결심해도 그 사람은 아직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일어나 버리면 ‘일어나야지!’ 하는 각오와 결심은 필요가 없잖아요. 그저 일어나면 되는 겁니다. 질문자가 ‘이럴까? 저럴까?’ 하고 생각만 해봐야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그건 지금 안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에요. 그냥 해버리면 되는 거예요. 일에 한 번 손을 대서 쉽게 못 놓겠다면, 그냥 계속하면 되는 겁니다. 하다가 ‘아이고, 이러다 죽겠다.’ 싶은 순간이 오면 그때 그만두면 됩니다. 그만두고 나서 한동안 지내 보는 거예요. ‘일어나야지!’ 하지 말고 일어나야 한다는 거예요. 일어났는데 졸리면 다시 자도 돼요. 안 일어나고 계속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인생에서 늘 각오와 결심만 하면서 실제로 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니 그냥 하라는 거예요.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두면 됩니다. 내일 그냥 가서 일을 해보세요.”
“하기 싫은 마음이 너무 많아요.”
“그러면 안 하면 되죠. 질문자의 마음은 누워서 ‘일어나기 싫은데 어떻게 일어나요?’ 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럼 제가 ‘그냥 자세요.’라고 합니다. 내일 가서 일에 손을 한번 대보세요. 손을 대보면 ‘아, 이건 해서는 안 되겠구나.’라는 결론이 나거나 아니면 ‘하기를 잘했네’ 하고 계속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질문자는 평화리더십아카데미 동문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우리 평화리더십아카데미 동문회가 앞으로 내실이 탄탄해지고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좋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동문회가 잘 유지되는 것은 어디든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동문회는 특정 이념이나 이익을 중심으로 모인 단체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한 친목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모임에 참석해 서로 얼굴도 보고, 오늘처럼 좋은 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너무 활동 위주로만 가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기고, 반대로 활동적 요소가 전혀 없으면 그냥 친목 모임과 다를 바 없게 되니까요. 그래서 사회 발전을 위한 방향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정도의 활동은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주 정보를 교환하고 소통하는 흐름을 이어 가야 해요. 하지만 그런 활동을 평화재단 통일의병처럼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 가자고 하다 보니, 그 부분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빠지게 되고, 자연스럽게 나눠지게 된 것이지요.
사실 동문회가 있기 때문에 평화재단 통일의병을 따로 만들 필요 없이, 전체가 통일의병이 되거나, 아니면 전체가 동문회로 함께 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임 자체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무언가 해보자는 취지로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처럼 적절한 관계를 잘 유지한다면, 통일의병과 동문회가 굳이 분리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형식적으로는 조금 더 적극적인 분들이 있을 수 있지만, 동문회라는 틀 안에서는 충분히 화합하며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문회에서는 단순한 친목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회 진보를 향한 우리의 관심을 조금 더 높여 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의 간격을 좁히면서 조금씩 협력해 나가면 관계가 더욱 넓어지고 강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큰 박수와 함께 평화리더십아카데미 송년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오랜만에 모인 동문들은 기수별로, 그리고 다 함께 스님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행사장을 나가는 스님에게 모두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인사를 했습니다.
“바쁘신데 시간 내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스님!”
차를 타고 스님은 서울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

그사이 눈이 많이 내려서 도로 곳곳이 정체가 되었습니다. 밤 10시 30분이 되어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한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을 연달아 한 후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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