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11.11. 노스님들의 삼사 순례, 베트남 VCIL 청년 활동가들과의 대화
“스님의 젊은 시절과는 다른 시대, 저희 청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두북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뒤, 어제부터 함께 머물고 있는 원로 스님들과 아침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식사 후에는 함께 비구니 사찰 세 곳을 순례하는 삼사 순례를 떠나 보기로 했습니다.

깊어 가는 가을, 노스님들의 삼사 순례

도법 스님, 수경 스님, 지홍 스님 모두 이곳 근방에 있는 비구니 사찰들을 가본 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일정을 조정했습니다. 출발하는 차 안에서 도법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절에 살아도 절 구경은 거의 안 가 봤어요. 일이 없으면 다른 절에 갈 일이 없거든요.”

오전 8시에 두북수련원을 출발하여 가장 먼저 운문사로 향했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높은 산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이 산들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들이 영남 알프스입니다. 전부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들입니다.”

차로 1시간을 달려 운문사에 도착했습니다. 운문사의 가을 풍경은 고요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경내는 형형색색 단풍으로 물들었고, 사찰 전체를 따스한 빛이 감싸고 있었습니다.

고즈넉한 대웅전 앞뜰에서는 가을 햇살이 지붕의 곡선을 따라 은은하게 퍼지고, 법당 뒤로 펼쳐진 산자락은 노랑과 주홍빛으로 타오르듯 아름다웠습니다.

대웅전을 참배하고 있는데 운문사 율주 일진 스님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스님들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스님들이 한꺼번에 저희 절에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여기 스님들 중에 한 분이 운문사를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대요. 그래서 제가 함께 참배하려고 왔습니다. 갑자기 와서 미안해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경내를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승가대학 신일당 앞마당에는 은행나무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은행나무가 대단하네요.”

은행나무를 잠시 둘러본 후 강의 장소로 사용되는 선열당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일진 스님이 곳곳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여기는 강의가 열리는 곳입니다. 법륜스님이 여기서 학인 스님들을 위해 강의를 하신 적도 있습니다. 저희 운문사는 다실이 정말 예뻐요. 차 한잔 마시고 가시지요.”

선열당을 둘러보고 다실로 향했습니다. 다실에 들어가니 창밖으로 계곡의 가을 풍경이 보였습니다.

잠시 다실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차를 건네면서 일진 스님이 물었습니다.

“만나 뵙기 어려운 훌륭한 스님들께서 다들 어떻게 모이게 되신 거예요?”

도법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주류에서 밀려나 소외받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위로하다 보니 자주 만나게 되었어요.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일 년에 한두 번은 만나고 지내자 해서 모이고 있어요. 법륜스님이 농사짓는 곳이 두북수련원이에요. 거기서 모이기 때문에 두북 모임이라고 해요.”

자연스럽게 운문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갈수록 줄어드는 출가자 수에 대한 우려도 나누었습니다.

“지금 운문사에 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얼마나 돼요?”

“옛날에는 250명 정도가 살았는데 지금은 50명으로 줄었어요.”

각자 한 마디씩 하며 자유롭게 대화가 오갔습니다.

“불교만 출가자 수가 줄어드는 게 아니에요. 얼마 전에 신부님을 만났는데, 전라북도는 신부가 되겠다고 희망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수녀원에서 저를 초청해서 강연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세 명이 새로 수녀가 되겠다고 들어왔는데 모두 칠레, 베트남, 필리핀에서 온 외국인이었어요.”

“기성 종교의 시대는 끝났다고 많이들 얘기하잖아요. 그래서 이후 종교가 가야 할 길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들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스님이 일진 스님과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제가 일진 스님을 처음 뵌 것은 비구니 영화 상영 반대 사태 때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10.27 법난과 관련해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눈물을 흘리며 비구니 어른 스님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때 실무를 맡아 활동하던 세 분의 비구니 스님 중 한 분이 바로 일진 스님이었습니다. 당시 일진 스님은 동국대를 다니는 학생이었죠?”

“네, 맞습니다. 법륜스님이 뒤에서 많은 도움을 주셔서 제가 혈서도 쓰고, 발원문도 낭독하고 그랬습니다. 그때 법륜스님이 안 도와주었으면 그 일을 못했을 겁니다.”

혈기 왕성하던 젊은 시절에는 열정적으로 활동했었는데 이제는 70대 노인이 되어 반가운 얼굴로 다시 마주 앉았습니다. 옛 추억을 하나둘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운문사를 걸어 나왔습니다. 운문사를 나올 때 보이는 산자락의 풍경도 아주 멋있었습니다.

“산에 단풍이 물든 것 좀 보세요. 저 산 위에 운문사 사리암이 있습니다.”

친절하게 접대해 준 일진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일주문을 나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다시 차를 타고 석남사로 향했습니다. 이곳도 비구니 사찰입니다. 다시 고개를 넘어 차로 30분을 가자 석남사가 나왔습니다.


“여기도 경치가 아주 좋습니다. 한번 가 봅시다.”

계곡 옆으로 난 돌담길을 걸어 고즈넉한 석조 계단을 오르자 웅장한 삼층 석탑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삼층 석탑을 참배한 후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했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이 사시 기도를 하고 있어서 조용히 참배만 하고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스님들이 오신 것을 뒤늦게 알고 주지 스님이 황급히 나와 인사를 했습니다.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식사라도 준비해 놓았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잠깐 참배하려고 왔어요.”

식사를 준비할 테니 점심을 먹고 가라는 요청을 겨우 거절하고 석남사를 나왔습니다. 계곡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나뭇잎이 조용히 떨어졌습니다. 산길을 내려오며, 고요한 풍경 속에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오전 11시가 되어 스님들은 내원사로 향했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조계종 포교원장을 역임한 지홍 스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오늘 내원사에 처음 가 봅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지홍 스님이 아직 내원사를 한 번도 못 가 봤다니, 앞으로 남들한테 조계종 포교원장 했었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웃음)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차는 내원사 계곡에 접어들었습니다. 산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계곡 길은 단풍으로 붉게 물들어서 절로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내원사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대웅전을 참배했습니다. 불단 위에 조성된 지붕 모양의 장식 구조물인 닫집이 아주 수려했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스님이 말했습니다.

“부처님은 나무 밑에서 주무셨는데, 불상 위에 화려한 닫집을 만드는 문화는 어디에서 유래한 걸까요?”

대웅전을 나오자 어린이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내원사에서 어린이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사가 사진을 같이 찍고 싶어해서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갑자기 스님들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내원사 주지 스님도 황급히 인사를 나왔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차 한잔하고 가셔요.”

주지 스님과 인사를 나눈 후 함께 다실로 향했습니다.

다실이 아담하고 예뻤습니다. 주지 스님이 발효된 솔차를 정성껏 내주셔서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습니다.

“지율 스님이 이곳 천성산을 살리려고 단식을 백일 했잖아요. 저는 그때 지율 스님을 살려 보려고 이곳을 몇 번 찾아온 적이 있어요. 도법 스님은 얼마 만에 여기 와보신 거예요?”

“저는 30년 전에 와 보고 그때 이후 처음입니다.”

스님들은 주지 스님에게 내원사와 산내 암자들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물었고, 주지 스님은 자세히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선방에서는 몇 분이 정진하시나요?”

“옛날에는 50명이 수행하는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15명 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자꾸 스님들 수가 줄어들면 재가자 선원으로 전환해야 하는 걸까요?”

“내원사는 큰스님들이 많이 와서 정진했던 유서 깊은 곳이어서 아직은 많은 스님들이 정진하고 싶어 하는 곳 중의 하나입니다.”

차담을 마치고 서둘러 내원사를 나왔습니다. 주지 스님이 갑자기 찾아온 스님들께 식사비를 건네려고 하는 것을 겨우 뿌리치고 차에 올라탔습니다.

내원사 계곡을 내려오는 길에 스님이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내원사는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대신사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 수도한 곳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수도를 한 후 경주 용담정으로 가서 도를 깨쳤다고 해요.”

계곡이 정말 깊었습니다. 다시 두북수련원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스님들이 모두 만족해하며 말했습니다.

“덕분에 삼사 순례를 아주 잘했습니다. 법륜스님 덕분에 차도 얻어 마셨네요. 우리 같은 노승이 오면 누가 차를 주겠소.”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모두 원로 스님들 덕분에 저희가 환대를 받은 거죠. 점심은 제가 국수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오후 1시에 두북수련원으로 다시 돌아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대화를 더 나누다가 오후 2시 30분에 두북수련원을 출발하여 스님들을 경주역까지 배웅해 주었습니다.

지홍 스님을 먼저 경주역에 내려 드린 후 수경 스님과는 무열왕릉 주변을 더 둘러보았습니다. 오후 4시에 수경 스님을 경주역에 내려드린 후 다시 두북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6시 30분부터는 베트남에서 온 청년 단체 VCIL(Vietnam Community of Integral Living)이 주최하여 정토회를 견학하러 온 청년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베트남 청년들은 ‘대한민국, 기적 같은 발전에서 지속 가능한 대안으로’라는 주제로 14일 동안 대한민국의 빛과 그늘을 살펴보기 위한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9일 동안은 경복궁,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비무장 지대, 실상사 등 여러 곳을 방문하고, 오늘부터 4일 동안은 두북수련원에 머물며 정토회를 견학하기로 했습니다.

베트남 청년들이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웃으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한국이나 불교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질문부터 해주세요. 질문에 답을 드린 뒤, 제가 덧붙일 이야기도 있으면 더 하겠습니다.”

베트남 청년들은 망설임 없이 질문을 시작했습니다.

법륜스님이 떠난 후, 정토회는 어떻게 이어질까요?

“법륜스님께서 정토회에 큰 역할을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토회는 스님과 함께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스님이 떠나신 뒤,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이 정토회를 어떻게 운영하도록 할 계획인지 궁금합니다.”

“질문은 결국 ‘정토회의 활동이 후대에도 계속 계승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죠. 이러한 질문에 대해 대부분은 ‘누가 법륜스님을 대신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치 다음 왕이나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를 고민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에요. 하지만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리더십과는 다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데바닷타입니다. 부처님께서 연로해지시자, 데바닷타는 ‘부처님께서는 이제 쉬십시오. 제가 뒤를 이어 그 역할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들에게는 특별한 지도자가 따로 필요 없다. 수행자들은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수행자들의 모임인 승가가 그 역할을 대신할 것이다.’

즉, 부처님이 없는 사회에서 리더십은 특정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승가 전체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는 의미입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말은 부처님과 그 가르침, 그리고 수행 공동체인 승가에 귀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중에서도 승가에 귀의하는 이유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부처님의 역할을 승가가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정토회 역시 승가를 구성하고 있으며,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와 운영 방식은 앞으로 다음 세대에서도 지속 가능한 리더십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토회는 특정 개인에게 리더십이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운영을 통해 조직 전체가 리더십을 갖게 되는 형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정토회는 승가 공동체로서의 리더십 체계를 면밀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토회는 제가 창립했고 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제가 죽고 난 뒤 정토회가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잘못된 관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치 부처님이 열반하시면 불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오히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승가에 의해 더 널리 퍼졌습니다. 정토회의 활동 역시 이와 같이 계승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청년은 눈시울을 붉히며 할머니를 걱정하는 마음을 꺼내 놓았습니다.

남편과 자식, 손자까지 잃은 할머니, 그 고통을 덜어드릴 수 있을까요?

“저희 할머니는 올해 80세입니다. 살아오시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남편과도 사별하셨고, 아들도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손자도 몇 년 전에 죽었습니다. 할머니는 아직 그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살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면 할머니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인생을 살아 보면 우리가 원하는 일이 다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여 그것에 집착합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로워하죠. 하지만 아무리 집착해도 원하는 일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 괴로워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만두거나, 필요하다면 다시 시도해 볼 수도 있어요. 그러나 괴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원하는 것도 다 해줄 수는 없습니다. 해줄 수 있는 것도 있고, 해줄 수 없는 것도 있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원하는 걸 다 해줘야 한다고 집착하면, 해주지 못할 때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왜 괴로우실까요? 할머니는 남편이 돌아가시는 것도, 자식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손자가 죽는 것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에 괴로우신 거예요. 잘 살펴보면, 질문자와 할머니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똑같습니다. 질문자 역시 괴로워하는 할머니를 도와줄 수 없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잖아요. 질문자는 ‘할머니가 남편과 아들과 손자를 잃었더라도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랍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괴로워하더라도 나는 괴롭지 않아야 합니다. 할머니가 괴로워한다고 해서 질문자까지 같이 괴로워하는 것은 자비심도 아니고, 수행도 아닙니다. 단지 어리석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할머니가 어리석듯, 질문자도 어리석은 겁니다.

남편이 돌아가실 때, 할머니가 남편을 살릴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저 장례를 치르고, 남편은 떠났지만 본인은 다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아들을 살릴 수 있었다면 물론 살리는 게 좋았겠죠. 하지만 아들이 죽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면, 그때 할 수 있는 일은 장례를 치러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할머니가 괴로운 이유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괴로움입니다. 마찬가지로, 질문자 역시 할머니의 괴로움을 대신 바꿔줄 수는 없습니다. 할머니는 남편도, 자식도, 손자도 잃으셨으니 슬픔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금 질문자도 어리석어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문제의 핵심은 할머니가 아니라, 질문자 자신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럼 질문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할머니를 괴롭지 않게 만드는 것은 질문자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치 할머니가 죽은 아들을 살릴 수 없는 것처럼, 질문자도 괴로워하는 할머니를 바꿀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질문자는 지금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안 되니까 괴로운 겁니다. 그러니 할 수 없는 일에 집착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걸 하세요. 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리거나, 함께 식사하며 위로해 드리거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하면 됩니다.
결국 이 문제는 할머니의 문제가 아니라, 질문자 자신의 문제입니다. 할머니가 아무리 힘들어하셔도, 질문자가 그 모습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오히려 할머니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도 하지 못하면서, 할머니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 정토회는 어떻게 해서 왜 시작되었나요? 목표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나요?

  • 인생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는데, 그 균형을 어떻게 찾아가나요?

  • 실상사를 가봤는데, 거기도 시골에 사는 젊은이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부탄도 마찬가지라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있을까요?

  • 저는 예민한 사람인데 어떻게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사회 참여 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 대학을 가지 않아서 4년의 시간이 주어졌는데, 운명적인 직업을 어떻게 찾을 수 있나요?

  • 한반도 분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 발우 공양을 배워보니 매우 복잡했습니다. 복잡한 의식을 하며 밥을 먹는 이유가 있나요?

대화가 끝날 무렵 마지막 질문자가 손을 번쩍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의 젊은 시절과는 다른 시대, 저희 청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법륜스님께서는 젊을 때 출가하셨는데, 저희 세대는 스님이 젊으셨던 시절과는 또 다른 과제와 사회적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저희처럼 사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해주실 조언이나 메시지가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문제의식을 느꼈다면, 바로 그때가 시작입니다. 나이가 몇 살인지 따지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어제와 오늘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낸 원로 스님들도 모두 사회의식을 갖고 계신 분들인데, 그분들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마흔이 넘어서였습니다. 승려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사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보며 ‘왜 저러지?’ 하고 의아해했다고 해요. 그런데 지금은 저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회 문제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나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자각한 그 순간이 바로 시작점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은 저와 비교하면 젊지만, 저는 여러분이 결코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열다섯, 열여섯 정도라면 어리다고 할 수 있지만, 스무 살이 넘으면 이미 성인입니다. 성인이 된 이후부터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아요. 문제는 여러분이 아직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리다기보다 제가 늙은 거예요. (웃음)

역사를 보면,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행동에 나선 사람들 대부분이 열여섯에서 스무 살 사이였습니다. 스무 살이면 이미 성인이에요. 예전에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왕이 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만큼 스무 살이면 나라를 다스릴 수도 있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나는 아직 어리다.’고 생각합니까? 그냥 성인으로 여기면 됩니다.

사자를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쉬워요. 사자가 세 살이면 성체가 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일단 다 자라고 나면, 세 살이든 여섯 살이든 그냥 사자일 뿐입니다. 새끼일 때만 ‘어린 사자’라고 하지, 성체가 되고 나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자라면 그냥 개인 거죠. 성체가 되기 전까지만 ‘어리다’는 말을 쓰는 겁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이제는 ‘나는 어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어른은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책임을 지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언제 시작해야 한다는 정해진 시점은 없어요. 스스로 자각하는 순간, 바로 그때가 시작입니다.

한국까지 와서 공부하겠다는 여러분의 열의가 정말 대단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 청년들보다 여러분의 눈빛이 훨씬 더 반짝여요. 환경이 좋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너무 열악하면 곤란하겠지만, 지금 베트남의 환경은 오히려 청년들이 도전하기에 적절할 수 있어요. 한국의 1980년대와 비슷하거든요. 그 시절, 학생 운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지금의 한국 사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대학을 포기하고 노동 현장에 들어가 노동 운동을 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농촌으로 가서 농민 운동을, 빈민촌에서 빈민 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쌓은 용기와 도전, 경험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리더십이 된 겁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 사회의 리더십은 다소 고령화되어 있지만, 그들의 경험을 젊은 세대가 쉽게 대체하기는 어렵습니다. 20대 때부터 사회적 책임을 지고 치열하게 도전해 왔기 때문에, 다음 세대가 단순히 나이를 기준으로 이어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현재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하나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베트남이나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시절,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독립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30대에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고, 지금 80대가 되어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가 그들을 대체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 스스로를 ‘어리다’고 생각하지 말고, 세상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지세요. 저희 어머니는 열여덟 살에 시집가서, 스물다섯에는 네 아이의 엄마가 되셨습니다. 네 아이를 둔 엄마를 보고 ‘어리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어른의 역할을 하면 어른인 겁니다. 반대로, 나이가 들었더라도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다면,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입니다. 스무 살이 넘으면 이미 성인입니다. 어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실천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세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베트남 청년들은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삼배를 드렸습니다.

베트남 청년들은 스님에게 베트남에서 직접 생산해 온 쌀, 소금, 커피 등 갖가지 선물을 건넸습니다. 한 청년이 수줍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제가 스님에게 선물을 드리는 게 아니에요. 스님께서 제 선물을 받아주시는 게 저에게 선물입니다.”

스님도 베트남 청년들에게 베트남어로 번역한 희망편지 책과 용돈을 선물했습니다.

선물을 주고받은 후 오늘이 베트남 청년들과 함께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간이어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은 남은 기간 동안 많이 배우고 가라고 격려한 뒤, 베트남 청년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3시에 두북수련원을 출발해 서울로 이동합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수행법회를 열고, 오후에는 평화재단에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을 한 뒤, 인도 정토회 임시 이사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할 예정입니다. 이어서 외교 안보 전문가들과도 미팅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전체댓글 7

0/200

구자정

고맙습니다.

2025-11-14 07:29:41

최영관

고맙습니다...

2025-11-14 07:06:30

정태식

“물론 정토회는 제가 창립했고 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제가 죽고 난 뒤 정토회가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잘못된 관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치 부처님이 열반하시면 불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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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법륜스님의 사후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다소간 마음이 놓입니다.

2025-11-14 06:5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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