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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두북 정토수련원 근처 13개 마을에 살고 계신 어르신들을 모시고 가을 나들이를 하는 날입니다.
두북수련원에서는 지난 21년 동안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의 집을 방문해서 청소도 해드리고, 반찬도 만들어 드리고, 말동무도 해드리는 봉사 활동을 해왔습니다. 매년 이 지역 어르신들을 모시고 봄과 가을에 어르신 잔치도 하고 있습니다.

마을 이장의 방송이 마을에 울려 퍼졌습니다.
“아. 아. 아아. 오늘은 법륜스님과 함께하는 마을 어르신 잔칫날입니다. 날씨가 쌀쌀하니까 옷 따뜻하게 입고 나오세요.”

정토회 부산울산지부에서 30여 명의 봉사자들이 마을마다 찾아가서 어르신들을 모셔 왔습니다. 어르신 중에는 자전거나 전동차를 끌고 오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은 환한 미소로 어르신들을 맞이했습니다.
“어르신, 잘 지내셨습니까?”


두북수련원 운동장에 세워진 대형버스 3대에 어르신들을 모두 태우고 운문사로 출발했습니다. 버스로 한 시간을 이동하여 9시에 운문사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어르신들보다 한 시간 일찍 운문사에 도착하여 주지를 맡고 있는 은광 스님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차담을 하는 사이 어르신들을 태운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어르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둘러 일주문으로 향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어르신들은 지팡이를 짚고, 봉사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주문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어르신들을 맞이했습니다.

“어서 오세요. 잘 지내셨어요?”
“우리는 형제자매들이 다 같이 왔습니다.”
“얼굴이 딱 닮았네요.”
“다들 오신다고 수고하셨어요!”

어르신들을 모시고 다 함께 대웅전으로 향했습니다.


모든 어르신들이 부처님께 참배하고 자리에 앉자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오늘 날씨가 많이 추워졌죠?”
“네.”
“가을이 오기 전에 겨울이 먼저 다가온 듯합니다. 올해는 태풍이 없어서 풍년이 될 거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정작 가을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추수도 못하고 있지요. 벼에 싹이 나버리면 방아 찧을 때 싸라기가 많이 나와서 소출이 줄어들 텐데,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하는 일인데 우리가 어떡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하루는 근심 걱정 모두 내려놓으시고 나들이라도 한번 하자고 일정을 잡았습니다. 원래는 봄에 한 번 멀리 나들이를 가고, 가을에는 해가 짧으니 가까운 곳에 함께 가려고 했는데, 제가 봄에 ‘백일법문’이라고 해서 하루도 쉬지 않고 백일 동안 매일 법문을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느라 3월부터 6월까지 꼼짝을 못 했어요. 그러다 보니 봄에 노인 잔치를 열지 못해서 가을인 지금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날이 짧아서 멀리는 못 가고 가까운 운문사에 왔습니다. 운문사에 와보신 지 오래되셨습니까?”
“네.”

“다행입니다. 작년에도 오셨다고 하시면 어쩌나 싶었는데요. 여기는 어르신들이 다니기에 참 좋습니다. 보통 사찰들은 경사가 가파른 데 있는데, 이곳은 평지라서 걸어 다니기 좋습니다. 여기가 비구니 스님들만 계시는 절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여자 스님들의 절 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이에요.
오늘 이렇게 부처님 전에 왔으니 절 한번 올립시다. 화광 법사님이 축원 기도를 해주시고 나서 그다음에 절을 한 바퀴를 쭉 둘러보겠습니다. 지금 이 절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설명해 봐야 귀에 잘 들어오지 않으실 겁니다. 우선 한 바퀴 둘러보면서 사진도 좀 찍으시기 바랍니다. 절 구경을 마치면 의자에 앉아서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혹시 살면서 힘드신 게 있으시면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웃음)
그럼 절에 왔으니 기도 한번 하겠습니다. 살아서는 건강하고, 죽을 때는 편안하고, 죽은 뒤의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곳이 있다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자식들 모두 아무 탈 없이 잘 되기를 바라는 기원을 잠시 하고 가겠습니다.”
이어서 화광 법사님이 삼귀의, 반야심경, 관음정근을 한 후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어르신들도 두 손을 모으고 정성스럽게 기도를 함께 했습니다.
“오늘 참여하신 모든 어르신들 건강하시고, 가정이 평화롭기를 발원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어르신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다리가 아파서 서서 찍을 수 없는 분이 많아 계단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운문사!”

이어서 운문사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인 스님이 운문사에 대해 자세하게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저희 운문사는 신라시대 때 처음 지어졌습니다. 당시 운문산을 중심으로 생긴 '오갑사' 중 하나인 대작갑사가 운문사의 유래입니다. 역사가 아주 깊은 사찰입니다. 경내를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다 같이 일어서서 이동해 볼까요?”
만세루를 돌아 비로전, 오백전, 관음전, 청풍료 등 다양한 전각을 둘러보고, 경내에 있는 9개의 보물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

어르신들은 삼삼오오 사진도 찍고 물맛도 본 후 함께 즉문즉설 강연이 열리는 선열당으로 향했습니다.

어르신들이 사찰 순례를 하는 동안 스님은 운문사 학인 스님들과 잠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학인 스님들이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가볍게 한말씀해 주었습니다.

“더우면 옷 하나 더 벗고, 그래도 더우면 물에 들어가면 되고, 그래도 더우면 땀 흘리면 됩니다. 추우면 옷 하나 더 입고, 그래도 추우면 난로 하나 더 피우면 되고, 그래도 추우면 떨면 되잖아요. 그런 것처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냥 여름에 더운 날이 있고, 겨울에 추운 날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수행자는 특별히 극복해야 할 게 없어요. 그때그때 주어지는 상황에 대응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다가 병이 들면 아픈 것이고, 때가 되면 죽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너무 사는 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모두 깨닫기 위해 목숨을 걸고 들어왔어요? 깨달음이란 특별한 게 아니라 일상에서 자신의 상태를 늘 알아차리고, 상황에 맞게 대응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무유정법’이고, 소승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강원 생활에 대해 힘들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밥할 때가 되면 밥하고, 일할 때가 되면 일하고, 참선할 때가 되면 참선하고, 예불할 때가 되면 예불하면 됩니다. 이게 다 살아 있으니까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어요? 죽으면 이런 일도 못해요. 아픈 것도 다 살아 있으니까 아픈 겁니다. 그러니 일상을 수행으로 받아들이고 지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학인 스님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후 스님도 선열당으로 향했습니다.


선열당에 150여 명의 어르신들이 자리하자 스님이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시죠? 옛날에는 노인 잔치를 하면 전부 저희 부모님 세대이거나 큰 형님 세대였는데, 이제는 저와 비슷한 연배의 분들이 많이 오시네요. 어떻게 된 거예요? 저보다 젊은 사람은 여기 오면 안 되는데요. 방금 전에 제 친구에게 ‘이제 영감 다 됐다!’라고 하니까 ‘내 나이가 몇 살인데!’ 하더라고요. 세월이 이렇게 빠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웃음)

오늘 이 자리에서는 여러분이 스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자식에 대해서든, 영감에 대해서든, 세상일에 대한 것이든 모두 괜찮습니다. 만약 특별히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바로 경주로 가서 식사하고 춤추고 노래하며 즐겁게 놀다 가겠습니다. 누구든지 손들고 스님에게 하소연할 것이 있으면 한번 해 보세요.
방금 법당에서 건강하게 사는 데까지 살다가, 죽을 때 곱게 죽고, 죽은 뒤에 좋은 곳에 가게 해 달라고 기원했으니, 나머지는 부처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겁니다. 살아 있는 동안 고민거리가 있으시면 지금 한번 말씀해 보세요.”
이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누구든지 손을 들고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르신들이 손을 들기 전에 운문사 승가대학장을 맡고 있는 일진 스님이 손을 번쩍 들고 먼저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의 일상이 늘 그러신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오늘 이렇게 특별히 많은 어르신들을 모시고 운문사에 오셨습니다. 귀한 발걸음을 하셨는데, 스님께서는 왜 이렇게 많은 어르신들을 모시고 다니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두북 초등학교가 있는 고향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중학교 때부터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절에 들어가는 바람에 거의 고향에 오지 않고 살았는데요. 그로부터 한 30년 가까이 지난 뒤에 제가 <아침마당>이라는 방송에 출연했는데, 그것을 보고 초등학교 여자 동창들이 ‘저 스님은 우리가 아는 사람 아닌가?’ 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맞다, 아니다 하다가, 제가 이가 툭 튀어나왔는데 ‘저 이빨 봐라, 맞다!’ 하고 알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가 튀어나오면 사람을 찾기가 굉장히 좋은 점도 있어요. 그래서 동창들이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저의 속명으로 물어보니 거기서는 알 턱이 없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 아니라고 얘기했나 봅니다. 방송이 끝나고 나오는데, 담당자가 ‘이런 이름으로 전화가 왔는데 맞느냐?’고 물어서 제가 맞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친구들과 다시 연결이 되었고, 동창회에 오라고 해서 한 번 가기도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고향에 내려와 보니 제가 나온 두북 초등학교가 폐교가 되어 잡초만 무성했습니다. 폐교된 학교를 살릴 방법에 대해 얘기하다가 노인 분들에게 필요한 시설을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그것이 20년 전이었습니다. 폐교된 학교 건물을 임차해서 게이트볼장도 만들고, 목욕탕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판단을 좀 잘 못했던 것 같아요. 옛날 생각에, ‘집에 목욕탕이 없으니 학교 교실 하나를 목욕탕으로 바꾸면 어르신들이 자주 오시지 않을까?’, ‘게이트볼장을 만들어 놓으면 자연스럽게 모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만들어 놓고 보니, 여기가 울산광역시가 된 뒤로는 면사무소 근처에 게이트볼장이 아주 잘 갖춰져 있어서 어르신들이 거기로 가셨어요. 목욕도 버스를 대절해서 온천으로 다니시는 겁니다. 그래서 학교에 마련해 놓은 시설이 아무 필요가 없어졌어요. 세상이 달라지는 만큼 소비 수준도 그만큼 바뀐 것인데, 제가 절에서 살다 보니 세상 물정을 잘 몰랐던 겁니다.
그 당시 저희 아버님이 시골에 사셨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지만요. 저희는 형제가 여섯 명입니다. 저는 당연히 ‘내가 출가를 했으니 집안은 돌보지 못한다.’라고 생각했는데, 미국에 사는 형은 미국에 있기 때문에 아버님을 못 돌보고, 다른 형제들도 다 돌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는 정당한 이유가 있지만 당신들은 돌봐야 하지 않냐?’라고 생각했지만, 사정을 들어 보니 저나 형제들이나 모두 시골에서 혼자 사는 아버님을 돌보기가 어려운 상황인 겁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이것이 일종의 복지 사각지대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시골에 땅도 있고 집도 있고 자식도 있는데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많이 있는 겁니다. 재산이 있고 자식도 있으니 정부의 지원 대상이 안 되는 거예요. 제가 주로 밖에 살다 보니 이런 사정을 잘 몰랐습니다. 시골에 내려와 가까이에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되면서 어르신들께 청소도 해드리고 반찬도 갖다 드리고 하다가, 이렇게 나들이도 함께 가자고 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노인 잔치를 시작할 당시에는 제 초등학교 친구들의 부모님이 대부분 살아 계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 그 집에 가서 밥 한 끼를 얻어먹었든 떡을 하나 얻어먹었든 다 신세진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제 가족을 넘어서서, 제가 어릴 때 이분들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일 년에 한 번씩은 나들이라도 같이 가고 이야기도 좀 들어 보자 싶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봄에는 나들이를 가고 가을에는 노인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절에 가서 축원도 해드리고, 사찰 구경도 시켜 드리고, 밥도 먹고 장구 치면서 놀고, 이런 시간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함께 계셨던 분들이 지금은 거의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요즘은 일 년에도 몇 분씩 돌아가시거든요.
이제는 제 친구도 이 자리에 낄 정도가 되었습니다. 나이가 73세이니 이제 노인 잔치에 올 정도가 된 것이죠. 방금 보니까 제 후배도 왔더라고요. 이렇게 다 같이 늙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웃음)

노인 잔치를 하면서 어르신들과 대화를 해보니 늙어가는 부모들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병이 안 났으면 좋겠다.’, ‘자는 듯이 죽고 싶다.’ 이런 소원들이 많고, 자식들 걱정도 많이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고민들에 대해 상담을 좀 해드리곤 하는데, 그동안 법문을 많이 들어서 질문할 게 없어지셨는지 선뜻 질문을 안 하시네요. 이렇게 해서 지난 20년간 노인 잔치를 해왔습니다.”
대화하는 분위기가 조금 무르익자 어르신들도 손을 들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분은 요즘 추세가 추석에 거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데 점점 제사가 사라지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경주 최 씨 문중에 시집온 지가 꽤 되었습니다. 요즘 추세가 추석에 거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데요. 점점 제사가 없어지고 있는 이런 추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제사를 안 지내면 불효일까요? 조상에 대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는 조선조 오백 년 동안 유교 문화가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유교에서는 충효 사상을 가장 강조합니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지요. 그래서 죽은 조상을 섬기는 제사를 지내고, 살아 있는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전통문화였습니다. 이백 년 전에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신 이외에는 섬기지 말고, 무릎도 꿇지 마라!’ 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유교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으로 태어나 조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짐승보다도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천주교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고 죽기도 했습니다. 유교에서는 그만큼 제사를 중요시했어요. 제사의 핵심은 효 사상입니다. 부모와 조상을 잘 섬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유교 문화는 점점 옅어지게 되었습니다. 부모 세대들은 전통적인 문화에 익숙하여 제사를 꼭 지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젊은 세대는 제사 지내는 데 굉장히 부담을 느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사는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이 승복도 생활하기에 불편합니다. 요즘은 다 편하게 옷을 입잖아요. 저는 제가 죽고 난 뒤에까지 스님들이 꼭 저처럼 이렇게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게 전통이잖아요. 저는 선조들이 해 오신 대로 살다가 죽을 생각입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죠. 요즘 젊은 세대 스님 중에는 승복을 입지 않고 점퍼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의 변화이지만, 그래도 저까지는 전통문화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후손들에게 ‘너희도 꼭 지켜라.’ 하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지키면 좋지만, 강요할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문화라는 것은 계속 바뀌기 때문이에요.

최근에 전 세계적으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면 등장인물이 한국의 전통적인 갓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이렇게 우리 전통문화는 버리기보다는 잘 살려 나가는 게 좋습니다. 한국의 사찰 건물도 요즘 해외 젊은이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종교가 아닌 문화로서 인기를 끄는 겁니다. 절에 와서 하루 지내 보고, 절 음식도 한번 먹어 보고, 명상도 해 보고 싶어합니다. 저는 이렇게 전통문화를 지키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불효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족과 의논을 한번 해 보세요. 의논을 할 때도 ‘내가 살아있을 때까지는 제사를 지내겠다. 엄마나 아빠 생각으로는 너희들도 지냈으면 좋겠다.’ 이렇게만 이야기해야지,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강요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종교가 무엇이든 관계없이, 꼭 조상의 영혼이 있어서가 아니라 한국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제는 절을 지을 때도 전통적인 방식만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서울에 절을 지었는데요. 서울 땅값이 엄청나게 비싸지 않습니까. 땅을 조금밖에 못 사서 용도에 맞게 건물을 지으려고 하니까 15층짜리 빌딩을 지어야 했습니다. 물론 내부는 전통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꾸미고, 그 안에 법당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을 수 없는 상황인데 전통적으로 지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시대의 변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고, 전통도 어느 정도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살아 있을 때는 지킨다.’ 하는 입장을 갖고 있지만, 가능하면 전통을 지키도록 권유는 하되 그들의 자유에 맡기는 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사를 지내지 마라!’ 하고 자식들에게 말하고 싶으세요? 아니면 ‘제사는 꼭 지내야 한다.’ 하고 말하고 싶으세요?”
제사 이야기가 나오자 다른 어르신들이 손을 들고 제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편안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저희는 제사를 조금 편리하게 지내려고 할머니, 할아버지 제사를 같이 지내고, 어머니 제사도 아버지 제사 때 같이 지냅니다. 지방(紙榜)을 쓸 때도 두 분의 이름을 같이 올립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스님이 웃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네. 자기 좋을 대로 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제사 장소를 옮기거나 시간을 옮기거나 하면 안 되지 않느냐고 염려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약속해 놓고 ‘우리 둘만 알자.’ 했는데 제삼자가 딱 그 자리에 나타나면 뭐라고 합니까? ‘귀신같이 알고 왔네.’ 이러죠? 그 말의 의미는 귀신은 뭐든지 다 안다는 것입니다. 모르면 귀신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귀신이 제사 날짜 바꾼 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장소를 바꾸면 알까요? 모를까요? 다 귀신같이 알고 찾아옵니다. 그러니 ‘장소를 바꾸었다.’, ‘날짜를 바꾸었다.’ 하면서 너무 난리 칠 일은 아닙니다.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윤리를 엄청나게 강조하는 유교에서도 80세가 넘으면 예의를 안 갖춰도 된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옛날에는 80세까지 산 사람이 별로 없어서 80세가 넘으면 이미 귀신에 들어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0세가 넘으면 예의범절 같은 것을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앉으라고 해도 서 있고, 서 있으라고 해도 앉고, 먹지 말라고 해도 먹고, 그래도 괜찮습니다. 80세가 넘으면 자기 좋을 대로 살면 됩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계신 분 중 절반은 80세가 넘으신 것 같네요. 80세라는 기준을 좀 올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추석은 천지의 은혜와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한 해를 맞는 설에는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새해를 무사히 잘 지내게 해 달라고 정초 기도를 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입니다. 저는 우리의 문화를 잘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로 자녀들이나 형제간에 싸움이 생긴다면, 전통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보다는 싸우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제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스님이 대화를 마무리하며 운문사 스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운문사 스님들께서 이렇게 스님들만 들어오는 공간에 저희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루 스님이 되셨어요. (웃음) 좋은 공간에 들어오게 해 주셨으니, 감사의 박수 한번 부탁드립니다.”

선열당을 나와 다 함께 주차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운문사에서 이번에 어르신들 모두에게 다포(茶布), 손수건, 단주를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해 주었습니다. 스님은 어르신들을 정성껏 맞이해 준 주지 스님, 강주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운문사를 나왔습니다.

다시 버스에 올라탄 어르신들은 점심 식사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오후에는 경주 시내에 있는 뷔페 식당에서 갖가지 음식을 차려 놓고 어르신들이 여흥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스님은 어르신들보다 일찍 식당에 도착하여 음식 준비 상태를 점검했습니다. 곧 어르신들이 도착해 식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봉사자들은 부지런히 음료와 부족한 음식을 나르며 어르신들이 맛있게 점심을 드실 수 있도록 대접했습니다.

어르신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자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식사 잘하셨습니까?”
“예!”
“음식이 맛있었어요?”
“예!”
“음식을 푸짐하게 차렸으니까 안주로 삼아서 술도 한잔 드시면서 지금부터는 마음껏 노시기 바랍니다. 체면 같은 거 따지지 마시고 신나게 노세요.”

이어서 노인회 회장이 어르신들을 대표해서 한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정토회에서 매년 노인 잔치를 열어 주셨는데, 올해로 21년은 되었지 싶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나이 많은 사람들을 챙겨 주시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다 같이 큰 박수 한 번 쳐주십시오. 좋은 음식 많이 잡수시고 잘 놀고 가십시오.”
다음은 활천리 마을 이장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이조댁 둘째 아들입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노인 잔치를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각 마을에서 어르신들이 많이 참석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오늘 나들이는 일상생활에서 잠시 벗어나서 부처님의 가르침도 되새겨 보고, 법륜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마음도 정화해서 행복한 시간을 갖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큰 박수와 함께 사회를 맡은 이태기 님이 등장하여 인사를 했습니다.

“여러분, 즐길 준비되셨나요?”
“예!”
술을 한 잔씩 걸친 어르신들은 크게 환호하며 기뻐했습니다. 흥을 돋우기 위해 부산울산지부에서 짤짤이팀을 결성하여 반짝이 옷을 입고 무대 앞으로 뛰어나왔습니다.
먼저 이수진 님이 보릿고개 노래를 애절하게 불러서 노래 자랑의 열기를 한껏 띄워 주었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노래 신청을 한 어르신들부터 앞으로 나와 노래를 한 곡씩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신나는 노래가 나오기 시작하자 어르신들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습니다.

봉사자들은 어르신들의 손을 잡고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한껏 열기가 달아오르자 이번에는 남자 어르신들도 한 명씩 나와 애창곡을 불렀습니다.

나는야 흙에 살리라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흙에 살리라 ♬
익숙한 노래들이 이어지고, 어르신들은 노래를 부르며 하나가 되었습니다. 옛날만큼 박자를 맞추는 것도, 음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지만 마음은 청춘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르신들이 다들 기뻐하자 화광 법사님도 흥이 나서 무대 앞으로 나와 노래 한 곡을 불렀습니다.

온 곳도 모르는 그 인간이 갈 곳을 어떻게 안단 말까 ♬
온 곳도 갈 곳도 모르누나 이것도 저것도 멍텅구리
울주군에 13개 마을 어르신들 만수무강하시고 ♬
내년에는 더 젊은 얼굴로 만납시다
‘다리 아프다’ 하시면서도 기꺼이 앞으로 나와 춤을 추시는 어르신, 머쓱한 듯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들까지 어울려 한바탕 신나는 춤마당이 펼쳐졌습니다.


묻지 마세요 물어보지 마세요 ♬
내 나이 묻지 마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앞만 보고 왔는데 ♬
지나간 세월에 서러운 눈물
스님은 박수를 치며 어르신들이 여흥을 즐기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박자가 틀려도, 음정이 틀려도 가사 속에 세월이 녹아 그대로 명곡이었습니다. 계속 노래 신청이 들어왔지만 시간이 모자라 나머지 분들은 내년을 기약했습니다. 노래 자랑을 마무리하고, 스님이 닫는 인사를 했습니다.

“재미있게 잘 노셨어요?”
“예!”
“재작년까지만 해도 코로나 팬데믹 덕분에 제가 고향에서 많은 시간을 머무를 수가 있었는데,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니까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고 농사도 못 짓고 있습니다. 저를 대신해서 화광 법사님께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화광 법사님에게 마무리 인사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화광 법사님이 무대로 나와서 마무리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

“올해는 가을에 비가 많이 와서 근심 걱정이 많으셨죠? 저도 농사를 망쳐서 어르신들이 걱정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다들 추수 잘 마무리하시고 내년에는 더 건강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이어서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어르신들이 가는 길에 드렸습니다. 스님이 마을 노인회 회장에게 대표로 선물을 전했습니다.

어르신들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인사를 드린 후 두북 어르신 가을 나들이를 모두 마쳤습니다.

스님은 행사를 준비해 준 정토회 부산울산지부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봉사자들은 어르신들과 버스를 타고 두북수련원에 도착한 후 차로 집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 두북수련원 가까이에 사는 어르신들은 손에 선물을 하나씩 들고 걸어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살랑이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다시 두북수련원으로 돌아와서 농사일을 했습니다. 이례적으로 길게 이어졌던 가을장마 때문에 김장철을 앞두고 배추에 무름병이 왔습니다. 배추의 뿌리가 썩거나 물러져 버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손쓸 방도는 없지만 촘촘히 심은 배추를 솎아 내서 공기가 통하게 해 주면 무름병이 심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배추 몇 개를 뽑기로 했습니다.
“다 괜찮아 보이는데 뭐를 뽑을까요? 이걸 뽑읍시다.”


스님은 그나마 약해 보이는 배추를 골라 하나씩 뽑았습니다. 배추를 뽑아 보니 속이 꽉 차야 할 배추가 조금씩 시들어 있었습니다.


배추밭을 정리한 후 무를 심은 밭으로 이동했습니다. 무도 잘 자라지 않아 크기가 아주 작았습니다. 튼튼한 무만 남기고 허약하거나 너무 빽빽한 무를 뽑거나 잘라내었습니다.

솎아낸 무는 나물로 먹기 위해 칼로 손질해서 다듬었습니다.

오후 5시가 넘어가자 벌써 해가 저물어 어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서 감을 따기로 했습니다. 감나무에는 주황색 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습니다.
“손으로 딸 수 있는 아랫부분만 일단 따 봅시다.”


손으로 딸 수 있는 것을 다 따고 나자 사다리를 가져와 더 높이 달린 것도 땄습니다. 스님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감을 따서 내려 주면 밑에서 향존 법사님이 바구니에 감을 담았습니다.
“아이고, 이건 홍시네요!”

가끔 홍시가 된 감도 손에 잡혔습니다.

어두워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바구니 두 개가 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나이가 많아도 노동 효율은 여러분보다 높아요.”
“맞습니다. 스님이 안 계시면 일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일이 안 될 정도는 아니에요.” (웃음)

뽑은 배추를 포대에 담고, 딴 감을 차곡차곡 쌓아서 가지런히 정리한 후 울력을 마쳤습니다.

해가 지자 산 너머로 초승달이 떴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저녁 식사를 한 후 밤에는 원고 교정과 여러 업무들을 처리한 후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두북수련원을 출발하여 서울로 이동한 후 오후에는 외부에서 사회 인사와 미팅을 하고, 저녁에는 여성 INEB 참가자들과 함께 정토회 스터디 투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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