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9.21. 태국 2일째, 국경변 난민 캠프 방문
“세상에서 내가 사라진다는 것이 두려워요. 죽음은 정말 끝일까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태국 치앙마이 국경 지역의 난민 캠프를 방문해 미얀마 난민 어린이들의 실태를 살피고, 지원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새벽 5시, 숙소를 나서 난민 캠프로 향했습니다. 이번 일정에는 치앙마이에 거주하는 정토회 회원 신수정 님도 함께했습니다. 출발 후 1시간 30분쯤 지나 식당에 들러 아침으로 죽을 먹고, 해발 1,500m가 넘는 고개를 넘어 국경으로 이어지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달렸습니다.

출발한 지 4시간이 지나 휴게소에서 INEB(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 활동가 오포르 님을 만났습니다.

“저희가 갈 곳은 외부 접근이 거의 없는 곳입니다. 먼 곳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포르 님과 함께 차로 1시간을 더 달려 오전 10시에 제1 난민 캠프 내 끄룽자우 학습 센터(Krungjaw Learning Center)에 도착했습니다.

모여 있는 주민들에게 인사를 건넨 후 마을 지도자들과 만나 난민들의 상황에 대해 들었습니다. 마을 지도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2002년 미얀마 정부군의 탄압으로 샨족 주민 600여 명이 태국으로 피난 왔다고 합니다. 당시 정부군은 일반 주민들을 살해하고, 가축과 재산을 약탈하며, 집을 파괴했습니다. 주민들은 국경을 넘어 태국 사찰에서 1년간 머물다가 현재 위치에 정착했으며, 이들은 임시 거처에서 생활하면서 자녀들을 태국 학교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고 합니다.

또한 현재 치앙마이 지역에는 약 2,500명의 미얀마 사미승들이 피난을 와 있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은 미얀마 정부군의 강제 징집을 피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채 국경을 넘어온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이었습니다. 정부군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청소년 명단을 작성해 징집하려 하자, 부모들이 자녀를 사미승으로 만들어 태국으로 피신시킨 것입니다.

스님은 설명을 들은 뒤 마을 지도자들에게 이곳을 방문한 목적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여기 온 목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JTS에서는 미얀마 지진 피해자와 전쟁 난민을 돕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로힝야 난민을 돕고 있고, 메솟(Mae Sot) 지역에서도 난민을 돕고 있습니다.

미얀마 안에서는 만달레이와 사가잉 지역의 지진 피해자와 난민들을 돕고 있습니다. 만달레이 지역의 난민들 중에는 샨 주에서 온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물론 샨족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소수 민족도 많습니다. 만달레이에서는 절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사미승으로, 여자아이들은 넌(여성 출가 수행자)으로 만들어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사가잉 지역에서는 군대가 계속 폭격을 하니까 절 주위에 난민촌을 형성해서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절 가까이는 폭격을 안 하니까요.

사가잉 지역은 군대가 물자 반입을 막아서 돕기가 어렵습니다. 이번에 지진이 났을 때도 양곤에서 만달레이로 물자를 옮기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시트웨이 지역은 아예 군대가 출입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바다를 통해 배로 쌀을 운반한 적도 있습니다.

난민촌의 여자아이들,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요?

지난 6월에 INEB 활동가 무 님이 한국을 방문해서 치앙마이 국경 지역에도 난민이 분쟁 때문에 많이 넘어와서 보호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사미승으로 만들면 절에서 보호를 할 수 있는데 여자아이들은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현재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넌을 만들어서 보호하는 게 나은지,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생활을 보살피는 게 나은지, 한번 현장을 보려고 방문했습니다. 미얀마는 넌들이 매우 많은데 태국은 여성 수행자 제도가 어떤지 몰라서 여러분들이 제안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태국 절 안에서 넌을 받을 수 있는지, 아니면 고아원 형태로 시설을 만드는 게 나은지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 제안된 것은, 미얀마 샨 주의 미얀마 지역을 반군이 장악했기 때문에 정부군으로부터 공격받을 위험이 없다고 했습니다. 만약 인권에 문제가 없다면 오히려 미얀마 쪽에 시설을 마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미얀마 쪽 절에다가 아이들 보호 시설을 만드는 겁니다.

저희 JTS는 주로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단체라서 아이들 보호와 교육 부분을 주로 지원합니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정말 그렇게 보호받을 아이들이 있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사미승들도 숫자가 많으면 교육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상황이 어떠한지 살펴보고,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한 번 보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자아이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입니다.”

스님은 특히 여자아이들의 보호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사미승이 되어 사찰에서 보호받을 수 있지만 여자아이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대화를 마친 후 난민 캠프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주었습니다.

테라밧다 스님들의 계율에 맞춰 12시 전에 식사를 하기 위해 인근 식당으로 이동해 점심을 함께 했습니다. 식사 뒤 마을 지도자들과 추가로 논의를 이어 갔습니다. 교전으로 인해 미얀마 쪽에 시설을 세우는 것은 위험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태국 내에서 아이들을 보호할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오후 1시 30분에는 제2 난민 캠프 내에 있는 왓 파(Wat Fa) 사찰을 방문했습니다.

주지 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니 현재 이곳에는 60명의 사미승들이 생활하고 있었으며, 더 많은 아이들이 오고 싶어하지만 운영비 부족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현재 여학생들이 살고 있는 숙소를 둘러보았습니다. 21명의 여자아이들이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침대 하나에 2명 내지 3명이 함께 자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현지 책임자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자재를 제공하면, 주민들이 직접 숙소를 지을 수 있습니까?”

“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해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문적인 건축 기술자 한 명은 필요합니다.”

또한 현지에서는 전기가 부족해 태양광 패널도 시급하다고 했습니다. 현재는 마을 주민과 학생들이 제한된 전력을 나누어 쓰고 있었습니다.

숙소 뒤편에 추가로 여학생 숙소를 지을 부지도 둘러보았습니다.

부지를 둘러본 후 여학생 숙소 옆 사찰로 갔습니다. 오늘 답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여학생 숙소 증축 방안과 더 많은 사미승을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회의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스님은 INEB 활동가들과 마을 지도자들에게 영문으로 번역한 스님의 저서를 선물하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오후 3시 30분에 작별 인사를 나누고 치앙마이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4시간 30분을 달려 저녁 8시에 치앙마이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탑승 수속을 밟았습니다. 비행기는 밤 10시 25분에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1시간을 연발했습니다.

결국 밤 11시 30분에 치앙마이를 출발하여 새벽 1시가 넘어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방콕 공항 근교에 있는 JTS 연수원 설립 부지를 둘러보고, 저녁에는 방콕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을 한 후 한국으로 귀국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8일 런던에서 열린 즉문즉설 강연에서 스님과 질문자가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세상에서 내가 사라진다는 것이 두려워요. 죽음은 정말 끝일까요?

“저는 죽음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죽을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게 되는 점들은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내가 없어진다는 생각이 들어 죽음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내세가 있다고 하는데, 어차피 저는 전생의 저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세가 있다고 해도 그 존재는 저를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죽음이 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없고,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것이 죽음이 아닐까요? 그래서 죽음에 대해 무서운 감정이 듭니다. 스님께서는 죽음이 전혀 무섭지 않나요? 공포감이 있어도 그냥 흘러가게 두시는 건가요? 스님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전혀 죽음이 무섭지 않아요. 누가 저를 죽인다고 하면 통증이 있을 테니 그건 좀 두렵겠죠. 그러나 ‘죽으면 다음 생에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이 세상에 내가 없어지잖아요?”

“내가 없으면 어때요? 자기가 뭐 그리 중요한가요? 사람이 숲에 있는 여치 한 마리나 다람쥐 한 마리와 무슨 차이가 있다고 나 자신을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합니까? 사람은 총이나 활에 맞으면 죽고, 약 먹어도 죽고, 불에 타도 죽고, 비행기에서 떨어져도 죽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와 질문자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해요? 개구리나 올챙이가 ‘자아가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합니까? 안 하잖아요. 그런데 질문자는 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자꾸 그런 걱정을 하는 겁니다. 질문자는 아무 특별한 존재도 아니에요. 지금 템스강 물에 빠지면 자기가 죽는지 안 죽는지 확인해 보세요. 비행기에서 추락하거나 차에 부딪히면 죽는지 안 죽는지 한번 보세요. 질문자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에요.

그렇다고 자기가 일부러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때가 돼서 죽으면 몰라도 일부러 죽을 만큼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사람들은 자신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대로 살 가치가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죽어야지!’ 하고 자살을 하는 겁니다. ‘나는 가치가 없다.’, ‘나는 살 필요가 없다.’ 하는데, 올챙이는 살 필요가 있어서 사는 건가요? 아니에요. 그냥 사는 겁니다.

질문자처럼 사람들이 ‘죽은 뒤에 어떻게 되나?’ 하고 자꾸 걱정을 하니까, ‘죽은 뒤에 좋은 곳으로 간다.’ 하고 말을 만들어 위로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냐 거짓이냐를 따지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아쉬운 것은 맞죠. 그러나 승진을 하거나 결혼을 해서 좋은 데로 떠나는 것은 덜 슬프지 않나요? 그런 것처럼 죽어서 좋은 데 간다고 하면 죽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좀 위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것은 사실인지 아닌지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이 진짜라고 하면 사이비 종교가 되기 쉽고, 거짓말이라고 하면 위안을 받을 데가 없습니다. 그냥 옛날 설화처럼 생각하면 됩니다.

다음 생이 있다고 해도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직접 사후 세계에 가본 사람이 있습니까? 죽은 뒤의 이야기는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절대로 들통이 나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온갖 소리를 다 하는 거예요. ‘죽으면 이렇지 않겠나?’, ‘죽으면 저렇지 않겠나?’ 하고 말하는 이유는 궁금해서 그런 것도 있고, 두려워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데 간다든지, 다시 태어난다든지 하며 위로하는 종교가 필요한 겁니다. 그런 말을 진짜라고 믿은 까닭에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모순과 부작용이 생겼습니까. 그렇다고 또 그런 것이 필요 없다고 말할 만한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몇 명이나 있을까요? 다 죽음이 겁나잖아요. 그러니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게 사실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살아 있을 때 일어날까요? 죽은 뒤에 일어날까요?”

“살아있을 때요.”

“그렇다면 지금 살아 있다는 거 아니에요? 이 얼마나 모순이에요? 죽음의 두려움이 죽은 뒤에 일어나면 괜찮은데, 죽음의 두려움은 살아 있을 때 일어납니다. 그래서 죽으면 그 두려움은 안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죽으면 어떻게 되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죽었나요? 살았나요? 살아 있습니다. 마치 누워 있는 사람이 ‘일어나야지!’ 할 때 이 사람은 일어나 있는 게 아니라 누워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별일 아니에요. 죽은 뒤에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죽은 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전생이 있으면 어떻고, 천당이 있으면 어떻고, 또 없으면 어떤가요. 만약 천당이 있다면 평소에 좋은 일을 하면 가게 된다 잖아요. 하느님이 자기에게 잘 보이면 천당에 넣어 주고, 자기에게 못 보이면 빼 버리는 그런 존재인가요? 나쁜 사람도 구원해 준다는 것이 하느님 아니에요? 그런 분이 교회에 다니다가 절에 좀 간 사람에게 벌을 주겠어요? 이런 것들이 다 논리적 모순이라는 겁니다. 평소에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천당이 있으면 먼저 가게 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고, 천당이 없으면 안 가도 되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다만 천당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천당에 갈 일을 해야 합니다. 지옥에 갈까 봐 두렵다면 평소에 못된 짓을 많이 했다는 얘기가 되잖아요. 만약 평소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면 걱정할 게 뭐가 있습니까. ‘천당에 가게 해 주세요.’ 이 말은 천당에 갈 짓을 안 했다는 말 아니에요? ‘부처님, 저 서울대에 붙게 해 주세요.’ 하고 빈다면 이것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뜻이잖아요. 실력이 있는 학생이 뭐 때문에 부처님께 빌겠어요? 실력이 없으니 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질문자는 걱정을 안 해도 됩니다. 나라는 존재가 있으면 어떻고, 또 없으면 어때요.

예를 들어, 자동차를 구성하는 부품이 약 2만 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자동차의 부품 2만 개를 조립하지 않고 바구니에 담아 놓은 것과 자동차 부품 2만 개를 조립해서 자동차를 완성한 것, 그 둘의 무게는 양쪽이 똑같습니다. 부속의 개수도 똑같죠. 그런데 조립하지 않은 자동차는 움직이는 작용도 일어나지 않고, 빛을 내거나 소리를 내는 작용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립해 놓은 자동차는 제3의 작용이 일어납니다. 움직이고 빛을 내고 소리를 냅니다. 무게나 구성 성분은 똑같은데 결합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제3의 성질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분석해 보면 제3의 성질이 그 안에 있을까요? 없습니다. 조립하면 나타나고, 해체하면 없어집니다. 지금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빛, 움직임, 소리가 자동차의 원래 성질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수소와 산소가 있습니다. 수소 원자에는 물의 성질이 없고, 산소 원자에도 물의 성질이 없어요. 그런데 산소 원자 하나와 수소 원자 두 개가 결합하면 물의 성질을 나타냅니다. 분해하면 물의 성질이 없어지고, 결합하면 물의 성질이 나타납니다. 물의 성질이 어디 있다가 온 것이 아닙니다. 연관을 맺으면 연관 맺은 전체가 하나로서 제3의 성질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의 분자들을 해체했을 때는 그 안에 물의 성질이라는 게 없습니다. 이것은 생명도 마찬가지예요. 유전자라고 하는 설계도에 따라 물질을 조립하면 생명 현상이 나타나지만, 물질이 해체되면 생명 현상이 사라집니다. 생명이 어디 있다가 오거나 누가 만들거나 이런 게 아니에요.

옛날에 인간이 세상에 대해 막연히 두려워하면서 하던 생각이 종교도 되고 사상도 되고 전설도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성인들은 존재에 대해 ‘왜 이런 성질이 발생할까?’ 하고 깊이 탐구했습니다. 주로 물질적 성질을 연구하면 과학자가 되고, 정신적 성질에 대해 연구하면 수행자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기법에 의하면 제가 죽었을 때 분자가 된다는 말씀인가요?”

“연기법에 의하면 결국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해체되면 부속이고, 조립하면 자동차인데, 자동차가 조립이 됐을 때 그 이름을 그냥 자동차라고 부르는 거죠. 사람의 정신적인 자아는 생후 3년 안에 형성됩니다. 주로 어머니로부터 보호받기 때문에 어머니로부터 자아가 형성되죠. 그러나 할머니에 의해 보호되면 할머니로부터 자아가 형성이 됩니다. 형성된 모든 것은 변할 수가 있지만, 생후 세 살까지 형성된 것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키울 때 세 살 때까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는 편안한 가운데 사랑으로 보살펴야 심리가 안정이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렇게 보살핌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심리적 불안이 생기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잘 안 변하다 보니 옛날부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거나 ‘천성’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천성이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되어 간다.’ 이런 말도 있는 겁니다.

그러나 자아는 형성되는 것입니다. UCLA 의과 대학에서 한 실험에 의하면 세 살 때까지 사랑받은 아이와 학대받은 아이의 대뇌 크기를 측정했을 때 학대받은 아이의 대뇌가 거의 절반 가까이 작았다는 결과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생각하면 세 살까지는 사랑으로 보살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입장에서는 각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가 있지만, 아이와 어른의 입장에서는 어른이 자기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의 보호를 더 우선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전체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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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웅

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2025-09-24 07:27:53

최상훈

고맙습니다 ^^

2025-09-24 07:27:41

강혜경

오늘 아침 이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연기법에 대해 생각하고 원래 나라는 것이 없음을 알고 죽기전까지 인연따라 잘 쓰이고 가겠습니다.

2025-09-24 07: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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