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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태국 소수 민족이 살고 있는 난(Nan) 지역의 불교학교와 사찰, 그리고 직업 훈련소 예정지를 방문했습니다.
새벽 5시 15분, 돈므앙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정토회 회원 황소연 님 부부가 동행했고, 공항에서 INEB 활동가 안첼리 님과 합류했습니다. 안첼리 님은 난이 외할머니의 고향인데 이번이 첫 방문이라고 합니다.
공항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7시 30분에 돈므앙 공항을 출발했습니다. 비행기는 1시간 20분을 이동하여 8시 50분에 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자, 지난 6월에 한국 정토회를 방문했던 콩신 스님이 반갑게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차로 40분을 이동해 9시 40분에 콩신 스님이 운영하는 왓 니크로타람 불교학교(Wat Nikrotharam School)에 도착했습니다. 사미승들과 마을 사람들이 나와 꽃을 건네며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이곳은 100여 년 전 중국 후난에서 이주한 소수 민족 타이르(Tai Lue)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입니다. 왓 니크로타람 불교학교는 콩신 스님이 교장으로 있고,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의 사미승들을 교육하는 곳입니다. 졸업생의 약 80%가 환속 후 직업을 갖는다고 하고, 설교법, 농사, 전통문화, 기술 교육 등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학교 곳곳을 둘러봤습니다. 지난 8월 큰 홍수가 나 이 지역도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콩신 스님은 당시 JTS에서 긴급 지원한 세탁기와 고압 물청소기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다며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강당에는 마을 주민과 학생들이 모여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콩신 스님이 환영사를 한 후 스님에게 인사말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얼마 전 사람들이 큰 홍수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해 위로의 마음을 전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지난번 홍수 때 많이 놀라고, 또 고생도 많으셨죠? 와서 보니까 어려운 가운데 깨끗하게 잘 복구를 하셨네요. 저희도 한국에서 홍수를 겪어 봐서 진흙을 치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압니다.
한국에도 매년 몇 차례씩 태풍이 옵니다. 비도 많이 오고, 바람도 세게 불어서 큰 피해가 생기곤 합니다. 요즘은 기후 변화로 인해, 태풍이 아니더라도 좁은 지역에 폭우가 쏟아지는 일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한국은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강 상류에 댐을 만들고 제방을 높이 쌓아 왔지만, 최근에는 폭우의 양이 너무 많아져 기존 제방만으로는 대응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앞으로는 폭우가 더 자주, 더 강하게 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이를 대비할 수 있는 방비책을 잘 마련해야 하고, 둘째, 실제 피해가 발생했을 때는 어떻게 신속히 복구하고 정리할 것인지도 함께 준비해야 합니다. 이번에 JTS에서 보낸 작은 지원이 여러분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지난 6월에 콩신 스님이 한국을 방문하셨고, 그 자리에서 이곳의 활동들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난’이라는 지역이 있는지도 몰랐고, 이곳에 소수 민족이 전통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콩신 스님의 말씀을 듣고 구글 지도를 열어 난 지역이 어디인지 찾아 보았습니다. 알아 보니 라오스와 중국 접경 지역에 있는 소수 민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콩신 스님이 기술 학교를 운영하며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직접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방문하게 됐습니다. 테라바다 불교의 전통에 따르면 출가하면 노동을 일절 하지 않는데, 이곳에서는 사미들에게 기술을 가르친다고 하니 무척 궁금했습니다. 또 마을 주민들이 전통 음료를 만들어 판매한다는 것과 또 어르신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한다는 말을 듣고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테라바다 스님들은 대개 개인 수행에만 집중하는데, 이곳에서는 사회적인 활동을 함께 해나가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요즘 미얀마에서는 내전으로 많은 난민들이 태국으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태국에 들어와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치앙마이로 답사를 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난 지역도 함께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콩신 스님과 함께 이곳을 둘러보게 되어 기쁩니다. 여러분들이 전통 의상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도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화를 마치고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학교를 나와 10시 20분에 차를 타고 왓 농부아(Wat Nong Bua) 사찰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에 롱보트 레이싱 축제장을 지났습니다. 매년 마을 축제로 롱보트 경주를 한다고 합니다.
10시 40분에 왓 농부아 사찰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200년의 역사를 지닌 태국 북부 스타일의 전통 사찰로, 콩신 스님이 수행 중인 도량이기도 합니다.
사찰 안에는 오래된 법상이 보존되어 있었고, 벽면에는 다양한 벽화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자타카 이야기 중 코끼리가 새를 보호하는 장면, 부처님께서 하프 연주를 듣는 장면 등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콩신 스님은 이것이 ‘중도’의 가르침을 상징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사찰 입구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전통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고, 마당에서는 할머니들이 목화에서 솜을 골라내어 물레로 실을 뽑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스님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도 다 이렇게 했어요. 목화에서 씨를 분리하고, 실을 뽑아 풀을 먹이고 염색까지 했죠.”
사찰 안에는 마을 생활사를 담은 작은 박물관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북부 지역에서 실제로 사용하던 농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하나하나를 직접 설명했습니다.
“이건 밭을 가는 쟁기인데 소나 사람이 끌 수 있어요. 이건 논을 평지로 고르는 써레입니다. 물속에서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가장 힘든 일이에요.”
스님은 어린 시절 사용하던 농기구들을 다시 만나 반가운 듯 환하게 웃었습니다.
사찰을 나서는 길에 콩신 스님은 참외 덩굴을 가리키며 이야기했습니다.
“지난 6월 한국에 갔을 때 참외가 맛있어서 씨를 주머니에 담아와 여기 심었어요.”
스님은 웃으며 답했습니다.
“다음에 여러 종류의 씨앗을 갖다 드릴게요.”
다음 일정은 직업 훈련소 예정 부지 답사였습니다. 이곳은 콩신 스님의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밭과 농막이 있는 땅으로, 앞으로 사미승과 청년들을 위한 생활 기술 교육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콩신 스님은 이곳에 채소 재배용 비닐하우스를 설치하고, 물펌프·경운기·자동 급수 장치 등을 갖추어 실제 농업 기술을 배우는 훈련장이 되기를 바란다고 설명했습니다.
다음으로 마을 화장장에 들렀습니다. 이곳은 시신을 태우면 아래에 재가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스님이 화장 시설의 문을 열어 보니 뼈가 남아 있었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불을 때 줄 테니까 들어가 보세요. 결국 우리 모두는 다 여기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화장장을 나와 왓 농파카(Wat Nong Pa Kaa) 사찰의 주지 프라 크루 수친 난다담마 스님과 함께 지역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콩신 스님은 최근 폭우로 물이 식당까지 차올랐다고 설명했습니다.
콩신 스님은 스님에게 직업 훈련소 설립 제안서와 설계 도면을 주었습니다. 제안서에는 소외 계층 아동들에게 생활 기술 교육을 제공하고, 지역 어르신들에게는 소득 창출과 복지 증진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 계획이 들어 있었습니다. 또한 난성 타왕파고와 인근 대학, 지역 단체들이 협력해 지속 가능한 학습 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는 계획도 담겨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프라 크루 스님, 콩신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난 지역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안첼리 님과도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영문으로 번역한 스님의 저서를 선물했습니다.
오후 12시 40분이 되어 치앙마이로 출발했습니다. 차를 타고 5시간 50분을 이동해 저녁 6시 30분에 치앙마이 숙소에 도착한 후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태국과 미얀마의 국경 변으로 가서 난민 캠프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1일 호주 브리즈번에서 열린 즉문즉설 강연에서 스님과 질문자가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저는 호주에서 10년 가까이 함께 살고 있는 아들이 있습니다. 영주권을 신청해야 하는데, 다른 조건은 다 되지만 영어 점수가 안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 큰 아들에게 ‘영어 공부 좀 하라!’고 하면 듣자마자 성질을 냅니다. 아들 기분도 안 상하게 하고, 저도 기분 좋게 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제가 말주변이 없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스님의 좋은 의견을 부탁 드리겠습니다.”
“말주변이 없으면 말을 안 하면 됩니다.” (웃음)
“말을 안 하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져요.”
“말을 안 하는데 왜 울화통이 터져요?”
“참고 있으려니까 그렇습니다.”
“말을 참으라는 게 아닙니다. ‘나는 말을 할 줄 모르니 안 한다.’ 하는 관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불이 날 일이 없어요. 다 큰 아들을 질문자가 가르치려 하니까 그런 거예요. 스무 살이 넘었으면 아무리 내 아들이라도 ‘노터치’입니다.”
“지금 아들이 30대 중반이 되어 가고, 여자 친구와 결혼식도 올려야 되거든요. 그쪽 부모님은 딸이 외국에 나와 살고 있는데 이런 상황이 얼마나 걱정이 되겠어요.”
“무엇 때문에 남의 걱정까지 자기가 해요?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즉문즉설의 목적은 ‘내가 어떻게 이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내 아들이었고 나는 엄마였지만, 스무 살이 넘은 지금은 과거의 인연으로 인해 엄마와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사실은 성인 대 성인의 관계입니다. 어떤 인생을 살든 그것은 본인의 인생이지 질문자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노터치! 이런 관점에 서는 게 좋아요.”
“아들이 다른 일에는 다정하고 다 좋은데, 듣기 싫은 말만 하면 먼저 성질을 버럭 냅니다.”
“듣기 싫은 말을 하는데 성질을 안 내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그래도 엄마가 하는 말인데 조곤조곤 들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님?”
“이제는 성인 대 성인의 관계이지 더 이상 엄마가 아닙니다.”
“그럼 자식이 땅에서 솟았습니까? 하늘에서 떨어졌습니까? 제가 낳았잖아요.”
“그런 고지식한 소리를 하니까 아들이 엄마가 이야기만 꺼내면 성질부터 버럭 내는 겁니다. 아들이 스무 살이 넘었다면 성인 대 성인의 관계입니다. 과거를 들먹이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돼요. 노터치! ‘너나 잘 살아라!’ 이런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아들은 성인이니까 어떻게 살든 자기 인생입니다. 질문자는 아들이 ‘엄마, 밥 좀 주세요.’ 하면 밥 해주는 것, 그 정도만 하면 됩니다. 관여하면 안 돼요.
첫째, 원칙적으로 남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둘째, 질문자가 관여해도 아들이 질문자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자기 스트레스만 늘어나고 부모 자식 간에는 갈등만 생깁니다. 질문자가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사이가 벌어집니다. 자기는 자기대로 힘들고, 아들은 아들대로 힘들어요.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맞는 것 같아요.”
“그걸 이제 알았습니까.”
“그런데 보고만 있자니 너무 안타깝습니다. 할 수 있으면 제가 공부를 대신해 주고 싶어요.”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아이들이 다 공부를 잘했으면 누구나 다 하버드대 가고 서울대 가겠지요. 왜 대학도 안 가는 아이들이 있겠어요. 법륜스님도 부모님의 말을 들었으면 결혼하고 애 낳고 살았겠지 왜 스님이 되었겠어요. 부모의 말을 제일 안 들은 사람이 법륜스님인데, 법륜스님한테 와서 ‘우리 애가 말을 안 들어요.’ 하고 질문하는 거예요? 제가 볼 때 질문자의 아들은 엄마의 말을 안 들으니까 훌륭한 사람이 되겠어요.
부처님도 부모의 말을 안 들었어요. 부인의 말도 안 들었어요. 다음 왕이 될 세자인데 그것도 버리고, 아내에게는 말도 안 하고, 아이에게 아빠의 역할도 안 하고 집을 나가 버렸단 말입니다. 질문자처럼 생각하면 그런 사람을 어떻게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위대한 인물이 되려면, 성인이 된 뒤에는 독립된 인간으로서 큰 뜻을 가지고 자기 길을 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스무 살이 넘으면 독립된 인간이에요. 지금처럼 생각하면 죽을 때까지 자식 걱정을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님, 이 음식을 먹고 싶어요.’ 하는 사람한테 ‘거기에 독이 들었다.’라고 말해 주면, 대부분은 안 먹습니다. 그런데 자꾸 ‘그래도 좀 먹어 보면 안 될까요?’ 하면, 저는 ‘그러면 먹고 죽어라.’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요. 질문자의 걱정은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에요. 정신 차려야 합니다. 이제는 아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도 없고, 끼쳐서도 안 돼요. 아들이 결혼을 하든 말든, 무슨 문제가 생기든, 그것은 본인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엄마, 밥 한 끼 맛있게 해 줄래요?’ 하면 그거 정도만 해줄 수 있는 거예요. 할 수 없는 것을 꿈꾸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만 하세요. 질문자가 선생도 아닌데 공부에 대해 왜 간섭합니까?”
“그러면 언제까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나요?”
“그럼 계속 간섭을 하세요. 집에 가서 아들한테 ‘영어 공부해라.’ 하고 계속 말하세요.”
“아들이 성질을 내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대화할 방법은 없을까요?”
“없습니다. 질문자가 말을 안 하면 돼요. 만약 한 남자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데 그 여자는 그를 극도로 싫어하고 전화하는 것도 싫어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법륜스님에게 와서 ‘스님, 제가 그 여자와 다정하게 얘기할 방법이 없을까요?’ 이렇게 묻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럼 스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 여자가 싫다고 하면 그만두어라.’ 이렇게 말하죠. 아무리 내가 좋아해도 상대가 싫다면 그만두어야 해요. 안 그러면 성추행이에요.
아들이 싫다는데 계속 그러는 건 아들이 고발을 안 해서 그렇지 일종의 추행입니다. 법적으로는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려도 돼요.
즉문즉설에서 어떤 분이 결혼한 아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들이 연락이 없길래 집에 찾아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니 며느리가 못 들어오게 하더랍니다. 그래서 억지로 밀고 들어갔더니 바로 경찰에 신고를 하더라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 ‘이럴 수가 있냐!’며 저한테까지 찾아와서 질문을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한 겁니다. ‘내 아들의 집’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직도 아들을 미성년자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처럼 질문자도 지금 생각을 잘못하고 있고, 범법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오늘부터 생각을 고쳐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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