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륜스님의 유럽 순회강연 중 네 번째 강연이 독일 뒤셀도르프(Düsseldorf)에서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6시에 암스테르담을 출발하여 뒤셀도르프로 향했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뒤셀도르프까지 230km의 거리를 자동차로 달렸습니다. 뒤스부르크(Duisburg)에 사는 정토회 회원 최순진 님이 암스테르담까지 와서 운전 봉사를 해주었습니다.
네덜란드 국경에서 독일 남동쪽을 가로지르는 A3과 A12 고속도로를 3시간 동안 달려 오전 9시에 뒤셀도르프에 도착했습니다.
숙소인 최순진 님 댁에 도착한 후 삼배로 인사를 하고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늘 뒤셀도르프에서는 현지인들을 위해 독일어 통역으로 진행되는 강연과 한국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 두 개의 강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독일어 통역 강연을 하기 위해 1시 20분에 숙소를 나와 강연장으로 향했습니다.
강연이 열리는 곳은 뒤셀도르프 중심가 비스마르크슈트라세(Bismarckstraße) 90번지에 위치한 게하르트 하웁트만 재단(Gerhart Hauptmann Haus)입니다. 독일 동부 지역에서 이주하거나 분쟁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문화를 보존하고 교류하는 장소인데, 오늘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스님이 강연장에 도착하자 봉사자들이 반갑게 스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다양한 홍보물을 보고 독일인 3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정토회 역사상 처음으로 진행되는 독일어 통역 강연입니다.
오후 3시가 되어 스님을 소개하는 영상을 함께 본 후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독일어를 못해서 지금까지는 한국인들 대상으로만 강연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훌륭한 독일어 통역사님 덕분에 여러분과 대화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고뇌가 사라지는 살아있는 대화
담마 토크(Dhamma Talk)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나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담마 토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담마 토크는 개인이 갖고 있는 고뇌나 의문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그 고뇌나 의문이 사라지는 대화를 말합니다. 담마 토크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가 괴로움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지식을 얻기 위한 대화가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많은 의문과 고뇌가 생깁니다. 이런 고뇌에 대해 ‘내가 이런 어려움이 있다.’라고 마치 친구에게 이야기하듯이 편안하게 대화하는 것입니다. 대화를 나눌 때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별일 아니네.’ 하는 생각이 들거나, ‘아, 이렇게 하면 되겠네.’ 하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답을 드리는 게 아니라 함께 대화하다가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불교 경전은 고뇌를 가진 사람이 붓다를 찾아와서 자신의 고뇌를 붓다에게 고백하며 대화를 나눈 기록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오늘날 경전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옛날의 대화록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의 대화록을 궁금해하는 것보다, 오늘날 우리가 그와 같이 대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불교(禪佛敎)에서는 지나간 이야기, 옛날이야기, 남의 이야기를 사구(死句), 즉 ‘죽은 글자’라고 표현하고, 나의 이야기,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활구(活句), 즉 ‘살아있는 글자’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처럼 오늘 우리도 지금 각자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서로 대화해 보고자 합니다.”
이어서 누구든지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다섯 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어머니 앞에서는 어린아이로만 남아 있어서 생기는 갈등을 이야기했습니다.
"성인이 된 저를 여전히 아이로만 대하는 어머니 때문에 힘듭니다"
“Umso älter ich werde, umso häufiger gerate ich in Konflikte mit meiner Mutter. Wenn ich sie besuchen fahre und ich fahr‘ dann wieder zu mir nach Hause, ich brauche mehrere Tage, um mich davon zu erholen und ich befinde mich so im persönlichen Zwiespalt. Ich möchte auf der einen Seite für sie da sein und auch die Eltern ehren, die Mutter ehren, aber auf der anderen Seite merke ich, wie es mir zusetzt, persönlich, und wie schwierig das für mich ist, und ich bin in diesem Bereich, bin ich so... gefangen. Auf der einen Seite die Fürsorge für meine Mutter, auf der anderen Seite aber meine persönliche Gesundheit, gerade meine emotionale Gesundheit. Und da stehe ich gerade vor so einem Scheideweg. Ich weiß nicht, wie ich damit umgehen soll.”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와 갈등을 겪는 일이 더 잦아집니다. 어머니를 뵈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그 여파에서 회복하는 데 며칠이 걸릴 정도로 개인적인 갈등에 휩싸입니다. 한편으로는 어머니 곁을 지켜드리고 부모님, 특히 어머니를 공경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개인적으로 저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저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저는 이 문제에 갇혀 있는 기분입니다. 한쪽에는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마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저의 개인적인 건강, 특히 제 감정적인 건강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기로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문제로 힘든가요?”
“Umso älter sie wird, umso älter ich werde, ich glaub‘, sie kann nicht so richtig akzeptieren, dass ich jetzt auch ein Erwachsener bin, und ich bin immer noch in dieser Kinderrolle gefangen. Und darauf basieren auch oft die Streitigkeiten, und sie möchte natürlich noch immer Recht haben und sich dann auch noch um mich kümmern und dann geraten wir oft in Streit, wenn es um irgendwelche Entscheidungen oder um so etwas geht. Sie möchte da immer das letzte Wort haben. Wir reagieren beide sehr emotional. Man schaukelt sich da gegenseitig hoch. Es wird dann gestritten, es wird geschrien. Und das ist eigentlich nicht, wie ich mir das dann vorstelle, sondern ich möchte, wo sie älter ist, zurückgeben, was sie für mich in der Kindheit getan hat, aber das fällt mir dadurch sehr schwer, dass sie da so blockiert und das eigentlich gar nicht möchte, wenn es nicht genau geht, wie sie das gerne hätte.”
(어머니도 저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머니께서는 제가 이제 성인이라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어린아이의 역할에 갇혀 있습니다. 저희의 다툼은 종종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어머니는 당연히 항상 본인이 옳아야 하고 저를 돌보고 싶어하시기 때문에,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나 비슷한 상황에서 저희는 자주 다투게 됩니다. 어머니는 항상 마지막 결정권을 갖고 싶어하십니다. 저희 둘 다 매우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서로의 감정을 격화시킵니다. 그러다 보면 다투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사실 이건 제가 바라는 모습이 아닙니다. 저는 이제 연세가 드신 어머니께서 어린 시절 저에게 해주셨던 것들을 돌려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당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면 그렇게 막으시고 실제로는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저로서는 그렇게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질문자는 몇 살이에요?”
“Ich bin achtunddreißig."
(38세입니다.)
“질문자는 결혼했습니까?”
“Nein.”
(아니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워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이건 말로만 설명해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에요. 부모는 아이를 낳아 20년 가까이 키웠기 때문에 그런 습관이 들어 있습니다. 담배도 몇 번 피우다 보면 습관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이를 돌보는 일을 20년 가까이 하게 되면 완전히 몸에 밴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어머니도 머리로는 ‘우리 아이가 다 컸지.’라고 생각하지만, 무의식 세계에서는 자녀가 30세가 아니라 50세가 되어도 늘 아이처럼 여기는 겁니다. 몇 년 피운 담배도 끊기 어려운데, 몇십 년 된 습관을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어머니가 뭐라고 하든 그냥 ‘감사합니다.’라고 하세요. 왜냐하면 이건 고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20세가 넘어 성인이 되었다면, 본인이 결정해서 행동하면 됩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어머니 말을 계속 듣는다면, 그것은 자유인이 아니라 어머니의 노예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수는 있지만, 최종 결정은 본인이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잔소리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어머니와 갈등 없이 지낼 수 있을까요? 어머니의 그 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어떤 말을 해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일단 ‘어머니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 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시에 나는 자유인이니 내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어머니가 ‘오늘은 나가지 마라’라고 말하면,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거예요. 이 말은 어머니의 마음을 알겠다는 뜻이에요. 본인의 상황이 안 나가도 되면 나가지 말고,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그냥 나가면 됩니다. 어머니는 ‘왜 안 나간다고 해 놓고 나갔느냐?’라고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죄송합니다. 안 나가려고 했는데 나갈 일이 갑자기 생겨서 다녀왔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몇 번 계속하다 보면 관계는 저절로 좋아집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내 말을 안 듣는다고 화를 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 아들이 자기 할 일은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포기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마음도 이해하고, 내 할 일도 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어머니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 할 일을 내가 하는 겁니다. 그러나 어머니께 ‘죄송합니다’ 하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머니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어머니 입장에서는 조금 서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잔소리하지 마세요!’, ‘간섭하지 마세요!’라고 화내면서 어머니가 말할 자유를 막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어머니가 뭐라고 하든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해요. 그러면 어머니가 나중에는 ‘말만 하고 실제로는 안 한다.’하고 불평할 겁니다. 그럴 때는 또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항상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내 갈 길을 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어머니와 같이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지금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습니까, 따로 살고 있습니까?”
"Ich wohne getrennt.“
(따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계속 잔소리할 수가 없으니 큰 어려움이 없잖아요. 어머니가 뭐라고 말하든 ‘알겠습니다.’ 하면 됩니다. 집에 오라고 하시면 ‘알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돼요.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안 돼요. 가겠다는 말은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안 가면 약속 위반이에요. ‘알겠습니다.’라는 말은 어머니의 마음을 알겠다는 뜻이에요. 질문자는 갈 형편이 되면 가고, 갈 형편이 안 되면 안 가면 됩니다. 어머니가 ‘왜 온다고 하고 안 오냐?’ 하면, ‘죄송합니다.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못 갔습니다.’라고 해명하면 됩니다. 이것은 거짓말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Danke schön.”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독일에서 전공을 제대로 마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거절하는 것이 어려운데, 어떤 수행을 해야 할까요?
아들이 운전할 때 주의가 필요해서 얘기를 해주니 화를 냈습니다. 운전이 서툰 아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내가 어떤 일에 최선을 다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다섯 명과 대화를 나눈 후 더 이상 질문할 사람이 없자 예정보다 일찍 강연을 마쳤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책 사인회를 했습니다. 참석한 독일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정토담마스쿨을 졸업한 독일 사람들도 강연에 참석해서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앞으로도 꾸준히 수행을 이어나갈 것을 다짐했습니다.
독일어 통역 강연을 준비한 국제지부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후 스님은 대기실에서 잠시 휴식을 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이 되자 한국 교민들이 속속 강연장에 도착했습니다. 봉사자들은 반갑게 청중들을 맞이했습니다.
90여 명이 자리한 가운데 저녁 7시 정각에 한국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의 소개 영상이 끝나고 무대 뒤쪽에서 스님이 걸어 나오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인사말을 했습니다.
“제가 강연을 길게는 3시간 반까지 해보았고, 짧게는 15분 만에 끝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대학 병원에서 강연을 요청했습니다. 제가 서두에 약 5분 정도 이야기하고 나서 ‘이제 여러분이 관심 있는 얘기를 해보세요.’ 하니까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세 번 더 물을 때까지 질문자가 없으면 일어나겠다고 하니, 어떤 한 분이 질문을 해서 약 10분 동안 대화를 나누고 그다음 질문자가 없어서 바로 강연을 마쳤습니다. 그러니까 청중들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러분에게 특별히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에요. 제가 할 말이 있으면 얘기가 길어지겠지만, 저는 할 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면, 그 주제에 대한 대화를 할 뿐이에요. 그래서 아무도 특별히 관심 있는 분야가 없다기에 금방 마쳤습니다.
여러분의 질문이 강연의 주제입니다
조금 전에는 독일어 통역으로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청중이 독일인들이다 보니 약 30명 정도만 참석을 했는데, 다섯 명이 질문을 하고 나서 더 이상 질문자가 없어서 1시간 만에 강연을 마쳤어요. 강연을 마치고 밖에 나왔는데, 질문을 하지 못했다며 그 자리에서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응대를 하지 않았어요. 저는 주어진 이 시간에만 대화를 하지, 따로 사적으로 대화를 이어가지는 않습니다. 끝난 뒤에 밖에 나와서 아무리 울고불고해도 저는 무시하고 가버립니다. (웃음) 그러니 이야기를 하려면 이 자리에서 하시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누구든지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여섯 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선불교 책을 읽고 명상하며 수행을 이어가고 있지만, 일상에서는 여전히 옳고 그름에 얽매이고 번뇌 속에서 힘들어한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직장인도 이번 생에 윤회를 끊고 깨달을 수 있을까요?
“저는 선불교에 관심이 많아서 책도 읽고 명상도 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할 때는 ‘이분법이 없다’, ‘너와 나를 나눌 것이 없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 이해가 되다가도, 실생활에서 업무나 일상으로 들어가면 카르마의 화염에 휩싸여 있는 저를 봅니다. ‘옳다’, ‘그르다’, ‘잘못됐다’ 하는 것들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현재 명상을 하고 부처님 말씀도 들으며 수행을 하고 있지만 굉장히 답답합니다. 지금 가는 길이 맞는지, 혹시 이번 삶에서도 깨닫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같은 직장인도 수행을 해서 아라한(阿羅漢)에 이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번 생에서 윤회를 끊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질문자가 선불교에 관심이 있다고 하니 직설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첫째, ‘이게 옳은 길인가’, ‘이게 바른 길인가’ 하는 것 자체가 비(非)선불교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선불교는 옳고 그름이 없는 관점, 제법(諸法)이 공(空)한 관점에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이미 선불교적 관점이 아닙니다. 둘째, ‘내가 이번 생에도 업에 끌려 또 윤회를 해야 하는가’, ‘내가 깨달음을 얻고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는가’ 하는 사고는 벌써 윤회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윤회를 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런데도 윤회를 한다는 믿음을 이미 가지고 사고하는 것입니다. 마치 기독교인이 ‘불교에서는 누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묻는 것과 같아요. 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누가 창조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질문에는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기독교인이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지 묻는 질문도 기독교적 세계관에서의 과제이고, 그 안에서만 성립할 수 있어요. 그것처럼 질문자가 어떻게 하면 윤회를 하지 않는지, 어떻게 하면 아라한과를 증득하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것도 이미 불교라는 관념 또는 인도의 전통적 관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禪)이라는 것은 그런 관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질문자가 말하는 것은 모두 비선불교적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는 믿음과 사유의 세계 안에 있어요. 선적 직관은 이런 믿음과 사유의 세계를 타파하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지금 불교를 공부하지만, 그 불교는 기독교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티베트 불교, 모두 각각의 믿음의 체계 안에서 추구하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선이라는 것은 이런 믿음과 관념의 틀 자체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건 어떻게 하면 된다’ 하는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에요.
‘누가 이 세상을 창조했습니까?’ 하는 질문은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누가 저에게 그 질문을 해서 제가 ‘모래로 밥을 하면 몇 시간 만에 됩니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모래로 어떻게 밥을 합니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제 질문은 몇 시간 만에 밥이 되는지 묻는 것이었어요. 이 말에는 모래로 밥이 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떨까요? 애초에 모래로는 밥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몇 시간’이라는 말은 아무런 쓸데없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그와 같이 ‘누가 이 세상을 창조했습니까?’ 하는 질문은 ‘누가’에 대해 묻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창조되지 않았다면 ‘누가’에 대해 묻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그것처럼 선은 모든 관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전제도 용납하지 않아요. 손가락으로 마음을 바로 가리키듯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의 관점에 서 있기 때문에, 질문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앞서 말한 기독교 신자나 불교 신자로서는 물을 수 있지만 선적 관점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선적 관점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나요?”
“선에서는 수행을 어떻게 하고 깨달음을 어떻게 얻느냐 하는 것이 큰 과제가 아닙니다. 깨닫는다는 것도 무언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이에요. 한 선사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선사가 앉아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스승이 대뜸 와서 뭐 하고 있냐고 물었어요. 길 가던 사람이라면 궁금해서 물어볼 수 있겠지만, 참선하라고 시킨 스승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잖아요? 그러자 선사가 ‘참선합니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다시 스승이 ‘그래? 참선해서 뭐 하는데?’ 하고 물었어요. 선사는 ‘참선해야 깨닫죠’ 하고 또 대답을 했습니다. 스승은 그 대답에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가버렸습니다. 참선하던 선사는 어이가 없었어요. 자기가 무엇을, 왜 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마치 길 가다가 처음 본 사람처럼 물으니까요.
이어서 선사는 다시 참선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로 옆에서 ‘드륵드륵’ 하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우리가 명상을 할 때는 벼락이 쳐도 일절 관심을 주지 않아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면 도대체 무얼 하나 싶어 눈을 뜨고 보게 되지요. 선사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살짝 떠서 옆을 보았는데, 스승이 벽돌 두 장을 들고 계속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스승님, 벽돌은 왜 문지르십니까?’ 하고 선사가 물었어요. 그랬더니 스승이 ‘거울 만든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선사가 다시 ‘스승님, 벽돌을 문질러서 어떻게 거울이 됩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러자 스승이 선사를 딱 쳐다보더니, ‘참선한다고 어떻게 깨닫는고?’ 하고 되물었습니다.
스승은 ‘참선해서 깨닫겠다’, ‘참선해서 부처가 되겠다’ 하는 것이 벽돌을 문질러서 거울을 만들겠다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겁니다. 선사가 깜짝 놀라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깨닫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러나 스승이 선사에게 ‘너는 마차가 안 가면 말을 때리느냐, 마차를 때리느냐?’ 하고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마차가 가지 않으면 당연히 말을 때리잖아요. 선사가 가당찮다는 듯 ‘그야 말을 때리죠!’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스승이 ‘그런데 왜 너는 마차를 때리느냐?’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선사가 깨달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선은 ‘깨닫는다’, ‘참선한다’ 하는 전제가 없어요. 그런 말조차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하는 문장이에요. 부처라느니 조사라느니 하는 것 또한 관념이므로 그런 전제를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전제도 갖지 않는 것이 선입니다. 위빠사나(Vippasana) 수행처럼 어떤 전제도 없이 다만 지금 내 마음을 알아차리든지, 간화선(看話禪) 수행처럼 ‘이 뭣고?’ 하고 다만 의심하든지, 이렇게 할 때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에서는 아라한을 증득하거나 부처님의 깨달음 자체도 부정하는 것인가요?”
“그런 것도 다 생각이에요.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곧 생각을 멈추는 것입니다. 질문자처럼 부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고, 깨달음이 어떻고, 단계가 어떻고, 이런 생각을 하면 이미 선이 아니에요. 명상이라는 것도 다만 알아차릴 뿐이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지금 이것저것 사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불교 철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이란 사유를 멈추는 것입니다.
선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깨달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깨달았느니, 못 깨달았느니 하는 이야기 자체가 이미 사유하고, 분별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것도 우리의 사유와 분별의 세계에서 하는 것이에요. 선은 사유를 멈추는 것이기 때문에 다만 여기 있을 뿐입니다. 분별이 끊어진 도리에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무엇을 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자는 스스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누워서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야 하는데’ 하며 노력하고, 각오하고, 결심하고 있다면 그는 일어난 상태인가요, 누워 있는 상태인가요?”
“누워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은 누워 있는 상태에서 필요한 거예요. 그것은 아직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벌떡 일어나 버리면 어떨까요? 일어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까? 아무런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선은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나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사유, 각오, 결심이라면, 선은 그냥 일어나는 거예요. ‘가야지!’ 하는 게 아니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주어야지!’ 하는 게 아니고 그냥 주는 것입니다. ‘해야지!’ 하는 게 아니고 그냥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합니다. 다만 할 뿐이에요.
아침에 눈 떠서 할 일이 있으면 그냥 하면 됩니다. 게으름을 피울 필요도 없고, 서두를 필요도 없는 거예요. 노력할 것도 없고, 게으를 것도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자연의 상태입니다. 소는 풀을 뜯을 때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뜯습니다. 풀 뜯는 게 끝나면 가만히 앉아서 되새김질을 하죠. 그때 소가 심심해서 죽으려고 합니까? 아닙니다. 그저 한가롭게 있을 뿐이에요. 이러한 자연의 원리에 따라서 사는 것이 바로 자유로움입니다.
삶은 그저 물 흐르듯이 살면 됩니다. 고이면 멈추고, 경사가 지면 흐르고, 절벽이 되면 폭포가 되어 흐릅니다. 바쁘면 바쁜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그냥 할 뿐이에요. 할 일이 없으면 한가하게 지내면 되는데, 여러분은 할 일이 없으면 지루하다고 몸부림을 치죠. 바쁘면 힘들다고 난리를 치고, 부모가 없으면 보고 싶다고 난리를 치고, 부모가 있으면 또 보기 싫다고 난리를 칩니다. 같이 살면 귀찮다고 난리를 치고, 혼자 있으면 외롭다고 난리를 칩니다. 일이 많으면 많다고 난리를 치고, 일이 없으면 또 없다고 난리를 치고, 취직하면 다니기 힘들다고 난리를 치고, 실직하면 취직을 못 했다고 난리를 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자연은 그렇지 않습니다. 있으면 있어서 좋고, 없으면 없어서 좋은 거예요. 그렇다고 게으른 것도 아니고, 조급한 것도 아닙니다.
선적 관점을 가지면 ‘이렇게 하면 천당 가고, 저렇게 하면 지옥 간다’ 하는 것이나 ‘이렇게 하면 깨닫는다’ 하는 것에 관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냥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에요. 성경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쓰여 있는데, 그건 사람이 쓴 거예요? 하나님이 쓴 거예요?”
“사람이 쓴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 말을 하나님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처럼 불경에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써 놓은 것 중에서도 역사 속에서 누군가 자기 생각으로 기록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을 읽을 때는 어느 시대에, 어떤 관점에서 기록한 건지를 살펴야 합니다. 불경에 쓰여 있다고 해서 모두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 사람들이 쓴 것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 썼느냐에 따라서 관점이 모두 다른 거예요. 예를 들어 공산주의 사회에서 불경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요?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쓸 수 없습니다. 왕조 시대라면 왕을 찬양해야 그 시대의 종교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야 왕이 된다고 찬양해야지, 왕이나 일반인이나 똑같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왕조 시대, 신분 사회, 성차별 사회를 거쳐 온 불교는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어진 부분이 많습니다.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야 남자가 되고, 죄를 많이 지으면 여자가 된다는 말이 나온 것은 성차별 사회의 관념이 투영된 것입니다. 복을 많이 지어야 양반이 되고, 죄를 많이 지으면 천민이 된다는 생각도 모두 신분 사회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붓다의 원래 가르침은 그런 것들을 모두 부정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이런 주장, 저런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진리는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계율이나 경전에 근거해서 검증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후대의 수많은 불교학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두고 진리를 검증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해서 문자를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선은 또다시 조사들의 어록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선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전제된 관념을 인정하는 순간 그것은 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선을 하려면 ‘이 뭣고’라는 화두를 들어야 한다는 것 또한 관념이에요. 이것을 사구(死句), 즉 죽은 언어라고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지금 저와 여러분이 대화하듯이 고뇌를 가진 사람들이 붓다와의 대화를 통해 ‘별것 아니네’ 하고 자신의 고뇌를 해결했습니다. 그 대화록을 모아놓은 것이 경전입니다. 불교학자들은 그 대화록을 계속 연구하고 분석해 왔던 거예요. 이것은 선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구, 즉 죽은 글귀입니다. 살아있는 글귀, 즉 활구(活句)가 되려면 지금 여기, 나의 문제를 갖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나의 이야기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접근해야 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만 하더라도 내가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 묻는 게 아니고, 그냥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까?’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는 식으로 과거에 누군가 써놓은 글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대화하고 있어요. 선 수행은 그런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아이에게 화를 자꾸 내다 보니까 아이의 자존감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화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마음이 편협한 남편과 10년째 살고 있습니다. 남편과 싸우고 나서도 남편이 왜 화가 났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족들에게 받는 스트레스와 상처가 커서 양가 부모와 절연 중입니다. 제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까요?
인공지능에 대해 스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새로 시작한 공부와 수행법회 시간이 겹칠 때 고민이 됩니다. 융통성 있는 수행이 가능합니까?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한 후 마지막으로 스님이 한국 교민들을 위해 격려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이 한국에서 독일로 올 때는 본인이 잘 선택한 행운이었다고 생각하고 왔습니까? 어쩔 수 없는 난민이 되어서 왔습니까? 어느 쪽이었어요?”
“잘 선택한 행운이라고 생각했죠.”
“그런 행운을 가진 여러분이 이곳에서 일이 좀 많고, 뭐가 어렵고 힘들다고 하면 자신을 제대로 못 보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각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겠지만, 그것은 모두 행운 속에서 겪는 사소한 문제일 뿐입니다. 결혼 생활이 어렵다고 하는데, 다들 결혼할 때는 축하를 받았잖아요. 그렇다면 결혼은 행운입니까, 불행입니까? 행운이죠. 행운 속에서 지금 문제가 조금 있는 겁니다.
행운을 잡았다가 놓는 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정말로 문제가 있다면 그냥 그 행운을 포기해 버리면 됩니다. 그래봤자 본전이에요. 이혼은 본전이지 불행은 아니에요. 제로 베이스에서 행운을 잡았다가 놓는 것일 뿐 불행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살기가 힘들면 한국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행운을 잡았던 것을 놓아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고민할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하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한국 간다.’ ‘하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이혼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직장에 취직한 것도 행운에 들어갑니다. 하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두면 돼요. 내가 잡은 행운을 놓는 것뿐인데 뭐가 문제예요? 그래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행운에다 또 행운을 계속 바랍니다. 행운은 잡았다가 놓을 수도 있고, 유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잡은 행운을 한번 따라가 보고, 안 되면 놓아버리면 돼요. 행운을 잡았다가 놓은 것이 불행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행운입니다. 죽는 것은 행운을 놓는 것이지 불행이 아니에요. 안 태어난 존재들도 있는데, 태어난 행운을 가진 사람이 무슨 말이 많아요. (웃음)
관점을 그렇게 가지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행운을 잡은 사람의 부류에 들어가고, 그 속에서 조금 문제가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아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독일에 온 김에 하는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식으로 관점을 가져 보세요.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행운을 포기하는 것이지 실패는 아닙니다.”
큰 박수와 함께 강연을 마쳤습니다.
곧바로 책 사인회를 시작했습니다. 참석자 대부분이 길게 줄을 서서 스님에게 사인을 받았습니다. 스님은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 덕분에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법문을 듣고 인생이 행복해졌다며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참석자들이 모두 강연장을 빠져나가고, 스님은 강연을 준비해 준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스님은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봉사자들은 묘덕 법사님과 함께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로의 노고를 격려하며 진심이 담긴 말들이 이어졌습니다. 먼저 독일어 통역 강연에서 통역 봉사를 해주신 분부터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걱정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덕분에 통역 소임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통역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믿고 맡겨주셔서 즐겁게 했습니다. 스님께서 통역하는 사람까지 세세하게 신경써서 강연을 하신다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15년 전에 대학생 정토회 활동을 하다가 쉬었습니다. 이번 강연을 계기로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해 다시 정토회 활동을 시작합니다.”
“처음 강연에 봉사자로 참가했을 때는 어리바리했는데, 오늘은 계속 호흡을 맞춘 덕분에 가족처럼 손발이 맞았습니다. 강연이 잘 마무리되어 뿌듯하고 기쁩니다.”
봉사자들은 차분히 소감을 말하며 함께한 시간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밤 10시에 숙소에 도착한 후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뒤셀도르프에서 베를린까지 기차로 이동한 후 오후에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하고, 저녁에는 유럽 순회강연 중 다섯 번째 즉문즉설 강연을 베를린에서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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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식
“그런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행운에다 또 행운을 계속 바랍니다.
행운을 잡았다가 놓은 것이 불행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행운입니다. 죽는 것은 행운을 놓는 것이지 불행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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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불행이 아닌데 무슨 불행이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