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8.9. 동북아역사기행 7일째, 요녕성 박물관, 한국 귀국
“이 만주 벌판의 풀과 돌에도 선열의 피가 스며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동북아역사기행 7일째입니다. 오늘은 심양으로 가서 요녕성 박물관을 관람한 후 역사 기행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갖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입니다.

오늘도 기행단은 새벽 4시 20분에 기상하여 5시에 숙소를 나왔습니다. 통화(通化)의 새벽 시장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삼삼오오 모여서 각자 입맛에 맞는 음식을 구입하여 끼니를 해결하고, 점심때 먹을 도시락도 마련한 후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 스님이 오늘 일정에 대해 간단히 안내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심양의 요녕성 박물관을 둘러본 뒤에 공항으로 가겠습니다. 비행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비행기 출발 3시간 전까지 공항에 도착할 계획입니다.”

아침 6시에 통화를 출발하여 중간에 휴게소에 두 번 들른 후 심양까지 쉼 없이 달렸습니다.

버스 안에서는 어제 작성한 소감문을 발표하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제 조별로 소감문을 읽고 한 명씩 선정된 분들이 돌아가며 송신기를 통해 소감문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고구려·발해, 항일 운동의 땅을 밟으며 다진 결심

참가자 대부분이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밟고 체험하며 민족의 뿌리와 자부심을 되찾았고, 조상들의 희생에 감사하며 통일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지 실천 의지를 다졌다고 말했습니다.

“무지와 무관심은 폭력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무관심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고 살아왔습니다. 중국 조선족 동포들의 애환이 섞인 삶과 우리 선조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지역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백두산 천지에 올라 작은 손을 맞대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행운을 찾지 않고 눈앞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행복을 바라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지금까지의 내 고민과 매너리즘이 아주 작디작은 조각으로 변한 것 같았습니다. 통일과 우리나라의 지속 발전이라는 과제 앞에 내 고민은 금방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통일을 위해 작은 역할이라도 하겠습니다.”

“가는 곳마다 공안이 따라와도 할 수 있는 만큼 해보는 태도, 지나간 역사를 공부하는 일은 다시 하기를 연습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옥수수 밭과 크림 같은 구름, 그리고 잊혀 가는 유적지들. 버스 안에서 창밖 풍경을 보다가 속마음이 툭 올라왔습니다. ‘달리자, 달려가자, 원을 향해서’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 해결되며 울컥했습니다. 모르는 노래가 많았습니다. 세대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학창 시절 홀로 고립돼 있던 시기가 길어서 그런 건지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 오랜 고독에 대해서는 천천히 어루만져 주겠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쓰이겠습니다. 가난해지고 조금 더 외로워지는 게 두려워 구체적으로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제 상처를 장점 삼아 원을 실행하겠습니다. 젊은 제가 살아가는 동안에 따뜻한 봄날 통일된 한국에서 동포들과 강 건너편의 꽃밭에서 만나기를 꿈꿉니다.”

“역사를 알았을 뿐인데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이번 역사 기행에서 뿌리를 알게 되니, 경계와 배타심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단편적으로만 알았던 독립운동사가 아니라, 수많은 선조들의 희생 위에 지금의 자유가 있다는 사실이 절절히 다가왔습니다. 북한과 조선족 동포의 삶을 직접 보고, 편안함 속에서 불평만 하던 제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세상 모든 고통받는 이들을 구제하겠다는 관세음보살의 서원처럼, 저 역시 고통받는 우리 민족을 돕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의 아픔을 덜며 살겠습니다.”

이 만주 벌판의 풀과 돌에도 선열의 피가 스며 있었습니다

“1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중국과 북한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을 가장 크게 울린 건 100년 넘게 고난을 견뎌온 조선족 동포들의 삶이었습니다. 이제 ‘조선족’은 낯선 타인이 아니라, 나와 뿌리가 같은 민족입니다. 대륙을 누비던 선조들의 기개와 지혜를 느끼며 대한민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커졌습니다. 통일이 조상들의 유훈이자 시대의 숙명임을 새기며, 후손들에게 통일된 한국을 물려주겠다고 다짐합니다. 역사는 지금도 쓰이고 있습니다.”

“이번 역사 기행에 대한 저의 소감을 한 줄에 실어 표현하겠습니다. ‘그대들이여, 이 만주 벌판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 무심코 대하지 마시라. 그 아래 우리 독립 선열들이 흘린 붉은 피가 스며 있다.’ 감사합니다.”

창밖 풍경 속으로 지난 6박 7일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무지에서 깨어나 민족의 뿌리를 되찾고, 조상들의 희생과 기개를 가슴에 새기며, 통일된 미래를 향한 각오를 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15개 조에서 한 명씩 소감 발표를 마치고 이어서 자발적으로 소감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소감을 나눈 후에는 노래도 한 곡씩 불렀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표현한 노래부터 시작해서 최신 유행곡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이 달리는 버스 안에 다양한 목소리로 울려 퍼졌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표현한 노래 가사가 이제는 단순한 노래 가사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6박 7일 동안 역사의 현장을 보고 듣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버스는 오전 10시에 심양 시내로 진입했습니다. 스님은 곧 도착할 요녕성 박물관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요녕성 박물관을 관람할 때 제가 설명하겠지만, 150명이 줄을 지어 이동하다 보니 앞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의 관람과 설명 내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람할 때는 제가 앞에서 어떤 것이 전시되어 있다는 정도만 간단히 설명해 드리고, 자세한 내용은 지금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요녕성 박물관에는 요녕성 안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제1관에는 28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구석기시대의 돌도끼나 돌칼과 같은 유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7600년 전의 신석기시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사해(査海)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 하여 이때의 문명을 ‘소하서 문명‘이라고 말합니다.

요녕성 박물관에서 본 우리의 뿌리

그다음에는 아주 예쁜 옥기(玉器)를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신석기시대 다음은 청동기 시대라고 말하는데,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옥기가 청동기 시대 이전에 출토되었기 때문에 옥기 시대를 지나 청동기 시대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옥기 유물은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 것인데, 이때를 홍산 문명(紅山文明) 또는 요하 문명(遼河文明)이라고 말합니다. 이 옥기들이 출토된 무덤의 양식은 광개토 대왕이나 장수왕 무덤과 같은 피라미드 형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여자 신상의 얼굴, 가슴, 팔, 다리 등이 부서진 상태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발굴 당시에 실제 사람보다 작은 것도 있었고, 사람만 한 것도 있었고, 사람보다 3배 정도 큰 것도 나왔다고 합니다. 이 여자 신상을 보면 단군 신화(檀君神話)에 나오는 웅녀(熊女)가 떠오른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과 아주 관계가 깊은 역사적 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주변 지역의 어떤 신화에서도 여신을 숭배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우리의 고조선 역사를 너무 신화적으로만 여기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부분이 1관에서 봐야 할 가장 중요한 핵심 부분입니다.

2관은 하(夏) 나라 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에 걸친 시대, 하상주 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실 당시 이 지역은 하나라 땅도 아니고, 상나라 땅도 아니었고 주나라 땅도 아니고, 고조선의 영역이었습니다. 고조선은 아주 발달한 청동기 문명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고조선의 일파가 청동기 문명을 지니고 중국 본토 쪽으로 내려가서 세운 나라가 상(商) 나라, 다른 말로 은(殷) 나라로 보입니다. 즉, 청동기 문명은 중국에서 형성된 게 아니라, 고조선에서 중국 쪽으로 전파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나라는 동이족(東夷族)계로 추측됩니다.

인류 문화사적으로 보면 고조선 시기에 우리가 고도의 청동기 문명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철기 문명이 늦게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청동기 문명에 안주해서 철기 문명을 빠르게 도입하지 못해 문명의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거예요. 청동기는 대부분 제기(祭器)로 사용되고 일부 무기로 쓰였지만, 농기구로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철기는 무기와 농기구를 만드는 데 모두 사용됐습니다. 철기가 중국 황하문명에 도입되면서 양자강(扬子江) 이남이 개척되었고, 농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이 시기부터 배달 문명이 황하 문명보다 뒤처지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3관은 진한 시기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진한 시기는 중국이 하나의 나라로 통일된 진(秦) 나라와 한(漢) 나라 시기를 뜻합니다. 진한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부여와 고구려에 해당합니다.”

버스에서 내려 웅장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고대의 시간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거대한 보물 창고가 기행단을 맞이했습니다.

박물관 안은 관람하러 온 중국인들로 북적였습니다. 스님이 대중을 향해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무척 많죠? 다른 사람들이 관람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저희는 한 줄로 이동하겠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넉넉하니 천천히, 그러나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스님은 역사 전시관으로 기행단을 안내했습니다. 28만 년 전 고인류(古人類)부터 신석기시대, 고대 하상주 시대, 진한 시대, 수당 시대, 원·명·청 시대에 이르기까지 연대기 순으로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한 줄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순간, 전시실 한가운데 놓인 지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도 위에는 수많은 신석기 유물 발굴 지점이 표시돼 있었고, 그중 눈에 띄는 곳이 바로 홍산 문화(紅山文化)의 중심지, 우하량(牛河梁) 유적이었습니다.

스님은 지도를 가리키며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우리가 말하는 홍산 문화에 들어갑니다. 홍산 문화는 요녕성 서쪽과 내몽골 자치주 적봉시에 걸쳐 분포하고 있습니다.”

홍산 문화의 첫인상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유리 진열장 속에는 고대의 여신상이 있었고, 귀와 손, 가슴이 세밀하게 표현된 조각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임산부 상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우하량 유적은 홍산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이곳에서 붉은 채색 토기와 다양한 토기들이 출토됐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00년 내지 6000년 전의 것입니다.”

유물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정교하게 깎아 만든 옥기(玉器)였습니다.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는 옥 장신구들은 고대 장인의 손길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습니다.

“관을 발굴했더니, 옥기를 팔에 끼고 목에 걸고 있었습니다. 무덤에서 출토된 겁니다. 아주 정교하게 제작됐죠.”

홍산이라는 이름의 유래 역시 흥미로웠습니다. 내몽골 적봉시 뒤편에 있는 붉은 산에서 처음 유물이 발견되면서, 그 이름이 그대로 붙여졌다고 합니다.

전시실을 빠져나오는 길에 스님은 대중이 꼭 기억해야 할 내용을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본 것 중 가장 중요한 건 두 가지입니다. 첫째, 동북아시아의 신석기 문화가 매우 오래전에 시작됐다는 사실입니다. 세계 4대 문명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이 지역에서 신석기 문명이 발달했습니다. 둘째, 홍산 문화 또는 요하 문명 시기에 아주 정교한 옥기가 우리 배달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유물들이 전하는 고대의 숨결이 지금의 공기를 더 묵직하게 느껴지게 했습니다. 6000년 전 이 땅에서 살아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은, 단순한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요녀성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을 끝으로 동북아역사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다 함께 전체가 모일 수 있는 공간으로 이동했습니다. 역사 기행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예식장을 급히 빌렸습니다.

12시 30분부터 스님이 마지막 정리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요녕성 박물관을 관람하는 동안 헷갈릴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며 보충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요녕성 박물관은 요하 문명 유물 전체를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요녕성 안에서 발굴된 유물들만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요하 문명이라도 내몽골 자치구에서 나온 유물은 전시를 안 하다 보니까 한눈에 요하 문명 전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부분은 조금 보충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요녕성 박물관 속 요하 문명은 빙산의 일각

요하 문명의 시작은 신석기 문명입니다. 9000년에서 6000년 사이에 여러 곳에 신석기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우리 고대사로 비교하면 이 시기는 환인의 한나라 시대에 해당합니다. 그다음 시기는 홍산 문화인데, 주로 옥기가 출토되는 시기입니다. 우리 역사로는 6000년에서 4500년 사이니까 환웅의 배달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홍산 문화의 중심지는 요녕성보다 더 서쪽에 있는 내몽골 자치주 적봉시입니다. 그곳에서 주로 옥기가 출토되었는데 5000년에서 6000년 전 것입니다. 또 요서 지방의 조양 지역에서는 여신상과 피라미드형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연대순으로 보면 6000년에서 4500년 전 무렵에는 서쪽에 있는 내몽골 자치주 적봉시 쪽에서 옥기 유물이 주로 나오고, 약간 후반기에 해당하는 4500년 전후로 해서는 요서 지방 쪽에서 무덤이 주로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적봉시에는 돌을 쌓아 만든 4500년 전 성곽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하 문명과 홍산 문명을 제대로 보려면 적봉시로 가야 합니다. 거기서 70퍼센트가 발굴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0퍼센트 정도는 요녕성의 서쪽 조양시에 가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요녕성 박물관에 있는 유물들은 홍산 문명의 아주 일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제1관은 첫째, 신석기가 아주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고, 둘째, 옥기 문화가 뛰어난 홍산 문명이 5000년에서 6000년 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유물로는 여신상이 나왔고, 신전이 발굴되었고, 고구려 무덤의 양식과 비슷한 피라미드형 무덤이 출토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하상주 시대 고조선 청동기 문명의 흔적

제2관은 하상주 시대에 발굴된 유물을 전시한 것입니다. 중국 역사에는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있습니다. 요·순·우·탕 같은 이름을 들어 보셨죠? 우 임금이 세운 나라가 하나라이고, 탕 임금이 세운 나라가 상나라, 다른 말로 은나라예요. 은나라가 멸망한 뒤 주나라가 세워집니다. 이를 하상주 시대라고 하는데,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부터 2500년 전까지 약 1500년 동안이 이 시기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의 유물은 발달된 토기와 청동기입니다. 우리 역사와 비교하면 고조선 시대에 해당해요. 그런데 이곳 요녕성 지역은 그 당시에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가 지배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은 역사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 시기에 이 지역을 지배한 나라는 고조선입니다. 그래서 하상주 시기에 이 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 문명은 고조선 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물관의 표지판에서도 전시한 토기나 청동기가 상나라와 주나라 유물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주나라 시기에 이 지역에서 나온 유물’, ‘상나라 시기에 이 지역에서 나온 유물’이라고만 표기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뿌리인 황하 문명의 중심지는 요하 문명 지역보다 서쪽입니다. 은나라는 그보다 훨씬 동쪽에 있었으며, 요하 문명이 있었던 곳, 현재 북경 이북 지역에서 남쪽으로 내려가야 은나라의 본거지가 됩니다. 그래서 고조선의 발달된 청동기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서남쪽으로 이주해 가서 중원에 세운 나라가 상나라임을 추리해 볼 수 있어요. 상나라는 청동기 문화가 가장 발달한 나라였지만, 그것은 그 지역의 고유한 문화가 아니라 고조선 문명이 남쪽으로 내려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류 문화사적으로는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유물의 형태나 문명이 발달한 지역의 위치가 중국의 황화 문명보다 훨씬 동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나라 시기에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도 대부분 고조선의 청동기 문명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잘 만들어진 대형 청동기는 한반도에서 잘 발견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고조선의 중심 지역이 요서 지방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는 문명의 중심 지역이 아니었어요. 한참 뒤에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그 유민들이 남쪽으로 밀려 내려와서야 삼한이라는 게 생깁니다. 그 유민들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 조그마한 나라들을 세운 때가 기원전 1세기 전후입니다. 한반도에서도 청동기가 발굴되기는 하지만 아주 발달된 청동기는 아닌 거예요. 그렇지만 고조선 문명의 흔적으로 볼 수 있는 청동기와 고인돌이 발굴되었고, 동북아에서만 발굴되는 비파형 청동검도 발굴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지역을 발굴해 볼 수가 없으니, 중국에서 발굴된 유물에 대해 그 시기와 특징을 살펴보고 ‘이건 고조선의 유물이겠구나.’ 하고 짐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100퍼센트 고조선의 유물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요.

요서 지역에 남은 고조선·고구려·발해의 흔적

제3관은 전국 시대부터 시작해서 진한 시기, 위진 시기, 수당 시기까지 발굴된 유물을 전시한 것입니다. 춘추 전국이나 전국 칠웅이라고 들어 보셨죠? 여기서 말하는 전국은 바로 그 시기입니다. 전국 칠웅 중에 북방 민족인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가 있습니다. 연나라는 우리 민족과 같은 북방 민족의 일파입니다. 연나라는 지금의 북경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고, 산둥 반도에는 제나라가 있었습니다. 칠웅 중에 이 두 나라는 동이계 민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시된 연나라의 유물 중 일부는 우리 문명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진나라가 전국 시대를 통일합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진나라 시기 유물들도 중국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부여 시대 또는 고조선 시대의 유물이라고 볼 수 있어요. 진나라 다음에 한나라가 나오는데, 한 무제가 삼조선 중에 번조선(番朝鮮)을 침공해서 멸망시킵니다. 그러면서 이곳에 사군을 설치했습니다. 당시 고조선의 영역이 이곳 요서 지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 사군을 설치했고, 그래서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유물이 출토될 수 있었습니다. 전한과 후한 다음에는 위진 남북조 시기가 나옵니다. 위나라와 진나라가 멸망하고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기가 되면 중원은 북방 민족이 들어와서 지배합니다. 이 시기 이 지역은 중국 역사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 이 지역에서 나오는 유물을 꼭 고조선의 유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북방 민족의 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북조 시대는 수나라가 통일하였지만 망하고, 이어서 당나라가 등장합니다. 위진 남북조 시기에 이 지역을 통치한 나라는 고구려입니다. 그래서 고구려 유물이라고 표기해 놓지는 않았지만 고구려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부여 유물도 있었고요. 그 시기에 이 만주 지역을 차지했던 나라는 부여와 고구려였고, 국가 수준은 안 되지만 거란족과 여진족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유물은 거란족의 유물 또는 고구려의 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과는 다른 북방 민족의 유물인 것이지요.

그다음에 수나라, 당나라가 생기고 고구려가 멸망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지역에는 발해가 들어섭니다. 발해는 당나라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마지막에 전시해 놓은 유물들을 보면 대부분 깔끔하게 사기로 만든 유물들이 많았죠? 그건 당나라의 유물 또는 서역의 영향을 받은 유물들입니다. 당나라 문화는 국제 교류가 많았던 문화입니다. 서역의 문화도 많이 수용했고요.

여진족에서 만주족까지, 이름만 바뀐 우리의 형제 민족

제4관은 요나라와 금나라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발해가 멸망하고 고구려 밑에 있던 거란족이 세운 나라가 요나라입니다. 이어서 여진족이 세운 나라가 금나라고요. 당시 중국은 송나라이고 우리는 고려였습니다. 요와 금은 둘 다 송나라를 압박했기 때문에 송나라 북쪽은 대부분 요와 금에게 영토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이후 금나라가 멸망하고 몽골족이 원나라를 세웁니다. 원나라가 중원을 지배합니다. 이어서 한족이 명나라를 세우고, 다시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웁니다.

마지막 제5관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원나라가 차지했다가 명나라, 청나라가 차례로 지배했습니다. 원나라와 청나라를 북방 민족이라고 규정하면 이 시기의 문화 역시 북방 민족의 문화라고 볼 수 있어요. 명나라가 차지했을 때도 있으니 명나라 유물도 일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5관에 있는 이 지역의 유물은 우리 민족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어요.

북방 민족들은 늘 같은 민족이었지만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졌습니다. 신라 시대에 이곳 동북아 지역에 살던 민족은 말갈족으로 불렸고, 고려 시대에는 여진족으로 불렸고, 청나라 시기에는 만주족으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모두 다 같은 민족입니다.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운 뒤에 송나라를 엄청나게 압박했는데 중국의 처지에서 보면 이는 엄청나게 치욕스러운 역사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여진족 또는 금나라라고 하면 치를 떨면서 두려워해요. 이 시대를 애국심으로 묘사한 중국 영화들이 많습니다.

청나라를 세운 민족은 여러 여진족 중 백두산 아래에 살던 건주 여진(建州女眞, 건진)이라는 여진의 한 부족입니다. 여진족은 통일 국가를 만들지 못하고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살았는데, 그중 건주 여진의 부족장이 금나라를 다시 세운다면서 다른 부족들을 통합해 나갔습니다. 이렇게 세워진 나라가 후금입니다. 후금이 명나라와 싸우면서 점점 승기를 다지고 중원으로 정벌해 나가니까 한족의 저항과 두려움이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금이 아니라 청이라고 바꾸었고, 민족 이름도 만주족으로 바꿨습니다. 한족의 저항을 줄이기 위한 한 방법이었는데, 이름만 바뀌었을 뿐 같은 민족입니다. 여진족과 만주족은 우리 민족과 거의 형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조영이 발해를 세울 때도 ‘걸사비우(乞四比羽)’라는 장수를 측근으로 기용했는데, 그는 말갈족이었습니다. 늘 우리 민족의 통치를 받던 종족 중 하나인데, 이제 이들의 세력이 커져서 청나라를 세우니까 조선은 청나라를 얕보았습니다. 사촌이 잘되는 걸 보면 서로 협력하면 되었는데, 오히려 그들을 얕보면서 명나라에 사대를 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일본을 얕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결국 청나라는 조선을 침공했고, 전쟁에 패한 조선은 청의 신하 국가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북방 민족의 속국이 된 적은 있었지만, 중국의 속국이 된 적은 없었습니다. 원나라를 세운 몽골족도 우리 북방 민족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동북 지방 민족끼리 서로 패권 경쟁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역사를 볼 때는 이런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문명사적 관점에서 보는 동북아의 역사

중국은 지금 역사관을 어떻게 세우고 있나요? 다른 민족이 중원에 와서 점령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를 중국 역사에서 빼지 않고 자기 역사로 만들었어요. 사실 그건 자기들의 역사가 아니지만, 이렇게 하니까 중국 역사가 장대해질 수밖에 없죠. 중국은 현재 중국 땅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 역사라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도 원래 고조선의 땅에 살던 동북 지방 민족들의 역사를 모두 우리 역사로 본다면 매우 방대한 역사가 될 겁니다. 동북 민족이 중원 대륙을 여러 차례 점령하기도 했는데, 오호십육국, 원나라, 청나라 때가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면 중원 대륙은 남방 민족과 북방 민족이 절반씩 점령했다고 볼 수 있어요. 이렇게 역사를 문명적 관점에서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요하 문명의 후예들은 황하 이북, 지금의 동북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황하 문명의 후예들은 황하 이남을 중심으로 해서 활동했습니다. 그 중간 지역에서 서로 싸우며 지배 관계를 주고받아 왔지만, 비교적 협력하며 잘 지낸 적도 많습니다. 당나라와 신라도 잘 지냈고, 송나라와 고려도 잘 지냈습니다. 조선과 명나라도 어떤 이웃보다 우방으로 잘 지냈죠. 그래서 중국을 꼭 나쁘게만 보지 마시길 바랍니다. 요·금·원·청이 우리를 침략한 것에 대해 우리는 모두 중국이 침략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나라들은 중국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 우리와 같은 북방 민족입니다. 일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촌들끼리 서로 경쟁한 역사로 봐야 합니다. 앞으로 이렇게 더 넓은 눈으로 역사를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지난 6박 7일 동안 수고한 스태프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이 스태프들을 한 명씩 소개하자 큰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이어서 참가자들도 소개했습니다. 인사말과 더불어 한 마디씩 소감을 나눈 후 노래도 한 곡씩 불렀습니다.

모두가 함께 웃고 손뼉 치며 역사 기행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공항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 되어 스님이 마무리 인사를 했습니다.

“이것으로 동북아역사기행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출국 심사 시간을 고려하여 조금 일찍 심양 공항으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2시에 심양 공항에 도착한 대중은 곧바로 출국 수속을 밟기 위해 카운터 앞에 길게 줄을 섰습니다. 수속을 마치고 스님은 역사 기행을 안내해 준 조신 님과 진신 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 후 탑승구로 향했습니다.

오후 4시 50분에 심양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2시간을 이동하여 현지 시간으로 저녁 7시 50분에 인천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수하물을 찾아 출국장을 나온 후 스님은 참가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인천 공항을 출발하여 서울 정토회관에 돌아오니 밤 10시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5년 만에 재개한 6박 7일 동안의 동북아역사기행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내일부터는 다시 한국에서의 일정이 시작됩니다. 오전에는 정토불교대학 졸업식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정토경전대학 졸업식에 참석한 후 발심행자 수계식에 참석하여 법문을 하고, 저녁에는 두북수련원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2025 9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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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오행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늘 함께 합니다.고맙습니다.()()()

2025-08-12 08:26:31

손경희

잘 읽었습니다. 동북아역사기행을 계속 구독하면서 새로운 역사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 보이지 않는 행복을 쫓지 말고 눈앞에 흐드러진 행복을 느끼며 살겠다.' 는 어느 분의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25-08-12 08:21:34

혜당

더 나이 들기 전에 꼭 가고 싶습니다!
스님의 해박한 지식과 설명에 깊히 감사드립니다!!

2025-08-12 08: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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