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정초기도 2일째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오전 10시 정각에 정초기도를 하기 위해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정토회 회원들은 정초기도를 하기에 앞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정초기도 두 번째 날을 맞아, 기도에 앞서 마음을 정갈히 준비하는 자세와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간절함'을 이야기하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정초기도 두 번째 날입니다. 기도할 때 옛날 사람들은 먼저 목욕재계를 했어요. 첫째, 몸을 먼저 깨끗이 하고, 둘째, 옷을 갈아입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것인데, 그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하나의 준비 자세로 먼저 몸을 청결하게 하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자기가 기도하는 도량, 나무 밑이면 나무 밑, 법당이면 법당, 방이면 방, 그 자리를 깨끗이 청소합니다. 이것을 '도량 청정'이라고 해요. 먼저 도량을 깨끗이 청소해 놓고, 그다음에 몸을 깨끗이 하고, 옷도 깨끗이 입고, 그리고 정성을 기울여서 기도합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간절함입니다. 얼마나 간절하면 좋아하던 고기도 안 먹고, 결혼한 사람이 기도할 때는 부부 관계도 안 해요. 그런 행위를 하면 '부정 탄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체가 어떤 영향을 끼친다기보다, 그만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하면 그런 것을 포기하겠느냐 이런 얘기예요.
그래서 기도할 때는 편안한 집에서 하지 않고 깊은 산중에 가서, 먹는 것도 아주 거칠게 먹고, 아주 불편하게 나무 밑이나 바위 밑에서 자면서 정진합니다. 그렇게 열악한 조건에서 기도를 해야 기도가 잘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런 곳에서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소망이 그만큼 간절하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기도할 때의 준비 자세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 모든 것의 핵심은 간절함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간절해야 할까요? 서산대사는 '선가귀감'에서 '갓난아기가 엄마 젖 찾듯이 간절해야 한다'라고 했어요. 어린아이가 배가 고파서 엄마 젖을 찾을 때는, 그 젖을 먹고 싶다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딱 그 한 생각이에요.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배고픈 자가 밥을 찾듯이' 이렇게 비유하기도 하고, 또 '고양이가 쥐 잡듯이' 이렇게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집중해서 정성을 모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간절함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될 수 없는 일을 되도록 하기 때문에 기적을 만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란 게 별도로 있는 게 아니에요. 다 일어날 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건데, 보통의 방법으로는 될 수가 없는데 이루어지면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간절하면 바로 기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오직 나라의 독립만을 위해서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는 그런 간절함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고,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도 먹고 입고 자고 친구하고 노는 데는 신경을 안 쓰고 오직 사업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기적을 이룬 것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집중을 해야 합니다. 학생이 공부할 때도 딱 공부에 집중하게 되면 그 학생의 능력이 기적을 이룬다고 표현할 만큼 성취가 됩니다. 그래서 간절함이 중요해요.
간절함이란 마음을 한곳에 모으는 것입니다. 이 간절함을 팔정도에서는 '정념'이라고 해요. 마음이 한쪽에 딱 집중이 되어서 뚜렷한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욕망으로부터 일어나는 생각이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일어나는 생각에 끌려서 '이럴까 저럴까' 하고 있는 것은 간절한 것이 아니라 산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절을 하든,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산만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늘 '이 생각 저 생각이 듭니다' 하고 질문만 하잖아요. 물론 이 생각 저 생각이 드는 게 자연스러움이에요. 중요한 것은 이 생각 저 생각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기가 목표로 세운 것에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화두를 참구할 때도 오직 화두에 딱 집중을 해야 해요. 요즘 말로 하면 ‘필이 꽂혀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입니다. 염불할 때나 절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리가 아프네’, ‘너무 춥네’, ‘땀이 나네’, '언제까지 해야 하나', '아직도 끝이 안 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망상을 피우고 있는 겁니다. 다리가 아프면 아픈 대로, 이 생각 저 생각이 나면 나는 대로, 땀이 나면 나는 대로, 그런 것은 다 놓아버리고 정성을 기울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절을 해야 합니다. 정신이 한 곳에 딱 집중되어야 해요. 이것을 간절함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상대가 순수하고 간절하게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저절로 '도와줘야지'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할 때도, 어떤 것에 대한 간절함이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요. 간절한 기도와 정성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끼고 있던 반지나 아끼던 옷도 척척 내어 놓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속임수나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에 주변 사람들이 감동을 하게 되면, ‘좋은 옷 좀 안 입으면 어때’, ‘좋은 음식 좀 안 먹으면 어때’ 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돈이 있어서 돕는 것도 아니고,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간절함에 감동을 받게 되면 ‘저 사람을 내가 꼭 도와야 되겠다’, ‘이 일은 꼭 되도록 해야겠다’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정토회가 여기에 이르게 된 것도, 정토회를 창립할 당시에 함께한 젊은이들의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당시 우리들은 '한국 불교가 더 이상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고 변해야 한다' 하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불교계 안에서 서로 절을 뺏기 위해 스님들끼리도 다툼이 자주 일어났고, 신문에도 연일 부도덕한 스님들의 기사가 나서 불교가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 스님들을 욕하고 비난했다면 더 큰 싸움이 되었을 거예요. 정토회를 창립한 젊은이들은 '우리라도 부처님 법을 바르게 알고 실천하자' 하고 발원하며 간절하게 소망했습니다. 이런 간절함이 오늘날 정토회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겁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땅에 전쟁은 없어야 된다, 정말 두 번 다시는 그 참혹한 전쟁, 수많은 사람이 죽고 헤어지고 다치고, 평생 모은 재산이 다 불타버리는 그 고통을 다시는 겪어서는 안 되겠다. 한반도의 평화는 꼭 지켜내야 되겠다.'
이런 마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간절함을 갖게 되면, 이웃 나라도 우리의 평화를 돕게 됩니다. 또한 국가 지도자가 그런 간절함을 갖고 호소를 하거나 활동을 한다면, 그 사람을 보고 감동을 해서 전 국민이 함께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게 됩니다.
정토회에서 처음 북한동포돕기를 할 당시 남한과 북한은 원수지간이라고 할 수 있었어요. 정부 정책이나 국민들의 정서가 북한에 매우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 동포들이 굶어 죽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발원하였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되겠다, 정말 그들이 내 형제, 내 부모라는 생각으로 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어떤 위험이 닥쳐도 그들을 살려야 한다.‘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북한 동포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런 간절한 정성과 행동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감동을 받은 거예요. 그렇게 한 사람이 참여하고 두 사람이 참여하면서, 세상 사람들도 조금씩 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정부 정책도 바꿀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적을 만들 때는 바로 이런 정성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태평한 시대에 살다 보니 그런 간절함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기도를 할 때도 그런 간절함이 없어진 것 같아요. 안 좋은 습관을 바꾸려고 할 때도 '내가 정말 이것만은 꼭 바꿔야 되겠다'라는 간절함이 있으면 어떤 것도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큰 장애가 닥쳐도 그 어려움을 극복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장애나 시련이 닥치면 그 앞에서 포기해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까지 할 게 뭐가 있을까?’, ‘먹고 싶은 거 안 먹는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자기 변화를 못 일으키는 겁니다. 무언가 자기 변화를 이루려면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처럼 몸을 완전히 바꾼다는 각오로 간절히 임해야 합니다. 먹고 싶은 거 먹고, 자고 싶은 거 자고, 다니고 싶으면 다니는 것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어떤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간절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변화를 추구하는 간절함이 없기 때문에 바뀌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담배를 정말 끊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즉시 끊어야 합니다. 피우고 싶은 마음에 죽을 것 같아도 안 피워야 해요. '담배를 끊어야 된다'는 생각이 간절하다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는 '담배 안 피우고 1년 더 살면 뭐하나, 빨리 죽으면 되지' 이렇게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습관을 바꾸는 데 큰 장애입니다. 이때 간절함이 없는 사람은 대부분 그 장애에 굴복하지만, 간절함이 있는 사람은 그런 마음을 이겨내고 극복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는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이나 부부 생활도 금하고, 찬물로 목욕하고 산에 가서 곡기도 끊는, 그런 정성과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행동하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얼마나 간절하면 저렇게까지 하겠느냐' 하는 거예요.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얼마나 간절하면 저렇게까지 할까' 하는 그 마음에 사람들이 감동을 하는 겁니다. 종교적으로는 '신의 은혜를 입었다',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이렇게 표현하지만, 사실은 기도하고 수행하는 사람의 간절한 행동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이 간절함이 사람을 감동시켜서 기적을 만들기 때문에 예로부터 '지극한 정성은 하늘도 감동시킨다'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기적을 만든다고 하지만, 그 하늘이 곧 사람이라는 말이에요.

이 간절함은 우리 몸에도 영향을 줍니다. 간절함이 지극하면 무의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무의식의 변화가 일어나면 우리 몸의 자율신경에 영향을 주게 되고, 그래서 불치병이 낫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물론 세균성 감염이나 뼈가 부러진 것을 이렇게 기도해서 해결하겠다고 하면 어리석은 방법이겠지요. 모든 것을 다 그렇게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간절함이 이런 기적을 만들 때가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은 지극히 기도를 했습니다.
오늘 우리 대한민국이 이렇게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된 것도 우리 국민들의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왜 우리는 대대로 가난하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지도자와 국민들이 근면하게 일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동남아 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 함께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딛고 나아가서 우리나라를 더욱 더 발전시키고,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주변 나라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없는 것 같아요. '나만 잘 살면 된다' 하는 생각이 만연하여 부동산이나 코인 등 투기 열풍이 불고, 노력은 안 하고 요행으로 어쨌든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진 것 같습니다. 경제 성장은 둔화되고, 사회 갈등이 심해지고, 성장세가 내리막길로 갈 조짐들이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나 자신의 변화와 가정의 화목, 정토회의 발전을 위해서, 우리나라의 발전과 평화, 나아가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쓰임이 되어야겠다'라고 하는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성질이 문제라면 내 성질을 좀 고치고, 나쁜 습관이 문제라면 그 습관을 좀 고치고, 내가 나를 괴롭히는 마음이 문제라면 그 마음을 좀 바꿔봐야 합니다.
이대로는 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올해는 '내가 나를 꼭 극복해야겠다' 하는 간절한 마음을 내어 보시기 바랍니다. 정초에 여러분들이 이런 간절함과 올바른 태도를 갖고 꾸준히 정진해나가게 되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 '저 사람 옛날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이런 말을 주변에서 듣게 될 거예요. 물론 남에게 좋은 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래야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간절하게 정진하고 정성을 모으면 그런 결과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올해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서 기도해 봅시다. 이런저런 생각이 나더라도 거기에 끌려 다니지 않고 딱 마음을 모아서 해보세요. ‘다리가 아프네’, ‘땀이 나네’, ‘옆 사람이 시끄럽네’ 이런 데에 신경을 꺼 보세요. 그런 것이 일어나도 '그렇구나' 하고, 오직 내 기도에 집중을 해보세요. 이런 관점을 갖고 정진을 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법문이 끝나고 다 함께 300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생중계 화면은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 설법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유수 스님의 집전으로 현장에 모인 대중들의 우렁찬 염불 소리가 랜선을 타고 울려 퍼졌습니다. 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정토회 회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배 한 배 염주를 돌려가며 절을 했습니다.

“사생육도 법계중생 다겁생래 지은 업장 지금 내가 참회하니 모두 소멸하여지고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게 하여지이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사홍서원으로 2일째 정초기도를 마쳤습니다.

스님은 오늘따라 목이 많이 잠겼습니다. 그래서 법회 후 오후에는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경주에서 이비인후과 치료를 받고, 부산으로 가서 치과 진료를 받고, 저녁 무렵에는 목과 어깨의 통증을 완화하기 위한 치료를 받았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다시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한 후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3700여 명이 동시 접속한 가운데, 먼저 스님이 약 30분 동안 지난 한 달 동안 인도를 다녀온 소식을 자세하게 공유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네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약 한 시간 동안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그중 첫 번째 질문자는 반복되는 폭력적 분노를 멈추고 싶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삼독심 중 하나인 ‘나’라는 고착된 착각, 곧 어리석음과 그로부터 타오르는 분노의 실체를 낱낱이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나 머리로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제압되지 않는 극단적인 공격성과, 현실에서 마주한 구체적인 사례들 앞에서 제 수행의 처절한 한계를 실감했습니다. 이제 저는 잘못을 알면서도 반복해 온 제 행동을 더 이상 정당화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죄책감에만 머무르기보다, 냉정한 자기 성찰로 제 허물을 직시하려 합니다. 타인을 원망하는 마음을 끊고, 오직 제 업을 제 책임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하늘과 제 자신 앞에 1년간의 침묵을 맹세했습니다. 감정이 격해지면 즉시 자리를 피하는 것을 절대적인 규율로 삼았고, 2027년 2월 17일까지 스스로를 단단한 형틀에 가두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침묵의 수행이 단순한 ‘벌’로 끝나지 않고, 업장을 녹여 참된 자유로 나아가는 수행이 되려면 저는 앞으로 무엇을 더 바라보고, 무엇을 더 놓아야 할까요?”
“탐진치 삼독심이 어쩌고 하는 것은 추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즉문즉설에서는 질문을 할 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지금 나는 이런 상황이고, 이런 고뇌 속에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느냐,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손가락으로 탁 짚듯이 ‘내 고뇌의 뿌리가 이것이구나’ 하고 정확히 짚어야 해요. 그래야 거기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를 악물고 죽기 살기로 해보겠다는 것은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하수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선택하는 수행 방식에 가깝습니다. 왜 이를 악물고 침묵을 하겠다고 합니까? 말하라고 입이 생겼는데, 왜 말을 안 하겠다고 합니까? 그렇게 하려면 그만한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왜 침묵하려고 합니까?”
“제가 분노를 이기지 못해 작은아버지께 흉기를 들고 위협을 가했고,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까지 내뱉었습니다. 이전에도 다른 사람에게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멈춰 보고 싶었습니다. 달라지고 싶었고, 그 방법으로 ‘침묵’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작은아버지한테는 왜 화가 났는데요?”
“사촌 동생이 잘못한 일이 있어서 제가 ‘그러지 말라’고 훈계했을 뿐인데, 작은아버지께서 왜 동생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며 어른의 권위로 누르듯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제 정의감이 훼손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세대 차이에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해요. 오늘 아침 기사에 사립학교 교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학교를 유명하게 만들려면 학생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켜서 어느 대학에 몇 명을 보냈다는 결과를 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숙제를 안 해 오면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왜 공부 안 하냐’며 배를 툭툭 치면서 다그쳤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학교 다녔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보다 더한 일도 많았습니다. 숙제를 안 해 가면 손바닥 맞는 걸 당연하게 여겼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때는 그걸 폭행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의 매’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젊은 세대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게 사랑의 매냐, 학교 폭력이냐’ 하는 논쟁이 10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결국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서 결론이 났어요. 교육 목적이라도 폭력은 폭력이라는 겁니다. 의도가 좋아도 법적으로는 폭력에 해당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학생이 선생님을 학교 폭력으로 고발하여 재판에 회부됐다는 게 오늘 기사 내용입니다.
지금 사회 분위기는 이렇습니다. 예전에는 부모가 자식을 때려도 ‘내 자식 내가 때리는데 왜 간섭하느냐?’라고 했어요. 주인이 종을 때려도, 남편이 아내를 때려도, 선생이 학생을 때려도 간섭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 가정폭력이고 학교 폭력입니다. 엄마라도 아이를 때릴 수 없고, 남편이라도 아내를 때릴 수 없고, 사장이라도 종업원을 때릴 수가 없어요. 불과 10년 전만 해도 종업원을 폭행하는 사건이 신문에 자주 났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폭력이지요. 예전에는 좋아한다고 계속 따라다니는 걸 진실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스토킹이에요. 범죄입니다. 이렇게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질문자가 사촌 동생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본인 입장에서는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어요. 내가 사촌 동생에게 이 정도는 훈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그 삼촌도 자기 조카에게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자기만 정당하고 상대는 옳지 않다고 여기는 마음이 강하다 보니, 삼촌의 부당함만 보이고 분노가 치솟은 것입니다.
지금 질문자의 말을 들어보면 두 가지가 보입니다. 하나는 화가 나면 못 참고 뚜껑이 확 열리는 성향이 있다는 겁니다. 이건 위험해요. 두 번째는 ‘내가 옳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에 대한 처방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순간적인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서 행동으로 튀어나올 위험이 있다면 정신과의 도움을 받는 게 필요합니다. 이건 참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그 순간에는 감정이 의식을 덮어버려서 통제가 안 됩니다. 예전에는 ‘성질이 더럽다’고 했지만, 지금은 감정 조절이 안 되는 병으로 봅니다. 약물 치료로 완화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둘째,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엎드려 절을 하면서라도 계속 되뇌어야 해요.
‘사람의 생각은 다 다르다. 내가 옳다고 할 것은 없다.’
생각이 다를 뿐이지, 누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옳다는 이 집착을 내려놓아야 해요. 그래야 나와 다른 이야기를 들을 때 화가 덜 납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연인 관계를 보세요. 여자친구든 남자친구든 각각 독립된 인격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예요. 서로 좋아서 만났을 뿐이지, 상대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갈등이 생겨 폭력이 행사되면 요즘은 데이트 폭력이라고 하지요. 이것도 처벌이 매우 엄격합니다. 실제 판결 사례를 보면, 두 사람이 좋아서 성관계를 맺다가 여성이 ‘싫다, 안 하겠다’고 했는데 남성이 ‘무슨 소리냐, 너도 할 생각이 있어서 여기 온 것 아니냐’고 다투다가 결국 성폭력으로 실형을 받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만큼 기준이 엄격해졌다는 거예요. 반대로, 또 다른 사례에서는 여성이 안 하겠다고 하자 남성이 즉시 ‘알았어’ 하고 멈췄습니다. 그럼에도 신고는 되었지만, 재판 결과는 무죄였습니다. 왜냐하면 상대의 의사를 즉시 존중했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이런 시대입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이면 안 됩니다. 상대가 거부 의사를 밝혔는데도 존중하지 않으면 폭행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결혼을 했더라도 아내나 남편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이혼 사유는 되지만 형법상 죄는 아닙니다. 결혼을 했더라도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배우자의 외도로 인해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있지만, 형사 처벌 대상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법도 이렇게 바뀌었는데, 질문자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같이 화를 내며 흉기를 휘두르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오늘 질문을 참 잘 했습니다. 만약 이 성질을 갖고 사회생활을 했다면 큰 문제가 생겼을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온갖 총기사고가 나는 것도 정신적인 문제로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나라는 총기가 없기 때문에 대량 살상은 일어나지 않지만, 칼부림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최근에도 헤어진 전 연인을 살해하거나, 부모가 결혼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살해해서 무기징역을 받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런 사례들이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치료가 필요합니다. 성질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내가 옳다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끊임없이 되뇌며 절을 하면서 '우리는 자유인이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슴 속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좋다는 의사도 표현할 수 있지만, 싫다는 의사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항상 '남의 뜻을 존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과는 반대로, 내 뜻이 존중받지 못할 때 화를 내며 대응합니다. 질문자의 경우도 삼촌이 나의 뜻을 존중하지 않자 바로 화가 올라왔습니다. 상대방이 내 뜻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서, 정작 자기 자신도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지 않은 것입니다.

질문자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이 전적으로 질문자의 잘못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태어나 보니 호르몬 분비가 과다했을 수도 있고, 어릴 때부터 폭력적인 집안에서 자란 내력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유전처럼 그런 성질을 이어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한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이런 성질이 앞으로 질문자에게 큰 손실을 끼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질문자 스스로 치료를 하고 완화시켜야 합니다.
데이트를 하다가 헤어지더라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고 해야 하고, 이혼을 하더라도 '그동안 잘 살았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사업을 하다 동업자와 결별하더라도, 사기를 당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동안 같이 사업 잘 했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함께할 수도 있고, 헤어질 수도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매일 108배를 한다면 화내는 성질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것은 안으로 분노를 축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과격하고 무섭게 터질 수 있습니다. 침묵은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침묵보다는 법당에 가서 '내가 옳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를 마음에 새기며 절을 하는 게 좋습니다. 항상 상대방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작년에 여자 친구와 헤어졌지만 그 때는 잘 받아들이고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그런 식으로 터졌는지 모르겠고, 상대가 선을 넘었다고 해서 흉기까지 든 것은 너무나 후회가 됩니다.”
“한 번 실수는 괜찮아요. 질문자가 실수를 했기 때문에, 나에게 위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앞으로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을 수가 있는 겁니다. 만약 이런 실수를 거치지 않고 진짜로 흉기를 휘둘렀다면, 20년 이상 감옥에 갈 수도 있었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후회하지 말고, 자신에게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계기로 삼으세요. 그러면 앞으로의 재앙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흥분을 진정시키는 약과 참회의 절을 하는 것을 겸하면, 자기 통제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하지 않고 화가 나면 자리를 벗어나기로 한 것조차도 제 멋대로 옳다고 생각한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점을 알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회한다는 것은 잘못을 자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이 이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자세입니다. 자신이 잘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오히려 '내가 이럴 수 있으니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 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참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즉문즉설 생방송을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오후 내내 병원 진료를 받아서 몸을 조금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정초기도 3일째 날로 회향 법문을 하고 마지막 정진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
전체 댓글 보기스님의하루 최신글
다음 글이 없습니다.
이전글“절을 할 때 번뇌가 올라오면, 어떻게 해야 정진이 잘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