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8.7. 동북아역사기행 5일째, 용정, 도문, 연길
"왜 독립운동사가 왜곡되고 축소되었을까요?"

안녕하세요. 동북아역사기행 5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를 집중적으로 둘러보는 날입니다.

기행단은 숙소를 나와 새벽 5시에 화룡을 출발하여 대종교 3인묘로 향했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 스님이 오늘 변경된 일정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원래 계획은 새벽 시장에 가서 아침을 먼저 먹고 대종교 3인묘로 가려고 했는데, 중국 공안이 계속 감시를 하니까 새벽 일찍 대종교 3인묘를 먼저 보러 가겠습니다. 조용하고 신속하게 움직여 주세요. 중국 공안이 우리를 쫓아오면 우리는 벌써 저 멀리 사라져 있어야 합니다. 여기는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가 있는 곳이어서 우리도 유격 작전을 하듯이 다녀야 합니다. (웃음)

법이라는 것은 지킬 만한 정당성이 있어야 되잖아요. 지킬 수 없는 법을 자꾸 만들어서 지키라고 하는 것도 문제지만, 선조들의 독립운동 유적지에 가면 안 된다는 것은 중국 법에도 없어요. 후손들이 자신들의 조상 묘에 찾아와서 인사하는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동양 문화의 예의범절인데 그걸 막으려고 하니까 유격 작전을 안 할 수가 없네요.”

버스에서 내려 조용히 대종교 3인묘를 참배했습니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나철, 김교헌, 서일 선생님의 무덤 세 개가 나란히 모셔져 있었습니다. 아무도 예초를 하지 않아 풀이 무성했습니다.

절을 올리기 전에 스님이 대종교 3인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했습니다.

“나철 선생님께서는 동지들을 모아 일본의 신도에 맞서 대종교를 창시해서 국조 단군을 받들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신 분입니다. 일본의 폭정을 규탄하며 기도를 드리다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실 때 시신을 식민지 나라에 두지 말고 백두산 밑에 안장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셔서 연변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 옆에 위치한 이곳 언덕에 묘소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2대 교주 김교헌 선생님은 대종교 총본사를 국내에서 만주의 화룡으로 옮기고 포교와 독립운동에 전념하신 분입니다. 나중에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총본사를 다시 흑룡강성 발해진으로 옮기긴 했지만, 결국 일제의 보복 토벌 작전인 경신대참변 때 병을 얻어 1923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서일 선생님을 3대 교주로 모시려 했으나 교주보다는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사양을 하셔서 3대 교주는 다른 분이 되셨습니다. 1920년에 우리 독립군은 일본군과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로 인해 이곳에 살던 우리 민족은 경신대참변(庚申大慘變)이라는 학살을 당하게 됩니다. 그다음 해인 1921년에는 일본군을 피해서 러시아로 갔다가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으로 인해 독립군이 궤멸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서일 선생님이 자결을 하셨습니다.

이분들의 묘는 마땅히 우리나라에 모셔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저는 여기 올 때마다 늘 가슴이 아픕니다. 지금도 이분들에게 제대로 된 제례 의식을 하지 못해 더욱 죄송한 마음입니다.”

이어서 대중을 대표하여 세 사람이 앞으로 나와 삼배를 했습니다.

오직 독립의 원을 품고 이곳에 와서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에게 충분한 예우를 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기행단은 마음으로나마 깊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절을 올렸습니다.


해마다 역사기행단이 낫을 가져와 예초를 하고 가곤 했는데, 올해는 중국 정부의 감시로 예초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서둘러 다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해가 떠오르고 기행단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화룡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시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다 함께 교재를 읽으며 나철, 김교헌, 서일, 세 분이 하신 독립운동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화룡 시장에는 옥수수, 두부, 과일 등 먹거리가 풍성했습니다. 각자 입맛에 맞게 요기를 한 후 간식거리를 구입하여 다시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스님은 두부 한 모를 사 와서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6시 30분에 화룡을 출발하여 용정으로 향했습니다. 도로 옆으로 넓은 벌판이 펼쳐졌습니다. 스님은 이곳이 한때 발해의 수도였고 5경 중 하나인 중경현덕 부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발해 중경 현덕부 유적지는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창문 너머 중견현덕부를 바라보았습니다.

오전 7시 40분에 용정 시내에 위치한 대성중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학교로 윤동주 시비가 남아 있는 곳입니다. 기행단이 도착하여 들어가 보려고 하는데 교문이 닫힌 채 옛날 건물을 허물고 신축 건물을 짓고 있었습니다.

중국 공안이 따라와 출입을 막았습니다. 스태프가 앞에서 사진만 찍으면 안 되는지 물었지만 허락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방문을 못하게 되자 스님이 송수신기로 아쉬운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여기가 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교입니다. 원래 옛날에는 이층으로 된 건물이 한 채 있었고, 그곳이 전시실이었습니다. 지금은 건물을 뜯어 역사의 흔적을 없애고 신축 건물을 짓고 있네요.

어제 가지 못하게 했던 청산리 전투터도 중국 공안이 출입을 계속 막는다면, 사람들이 한 번, 두 번 와 보다가 세 번째도 계속 막을 경우 다음부터는 역사기행 일정에서 제외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잊히고 허물어지겠지요. 그렇게 역사를 없애고 있는 것입니다. 대성중학교도 한국 사람들이 자꾸 이곳을 보러 오니까 아예 과거의 건물을 뜯어버리고 신축 건물을 세웠습니다. 이런 게 바로 역사의 흔적 지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새로 건물을 지어야 할 필요성도 있겠지만, 과거의 역사적 유물을 보호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역사의 흔적을 지우려고 하면 민심을 잃게 됩니다

중국은 자국 내부에서는 강경한 정책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한국 국민에 대해서는 일제 침략에 맞서 함께 싸웠던 옛날 역사를 교감하면서 상호 존중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중 간의 악감정을 해소할 수 있고, 나아가 한국 젊은이들도 중국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역사 기행을 하지 못하게 막는 정책은 악수(惡手)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한중 관계가 안 좋은 때일수록 한국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사실 공산주의란 권력자의 눈치를 보게 하는 게 아니라 민심을 얻는 게 본래 기본 이념입니다.

중국은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많은 역사적 공통점을 함께 가질 수 있는 요소가 많습니다. 한중 간에 ‘김치가 너희 것이냐, 우리 것이냐’, ‘단오절이 너희 것이냐, 우리 것이냐’ 하면서 싸우는데,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화적 공유를 통해 ‘같은 문명권’이라는 인식을 갖고 광범위한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정책을 써야 합니다. 내 것, 네 것을 따지다 보면 이웃과 형제간에도 갈등만 더 커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역사기행을 하러 온다고 할 때, 중국 정부가 묘소에 난 풀도 베어 놓고, 정비를 잘 해 놓은 상태에서 참배하도록 해주면 서로가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돌아갈 때 십시일반 모금해서 수고했다고 감사의 표시를 할 수가 있잖아요. 이런 게 진정으로 민심을 얻는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 용두레 우물로 향했습니다. 이승용 님이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용정이라는 지명이 용두레 우물에서 나왔습니다. 어느 날 젊은이가 밭을 갈다가 파묻힌 우물을 발견했는데 우물물이 깨끗하고 맛이 좋았다고 합니다. 마을에서 용두레를 만들어 오가는 길손들이 목을 축이게 하면서 용두레촌이라고 불리다가 용두레의 ‘용’ 자와 우물 ‘정’ 자를 합쳐 이름을 ‘용정’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용문교를 지나 일송정이 있는 비암산으로 향했습니다.

옛날에는 차를 주차장에 대고 한참을 걸어 올라갔지만, 이제 셔틀버스를 운행해서 거의 꼭대기까지 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기념비 앞에서 차량별로 사진을 찍고 다시 계단을 걸어 올랐습니다.


8시 30분에 일송정에 도착했습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당시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선조들의 마음을 잠시 느껴보았습니다.

먼저 스님이 주변의 풍경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중국 용정시(龍井市)에 위치한 비암산(琵岩山)입니다. 앞에 펼쳐진 도시가 바로 용정입니다.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이 해란강(海蘭江)입니다. 정면에 보이는 봉우리는 모아산(帽兒山)입니다. ‘모아(帽兒)’는 ‘아이 모자’와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 너머는 연길시입니다. 이곳에서 약 20분 정도 고개를 넘어가면 연길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강이 부루하통하(布尔哈通河)입니다. 부루하통하는 해란강과 만나 흐르며, 이후 왕청 지역에서 흘러 내려오는 가야하(嘎呀河)와 합쳐져 두만강으로 이어집니다.

반대편으로 돌아보면 들판 위로 흘러 내려오는 강이 바로 해란강입니다. 이 지역은 과거 중경 현덕부의 중심지였던 화룡벌입니다. 현재 우리가 바라보는 들판은 용정벌이라 부릅니다.

일송정(一松亭)은 1932년 윤해영 시인이 가사를 쓴 노래 ‘선구자’를 통해 유명해졌습니다. 일송정은 여기에 정자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고, 이 산꼭대기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정자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이 소나무를 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다 보니 일본이 나무를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베어버렸다는 설도 있고, 사격 연습 대상으로 삼아서 나무가 죽게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 관광객들이 소나무를 계속 그리워하자, 이곳에 정자를 세우게 되었고, 백두산에서 소나무를 가져와서 심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져온 소나무가 계속 고사하여 새로 심고, 현재 심어진 나무는 일곱 번째 나무가 살아남은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선구자 노래에 나오는 일송정이 바로 이곳입니다. 다 함께 '선구자'와 '고향의 봄'을 불러보았습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 낯선 중국 땅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조선 민족의 기개를 놓치지 않았던 그분들의 마음이 노래 가사에서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따뜻한 남쪽 고향을 그리워했을 그 마음도 잠시 느껴보았습니다. 용정을 내려다보며 다 함께 노래를 부르니 가슴이 더욱 애잔했습니다.

일송정을 내려온 후 두만강으로 향했습니다. 두만강 강변에 위치한 마패촌에는 발해 시대의 24개 주춧돌이 있습니다. 마패 24석을 보고 도문으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나 중국 공안이 따라와서 두만강 국경 변으로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쉽지만 또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마패 24석 방문을 포기하고 곧바로 도문으로 가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11시 40분에 냉면집에 도착하자 역사기행을 물심양면으로 돌봐주셨던 도문시 전 종교국장 김학길 님과 조선족 사기피해자협회 훈춘 지부장을 하셨던 오금숙 님이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찾아왔습니다. 두 분은 JTS가 북한 인도적 지원을 할 때도 많은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스님이 오시길 오래 기다렸습니다. 늘 한결같으시네요.”

함께 냉면을 먹으며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중도 삼삼오오 모여 냉면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북한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두만강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함께 공원을 걸으며 저 멀리 북한 땅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이곳에서 수많은 북한 난민이 넘어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좋은 벗들에서 도운 북한 난민들은 대부분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두만강 건너편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여서 조선 사람이 많이 살다 보니, 북한 주민으로서는 강을 건너기도 쉽고, 건너와서 보호받기도 쉽고, 다른 곳으로 가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난민의 거의 80퍼센트가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20퍼센트가 압록강을 건너 장백으로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함경북도와 함경남도 출신입니다.

강 건너편은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읍입니다. 10여 년 전, 큰 비로 인해 두만강이 범람하면서 북한 쪽 둑이 무너졌고, 이로 인해 남양읍 마을 전체가 물에 휩쓸려 사라졌습니다. 지금 보이는 저 집들은 모두 홍수 이후에 새로 지어졌습니다. 예전 집들은 좀 우중충했는데 지금 집들은 비교적 깨끗한 편입니다.

저기 북한 산을 보시면 나무가 거의 없죠? 첫째는 땔감으로 써서 그렇고, 둘째는 뙈기밭으로 만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옛날과 비교하면 지금은 나무가 많아진 편입니다. 예전에는 그야말로 민둥산이었는데, 최근 10년간 북한 당국이 나무를 심도록 장려하면서 산림 상태가 다소 회복된 편입니다.

편지를 띄우고 몇 달을 기다리던 강가의 사람들

고난의 행군 시기, 많은 북한 주민들이 중국에 있는 친척과 연락하기 위해 두만강 강가에 나와 편지를 띄우고, 몇 달씩 강가에 머물며 답장을 기다렸습니다. 노천에서 숙식하며 애타게 소식을 기다렸지만, 중국에 사는 친척들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 6촌이나 8촌의 먼 친척 관계이다 보니 한두 번 도움을 주다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슴 아픈 과거입니다.

JTS에서는 여기서 북한으로 이어지는 철길을 통해서 식량과 비료를 북한으로 많이 보냈습니다. 저 철길 밑에서 넘어온 북한 어린이 두 명을 제가 한국으로 데려와서 정토법당에서 공동체 생활을 몇 년간 같이 했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에서 대학도 졸업했고, 사회로 나가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들이 하는 얘기가 정토회는 살면 살수록 북한보다 더 살기 어렵다고 합니다. 북한 사람들도 새벽 4시에는 안 일어난다고 해요. 기왕 자본주의 사회에 왔으니까 자본주의 방식으로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해서 제가 ‘알았다. 나가서 살아라.’라고 했습니다.” (웃음)

저 멀리 두만강을 건너는 조중우호다리가 보였습니다. 난간의 색깔이 달라지는 곳이 중국과 북한의 국경이라고 합니다.

한 시간 동안 두만강을 따라 걸은 후 1시 30분에 다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이제 기행단은 한반도의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버스가 이동하는 중에 갑자기 중국 공안이 또 못 가게 길을 막았습니다. 이유는 산사태가 나서 도로 공사를 하고 있는 관계로 못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버스가 멈춰 서자 스님이 말했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뭐든지 막으니까 통제를 하는 것인지 산사태가 난 것인지 알 수가 없네요. 돌아갑시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여기가 한반도 최북단이라고 생각하세요.” (웃음)

아쉽지만 또 발길을 돌렸습니다.

다음은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인 봉오동 전적지로 향했습니다. 이곳도 중국 정부가 출입을 막을 것이라고 미리 예상을 하고 가보았습니다.

도문 시내에서 북쪽으로 9km를 이동하여 오후 2시 20분에 봉오동 전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예상대로 출입은 금지되었습니다. 봉오동 저수지 안에 전적지가 있는데, 저수지의 출입문이 꽁꽁 닫혀 있었습니다. 저수지 앞 대문에서 저 멀리 봉오동 골을 바라보며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곳은 봉오동 골입니다. 과거에는 황무지였으나 최진동 형제들이 국가로부터 땅을 불하받아 개발해서 상동, 중동, 하동이라는 세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최진동, 최운산 장군들이 독립군의 재정을 지원하고, 홍범도 장군이 군사 책임을 맡아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20년 일본군이 국경을 넘어 공격해 오자 봉오동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현재는 저수지를 조성하여 출입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봉오동 저수지 앞에서 기념사진은 찍을 수 있었습니다. 차량별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다시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이제 기행단은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중심 도시인 연길로 향했습니다. 도문에서 차로 한 시간을 이동하여 오후 3시 30분에 연길에 도착했습니다.

가장 먼저 연변박물관을 관람했습니다. 중국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조선족의 어제와 오늘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총 500여 점의 전시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특별한 설명 없이 조용히 전시물을 관람하고 나왔습니다.



박물관을 나오며 스님이 말했습니다.

“전시물을 보니까 이 지역도 오래전부터 중국 땅이었다고 표현을 해놓았네요. 발해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옥저까지도 다 중국 역사로 편입시켜 버렸습니다. 중국에는 여러 소수민족이 있었지만 지금은 하나의 나라라고 강조하는 것은 좋은데, 그것이 3천 년 전에도 그랬다고 표기해 놓은 겁니다. 여기는 한족이 살던 중원이 전혀 아닌데도 말이죠.”

박물관을 나와 숙소에 도착하자 하늘 위로 무지개가 떴습니다.

숙소로 이동하여 짐을 푼 후 오후 5시 20분에 숙소 로비에서 스님을 찾아온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스님이 북한 난민 지원과 인도적 지원을 할 때 헌신적인 도움을 주신 분들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몇 년 만인가요. 스님을 오래 기다렸습니다. 스님은 똑같으시네요.”

직접 농사지은 옥수수, 직접 말린 민들레, 잣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함께 식사 자리로 이동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6시부터 역사기행단과 손님들이 함께 자리한 가운데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칠 무렵 스님이 손님들을 소개했습니다.

“이분들은 조선족 아리랑상조협회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북한에서 넘어온 난민들을 돕기 위해 많은 헌신을 하신 분들입니다. 처음에는 조선족 사기피해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해오셨고,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북한에서 넘어온 난민들을 두만강 변에서 구호하는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때 이분들이 ‘왜 좋은 일을 하는데도 드러내놓고 자랑하기는커녕 죄지은 사람처럼 숨어서 해야 하느냐?’라고 반문하시며 활동을 해주셨어요. 현재는 아리랑상조협회를 만들어 이웃을 돕고 있습니다.

동북아 역사기행이 가능했던 데에는 두 분의 공로가 큽니다. 한 분은 역사기행의 내용을 만들어주신 연변대학교 발해연구소 소장 방학봉 교수님이고, 다른 한 분은 역사기행이 가능하도록 기반을 만들어주신 조춘호 선생님입니다. 방 교수님은 작고하셨고, 조 선생님은 병환 중이십니다. 오늘 방 교수님의 사모님이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셨습니다. 사모님은 연변대학교 병원의 의사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북한 난민들에게 의료적 도움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오셨습니다. 북한 난민들의 대부분은 신분증이 없어 병원 치료를 받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때 교수님이 적극적으로 치료도 해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대중은 뜨거운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한 분 한 분 일어나 스님과의 인연, 역사기행과 난민 돕기에 얽힌 사연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스님은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얼굴을 드러내고 살아가려면 보이지 않는 몸속의 수많은 기관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정토회가 그간 일궈온 많은 활동 역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분들이 묵묵히 헌신해 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특히 북한 난민을 돕는 일에 있어 이분들의 희생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밝혀져야 할 중요한 공헌이라 생각합니다.”

대중은 저녁 강의를 듣기 위해 강의실로 이동하고, 스님은 손님들에게 선물을 전달한 후 정성껏 배웅을 해드렸습니다.


이승용 님이 저녁 강의를 하는 동안 스님은 숙소에 와 계신 조춘호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조 선생님은 역사기행 시작부터 스님과 함께 역사기행을 만들어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8년 전 뇌출혈이 와서 쓰러진 후 거동이 불편해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스님은 조 선생님을 보자마자 부둥켜안으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함께 숙소로 이동하여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조 선생님은 어눌하게 말을 할 수는 있었지만, 옆에서 딸인 조신 님이 통역을 해주어야 겨우 알아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스님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으시네요. 저는 예전 같지 않아서 자유롭게 다니지 못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조 선생님이 하던 일을 딸이 잘해 나가고 있어요.”

“그래도 스님 덕분에 역사 기행 하면서 많이 걸어 다녔기 때문에 더 나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더 나빠졌을 겁니다.”

“저도 요즘 심장이 안 좋고 무릎도 안 좋아서 옛날 법륜스님이 아니에요. 대중보다 앞장서서 못 다니고 대중 뒤를 따라서 다녀야 해요. 그래서 은퇴할 때가 다 되어 가요. 돌아보니까 우리가 진짜 오래 같이 일했네요. 1998년부터 20년이 넘게 조 선생님이 역사 기행을 맡아 주었잖아요.

어제와 오늘 다섯 군데를 못 봤어요. 청산리 전투터도 못 보고, 대성중학교도 못 보고, 마패 24석도 못 보고, 한반도 최북단도 못 보고, 봉오동 전적지도 못 봤습니다. 중국 정부가 통제하기도 하고, 산사태가 나서 도로 공사를 하고 있는 문제도 있었어요. 옛날에는 버스에 삽하고 톱, 괭이, 낫을 실어서 길을 복구하면서 다녔잖아요. 30년 전에 비해 길도 더 좋아지고, 숙박 시설도 좋아졌는데, 중국 공안이 따라다니면서 통제하는 것은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네요.”

조 선생님은 식사 장소에 오지 않고 스님만 만났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몸이 불편해지고 나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가 않습니다.”

“팔이 하나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 다리를 하나 못 쓰게 되면 못 쓰는 대로 살고, 눈이 하나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산다. 이렇게 생각을 바꿔야 해요. 자꾸 옛날에 건강할 때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역사 공부는 많이 했는데, 불교 공부는 적게 해서 생각을 못 바꾸는 거예요. 불교 공부를 많이 하면 몸이 좀 불편해도 별로 개의치 않고 살 수 있어요.”

“제가 밖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게 되니까요.”

“사는 것 자체가 피해를 주면서 사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는 밥도 안 먹어야죠. 밥 먹으면 곡식에게 피해를 주게 되고, 생선 먹으면 물고기한테 피해를 주게 되는데요. 매일 피해를 주고 살면서 피해를 안 주는 척하고 그래요.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도 괜찮아요. 다들 조 선생님을 좋아해요. 휠체어 타고 한국에도 오세요. 제가 조 선생님이 잘 수 있는 방을 많이 만들어 놓았어요.”

스님은 조 선생님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기운을 듬뿍 실어준 후 가족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숙소를 나왔습니다.

스님이 조 선생님을 만나는 동안 이승용 님이 저녁 강의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저녁 8시부터 다시 스님이 강의를 이어갔습니다.

스님은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중국의 정책에 대해 아쉬움을 이야기하며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어제와 오늘은 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 과거에 비해 교통도 편해지고, 호텔도 좋아지고, 많은 면이 좋아졌지만, 우리가 원하는 역사기행을 하기에는 많은 장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지 사람들과 얘기해 보니, 현재 중국 정부의 통제가 예전보다 전반적으로 강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족 문화가 도외시되고 중국 전체의 통일성이 더 강조되는 것 같아요. 이런 상황은 어떻게 보면 중국 나름대로 미중 경쟁에서 내부 분열을 막고 단결하여 난관을 극복하자는 측면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인류문화사적으로 보면 다양성을 존중한 상태에서 결합을 할 때 힘이 나오지, 강제적인 결합은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지만 나중에는 내부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중앙정부가 돈이 많아서 지방정부에 지원을 잘해줄 때는 강제적 통제가 먹히겠지만, 나중에 중앙정부 재정이 빈약해져서 오히려 지방정부에서 돈을 걷어가는 입장이 되면 ‘이럴 바엔 우리가 독립하는 게 낫다’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면 분열이 가속화하게 됩니다.”

이어서 어제와 오늘 둘러본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를 되돌아보며 독립운동의 역사를 다시 한번 정리해 주었습니다.

왜 독립운동사가 왜곡되고 축소되었을까요?

“항일 독립운동은 비밀을 유지해야 하고, 재판을 받거나 체포되면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한 것을 안 했다고 대답하고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재판 기록 같은 것만 증거로 남고, 나머지는 증거로 남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증거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게 되면, 첫째, 독립운동을 했다는 내용이 적어집니다.

둘째, 분단 이후로 남한 정부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에 맞지 않는 내용은 배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 북한 정부에 참여했다’라고 하면,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데 도움이 안 되니까요. ‘독립운동한 사람들이 전부 대한민국 정부 구성에 관여했다’라고 해야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시대적 조류를 보면, 19세기 초엽에 전 세계는 혁명의 열풍에 휩싸여 있었고, 젊은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적 이상과 꿈을 갖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처음에는 민족주의자였지만, 러시아혁명 이후에는 대부분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 초기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갈등이 많았습니다. 중국도 국공합작 시기가 있었듯이 우리도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신간회를 창립하기도 했죠. 그러나 실제로 젊은이들의 주류는 사회주의적 성향이었습니다. 남북이 분단되고 세계적으로 이념 대립이 심해지면서 결국 우리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사람은 독립운동사에서 제외하였습니다. 이로 인한 독립운동사의 유실이 매우 컸습니다.

분단이 지워버린 독립운동의 진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독립운동 기록을 축소했고, 분단으로 인해 전체 독립운동사를 다 포용하지 못하고 남한 정부가 인정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다루었습니다. 민족주의 운동과 3.1 운동을 한 사람들은 독립운동가로 포함시켰지만, 무장 투쟁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념적인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배제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는 광복군을 제외하면 무장 투쟁을 했던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부분이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매우 왜곡하고 축소시킨 것입니다.

저는 없는 것을 만들거나 과장하자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있는 것을 모르면 알아야 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수정해야 되고, 축소되었으면 보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만 해도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립운동사 부분이 빨리 제대로 복원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상고사 복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문명사적 관점에서 우리의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상고사도 복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요하문명적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만리장성 밖 동북아시아에서 5천 년 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얘기라고 하더라도 말이죠. 몽골이나 일본에는 6천 년 전의 오랜 역사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6천 년의 역사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2천 년 전까지는 자신들의 역사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도 2천 년 전에 그들의 왕족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그 얘기는 다른 데서 이주해 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도 어딘가 다른 곳에서 이주해 왔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하문명으로 다시 보는 동북아 문명의 주인과 우리 역사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 보면 동북아 역사의 중심은 배달문명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요하문명이 우리 민족의 역사라고 아직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거기서 요나라, 금나라가 생기고 그 중심에 우리 민족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배달나라 시대에는 자기 나라를 주장하는 민족이 없었고, 조선, 부여, 고구려 시대에도 각자 우리 민족의 국가 영역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제일 먼저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워서 우리 민족과 갈등을 일으킨 것이 선비족, 즉 연나라예요. 연나라는 춘추전국시기에 중국 7웅 중의 한 나라가 됩니다. 선비족은 우리 동북아 민족의 무리 중에서 독자적으로 자기 세력을 형성한 첫 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발해가 멸망하면서 소수민족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왜냐하면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웠지만, 넓은 영역에 비해 고구려족의 인구 분포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국가 경영의 일부를 다수 인구를 차지하는 다른 민족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국가라는 개념을 배운 북방 민족들이 발해 멸망 후 독자적인 국가를 설립하게 된 거예요. 거란족이 요나라를, 그다음에 여진족이 금나라를, 그리고 몽골족이 원나라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동북아의 중심은 발해 아래 있던 소수민족들에게 넘어가고, 우리 민족은 한반도로 밀려난 형국이 된 것입니다. 이럴 때 민족사에 대한 기술을 우리 민족만으로 좁히고, 나머지를 다 우리 역사에서 부정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독립운동사에서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관여한 것 빼고는 다 부정하는 것과 같은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동북아 문명적 관점에서 보면, 처음에는 우리 민족이 중심이었지만, 이후 다른 민족이 등장해서 나라를 만들었다고 봐야 합니다.

요나라와 금나라는 우리에게 ‘신하가 되어라.’ 이렇게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항상 ‘동생이 되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얘기는 지금까지는 자신들이 동생이었다는 의미이고, 이제 자기가 커졌으니 형 동생 관계를 바꾸자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용납한 적이 한 번도 없었죠. 그러다 전쟁을 해서 지면 동생이 되지 않고 신하가 되는 거죠.

요나라와 금나라는 터무니없이 우리를 침략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운 후 우리하고 잘 지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과 잘 지내지 않고 요나라를 부정하고, 중국 송나라 하고만 우호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니 요나라가 볼 때는 형제간 우애는 제쳐두고, 다른 나라와 친하게 지낸다면서 쳐들어온 거예요. 청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어주면 되는데, 명나라 사람들보다도 더 명나라에 충성하니까 침략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의리이고, 나쁘게 말하면 국제 정세를 판단하는 실용주의적 관점이 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분만 지나치게 집착했던 거예요.

이런 큰 틀에서 동북아 민족들이 서로 자기들끼리 경쟁하면서 중원을 점령하는 동안 우리 민족은 고구려 이후 한 번도 동북아 대륙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금나라, 요나라, 청나라는 다들 동북아뿐만 아니라 중원까지 점령하려고 야망을 가졌죠. 성공하기도 하고 성공하지 못하기도 했지만요.

우리 민족은 정말 약소민족이었을까요?

동북아의 문명의 뿌리는 요하문명입니다. 우리가 요하문명적 관점에서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한족이 중심이 된 북경 이남 지역의 황하 문명보다 북경 이북 지역의 요하 문명의 역사가 오히려 좀 더 풍요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독립운동사가 왜곡되고 축소되듯이 우리 민족사도 너무 축소되다 보니, 우리 스스로 약소 민족이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은근과 끈기 같은 것을 우리 민족의 근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왜곡된 역사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일 공부하게 될 발해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대조영은 거란족과 말갈족, 고구려 유민을 통합해 진두지휘하여 이곳 연변 돈화(敦化)에 와서 동모산에 산성을 쌓고 진국을 세웠습니다. 대조영이 고구려인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방어 전략인 산성과 평지성을 연계한 구조를 만든 것입니다. 발해는 698년에 건국되었습니다.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했으니 30년 만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셈입니다.

그런데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고구려와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 왕족이, 예컨대 고구려 왕의 아들이나 동생 같은 인물이 나라를 다시 세웠다면, 나라의 이름이 당연히 ‘고구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조영은 고구려의 왕족도 귀족도 아닌, 중간 간부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고위층 중 누구도 나라를 다시 일으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간 간부 출신이 나라를 세운 것이니 고구려의 후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고구려를 그대로 복원해야 할 이유는 없었겠지요.

대조영은 왜 ‘고구려’ 대신 ‘진나라’를 세웠을까요?

우리 역사에서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만약 3·1 독립운동을 조선의 왕족이나 고위 관료들이 주도했다면, 대한제국 부흥 운동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교인들과 일반 백성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을 외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대한제국을 복원해야 할 이유가 없었고, 오히려 자신들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래서 국호는 ‘대한’을 유지하되 ‘제국’이 아니라 ‘민국’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발해도 ‘진(震) 나라’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택했습니다.

진나라는 당나라와 싸우다가 화친을 할 때 조공을 요구받았고, 이에 형식적으로 조공을 하며 평화를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당나라로부터 ‘발해국’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습니다. 원래 자국의 이름이 ‘진나라’였지만, 당나라로부터 받은 명칭이 ‘발해국’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외부적으로는 ‘발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발해’라는 명칭은 ‘발해(渤海) 연안에서 일어난 나라’라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발해국’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대진국(大震國)’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발해’가 아닌 ‘진나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무왕과 문왕 시대, 발해의 팽창과 제국 건설

이렇게 나라를 세운 뒤, 발해는 점차 영토를 확장해 갔습니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아들 대무예는 무장 출신으로 아버지를 도와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당나라에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실제로 장군 장문휴를 보내 산둥반도를 공격하고 점령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처럼 발해가 무력으로 당나라에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 사이에는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이는 발해가 강대해서 당나라가 발해를 쉽게 이길 수 없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지만, 당시 당나라 황제가 당태종처럼 ‘끝까지 정복해야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발해는 군사력 면에서 결코 당나라에 뒤지지 않을 만큼 강성했습니다. 둘째, 당나라 또한 평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두 가지 요인으로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고, 평화가 정착된 이후 발해는 제3대 문왕 시기에 경제적⋅문화적⋅예술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발해의 제2대 왕은 ‘무왕’, 제3대 왕은 ‘문왕’이라고 불립니다. 특히 무왕 시기에 이미 발해는 옛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했으며, 북쪽으로는 흑룡강 유역까지 정복하여 북쪽 영토를 더욱 확장했습니다. 이를 통해 발해는 고구려의 두 배에 달하는 넓은 영토를 가진 ‘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발해는 왜 우리의 역사에서 지워졌을까요?

당시 북쪽에는 발해가, 남쪽에는 신라가 있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발해를 역사에서 제외해 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삼국 시대가 ‘이국 시대’ 즉, ‘남북국 시대’로 전환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인식해야 발해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 되는데, 발해를 제외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평가해 버리니, 발해가 우리 역사에서 빠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후 그 신라를 고려가 계승하게 됩니다. 요나라는 고려에게 ‘너희는 신라를 계승한 것 아니냐. 그렇다면 옛 발해 땅은 본래 다 요나라 땅인데 왜 너희가 차지하려 하느냐.’ 하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서희는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했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고 한 것이다. 너희 말대로라면 발해는 원래 고구려의 땅이니 너희가 있는 땅이 다 우리 영토다.’라고 반박했습니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서희는 요나라와 협상을 통해 강동 6주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발해는 점차 우리 역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그나마 발해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그러한 인식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실학자들에 의해 역사가 잘못되었다는 문제의식이 생겨나면서, 신라의 삼국 통일이라는 표현이 아닌 ‘남북국 시대’로 정의해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등장했습니다. 이로써 비로소 발해가 우리 역사 속으로 다시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발해는 신라, 일본, 당나라와 모두 교역했지만, 발해와 신라는 지금의 남북한처럼 서로 갈등 관계였습니다. 당나라 기록에 따르면, 외국 국가 중 신라와 발해가 가장 큰 세력이었고,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를 두고 엄청나게 경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라와 발해는 크게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서로 ‘너는 너, 나는 나’ 하는 식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었기에 전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보통 ‘두 나라’로 인식되면 전쟁을 할 일이 많지 않지만, ‘하나의 나라’로 보게 되면 정통성 경쟁이 심해지고, ‘너는 내 것’이라는 생각이 생기면서 갈등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남북한 관계도 ‘하나의 나라’로 보면서 통일을 추진하기보다, 우선 ‘두 나라’로 인정하는 것이 낫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무엇이 더 좋고 나쁘냐는 관점에서 보면 안 됩니다. 역사를 통해 어떤 관점이 문제 해결에 유리한지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배우는 남북 분단의 해법

신라와 발해는 ‘두 나라’ 개념으로 확실히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후에 발해가 요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 신라는 ‘왜 우리나라에 침입하느냐’고 요나라에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발해를 ‘우리나라’라고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북문제도 앞으로 ‘두 나라’라는 개념이 확고히 굳어져 버리면, 북한이 중국에 흡수되더라도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한 나라’라는 개념으로 갈 경우에는 통일을 둘러싼 분쟁이 계속될 수 있고, ‘두 나라’ 개념으로 굳어지면 민족사적으로 굉장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여러 가지를 모두 고려해야 하며, 단순히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 속에서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살펴보고, 현재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위험을 줄이고 미래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함입니다. 물론 외국 사례에서도 배울 수 있지만, 이렇게 우리 역사 속에서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내일 발해의 유적지를 보러 가게 되는데요. 여러분도 발해에 대해 새롭게 알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강의를 한 후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명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조선족 청년이었습니다. 중국에 살 때는 조선족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졌는데, 한국에 오니까 위축되는 마음이 든다며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면 좋을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조선족인 저는 한국에서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할까요?

“저는 조선족인데, 중국에 있을 때는 조선족이라는 사실이 굉장히 자랑스러웠습니다. 어디를 가든 한족 사람들이 ‘조선족은 깨끗한 민족이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살면서는 ‘어, 조선족이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상대방이 저를 무시하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나쁩니다. 특히 제 말투 때문에 조선족이라는 걸 들켰다는 감정을 느낄 때는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이 무엇일까?’ 고민을 하게 되는데, 결국 소속감과 연결된 문제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저는 한국에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한민족이라는 소속감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스님께서는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창조성이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성’과 ‘정체성’의 관계가 잘 와닿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독일인, 일본인, 프랑스인이라면 ‘정체성’을 논하는 것보다 ‘다양성’과 ‘포용성’을 논하는 게 더 적절합니다. 열린 자세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국가의 발전에 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과거에 식민지 지배를 경험했고, 상고사에서는 중국에 대한, 근대사에서는 일본에 대한, 현대사에서는 서양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는 좀 다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는 첫째, 마음속에 비굴함이 자리 잡게 되고, 둘째, 모방 성향이 강해집니다. ‘저쪽은 우월하고, 우리는 열등하다’ 하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 남의 것을 더 좋게 보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창조성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해 당당해지기도 어렵고, 남을 포용하기도 어렵습니다. 결국 모방을 하거나 배타하게 됩니다.

예컨대, 남한은 지나치게 모방을 하고, 북한은 배타성이 심합니다. 남한은 배울 것은 배우되, 자기 것도 소중하게 여겨야 하고, 북한은 너무 배타적이지 말고 외부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이는 개방성이 필요합니다. 북한은 굶어 죽더라도 절대 고개는 숙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렇게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살면 경제적으로 궁핍해집니다. 반대로 남한은 ‘배만 부르면 된다’하는 태도가 너무 강합니다. 굶지는 않되 밥은 조금 덜 먹더라도, 때로는 고개를 들고, 필요할 때는 조금 숙일 줄도 알고, 적절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남한과 북한은 모두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자긍심’을 갖는 게 더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우리가 겪어온 비굴함을 극복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앞으로 우리의 국가 규모가 커질 것을 대비하려면 계속해서 피해 의식만 갖고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포용성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일 관계에서 일본이 무조건 사과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면, 관계 개선이 어렵습니다. 일본의 사과도 필요하긴 하지만, 우리도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과거사 문제에만 집착하지 않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이 이루어져야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가난하게 살았고, 그로 인해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되면 확실히 과거의 상처들이 어느 정도 치유가 되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과거의 열등감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권력을 갖게 되면, 그 열등의식이 나중에 반드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실제로 지도자가 겉으로는 성공했지만 내면의 상처가 남아 있을 때 그것이 권력 운영에 부작용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앞으로 잘 나가게 될 때를 대비해서 열등의식을 자기 우월주의로 덮으려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사적인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정체성 혼란을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요즘은 사람이 태어난 곳에서 계속 사는 경우가 점점 드물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라고, 지금은 미국에서 살 수가 있습니다. 나라 간에 점점 교류가 많아지면서 이런 식의 삶을 사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입국 카드를 작성할 때도 ‘어디에서 태어났나요?’, ‘국적이 어디인가요?’, ‘현재 어디에서 살고 있나요?’ 이렇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합니다. 실제 이 세 가지가 같지 않을 수 있고, 많은 경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만약 정체성을 하나의 장소에만 한정하여 정의한다면 정체성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태어난 곳, 자란 곳, 현재 살고 있는 곳이 다른 경우, 이것은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라고 현재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면, 정체성을 ‘한국 사람’, ‘일본 사람’, ‘미국 사람’ 등 하나로 삼지 말고,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라 미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식의 새로운 정체성 형성이 아직은 사회적으로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하고 남의 정체성을 빌려 나의 정체성을 찾으면 갈등이 따릅니다. 물론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항상 마음속에 혼란이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복합적인 삶의 경험을 오히려 장점으로 삼아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정체성 혼란을 겪는 사람은 ‘나는 한국말도 부족하고, 중국말도 잘 못 해’라고 못하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한국 사람들 중에서는 중국어를 제일 잘하고, 중국 사람들 중에서는 한국어를 제일 잘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이 곧 자기만의 장점이 됩니다.

여러분이 갖는 심리적 ‘자기 열등의식’은 대부분 비현실적인 비교에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노래는 가수보다 못하고, 운동은 운동선수보다 못하고, 법문은 스님보다 못하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결국 자신은 아무런 장점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누구나 어떤 부분에서는 잘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못하는 게 있습니다. 예컨대 법륜스님을 기준으로 삼더라도 법륜스님보다 내가 얼굴이 잘 생겼을 수도 있고, 키가 더 클 수도 있고, 노래를 더 잘 부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우리는 상대의 최고 수준만을 기준으로 삼아서 자신과 비교를 하니까, ‘나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 하는 열등의식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장점을 발견해서 그것을 중심으로 정체성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창조성은 결국 이렇게 정립된 정체성 위에서 나옵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라고만 생각해야 창조성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배타성을 가지면 외국 문화를 배격하고 자기 문화만 고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기 것이 없으면 남의 것을 모방만 하기 때문에 창조성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나름대로 전통 옷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데 외국에서 들어온 옷을 입어보니 편한 점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럼 기존 옷을 벗고 외국 옷을 입을까, 아니면 내 옷의 불편한 부분만 고쳐서 입을까, 이런 고민이 생깁니다. 그래서 전통 옷에서 소매의 디자인만 약간 편하게 만들어 입는 겁니다. 그건 한복도 아니고 양복도 아닌 형태가 되죠. 지금은 이걸 보고 ‘정체성도 없고 가짜 아니냐?’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런 게 창조성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성이란 게 별 게 아닙니다.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면 배타적인 성향으로 흐르기보다 창조성의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 들여온 클래식 음악을 잘 모방하면 서양 사람보다 더 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창조성이 발현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창조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 ‘한류’입니다. 한류의 대부분은 대중문화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중문화 분야를 제외하고 종교계, 학문계 등 다른 분야들은 아직 창조성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질문하고 싶은 사람들이 더 있었지만 밤이 깊어서 큰 박수로 강의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동북아역사기행 6일째 날입니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를 비롯해 강동 24석, 육정산, 동모산 등 발해 유적지를 주욱 둘러본 후 통화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2025 9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18

0/200

프린

고맙습니다.

2025-08-10 17:40:38

무량덕

중국 정부의 통제를 정부 차원에서 중국과 타협해보길 바랍니다. 통제가 심해도 동북아 역사기행은 계속되길 바래요

2025-08-10 16:35:45

감로화

우리의 역사를 축소하지 않고 정체성을 잘 확립해야겠습니다.
긴 스님의 하루를 정리해 올려주시는 제작진분들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2025-08-10 15:35:53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