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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두북수련원에서 농사일을 하고, 정토불교대학 학생들과 온라인으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산은 연초록으로 짙게 물들고, 들녘엔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되었습니다. 논마다 물이 가득 차오르고, 트랙터는 쉼 없이 땅을 갈아엎으며 모내기 준비로 분주합니다. 밭에서는 모종을 옮겨 심느라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손길이 오갑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뒤 농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습니다. 지난주 160여 명의 봉사자들이 와서 풀을 뽑아 주어 비닐하우스 주변이 한결 정돈되고 깔끔해졌습니다.
논농사는 이제 써레질을 해야 할 시기입니다. 묘당 법사님과 행자들이 트랙터를 몰고 논에서 평탄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스님도 논으로 향했습니다.
이미 한 차례 트랙터로 땅을 고르긴 했지만, 마을 어르신께서 높낮이가 아직 고르지 않다며 한 번 더 써레질을 하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써레질 전에는 논에 물을 넉넉히 받아 두어야 하는데, 어제 마을에 사정이 있어 오늘부터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물길을 넓히기 위해 배수로를 다시 파주었습니다.
트랙터가 닿지 않는 논 가장자리는 행자들이 손으로 직접 평탄화 작업을 하고, 묘당 법사님은 다시 트랙터를 몰고 논으로 들어갔습니다.
“다들 수고해 주세요. 간식도 가져왔으니 일하면서 중간에 드세요.”
스님은 묘당 법사님과 행자들을 따뜻하게 격려한 뒤, 다시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어서 일주일 전에 양삼을 심어 놓은 밭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싹이 났을까요? 한번 봅시다."
멀리서 볼 때는 싹이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연둣빛 새싹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정성헌 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께서 환경 운동 차원에서 양삼을 심는 것이 좋다고 하여 실험 삼아 재배를 시작한 것입니다. 양삼은 탄소 흡수량이 많고, 미세 먼지 저감 효과도 탁월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실험을 해 보고 재배 면적을 점차 넓혀 봅시다."
다음으로는 산 밑 밭을 찾아갔습니다. 부드러운 흙 위에 땅콩이 줄을 맞춰 나란히 심겨 있었습니다.
이어서 산 아래 밭으로 향하니, 고구마 줄기들이 촘촘히 자라 아침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숨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삽과 마대 자루를 챙겨 밭 주변 잔디를 캐기 시작했습니다. 마당에 죽은 잔디 자리가 있어 새로 심기 위해서였습니다. 삽으로 잔디를 사각형으로 잘라 뿌리째 캐서 마대 자루에 담았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마대에 담긴 잔디를 들고 스님은 마당으로 향했습니다. 잔디가 죽은 자리를 판 후 캐 온 잔디를 하나씩 옮겨 심었습니다. 옆에서 향존 법사님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습니다.
"흙이 부족해서 잔디가 또 죽으면 어떡하죠?"
스님은 웃으며 답했습니다.
"잔디는 흙이 다 떨어지고 뿌리만 남아도 잘 자랍니다.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거든요."
잔디를 심은 뒤 흙을 고르게 덮고, 발로 꾹꾹 눌러주었습니다.
“이 정도 잔디를 시장에서 사려면 얼마나 하나요?”
“아마 만 원어치는 사야 할 겁니다.”
"그럼 오늘 만 원을 번 셈이네요." (웃음)
스님은 새로 심은 잔디에 물을 듬뿍 뿌린 뒤, 전지가위를 들고 나뭇가지 손질에 나섰습니다. 옆으로 삐져나온 가지들을 정리하며 깔끔하게 다듬었습니다.
감나무도 너무 무성하게 자라, 차나 사람이 다니기 불편할까 염려되어 전지가위로 가지를 쳐 주었습니다.
가지치기를 마치자 나뭇가지 사이로 햇볕이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화단에는 봄을 맞아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꽃잎을 바라보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작약꽃이 핀 것 좀 보세요. 색이 정말 곱죠?"
작약은 햇살을 가득 머금고 풍성한 꽃잎을 활짝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건 해당화입니다. 색이 곱지요?"
해당화는 바람결에 살랑이며 은은한 향기를 퍼뜨렸고, 장미는 짙은 붉은빛으로 고운 자태를 뽐내며 고요한 봄날을 수놓고 있었습니다.
"장미꽃도 많이 피었네요."
조금은 독특한 모양의 꽃도 눈에 띄었습니다. 옆에 있던 행자가 이름을 묻자,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건 인동초꽃입니다."
연분홍빛 인동초꽃은 가지 끝에 다정하게 매달려, 봄날 풍경에 소박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스님이 인도에서 가져와 키우고 있는 보리수는 겨울을 지나며 다소 시들어 있었습니다.
"겨울에 인도 성지 순례 간다고 한참 물을 못 주었더니 가지가 많이 말라 죽었네요."
잔디를 심고 가지치기와 잡초 제거, 꽃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제 비가 와서 오늘은 선선할 줄 알았는데, 해가 나니까 꽤 덥네요."
스님은 땀으로 흠뻑 젖은 작업복을 햇볕에 말린 뒤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오후 2시부터는 두북수련원 방송실에서 정토불교대학 학생들과 온라인으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북수련원에는 ‘나비장터’가 열리고 있어서 시끌벅적했습니다. 요일 농부 봉사자 모집도 한창이었습니다.
스님이 카메라 앞에 자리하자 삼귀의와 수행문을 낭독한 후 즉문즉설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학기 정토불교대학은 백일법문과 함께 진행되면서 오프라인반, 생방송반, 기본반 등 3개 반으로 편성이 되어 총 2000여 명이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수업을 들으며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입니다.
학생 세 명의 수업 소감을 들은 후 다 함께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반갑게 인사말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두북수련원 방송실에서 여러분을 뵙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이곳에서 3년간 온라인 방송으로 법회를 했는데, 요즘은 백일법문 중이라서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1080배 정진을 하는 날이지만, 제가 무릎 연골에 문제가 생겨서 당분간 절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오후에 예정되었던 약속도 취소가 돼서 어젯밤에 두북수련원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전에는 농사일을 좀 할 수가 있었습니다. 자연 속에서 육체노동을 하다가 이렇게 방송실에서 여러분을 뵙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여덟 명이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개념이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며 영혼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이번 정토불교대학 강의에서 불교 이론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지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무아의 개념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없다면 영혼도 없다는 말씀인지요? 어렸을 때 가톨릭 성당을 오래 다녀서인지,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고, 당연히 영혼이 ‘나’라는 실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스님의 강연에서 H2O의 H와 O에는 물의 성질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은 뒤에는 보통 불교에서 말하는 지·수·화·풍으로 사라진다는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그건 질문자가 죽은 뒤에 한 번 연구해 보세요. 지금 살아 있는 사람끼리 얘기해서 뭐 하겠어요? 죽은 사람끼리 얘기해 보면 확실하게 답이 나오겠죠.
영혼이 있다는 것도 생각일 뿐이고, 영혼이 없다는 것도 생각일 뿐입니다. 신이 있다는 것도 믿음일 뿐이고, 신이 없다는 것도 믿음일 뿐입니다. ‘신이 있다.’는 것만이 믿음이고, ‘신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아닐까요? 신이 없다는 것도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믿고, 어떤 사람은 신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생각과 믿음의 문제이지, 객관적 사실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가 신이 있다고 믿거나, 신이 없다고 믿는 것에 대해 문제를 삼아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은 있다고 믿는구나.’, ‘저 사람은 없다고 믿는구나.’ 하고 바라보면 됩니다.”
“그런데 저는 나라는 존재가 조금은 있을 것 같습니다. 무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나라는 존재가 조금은 있을 것 같다는 것은 질문자의 생각일 뿐입니다”
“무아의 개념이 이해가 안 됩니다.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나는 뭐지?’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자동차는 2만여 개의 부속이 설계도에 따라 조립되어 만들어집니다. 각 부속 하나하나가 따로 있을 때 움직임, 빛, 소리 같은 성질을 지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립되면 전체로서 제3의 성질이 나타납니다. 자동차를 분해하면 그 어떤 부속에서도 움직임, 빛, 소리라는 특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자동차라는 특성은 조립된 상태에서만 나타납니다.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동차가 움직이면 그 작용이 자동차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는 다양한 요소가 조립되어 작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조립이 해체되면 그런 작동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원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고정된 실체가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확히 분석해 보면 작동하는 특성은 개별 부품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몸의 어딘가에 있는 것도 아니고, 별개로 있다가 조립되면 결합하는 것도 아니고, 해체되면 어딘가에 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조립되었을 때만 나타나는 제3의 성질일 뿐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원리를 잘 몰라 ‘나’라는 존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지만, 분석해 보면 사실 ‘나’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라는 존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이렇게 작동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실체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불성(佛性)의 개념도 맞지 않는 개념인가요?”
“그건 용어의 오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괴롭게 사는 사람이 많지만, 사람은 괴롭게 살도록 정해진 존재가 아닙니다. 정신 작용에 문제가 생겨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이 부정적 관점을 내려놓으면 누구나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붓다는 괴로움이 없는 자를 말하고,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열반이라 부릅니다. 열반을 증득한 자를 붓다라고 합니다. 누구나 괴로움 없이 살 수 있고,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붓다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붓다가 될 수 있는 성품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성품을 불성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불성이 있다고 하면 브라만 사상의 ‘아트만’처럼 몸 안에 존재하는 개별적 실체라고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불성은 아트만과는 개념이 다릅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자질이 있다.’ 하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즉석에서 직접 손들기 버튼을 누른 질문자 중 한 명은 스님의 법문을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마음은 여전히 괴롭다며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뜻을 세워서 열심히 준비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받았습니다. 이미 여러 번 도전했던 일이라 더는 시도하지 못할 것 같고, 그냥 주어진 결과대로 진학하려고 합니다. 다만 어렵게 얻은 기회를 감사하게 여기지 못하고 떨떠름하게 받아들이는 제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 능력보다 더 큰 것을 원하는 욕심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집착과 욕심을 실제로 어떻게 버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받아들이면 괴로움이 사라진다.’ 하신 말씀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괴롭습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괴로워하면 되죠.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괴로워지기 싫으면 내려놓으면 되고, 안 내려놓아지면 괴로워하면 되는 거예요.”
“머리로는 ‘받아들여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받아들여야지!’ 하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상태인 겁니다. 둘이 따로 놀고 있는 거죠. 같이 놀 때도 있지만 대부분 따로 노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과 돈이 많이 드니까 사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별개예요. 먹고 싶다는 욕구는 그대로 있지만, 돈이 부담되니 안 먹겠다는 판단을 한 거죠. 그러면 선택은 하나예요. 정말 먹고 싶으면 돈이 들어도 사 먹어야 하고, 돈이 아까우면 먹고 싶어도 안 먹어야 합니다. 둘 다 못 놓으면 괴롭습니다. 결국 배도 안 부르고, 마음도 괴로운 거죠. 누워서 ‘일어나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과, 일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별개예요. 그 둘이 갈등을 하면 잠도 못 자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거예요. 하나로 통일을 해 버리면 간단해요. 자고 싶으면 그냥 자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일어나지는 못하지만 잠은 자잖아요. 아니면 벌떡 일어나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잠은 못 자도 일어나긴 하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어나야지!’ 생각만 하면서 그냥 누워 있어요. 그러면 결국 잠도 못 자고 일어나지도 못해서 손해라는 겁니다. 자고 싶어서 자 버리면 나중에 회사에 지각해서 꾸중을 듣는 과보를 받게 됩니다. 그게 싫으면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일어나기 싫은데 어떻게 일어나요?’라고 묻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일어나기 싫지만 일어나야 한다면 벌떡 일어나는 거예요. ‘어떻게?’ 하고 묻는 게 아니고 그냥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뜨거운 물건을 손에 쥐었을 때 계속 갖고 싶으면 뜨거워도 잡고 있으면 돼요. 그러면 손을 데는 과보를 받겠죠. 손을 데기 싫으면 뜨거운 걸 놓아 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놓아요?’ 하고 묻습니다. 정말 방법을 몰라서 못 놓는 걸까요? 아닙니다. 사실은 놓기 싫은 거예요. ‘집착을 어떻게 놓습니까?’라고 묻는 건 사실은 놓기 싫다는 말입니다. 놓기 싫으면 그에 따른 과보를 받으라는 얘기예요.”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오후 4시가 되어 강연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모둠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이어 갔습니다.
방송실을 나온 스님은 곧바로 텃밭으로 향했습니다.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자, 햇살도 차츰 잦아들었습니다. 스님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농사일에 나섰습니다.
“내일 서울에 가져갈 채소를 좀 수확합시다.”
가장 먼저 무성하게 자란 고수 밭을 정리했습니다. 스님은 함께 일하는 행자들에게 작업 방법을 차근히 설명했습니다.
“너무 촘촘하게 난 건 솎아 주고, 이미 꽃대가 올라온 건 그대로 두세요. 꽃이 피게 놔 두면 됩니다.”
고수 밭에는 벌써 하얀 꽃들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가위질을 멈추지 않으며, 조밀하게 자란 고수 사이를 골라 정성껏 솎아 주었습니다. 가위 끝에서 잘려 나간 고수에서는 특유의 짙은 향이 피어올라, 저녁 공기를 향긋하게 물들였습니다.
이어서 상추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연둣빛과 자줏빛 상추들이 제각기 빛깔을 뽐내며 하늘을 향해 힘차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상추 잎을 한 장 한 장 살펴가며 조심스럽게 뜯어냈습니다.
"상추 뿌리를 벌레가 갉아먹어서 벌써 시드는 것도 있네요."
뜯은 상추를 종류별로 구분해 비닐봉지에 담았습니다. 고수와 상추를 모두 수확하고 나니 여섯 봉지가 되었습니다.
"서울에 가져가서 손님들과 대중이 조금씩 맛볼 수 있게 합시다."
두북수련원의 팽나무는 어느 때보다 잎이 무성하여 온통 초록으로 가득했습니다.
이곳에서 25년 동안 사신 화광 법사님이 팽나무를 보고 말했습니다.
“내가 지난 25년 동안 이 나무를 봤는데, 지금이 가장 잎이 무성하네.”
농사일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해가 완전히 저물어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실내로 들어와 간단한 업무를 정리한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91일째 날입니다. 새벽 4시 30분에 두북수련원을 출발하여 서울로 이동한 후 오전에는 명상 수련을 안내하고, 오후에는 이번 백일법문 기간 동안 각 영역에서 봉사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격려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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