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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85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경전 강의와 불교사회대학 강의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경전 강의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0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으로 56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에 올랐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배운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서 설명한 후 반야심경 다섯 번째 강연을 이어 갔습니다.
“반야심경은 소승의 교리를 대승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 핵심 내용은 소승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집착하여 법상(法相)을 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바로 상(相)을 깨뜨리고, 그에 대한 집착을 무너뜨리는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이 설해진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당시 유행하던 소승의 교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 시대에 소승 교리의 핵심은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 십이연기(十二緣起), 사성제(四聖諦)였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구절은 이 교리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시고 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무의식계 무무명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是故 空中 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無意識界 無無明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이런 까닭에 공 가운데는 앎도 없고, 느낌·생각·의지·의식도 없고, 눈·귀·코·혀·몸·뜻도 없으며, 빛깔·소리·냄새·맛·감촉·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경계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앰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깨달음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습니다.
오온(五蘊)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를 말합니다. ‘색(色)’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수(受)’는 느끼는 것이고, ‘상(想)’은 기억하고 생각하는 작용입니다. ‘행(行)’은 욕구를 일으키고 의지를 발동하는 작용이며, ‘식(識)’은 이러한 행위들이 쌓여 언제 어디서나 작용하는 의식의 바탕이 됩니다. 우리가 ‘나’라고 느끼는 존재는 이 다섯 가지 작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바로 ‘오온설’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볼 때, 단순히 인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거기에 기분 좋은 느낌이나 불쾌한 감정, 나아가 욕망까지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경전에 ‘눈이 불탄다.’, ‘귀가 불탄다.’ 하는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보고 듣는 과정에서 욕망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즉, 오온이란 욕망과 느낌, 생각이 종합적으로 작용하는 과정을 설명한 거예요. 마음이 작용하는 과정을 아주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크다’, ‘작다’ 하고 따지는 모든 판단도 결국은 이 다섯 작용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러한 작용들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맛에 끄달리고, 냄새에 끄달립니다. 냄새에 끄달리니 고가의 향수를 사게 되고, 맛에 끄달리니 수십만 원짜리 음식을 찾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 끄달리니 목걸이와 반지를 수천만 원 주고 사게 되고, 소리에 끄달리니 수천 만원짜리 스피커를 구입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기의 수행자들은 몸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감각적 경계, 즉 풍경, 소리, 냄새, 맛, 감촉, 그리고 온갖 생각들에 끄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온한 열반에 이를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이 중요한데, 점차 교리를 연구하고 설명하려는 학문적 접근이 많아지면서 이 모든 것이 관념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와 같은 개념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으로 이해하다 보니 사람들은 그것들을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요소처럼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오온의 다섯 작용이나 십이처, 십팔계의 항목들이 고정된 실체나 틀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교리를 외우고 익히고, 그것을 가지고 논쟁하고 해석하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제법이 공(空)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색(色)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안다는 것이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느낌도 그렇고,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때그때 달라지고, 마음도 수시로 바뀌는 것일 뿐이라는 거예요. 오온을 부정한다는 말은 오온의 교리가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온에 집착하여 오온을 고정된 실체처럼 여기고, 다섯 가지 작용을 각각 독립된 요소처럼 받아들이는 태도를 부정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색이라 할 것도 없고, 수상행식이라 할 것도 없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다음 구절에서는 십이처(十二處)의 요소설을 부정하고, 십팔계(十八界)의 요소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십이연기의 요소설을 부정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금덩어리를 잃어버려서 괴롭다고 합시다. 왜 괴로운 것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수없이 많은 것을 잃기도 하고, 때로는 원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은 자기 몸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이 몸도 사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조차도 6개월이면 싹 다 바뀝니다. 매일 음식을 먹고 자고 일어나면 어느 순간 낡은 세포는 빠져나가고 새로운 세포가 생겨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몸이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낡은 세포를 모아서 영원토록 보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스쳐 지나가는 것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을 잃었다고 괴로워한다면, 그 대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금덩어리에 집착하게 됐을까요? 그것을 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칼로 금덩어리를 긁어보니 사실은 겉만 금으로 칠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 순간 집착은 끊어집니다. ‘금이다!’라는 생각이 바로 실체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가짜네!’하고 알게 된 것이 바로 실체가 없다고 깨달은 것에 해당합니다. 금강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相)을 지은 것입니다. ‘가치가 있는 금이다.’, ‘진짜 금이다!’ 이렇게 어떤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상을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괴로움이 생겨나는 근본 원인을 찾아가 보면, 그 연결된 과정이 하나하나 드러납니다. 그 과정을 열두 가지 고리로 설명한 것이 바로 십이연기(十二緣起)입니다.
십이연기의 첫 번째 고리가 무명(無明)입니다.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다.’라는 말은, 무명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무명이 있어서 그다음에 행(行)이 생기고, 행이 있으면 식(識)이 생기고, 이런 식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본질의 차원에서 꿰뚫어 보면, 무명이라는 건 애초에 정해진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그저 한순간 어리석은 생각이 일어났을 뿐이에요. 어리석은 마음이 작용했을 뿐이지, ‘어리석음’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본래 있었던 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무무명(無無明)’이란 무명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뜻이고,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이란 무명을 없앤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즉, 무명이 없으니 무명을 없앨 일도 없다는 말이에요.
십이연기의 마지막 고리가 ‘노사(老死)’입니다.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은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 하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반야심경에서는 십이연기의 첫 고리인 무명부터 시작해서, 가장 마지막 고리인 노사(老死)까지도 모두 부정하고 있습니다.
소승 불교에서는 크게 성문승과 연각승이 있습니다. 성문승은 사성제, 팔정도,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공부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을 따릅니다. 연각승은 십이연기를 관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을 따릅니다. 그러니 이것을 모두 부정했다는 것은 곧 관념화된 소승의 교리를 모두 부정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괴로움이 있으면 그것을 없애려 하죠. 괴로움이 있고, 그 괴로움을 없애는 길이 있다고 여깁니다. 처음에는 괴로웠지만 어떤 수행 방법을 통해 괴로움이 사라졌으니 ‘괴로움이 있어서 그것을 없앴다.’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승의 관점은 이와 다릅니다. ‘내가 괴롭다.’ 하고 느낄 때 왜 괴로운지 자꾸 물어보다 보면 결국 괴로움은 실체가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애인과 헤어져서 괴롭다고 느낀다면 ‘왜 괴롭지?’ 하고 자꾸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결국 ‘헤어진 건 맞지만, 그것이 괴로울 일은 아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대승의 관점은 괴로움이 있어서 괴로움을 없애는 게 아니라 본래 괴로움이라는 것이 없는 줄을 깨닫는 것입니다.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는 괴로움이란 것도 없고, 괴로움의 원인도 없으며, 괴로움을 없앰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꿈속에서 강도에게 쫓기면 무섭고 괴롭습니다. 그때는 분명히 괴로움이 있어요. 그러나 꿈에서 깨어보면, 강도도 없고 두려워할 일도 없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꿈속에서 강도에게 쫓기다가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나를 구해줬다고 합시다. 그래서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고, 그 은혜에 감사 인사를 드렸는데, 눈을 떠보니 그 모든 게 꿈이었다면 어떨까요? 강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던 것도 아니고, 괴로움이나 고마움도 모두 허상이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럼 괴로움의 원인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서 맨 앞에 ‘공중(空中)’이라는 표현은 곧 ‘눈을 뜨고 보면’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눈 감고 꿈을 꾸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꿈속에서는 괴로움이 있고, 괴로움의 원인도 있으며,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있고,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도 있습니다. 하지만 눈을 딱 뜨는 순간, ‘꿈이었네!’ 하면 끝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종종 꿈에서 깬 뒤에도 ‘왜 이런 꿈을 꿨을까?’ 하고 원인을 분석하려 듭니다. 마치 꿈이 현실이었던 것처럼 말이죠. 수행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눈을 딱 뜨면 ‘어! 꿈이네!’ 하고 끝입니다. 굳이 한마디 덧붙인다면 ‘깜빡 속을 뻔했네.’ 이 정도면 됩니다. 헛된 것을 진짜인 줄 알고 잠시 착각했지만, 이제는 알았다는 뜻이에요.
이처럼 괴로움이라는 게 본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괴로움의 원인도, 괴로움이 사라지는 과정도,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길도 모두 의미가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사성제를 깨달았다는 것조차도 결국은 깨달았다고 할 만한 어떤 실체가 있는 게 아닙니다. 깨달음이라는 게 없으니, 깨달음을 얻었다 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즉 ‘깨달음도 없고 또한 깨달음을 얻음도 없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무지역무득’이라는 표현은 소승 불교에서 말하는 아라한과를 부정하는 내용입니다. 소승에서는 ‘나는 깨달았다.’, ‘나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정말 깨달았다면 고개가 숙여질까요? 아니면 목에 힘이 들어갈까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전제가 무엇일까요? 그건 깨달음이라는 어떤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그것을 얻었다고 여기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실체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 반야심경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렇게 반야심경에서는 소승에서 불법을 잘못 이해한 부분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후 2세기 무렵에는 소승 불교가 지나치게 학문 중심으로 흐르고, 권위와 관념에 기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반야심경은 바로 이러한 소승 불교의 잘못된 방향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근거로 ‘대승이 최고다.’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소승의 교리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스님이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해 준 덕분에, 경전 강의 수강생들은 대승 불교의 공(空) 사상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지하 공양간으로 이동하여 대중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저녁에 있을 불교사회대학 강의 준비를 했습니다.
스님은 잠시 시간을 내어 어제 두북수련원에서 직접 캐고 다듬은 쑥으로 만든 쑥떡을 실무자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자, 쑥떡 좀 맛보고 일하세요.”
실무자들은 쑥떡을 한 입씩 맛본 후 다시 업무에 집중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6시 30분에 양창식 세계평화연합(UPF) 세계의장과 김정남 님이 스님을 찾아와 미팅을 했습니다. 스님은 트럼프 재선과 대통령의 탄핵으로 인해 한반도의 전쟁 위기가 한층 낮아진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하면 북미 관계를 정상화하고, 남북 관계를 화해와 협력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손님들을 배웅한 후 저녁 7시 30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18강 강의를 했습니다. 현장에는 17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수업에는 190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기후 위기와 소비 멈춤’을 주제로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불교적 관점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세상을 평화적 방법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주제로 불교의 평화 사상에 대한 강의를 이어 갔습니다.
“오늘은 ‘평화’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평화를 지켜내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힘에 의한 평화입니다. 내가 충분한 힘을 가질 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와 정반대 개념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평화를 지키려는 방식입니다.
힘에 의한 평화는 내가 상대보다 압도적으로 무력이 우위에 있으면, 상대가 감히 공격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 나온 방식입니다. 오늘날 이 방식은 많은 사람에게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압도적인 힘을 갖추게 되면, 상대도 그만큼 위협을 느껴서 더 큰 힘을 키우려 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거기에 맞서기 위해 힘을 키워야 할 테고요. 이런 식으로 서로 힘의 우위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다 보면, 군비 경쟁이 심해지고 결국에는 전쟁이 일어나 대량 살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서로 군비 경쟁을 벌였습니다. 미사일 경쟁, 핵무기 경쟁이 이어졌고, 결국 두 나라 모두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타협을 통해 서로 핵무기를 일정 수 이하로 줄이자고 군축 회담을 열게 됩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해도, 그동안 만들어 놓은 무기를 다 쓸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많이 생산해 놓았기 때문이에요. 이 사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무조건 더 많은 무력을 갖춰야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압도적인 힘을 가졌다고 해서 전쟁에서 꼭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입니다.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이나 임진왜란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군사력이 우세하다고 해서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평화를 어떻게 실현하셨을까요? 부처님은 주로 ‘대화’를 통해 상대를 설득하고 전쟁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마가다국이 밧지족을 침공하려던 어느 날, 마다가국의 왕이 신하를 보내 부처님께 의견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나라가 망하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7가지 방법을 말씀하셨고, 그 가르침 덕분에 결국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도 모든 전쟁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코살라국이 석가족을 침공하려 했을 때는 안타깝게도 전쟁을 막지 못했습니다. 당시 부처님은 군대가 지나가는 길목에 뙤약볕 아래 조용히 앉아 계셨습니다. 코살라국의 장수가 말에서 내려 인사드리고 ‘왜 뙤약볕에 앉아 계십니까? 저기 망고나무 아래 시원한 그늘도 있는데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 세상 어떤 그늘이 아무리 좋다 해도, 친족의 그늘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수는 마음이 움직여서 군대를 이끌고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시 화가 치밀었습니다. 예전에 석가족에게 푸대접을 받았던 원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러 왔는데, 이번에도 부처님이 그 길목에 조용히 앉아 계셨어요. 다시 같은 대화가 오갔고, 이번에도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다음번에는 마음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내일은 부처님이 길을 막고 계시더라도 밟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하고 결심하고 다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그때는 부처님이 더 이상 길목에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했을 때 부처님은 조용히 손을 떼셨어요. 순교를 각오하며 끝까지 길을 막아서지도 않으셨고, 그렇다고 제자들을 동원해서 무력으로 막으려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결국 코살라국이 석가족을 멸망시킬 때는 부처님의 설득이 통하지 않아 전쟁을 막아내지 못했어요. 부처님은 설득해서 최대한 전쟁을 막으려 하셨지만,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는 세상의 일이기 때문에 손을 떼셨습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분쟁이나 전쟁 같은 큰 갈등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 모든 갈등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상대방이 나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생각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고,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예요. 이렇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존중’입니다. 여기서 ‘존중하라’는 말은 상대를 떠받들라는 말이 아닙니다. 상대를 나와 같은 사람, 즉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라는 뜻이에요.
존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이해’입니다. 이해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마음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이해입니다. 아이 입장에서, 어른 입장에서, 북한 입장에서, 남한 입장에서, 일본 사람 입장에서, 미국 사람 입장에서, 여당 입장에서, 야당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바로 이해입니다. 이해를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입니다. 많은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사랑이라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를 바탕으로 합니다. 이해에서 비롯된 사랑은 미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은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금세 미움으로 변하기가 쉽습니다.
평화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주 모여서 의논해야 됩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다를지라도, 힘으로 제압하려 하지 않고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승가(僧伽)에서는 갈마(羯磨)라는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어떤 사안이든 공동체가 함께 모여 의논하고,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 갈마 제도입니다. 이런 합의의 문화는 평화를 지켜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정당한 전쟁, 착한 전쟁, 정의로운 전쟁이란 없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참혹하고, 비참한 결과를 낳습니다. 그 자체로 전쟁은 비극이며, 동시에 범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는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했습니다. 남한에서는 ‘평양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라는 말이 나왔고, 북한에서는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라는 말까지 나왔어요. 최근에는 남한이 국력과 국방력 면에서 우위에 있으니까 ‘힘으로 통일하자.’ 하는 주장도 많습니다. 단기간 내에 무력으로 통일이 가능할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6.25 전쟁을 떠올려 보세요. 전쟁은 결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상상 이상의 피해를 가져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기고 지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통일이 되느냐 마느냐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가 반세기 넘게 쌓아온 산업화의 성과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민주주의도 함께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설령 통일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손실이 훨씬 큽니다. 그런데도 일부 어리석은 사람들은 여전히 전쟁을 부추깁니다. 국민들 또한 감정이 격해져서 힘에 의한 평화라는 논리에 쉽게 동조하게 됩니다. ‘북한이 한 방 쏘면, 우리도 보복하자!’, ‘우리도 핵무기를 만들자!’ 이런 주장이 곳곳에서 나옵니다. 북한은 국민이 굶어가면서도 핵무기를 만든 나라입니다. 과연 남한에서 경제를 포기하면서까지 핵을 만들자는 주장에 진심으로 동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만약 지금처럼 경제 수준을 유지하면서 핵무기를 가질 수 있다면, 아마도 찬성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그런데 핵 확산 금지 조약(NPT)에 따라 핵무기 개발은 국제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핵을 만들려면 경제 제재를 감수해야 하고, 무엇보다 몰래 만들어야 해요. 지금까지 이렇게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만들자고 떠들면서 핵을 만든 나라는 단 한 곳도 없습니다. 그만큼 위험하고 외로운 길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현실은 언급하지 않고 여론 조사를 할 때 ‘핵무기 보유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라는 식으로만 묻습니다. 당연히 지금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찬성할 수밖에 없죠. 이런 여론 조사는 따지고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의미 있는 여론 조사는 ‘북한처럼 경제가 무너지고 국제적 고립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는 핵을 보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그 질문에 대해 ‘그래도 핵을 가져야 한다.’라는 의견이 많다면, 그건 진짜 여론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에 동의할 사람은 소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반도에서 6.25 전쟁 이후에 전쟁의 위험이 제일 높았던 때가 2017년이었습니다. 그해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악화됐습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광화문에서 전쟁 반대 집회를 열었습니다. 1만 5천 명이 모여 전쟁 반대를 외쳐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어요. 그러다 남북 관계가 급속히 개선되면서 전쟁의 위험은 한동안 낮아졌습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쟁의 위기는 다시 점점 고조되어 작년에는 그 수위가 최고로 높아졌습니다. 2017년만큼의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북한과의 국지전을 유발하려는 시도까지 있었을 만큼 전쟁의 위험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지금은 그 긴장이 다소 완화된 상태입니다.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당선되고, 윤석열 정부가 잘못된 계엄을 선포한 뒤 탄핵을 당하면서 긴장이 조금 누그러진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에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 갈 것인지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하거나 협상한다고 할 때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완전히 원수 사이, 즉 적대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화는 필요합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대화를 시도한다고 해도, 이것은 우호적인 관계에서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현재 남북 간의 대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적대적 관계에서의 대화는 그 자체로 매우 어렵습니다. 서로 적대하고 있기 때문에 ‘원수하고 어떻게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느냐?’ 이렇게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대적 상황일수록 오히려 대화가 더욱더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적대적 관계라는 것은 양쪽 모두 손해를 감수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가면 더 큰 손해가 발생합니다. 즉 전쟁이라는 막대한 손실을 막기 위해서는 적대적인 상황이라도 반드시 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약 전쟁 중이라면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정전을 위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적대적 관계에서는 대화 자체를 꺼립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장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바로 적대적 관계에서의 대화예요. 그 이유는 손실을 줄이는 것이 결국 우리에게 더 큰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대적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손실을 줄이기 위해 대화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금 남북 간의 대화가 바로 이런 필요성이 있는 거죠.
둘째는, 상호 우호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 우리가 시리아, 쿠바, 이런 나라들과 수교를 하는 이유는 대화를 통해 앞으로 상호 우호적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상호 이익을 얻기 위해 친구가 되자는 겁니다.
셋째는, 동맹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 지금 한국과 미국 간에는 관세 협정을 두고 협상 테이블에 앉아 티격태격 다투고 있죠. 이것은 이미 좋은 관계인 동맹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 동맹 관계에서의 대화는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성격을 가집니다. 내가 손해를 좀 본다고 해서 친구를 버릴 수가 없잖아요. 친구라고 해서 늘 이익만 주는 것도 아니고, 적이라고 해서 항상 손실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적이지만 손실을 줄이기 위해 대화해야 하고, 친구이기 때문에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대화하며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현재 한미 관계는 친구 관계이기 때문에 손해가 조금 있을지라도 대화를 지속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들과는 상호 이익을 위해 대화해야 합니다. 그에 반해 북한과의 관계는 적대적이지만 손실을 줄이기 위한 대화가 반드시 필요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감정에 치우쳐서 ‘적인데 어떻게 대화하느냐!’라고 합니다. 국회에서도 ‘내란 동조 세력과 어떻게 한 테이블에 앉을 수 있냐!’ 하는 발언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란 동조 세력이 아니라 설령 실제 내란 세력이라 하더라도 국론을 안정시키고 국민을 위한다면 우리는 대화해야 합니다. 전쟁 중인 적과도 우리는 대화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대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해야 여러분도 누구와든 대화가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저런 나쁜 놈하고 어떻게 대화하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내가 볼 땐 상대가 나쁜 놈이지만, 상대는 상대대로 나를 나쁜 놈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일단은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 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지금 남북 간에 분쟁이 발생한다면, 북한이 더 큰 손해를 볼까요? 남한이 더 큰 손해를 볼까요? 대한민국이 여러 면에서 앞서 있다고는 하지만, 전쟁이 나서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또는 원자력 발전소 같은 주요 시설이 파괴되거나 폭격당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전쟁이 나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손실이 닥칠지는 가늠조차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모른 채 감정적으로 전쟁을 하자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전쟁이 나면 경제가 발전한 남한 쪽 피해가 훨씬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전쟁은 어떤 이유에서든 피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뭘 잘못했길래 북한에 비굴하게 굴어야 하나?’, ‘왜 북한을 편드느냐?’ 이렇게 말하죠.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비행기 타고 외국으로 도망갈 겁니다. 그래서 전쟁을 해서 통일을 하자는 생각은 정말 위험한 생각이에요.
만약 현재 북한이 핵무기를 10기 보유하고 있다면, 이대로 방치할 경우 그 수는 50기, 심지어 100기까지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일까요? 10기에서 그 수를 고정시키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50기, 100기로 증가하도록 방치하는 게 나을까요? 물론 핵무기가 없는 것이 최상의 상태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일뿐, 현실적으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북한 핵을 없애려면 폭격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더 큰 전쟁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내버려 두면 북한의 핵무기는 계속 늘어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상황에서 멈추도록 유도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면 ‘그럼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자는 말이냐?’ 하는 반발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 상태에서 멈추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미국과 북한의 요구를 비교해 보면, 미국은 ‘핵무기를 없애라.’ 하고 주장하고, 북한은 ‘경제 제재를 해제하라.’ 하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만약 미국이 경제 제재를 먼저 해제했는데도 북한이 핵을 폐기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시 제재를 가하겠다고 해도, 그 제재가 실제로 효과를 내려면 중국과 러시아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반대로 북한이 핵을 폐기한 뒤, 미국이 약속한 경제 제재를 풀지 않거나 수교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실패로 돌아가겠죠. 결국 서로를 믿지 못하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평화를 향한 현실적인 길은 무엇일까요? 북한에게 핵 폐기가 아니라 핵 동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 경제 제재의 해제가 아니라 임시 해제를 제안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 경제 제재를 해제해 버리면 다시 원상 복구하는 게 쉽지 않지만 임시로 해제해 두는 것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다시 복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대화를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조건 없는 대화를 내세우면서, 물밑에서는 핵 동결과 경제 제재의 임시 해제에 대한 협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현재 협상 마지막 단계에 설정되어 있는 북미 관계 정상화라는 건 어쩌면 종이 한 장 짜리 문서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거기에 너무 목매달지 말고 그것을 협상의 마지막 단계가 아닌 오히려 시작점으로 앞당겨 배치해 보자는 겁니다. 표면적으로는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대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핵 동결과 경제 제재의 임시 해제’를 바탕으로 신뢰를 쌓고 관계를 확대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상황에서 그나마 협상의 진전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의견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은 ‘그러면 북한 핵을 인정하자는 말이냐?’ 하며 강하게 반발합니다. 그러나 반대만 한다면 지금의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북한 주민들은 계속해서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주민은 고통받고, 위험은 점점 커지는 상황이 계속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정책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위험은 줄이고, 북한 주민의 삶은 실질적으로 나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미 관계 정상화, 나아가 북일 관계 정상화를 통해 한반도에 평화 체제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불교의 사회 참여’를 주제로 강의하기로 하고 밤 9시가 넘어서 수업을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마음 나누기를 하였고, 스님은 평화재단 접견실로 돌아와 워싱턴D.C.에서 오신 윤시내 님을 만나 오랜만에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윤시내 님은 미주 정토회관에서 오랫동안 자원봉사를 해오고 있는 분입니다. 인사를 나눈 후 정토회관으로 돌아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86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주간반 정토불교대학 '인간 붓다' 2강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외교 안보 전문가들과 모임을 가진 후, 저녁에는 저녁반 정토불교대학 '인간 붓다' 2강 수업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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