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5.8. 백일법문 81일째, 반야심경 4강, 불교사회대학 17강, 경북 산불 피해 구호품 전달
“이 구호품을 받고 산불 피해 주민들이 덜 외로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81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베트남에서 도착하자마자 하루 종일 바쁜 일정을 이어 나갔습니다.

어젯밤 11시 45분에 베트남 호찌민을 출발한 스님은 5시간 15분을 비행하여 오늘 아침 7시에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밤새 비행기 안에서 쪽잠을 잤습니다.

서둘러 공항을 나와 곧바로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도착 후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하고 오전 10시부터 반야심경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0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으로 56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에 올랐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배운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서 설명한 후 반야심경 네 번째 강연을 이어 갔습니다.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이 공한 상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실상의 세계, 즉 꿈에서 깨어난 세계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상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생겨나고 사라지며, 성스러운 것과 부정한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함께 존재합니다. 어떤 것은 늘어나고, 어떤 것은 줄어들기도 하죠. 여기서 언급한 세 가지는 대표적인 예에 불과하고, 그 외에도 다양한 구분이 존재합니다. 크고 작음, 넓고 좁음, 새것과 헌것, 선과 악처럼, 현상 세계는 수많은 상대적 기준에 따라 끝없이 구분되고 나뉩니다.

생겨난 것도 없고 사라진 것도 없다, 불생불멸의 진실

그 가운데 특히 ‘생멸(生滅)’은 현상 세계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우주도 생겨나고 사라지며, 산도 그러하고, 원자 하나, 물질 하나, 사람 하나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으며, 하나의 생각도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이렇듯 생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규정하는 가장 뚜렷한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현상을 '제법이 공하다.' 하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떤 것이 생겨났다고도 할 수 없고, 사라졌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무언가가 영원불변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본래부터 생긴 것도 없고, 사라진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영하 30도 정도로 얼린 얼음 구슬을 그릇에 담아, 다섯 살 아이에게 주었다고 해 봅시다. 아이는 그 얼음 구슬을 몇 분 동안 딸랑딸랑 흔들며 재미있게 가지고 놉니다. 이렇게 단단하고 차가운 얼음 구슬은 실온에서 잠깐 논다고 해서 금방 녹지 않아서 겉보기엔 변한 게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구슬을 방에 두고 밖에 나가 놀다가 30분쯤 지나 다시 돌아와 보니, 구슬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물만 남아 있습니다. 아이는 구슬이 없어졌다고 생각하거나, 물이 갑자기 생긴 것처럼 느낍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구슬을 단단한 고체 상태의 물건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변화의 전 과정을 알고 있는 어른의 눈으로 보면, 구슬이 사라졌다고도 할 수 없고, 물이 생겼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얼음이 녹아 물이 되었을 뿐입니다.

물리적인 상태 변화로만 보자면, 고체에서 액체로 바뀌었으니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겨났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 분자의 관점에서 보면 본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분자들은 그대로 존재하며, 단지 이전에는 단단히 엉켜 있던 구조가 지금은 느슨하게 풀려 있을 뿐입니다. 마치 손깍지를 끼고 있다가 깍지를 푼 것과 같은 이치예요. 그러니 본질의 차원에서 보면, 물이 새로 생겼다고도 할 수 없고, 얼음이 없어졌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바다에 가보면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파도 하나하나는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또다시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무언가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있어 보입니다. 수많은 파도가 쉼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되풀이하니까요. 그러나 바다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요? 파도는 생겨났다고도 할 수 없고, 사라졌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물이 출렁이고 있을 뿐이에요. 우리는 다만 그 출렁이는 물의 움직임을 보고 있을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새롭게 생겨난 것이 없고, 사라진 것도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의 차원에서는 분명히 ‘생(生)’하고 ‘멸(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본질의 차원, 즉 ‘공상(空相)’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의 본래 모습은 공한 것이며, 본질의 세계에서는 무엇이 생겼다거나 없어졌다고 할 수 있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변화만 있을 뿐입니다.

그 누구도 나를 더럽힐 수 없다, 불구부정의 가르침

‘불구부정(不垢不淨)’이란, 성스러움도 없고 부정함도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본질적으로 성스럽다고 할 수도 없고, 부정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겉모습은 다를 수 있으나, 그 본성은 모두 공(空)하여 실질적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는 브라만은 성스럽고, 천민은 부정하다고 여겨집니다. ‘남자는 성스럽고, 여자는 부정하다.’, ‘신은 성스럽고, 인간은 부정하다.’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모두 성스러움과 부정함이 있다는 전제를 따르고 있습니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역시 관습과 인식의 틀 안에서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청소를 안 하면 더럽고, 청소를 하면 깨끗하다고 여기는 수준에서 불구부정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이 가르침이 지닌 파격성과 깊이를 온전히 알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늘 ‘깨끗하다’, ‘더럽다’ 하는 식의 이분법에 갇혀 사고합니다. 하지만 붓다의 가르침은 그런 식의 구분이 정말 옳은 것인지 근본부터 되묻게 합니다. 이 문장의 의미는 성스러움도 없고, 부정함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전통적인 종교관과 가치 체계에 던지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혁명’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스럽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다.’ 하는 말을 우리는 너무 쉽게 흘려듣지만, 사실 이 말은 기존의 세계관을 뿌리째 흔드는 엄청난 전환입니다.

조선 시대만 해도 특별한 날에 여성이 처음 손님으로 오는 것이 금기시되었습니다. 여성이 배를 타거나 가게의 첫 손님이 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들어오면 소금을 뿌리고 소란을 피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스럽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다.’ 하는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그런 금기나 차별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천민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인식이 일부 지역에 남아 있습니다. 예전에는 실제로 천민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지금도 그런 전통을 이어 가는 곳들이 있죠.

예를 들어, 부탄에서는 지금도 어떤 사원에는 여성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곳은 호법신장(護法神將)이 모셔져 있는 신성한 장소이므로, 여자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식입니다. 이럴 때 단순히 ‘왜 여성 차별을 하느냐!’ 이렇게만 보기보다는,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문화와 신앙의 영향이 있다는 점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만 해도, 남자가 여자 손을 한 번만 잡아도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여자로 여겨졌습니다. 여성이 허벅지나 종아리 같은 신체 일부만 드러내도 낙인이 찍혔고, 그 남자와 혼인하지 않으면 더럽혀진 존재로 취급되곤 했죠. 이러한 인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변화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손을 잡는 것 자체를 큰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는 이유로 ‘더럽혀졌다.’ 하는 시선은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실제로 존재하는 인식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더럽혀진다.’라는 말 자체가 실체 없는 허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 허상을 진짜라고 믿고, 그 믿음 때문에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상태는 마치 비단 이불을 덮고 따뜻한 방 안에 누워 있으면서도, 꿈속에서 강도에게 쫓겨 ‘살려주세요!’ 하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데도, 꿈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공포가 너무도 실제처럼 느껴집니다. 강도가 지금 당장 자신을 덮칠 것 같은 절박함 속에 있는 것이죠.

여러분이 느끼는 괴로움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여성을 부정하게 보는 오래된 관념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손을 잡았다거나, 껴안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럽혀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나를 안아주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을 받았다.’라고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존경하는 스님이 머리에 손을 얹어주시면 ‘가피를 입었다.’라고 느끼죠. 그런데 같은 행동이라도, 상대에 대한 거부감이나 불쾌감이 있으면 ‘추행을 당했다.’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같은 행위도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느냐는 전적으로 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내가 사랑을 받았다고 느끼는지,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는지는 외부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식 안에서 결정되는 거예요.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누군가의 행동으로 내가 더럽혀질 수 있다면, 나는 본래부터 깨끗해질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그 더럽혀졌다는 감정이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스스로 떨쳐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괴로움이 외부에서 온 것이라면, 나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겠죠. 하지만 그것이 나의 어리석음, 즉 무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각하게 되면, 괴로움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어른이든 아이든, 그 누구도 나를 성스럽게 만들 수도 없고, 부정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나를 더럽힐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나를 부정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허상을 믿는 순간, 우리는 그 허상에 사로잡혀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변화만 있을 뿐 손해도 없고 이익도 없다, 부증불감의 진실

‘부증불감(不增不減)’은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무엇이 더해지거나 줄어들었다고 할 수 없어요. 겉으로는 시시각각 변화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여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인구가 10억에서 100억으로 늘어났다고 해서, 지구의 무게가 본질적으로 변했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형태와 구성은 바뀌었을 수 있어도, 총량은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드러난 변화는 분명하지만, 그 변화는 단지 모양의 전환일 뿐입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집에 방이 두 개 있고, 한 방에는 세 사람이, 다른 방에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중 한 사람이 방을 옮기면, 어느 방에서는 인원이 줄고, 다른 방에서는 늘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집 전체로 보면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단지 사람의 위치만 이동한 것뿐이에요. 또 다른 예로, 비행기에 음식을 가득 싣고, 승객들에게 식사를 제공합니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그 음식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음식은 여전히 그 비행기 안에 존재합니다. 다만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승객이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해도 그 무게가 비행기 밖으로 빠져나간 건 아닙니다. 결국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말은 범위의 문제입니다. 어느 범위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명절에 네 식구가 모여 윷놀이를 하며 돈을 걸었다고 해 보죠. 큰아이가 따기도 하고, 둘째가 잃을 수도 있겠죠. 아버지가 이기면 어머니가 지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속상해하면서 말다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 둘째가 ‘형이 내 돈을 다 가져갔다.’라고 하면, 형은 ‘그건 내가 딴 거야!’ 하고 반박할 수도 있겠죠. 그 상황에서 어머니는 ‘조용히 해라, 그 돈이 그 돈이다.’라고 할 거예요. 어머니는 집 전체에서 돈의 흐름을 보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의 말이 맞습니다. 돈이 집안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녔을 뿐, 누가 손해를 본 것도 아니고, 누가 이득을 본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아이 입장에서는 주머니가 다르기 때문에, 그 돈이 절대 같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전체를 보느냐, 부분을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판단이 나옵니다.

시야가 좁아지면 부부 사이와 부모 자식 사이에도 ‘네 것’, ‘내 것’이라는 경계가 생깁니다. 그러나 시야가 조금만 넓어지면, 이웃 사이에도, 나아가 온 세상에도 ‘네 것’과 ‘내 것’이라는 구분이 의미를 잃게 됩니다. 범위를 좁혀 보면 어떤 것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이 보이지만, 조금 더 넓은 시야에서 보면 그것은 단지 위치의 이동일 뿐입니다. 여기 있던 것이 저기로 갔고, 저기 있던 것이 이리로 온 것뿐이에요. 실상은 아무것도 줄지 않았고, 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법이 공하다.’ 하는 가르침입니다. ‘얻었다’, ‘잃었다’, ‘늙었다’, ‘젊다’ 하는 판단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별일 뿐입니다. 하나의 생각이 일어났다가, 또 다른 생각으로 바뀌었을 뿐이에요. 이것이 바로 실상(實相)입니다. 앞서 말한 것들은 모두 그 실상을 설명하기 위한 예시일 뿐입니다. 본질의 차원에서 보면, 생겼다고도 할 수 없고 사라졌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성스럽다고도 할 수 없고 부정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늘어났다고도 할 수 없고, 줄었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스님이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해 준 덕분에, 경전 강의 수강생들은 대승 불교의 공(空) 사상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오후 일정이 바빠서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강의를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 시간을 충분히 갖기로 하고, 스님은 서둘러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출발하여 안동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11시 15분에 서울을 출발한 차는 오후 2시 정각에 안동 시민 운동장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지난 3월 말 경북 북부 지역의 초대형 산불로 삶터를 잃은 주민들에게, JTS가 마련한 구호품을 전하는 날입니다.

스님이 차에서 내리자 안동시, 의성군, 청송군, 영덕군, 영양군, 5개 시·군에서 온 공무원들과 JTS 활동가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오늘 전달식에는 김홍신 작가, 노희경 작가, 방송인 김제동 님, 필리핀JTS 노재국 대표가 함께해 주셔서, 피해 주민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먼저 JTS 사무국장이 오늘 이 전달식이 있기까지 진행해 온 일에 대한 경과보고를 해주었습니다. JTS에서는 산불 발생 직후인 3월 27일부터 30일까지 긴급 구호단을 파견해 비누, 칫솔, 치약, 속옷, 양말, 방진 마스크 등 개인 위생 물품과 생필품을 지원한 바 있습니다. 그 후 지방 자치 단체를 통해 이재민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확인한 결과, 임시 주택에 입주한 분들이 자립적인 일상생활을 이어 가기 위해 생활용품과 양념류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JTS는 5개 시군구에 양념류 2877세트를 지원하기로 하고 간장, 된장, 고추장, 콩기름, 참기름, 액젓 등 7가지 품목을 꾸러미로 구성했습니다. 특히 안동 지역에서는 베개가 급히 필요하다는 요청이 있어서 양념류 세트와 별도로 베개 1000개를 준비했습니다. 어제 1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정성을 모아 양념류 2877세트를 만들었습니다.

이어서 JTS 이사장인 법륜스님이 산불 피해 주민들에게 구호품을 나눠줄 담당 공무원들에게 인사말을 했습니다. 스님은 이 작은 정성이 희망의 씨앗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이제는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캐나다, 호주, 시베리아, LA 등의 산불은 늘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이번 대형 산불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같은 재난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현실을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응을 합니다. 이번 산불도 처음에는 하루이틀 지나면 불이 잡힐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불이 5일이나 더 진행되면서 JTS에서는 그제야 긴급 구조단을 보냈고, 막바지에 이르러 지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동안 JTS는 해외에서 산불이나 홍수가 발생하면 빠르게 지원을 했는데, 이번에 발생한 국내 재난에는 정작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일찍 방문하고 대응하지 못해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재난의 최전선에서 애써 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오늘은 우선 기본 생필품을 준비해서 전달해 드립니다. 앞으로 집이 마련되면 냉장고와 같은 가전제품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 전에 조계종 총무원장님과 이러한 내용을 논의했는데, 조계종에서도 필요한 가전제품을 지원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필요한 물품을 파악하여 지원해 나가겠습니다.

이번 산불로 피해를 입은 5개 시군구 공무원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시군구 자치 단체장들과 재해 담당자 여러분의 노고에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제 하루 종일 양념류 포장 봉사를 해주신 JTS 활동가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담당 공무원들은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김홍신 작가가 피해 주민들을 위해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기도뿐이어서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늘이 그 기도를 들어 주지 않은 듯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고, 피해는 커졌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법륜스님을 모시고 5개 시군구 관계자 분들과 함께 구호품 전달식을 할 수 있어서 마음이 푸근합니다. 부족할 수 있지만 넓은 마음으로 받아 주시고, 이웃과 함께 나누며 마음의 평안을 되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정부에서도 더 적극적으로 복구 활동에 나설 것으로 알고 있으니, 조금은 안심하셔도 좋겠습니다. 작은 정성이지만 깊은 뜻으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노희경 작가가 피해 주민들을 위해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이 구호품을 받고 산불 피해 주민들이 덜 외로우셨으면 좋겠습니다

“뉴스를 보며 정말 많이 울었고, 많이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오늘 이렇게 행동으로 조금이라도 보탤 수 있게 되어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자리에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이 작은 나눔을 통해 피해 입은 분들이 조금이나마 덜 외로우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제동 님이 피해 주민들을 위해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는 젖이 돌지 않아 이웃 어머님들에게 젖동냥을 해서 저를 키우셨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웃이 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살아갈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곁에도 지금 이웃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젖 먹던 힘까지 낸다.’ 하는 말의 의미를 이번 산불을 통해 배웠습니다. 고생하신 공무원 여러분께 오늘 제가 무생채라도 해서 맛있는 밥 한 끼 준비해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구호품 전달식을 했습니다. 먼저 법륜스님이 안동시에 산불 재해 구호품인 양념류 1000세트와 베개 1000개를 전달했습니다.

“조금이나마 위로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은 김홍신 작가가 의성군에 산불 재해 구호품으로 양념류 241세트를 전달했습니다.

이어서 노희경 작가가 청송군에 산불 재해 구호품으로 양념류 570세트를 전달했습니다.

김제동 님은 영덕군에 산불 재해 구호품으로 양념류 916세트를 전달했습니다. 마침 영덕군 담당 공무원이 김제동 님의 고등학교 후배여서 두 사람은 반가운 인연을 확인하며 짧은 인사를 나누었고, 전달식 현장에는 정겨운 웃음이 번졌습니다.

이어서 노재국 필리핀JTS 대표가 영양군에 산불 재해 구호품으로 양념류 150세트를 전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참석한 내빈과 5개 시군 공무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진간장, 된장, 고추장, 참기름, 식용유, 액젓, 국간장, 이 일곱 가지 양념 속에 담긴 정성 어린 마음을 바라보며, 참가자 모두 얼굴에 봄햇살처럼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습니다.

전달식을 마친 후 공무원들과 잠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피해 주민들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지원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에요?”

“전국에서 성금이 계속 들어오고 있어서 예산 부족에 대한 걱정은 없습니다. 다만 구호품을 나눠줄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러면 물품 지원보다는 자원봉사자가 많이 필요하겠네요. 저희들도 방법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희경 작가, 김제동 님은 JTS 활동가들과 함께 마을마다 구호품을 전달하러 출발하고, 스님은 김홍신 작가와 함께 경상북도 도청으로 향했습니다.

차로 30분을 달려 경상북도 도청에 도착했습니다. 도지사 집무실에 들어서자 이철우 경상북도 도지사가 스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전달식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피해 주민들에게 잘 나누어 주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도지사님에게 경북 산불 피해 주민들에게 나눠줄 양념류 세트를 보여 주었습니다.

“피해 주민들에게 물어보니까 양념류가 가장 필요하다고 해서 저희 JTS에서 2877세트를 준비했습니다. 안동시에서는 특별히 베개가 시급하게 필요하다고 해서 1000개를 준비했고요.”

“맞습니다. 주민들이 가장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준비해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전달식을 마치고 스님은 도지사님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지방 자치 단체와 JTS가 협력하여 피해 주민들이 하루빨리 일상을 회복할 수 있게 함께 힘을 모으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산불이 남긴 상처를 회복하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참여했습니다. 와서 보니, 지방 자치 단체에서 피해 주민들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국민들도 적극 협조해 주신 덕분에 지금은 주민들이 큰 불편 없이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민들께 물어보니, 공동생활을 하다가 다시 개인 생활로 돌아가다 보니 음식 준비에 필요한 기본적인 양념류가 부족하다고들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중심으로 준비해 왔습니다. 앞으로 지자체 예산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한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이제는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재해가 예전과는 달리 예측 불허의 상황이 되었기에, 보다 긴밀한 대응 체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산불 진화에 참여해 주신 소방관과 공무원 여러분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피해를 입으신 주민 여러분도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우리 국민과 이웃이 여러분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힘내셔서 함께 복구해 나갑시다.”

도지사님은 스님의 생각에 적극 공감하며 대형 산불이 났을 때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래 산불로 인한 피해 면적이 8만 헥타르를 넘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산불로 무려 10만 헥타르가 불에 탔습니다. 3월 25일 오후 4시부터 8시 30분까지 단 4시간 반 동안, 태풍급 강풍이 불면서 화재가 확산된 결과입니다. 이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산불로 인한 피해 면적 중 가장 넓은 규모입니다. 강풍이 불면 불덩이가 마치 ‘불 폭탄’처럼 커져서 최대 2km까지 날아갑니다. 실제로 영덕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어선 31척이 불에 탔습니다. 산불로 인해 바다 위에 있는 배들이 불에 탄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이번 일을 통해 이상 기후의 무서움을 실감했습니다. 이번 산불로 26명이 희생되었는데, 불과 4시간 만에 일어난 참변이었습니다. 도피하던 차에까지 불이 옮겨 붙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위력이 엄청났습니다.”

스님도 도지사님의 말에 공감하며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이번 산불은 일반적인 예측 범위를 넘어선 재난이었습니다. 바다에 다다른 덕분에 불이 겨우 멈춘 것이지, 만약 바다가 없었다면 훨씬 더 넓은 지역까지 번졌을 것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횃불을 들고 바다를 향해 달리는 듯한 속도로 불이 퍼졌습니다.”

도지사님은 앞으로 피해 복구에 전력을 기울일 계획이라고 화답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강풍의 방향 때문에 만약 한반도의 서쪽 끝에서 산불이 시작되었다면 대한민국 전역이 산불에 탈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번 도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단순한 재난 복구가 아니라 마치 재창조 수준에 해당하는 개선 복구를 추진할 계획입니다.”

앞으로 더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 적극 협력하기로 하고 경북도청을 나왔습니다.

오후 3시 30분에 경북도청을 출발하여 다시 서울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하루 종일 식사할 시간이 없어서 차에 탄 후 도시락으로 늦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고속도로를 부지런히 달려 저녁 7시가 넘어서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에 도착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17강 강의를 했습니다. 현장에는 17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수업에는 190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왜 남을 도와야 하는가’를 주제로 불교와 복지 실천, 자비의 사회화, 구호의 원칙, 자원봉사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은 ‘기후 위기와 소비 멈춤’을 주제로 강의를 이어 갔습니다.

“오늘은 환경 문제 중에서도 ‘기후 위기’와 ‘소비 멈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연기법을 주로 인간 윤리에 기반해 다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후 위기와 지구 환경 문제가 제기되면서, 인간 윤리 역시 결국은 지구 환경 윤리 위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 인간 윤리가 자연 윤리 위에 서야 하는 이유

비유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부잣집 창고에 양식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집 아들은 창고에서 쌀을 꺼내 시장에 내다 팔아 용돈을 벌었어요. 하인을 시켜서 한 가마니를 팔면 돈이 생기고, 두 가마니를 팔면 두 배의 돈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아들은 쌀의 가치를 단순히 창고에서 시장까지 운반하는 비용으로만 생각하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늘 창고 안에는 쌀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의 소비는 점점 늘어났고, 운반 능력도 커졌습니다. 하루에 열 가마, 스무 가마씩 내다 팔게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창고 안의 쌀이 바닥났습니다. 부모가 쌀을 채워 넣는 속도보다 아들이 내다 파는 속도가 더 빨랐던 거죠. 그제야 아들은 쌀의 가치는 단지 운반에 드는 노동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농민들이 농사짓고 수확해서 창고에 쌓아 두는 노력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어리석은 아들 눈에는 창고에 늘 쌀이 당연히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 가치를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자연을 그저 주어진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노동이 더해져야 생산물의 가치가 형성된다고 믿어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노동 가치설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석탄을 캐내는 노동이 곧 석탄의 가치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석탄은 수억 년에 걸쳐 자연이 축적해 온 산물입니다. 긴 시간 동안 자연이 만들어 낸 자원을 우리는 단지 노동을 통해 얻은 것으로 착각해 왔던 거예요. 그간 우리는 자연자원을 무한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술로 가공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생산’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렇게 가공한 결과물을 인간이 노력을 통해 얻은 산물이라고만 믿어왔어요. 그러나 이제 인류의 소비량이 지구의 자원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자연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의 노동 이전에, 자연의 생산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치와 윤리를 논하려면, 그 근간이 되는 자연의 가치와 윤리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당연한 인식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부잣집의 어리석은 아들처럼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 곧 문명의 발전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결과 인류의 소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제는 자연의 생산 범위를 넘어섰습니다. 자연의 재생산 구조, 즉 생산물이 분해되어서 다시 원재료로 환원되는 그 체계를 뛰어넘으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소비 속도가 자연의 생산 속도나 재생산 속도를 넘어서면서, 우리는 지금 자연 자원의 고갈과 환경 파괴라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미래 세대의 고통 위에 세워지고 있는 지금의 풍요

지금까지 우리는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것을 곧 잘 사는 삶이라고 여겨왔습니다. 1년에 무엇을 얼마나 소비하는지를 기준으로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를 구분했습니다. 예를 들어, 콜라 소비량, 커피 소비량, 전기와 물의 소비량, 심지어 1인당 병상이 몇 개인지를 기준으로 선진국 여부를 판단했습니다. 즉, 잘 사는 기준을 소비의 양으로 측정했던 겁니다. 이러한 가치관으로 인류가 지금껏 달려온 결과 현재의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보유하게 된 대량 생산 체제는 자연의 생산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어서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 체제가 몇 년을 더 갈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유한한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창고에 가득 차 있는 쌀을 내다 팔기에 급급한 사람이었다면, 앞으로 우리 후손들은 텅 빈 창고를 채우는 데 허덕이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쩌면 우리 후손들은 전 생애를 텅 빈 창고를 채우는 일에 쓰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 세대가 미래 세대의 몫까지 소비해 버린다면, 다음 세대는 그 빚을 갚느라 평생을 보내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지금 있는 신발만 신고, 지금 있는 옷만 입고 살아도 죽을 때까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을 사고, 한두 번 사용하고 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이산화탄소(CO2)가 끊임없이 배출됩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첫째, 소비 멈춤이 필요합니다. 둘째, 완전한 소비 멈춤까지는 아니더라도 소비를 줄이는 삶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더 이상 소비를 늘리지는 않아야 합니다.

만약에 내가 한 달에 100만 원을 소비한다면, ‘소비 멈춤’이란 하나도 쓰지 않는 것이고, ‘소비 줄임’은 100만 원 이하로 지출을 줄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는 것을 잘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 가치관 자체를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삶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제로(0)에 가까운 삶이 되어야 합니다. 녹지를 잘 가꾸어서, 우리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자연의 탄소 동화 작용으로 흡수 가능한 양을 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렇게 한다고 해도, 이미 배출된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기 때문에 기후 위기는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소비 증가를 멈추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소비 증가 속도가 점점 느려지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멈출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현재는 점점 소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비에 중독된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시간이 흐를수록 수입이 조금씩 늘고, 소비도 조금씩 늘고, 집이나 차도 점점 더 나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이런 변화가 습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흐름을 멈춘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꿀벌이 사라지면, 우리 식탁도 사라집니다

저는 농사를 직접 지으면서 기후 변화의 영향을 몸소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겨울에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면 꿀벌이 상당수 동사하는 일이 생깁니다. 반대로 겨울에 날이 갑자기 따뜻해지면, 꽃이 피고 꿀벌들이 일찍 나옵니다. 그런데 그 직후 다시 추워지면, 미처 대비하지 못한 벌들이 죽어 버립니다. 날이 따듯해졌다가 갑자기 추워지는 일이 반복될수록, 즉 기후 변화가 심할수록 꿀벌의 개체 수는 줄어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 생태계에 변화가 생깁니다.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꿀을 생산하는 양봉 농가입니다. 제가 사는 시골에서도 예전에는 벌통을 100통씩 놓아 두었지만, 지금은 두세 통만 둡니다. 그 정도면 꿀 농사가 아니라 그냥 집에서 먹는 양 정도입니다. 이렇게 꿀 생산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과일의 수분(受粉)입니다. 벼처럼 바람을 타고 수분이 이루어지는 작물은 괜찮지만,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과일은 꿀벌이나 나비를 통해 수분됩니다. 벌이 줄어들면 과일의 수분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결국 과일 생산량이 줄어들게 되는 거예요. 요즘은 온실에서 과일을 재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온실 안에서도 수분을 일일이 인공적으로 해 주려면 인건비가 굉장히 많이 들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자연의 벌이 들어오도록 온실 문을 열어 놓기도 합니다. 그러면 벌레가 꼬이는 문제가 있고, 또 정작 자연의 벌 자체가 줄어들어서 아무리 문을 열어 놔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온실 농사용 벌을 따로 길러서 그걸 사 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꿀벌의 감소 현상은 마치 자동차의 중요한 부속 하나가 빠진 상태와 같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그 하나의 부속이 없으면 자동차가 시동이 안 걸리고 움직이지 못하듯이, 벌이라는 존재가 우리 생태계에서 그만큼 중요한 고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단순히 산불이 나거나, 일부 지역의 농사가 망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생태계의 핵심 고리 하나가 끊어지면서 전체의 순환 체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탄소 제로의 삶을 실천한 부처님

이런 기후 위기 시대에 우리는 수행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부처님의 삶을 본받는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부처님은 남이 버린 음식을 드시고, 옷도 남이 버린 것을 주워 입었습니다. 잠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의 처마 밑이나 동굴 밑에서 잤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부처님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삶을 사신 거예요. 물론 우리가 부처님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먹고, 입고, 자는,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해 불평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현재 수준에서 소비를 더 늘리지 않고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기후 위기를 대하는 수행자의 관점은, 첫째, 나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꾸 남 얘기하거나, ‘나 혼자 하면 뭐가 달라지나.’ 하고 회의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내가 먼저 실천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둘째, 가능하면 다른 사람도 함께할 수 있도록 모범적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안 한다고 비난할 필요도 없지만, 나 혼자 한다고 주눅 들거나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랑스럽게 실천하면서 이 삶의 방식이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소비를 줄이면서도 당당하게 살아야 해요. 그래야 남이 본받습니다. 당당하지 못하고 불쌍해 보이면, 사람들이 동정은 할지 몰라도 본받고 싶어하지는 않아요. 법륜스님이 살아가는 모습이 좋아 보여야 ‘나도 한번 저런 삶을 살아 볼까?’ 하는 마음이 들지, ‘존경스럽지만 저렇게는 안 살고 싶어.’ 이런 반응이 나오면 확산성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절대로 불쌍하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가끔 절에 사는 행자들이 누가 밥을 사준다고 하면 따라가서 정신없이 먹고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밥을 사준 사람은 ‘얼마나 굶었으면 저럴까?’ 이런 마음이 듭니다. 그렇게 밥을 사준 사람이 제게 와서 ‘행자들에게 밥을 사줬는데 너무 잘 먹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저는 부끄러워집니다. 물론 밥을 얻어먹는 것까지 금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너무 즐기지는 말아야 해요. 수행자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지, 불쌍해 보여서 동정을 받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수행자의 삶이 전혀 확산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수행자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에 끄달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가치관이 바뀌지 않아서 수행자의 삶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이라면, 옆에서 누가 돈을 많이 벌고 호화롭게 산다고 해도 거기에 끄달리지 않아야 합니다. 잠깐 구경하는 건 괜찮습니다. 그러나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라고 하면 귀찮아서 못 살겠다고 할 정도로 자기중심이 딱 잡혀 있어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 중심이 흔들립니다. 심지어 그런 큰 집을 갖고 싶었는데 못 가져서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속으로 부럽기까지 한 겁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소비 중독을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 수행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소비 멈춤에 대해 당당해야 합니다. 둘째, 소비 중독의 위험을 제대로 인식해야 합니다. 저는 소비 중독이 마약 중독보다도 훨씬 피해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마약 중독은 개인의 건강을 해쳐서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는 정도지만, 소비 중독은 인류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지구 생태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제도 개선을 통해 과소비를 줄이고, 빈부 격차를 완화해서 소비를 부추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언론이나 방송도 지나치게 화려한 장면을 자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을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소비를 줄이고 탄소 배출을 절감할 수 있는 국가 정책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한 나라의 차원을 넘어선 국제적인 협력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NGO나 시민 단체 차원의 실천뿐 아니라 공동체적 실천과 협력을 함께 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후 위기 시대에 수행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세상을 평화적 방법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주제로 강의를 하기로 하고 밤 9시가 넘어서 수업을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마음 나누기를 하였고, 스님은 정토회관으로 돌아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82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주간반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하고, 오후에는 천도교 염상철 선도사의 도서 〈동학만리〉 출판 기념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한 후, 저녁에는 저녁반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하고 두북수련원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11

0/200

감로화

바쁘신 스님의 하루~~
알려주시는 바른 길 천천히 따라갑니다🙏

2025-05-11 09:27:56

이선후

깨달음의 지혜로 지구와 모두가 공존할수있는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5-05-11 08:46:04

구자정

고맙습니다.

2025-05-11 07:41:17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