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4.30. 백일법문 73일째, 수행법회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남편이 너무 괴로워합니다"

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73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정토회 회원들이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는 수행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수행법회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50여 명의 대중이 자리한 가운데 오전 10시 15분이 되자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낭독하며 수행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전국의 정토회 회원들도 온라인으로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먼저 지난 한 주 동안 정토행자들의 활동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전국 으뜸절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 준비로 바쁜 한 주를 보냈습니다.

대중들은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 경상북도 지역의 산불 피해 이재민들의 일상 복귀에 도움이 되고자 JTS에서 물품 기부를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경상북도 지역에서 산불 피해가 크게 발생했습니다. 이처럼 큰 산불은 우리도 처음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소방 당국에서 잘 수습할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점점 피해가 커지는 모습을 보고 JTS에서도 뒤늦게 긴급 구호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산불 대부분이 진화가 된 상황이라 긴급 구호 활동을 충분히 펼치지 못했어요. 마무리 단계에서 불길을 잡는 데 필요한 물품과 피해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생필품 몇 가지를 지원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충분하게 지원하지는 못했습니다.

산불 피해를 입은 분들의 아픔을 생각하며

부처님 오신 날을 계기로 피해 상황을 다시 조사해 보니, 이번 화재로 인해 재난을 입은 분들이 약 3000명 정도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분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 보니, 요즘은 정부와 지방 자치 단체가 전반적으로 잘 챙겨 주고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대부분 지원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살림살이가 모조리 타버린 탓에 컨테이너나 모텔 같은 임시 거처에서 생활하는 분들의 경우 된장, 고추장, 간장 같은 기본양념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JTS에서는 구호 자금 1억 원을 마련하여 피해 가구 전원에게 기본양념 세트를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원래는 부처님 오신 날 전에 전달할 계획이었으나, 제품 주문과 포장에 시간이 걸려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아 전달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이번 산불로 인해 고운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여러분이 낸 보시금을 모아 사찰 문화재 복구에 쓰일 수 있도록 대한 불교 조계종 총무원에 성금을 전달하기로 했습니다. 산불 피해 지역에 대한 지원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냉장고와 세탁기 같은 필수 가전제품입니다. 집에서 밥 짓고 빨래하는 일은 일상의 기본입니다. 게다가 날이 점점 더워지는 시기여서 냉장고는 특히 절실한 상황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냉장고 없이도 살았지만, 지금은 냉장고 없이 생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전제품은 값이 비싸다 보니, 누구는 주고 누구는 못 주는 식으로는 지원할 수가 없습니다. 전 가구를 지원하려면 수십억 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업과 공동으로 지원하는 방안 등 여러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소외된 이웃들의 외로움을 덜어 주는 부처님 오신 날이 되길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우리는 다시금 부처님께서 왜 이 세상에 태어나셨는지, 어떻게 깨달음을 얻으셨는지, 열반에 드신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탄신일, 성도일, 열반일을 각각 따로 기념하고 있지만, 남방 불교에서는 ‘베삭 데이(Vesak Day)’라고 해서 세 가지 의미를 한 날에 함께 기념합니다. 여러분도 부처님 오신 날을 계기로, 단지 나만의 기쁨에 그치지 않고 주위 사람들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한반도에는 평화가 절실하고, 우리 사회에는 국민 간의 화합이 절실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는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따뜻한 안정이 절실합니다. 여러분이 계신 지역에 소외된 노인들이나 외로운 이웃이 있다면 한 번씩 찾아가 보시기를 바랍니다. 곧 어버이날이 다가옵니다. 이런 날을 기회 삼아 부모님 댁에 들르거나, 멀리 계신다면 전화라도 한 통 드려 보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은 공경하면서 정작 자기 부모에게는 무심하다면 수행자로서 모순된 모습일 겁니다. 가정에 집착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특별한 날을 계기로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소통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이 차례대로 질문을 했습니다. 온라인에서 한 명, 현장에서 한 명이 각각 질문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동네에서 21년 동안 치킨집을 하고 있는데 수행자로서 혹시 불살생 계율을 어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된다며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치킨집 운영이 불살생 계율에 어긋나는 일일까요?

“저는 21년째 치킨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제 일이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일이라 여겨 당당했습니다. 그런데 정토회에서 오래 활동한 도반 한 분이 제 직업이 살생하는 일이므로 그만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이 일이 자식들부터 시작해 대대손손 악업을 끼칠 수 있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멈추는 게 좋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며칠간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제가 이 일을 십 년 더 이어가도 되는지 스님께 여쭙고자 합니다. 이처럼 직업에 대한 걸림이 생긴 상황에서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그 일을 그만두고 살아도 큰 어려움이 없다면, 그만두는 것이 좋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굳이 안 해도 된다면 계속할 필요는 없겠죠.”

“그런데 그건 그분의 생각이잖아요. 저는 그동안 자신만만하게 장사를 해왔고, 단지 하나의 직업으로만 여겼지, 그것이 나쁘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지금은 ‘그건 그 사람의 생각일 뿐이고, 나는 내 길을 가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수행자의 삶을 살아갈 때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매일 남의 살을 끓는 기름에 튀기면서 그걸 잘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는 없죠. 질문자도 나중에 죽으면 지옥에 가서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 봐요. 그게 자랑스러운 일일까요? (웃음)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는 최선의 길, 차선의 길, 차악의 길, 최악의 길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선택을 할 때는 최선의 선택, 차선의 선택, 차악의 선택, 최악의 선택이 있어요. 우리가 항상 최선의 길만 갈 수 있을까요?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최선의 길만 가려면, 부처님처럼 출가해서 밥은 남이 먹다 버린 것만 얻어먹고, 옷은 남이 입다 버린 것만 주워 입고, 잠은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자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면,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의 다른 생명에게도 일절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항상 최선의 길만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차선의 길도 존재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남이 먹다 버린 밥을 얻어먹는 것은 이미 버려진 음식을 먹는 것이어서 누군가의 몫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그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가 굶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타인의 불행 위에 내 행복을 쌓는 삶이 아니죠. 이처럼 부처님처럼 사는 길이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재가 수행자의 삶을 사는 길도 있습니다. 실제로 부처님이 살아계셨을 당시에도 출가 수행자의 길만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따르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재가 수행자의 길도 열어 두셨습니다.

재가 수행자로 살아갈 때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계율은 지켜야 수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말 것. 둘째,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지 말 것. 셋째, 결혼은 허용되지만, 성추행이나 삿된 음행을 삼갈 것, 넷째, 거짓말이나 욕설, 사기를 치지 말 것, 다섯째, 술을 마시고 취하지 말 것. 이 다섯 가지마저 지키지 않는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먹지 말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산불로 인해 토끼가 타서 죽었다면, 그 고기를 먹는 것은 살생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내가 그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생명을 죽인 것도 아니고, 살생을 조장한 것도 아니죠. 이처럼 살생과 무관한 경우라면,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먹는 것이 살생을 유발한다고 생각하면, 직접 죽이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살생을 부추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버려질 음식에 고기가 들어 있다면 그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것을 먹는다고 해서 살생이 더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누군가가 나를 위해 준비한 음식에 고기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건 다릅니다. 그 고기는 다른 사람이 먹을 수도 있었던 것이고, 내가 그 고기를 먹는 것은 살생을 더 유발할 가능성이 생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두 경우가 다릅니다. 하나는 살생과 무관하지만, 다른 하나는 살생을 조장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비행기에서 제공되는 기내식은 먹지 않으면 버려집니다. 이런 경우에는 내가 그 음식을 먹든 말든 살생과 무관합니다. 반면 식당에서 돈을 주고 고기를 사 먹는다면, 고기 소비가 늘고 그만큼 살생도 증가합니다. 결국 최선의 길이란 단지 내가 직접 죽이지 않는 것만이 아닙니다. 살생을 유발할 수 있는 행위까지도 삼가는 것이 불교적 관점에서 최선의 길이에요.

스님들에게도 ‘고기를 먹지 말라.’하는 계율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스님을 대접하려고 일부러 고기를 잡았다면, 그 고기를 먹는 것은 살생을 유발하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스님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굳이 고기를 잡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록 직접적인 살생은 아니더라도 간접적인 살생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나를 위해 고기를 잡았다고 여겨지는 고기는 먹지 말라.’하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중에 음식에 고기가 들어 있었다면, 그것은 먹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나를 접대하기 위해 따로 고기를 준비했다면, 그것은 나로 인해 살생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고기를 정육점에서 사서 먹지만, 옛날 시골에서는 손님이 오면 집에서 직접 고기를 잡았어요. 내가 고기를 먹지 않았다면 그 동물을 죽이지 않았을 텐데, 내가 먹는다고 했기 때문에 살생이 벌어진 것이죠. 이런 경우의 고기는 먹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경전에 ‘고기를 먹지 말라.’하는 계율은 없지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잡은 고기라면 그런 고기는 먹지 말라.’하는 기록은 있습니다. 이것은 최선의 길을 가는 수행자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반면에 차선의 길을 가는 재가 수행자에게는 직접 살생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되어 있어요. 식당에서 고기를 사 먹는 행위까지 하지 말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건 차선의 길에 해당합니다.

차선의 길도 못 간다면 차악의 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부나 도살꾼처럼 살생을 피할 수 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그런 일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에스키모나 몽골 유목민처럼 그것이 유일한 생계 수단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기른 양을 잡아먹고 살아갑니다. 그 지역에는 채소도 없고, 고기 외에는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에게 불교를 믿지 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먹는 음식 때문에 불교가 그들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마치 기독교에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하느님을 믿지 말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소수자도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듯이, 환경이 다른 조건에 놓인 사람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양을 잡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더 좋겠죠. 요즘은 양을 팔아서 다른 음식을 살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과거에는 시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여름에는 양에게 풀을 먹여서 젖을 짜고, 그 젖으로 만든 치즈나 버터로 먹고살았어요. 겨울이 되면 양을 잡아 고기를 먹었고, 일부는 바짝 말려서 여름까지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당시 그 지역의 생활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조건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수행은 항상 현실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최선의 길을 갈 수 없다면 차선의 길을 가야 하고, 차선의 길도 가기 어렵다면 차악의 길이라도 가야 합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최악의 길은 피해야 합니다.

질문자의 직업이 도살업이라면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생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바닷가에서 자란 어부에게 ‘물고기를 잡지 말라.’하고 말하는 것은 불교를 믿지 말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부라는 직업을 버려야만 불교를 믿을 수 있다는 식의 이분법은 모순이에요. 어부도 불교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생계를 위한 직업 선택에는 현실적인 고려가 필요합니다. 이상적이지는 않더라도, 차선이나 차악의 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예요. 다만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로 허용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행위를 당연하게 여기거나 자랑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선택한 길일뿐이지, 그것이 옳거나 당연한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문자는 치킨집을 운영하면서 살아있는 닭을 가져오나요, 아니면 이미 도축된 냉동 닭을 가져오나요?”

“가맹점이라 이미 도축된 냉동 닭을 가져다 씁니다.”

“그러면 질문자가 직접 닭을 죽이는 것은 아니므로, 최악의 경우는 아닙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냉동 닭을 들여와 판매한다는 것은, 그만큼 수요를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더 많은 닭이 죽임을 당하게 되겠죠. 그렇기 때문에 이 직업은 불교적 관점에서 최선의 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제가 처음에 그 직업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물어본 거예요. 예컨대 치킨집 대신 옷 가게를 하거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도 있다면, 굳이 치킨집을 고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이 일이 수익이 더 난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고집한다면, 그 직업을 바꾸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른 기술이 없다거나, 이 일을 20년간 해왔고, 또 직접 칼로 닭목을 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축된 닭을 튀겨 판매하는 상황이라면, 최악의 상황은 아니에요. 살생을 유발하는 행위에 해당하니까 차악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내가 직접 죽이지는 않으니 차선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결국 그 중간쯤에 해당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보다 나은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죄를 짓는 건 아닙니다. 질문자의 직업일 뿐, 오계를 어긴 것도 아니잖아요. 물론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치킨집을 하면 살생을 유발하니 좋지 않습니다.’하고 의견을 낼 수는 있죠.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당신의 아들이 안 좋아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업을 바꿀 수 있다면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다.

저한테 누군가 ‘스님이라면 해진 옷을 입어야지, 옷이 멀쩡해 보인다.’라고 말한다면, 그 의견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저 역시 더 검소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해진 옷을 꿰매 입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떨어진 옷을 손질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일을 맡아줄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다들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니 차라리 버리라고 권하죠. 그러나 정토회에는 바느질 공방이 있어서 옷을 수선해 주는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제가 이렇게 해진 옷을 계속 입을 수 있는 겁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없었다면 어쩔 수 없이 저도 해진 옷을 버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남이 버린 옷을 주워 입고, 남이 버린 음식을 먹고살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가능하면 새 옷은 사지 않고, 음식도 검소하게 먹고, 생활도 소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질문자의 직업을 바라보면 ‘내가 남의 것을 훔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라고 자부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내가 큰 죄를 짓고 있구나.’하고 자책할 필요도 없어요. 이것이 중도적 관점입니다. 해결이 좀 되었나요?”

“네, 정리가 잘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기도할 때는 본인 마음대로 하세요.” (웃음)

“네, 감사합니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답하기가 모호합니다. 보통은 무엇을 위한 기도인지 목적들이 있을 거잖아요. 부부 갈등을 겪고 있다든지, 애가 말을 안 듣는다든지, 장사가 안된다든지, 요즘 심리가 불안하다든지, 이런 구체적인 사정이 있다면 그것에 맞게 조언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맥락 없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하고 묻는 것은 막연합니다. 상황마다 해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부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척척 풀릴 것이라는 식의 만병통치약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문 하나만 받아서 그것만 외우면 부부 문제도, 자식 문제도, 사업 문제도, 심지어 건강 문제까지 다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겁니다.

불법(佛法)이란 결국 무엇이든 움켜쥔 것을 내려놓고 버리는 데서 해탈의 길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문 하나만 달라는 요구는 하나를 움켜쥐고 거기에 얻고자 하는 모든 욕망이 반영된 요구입니다. 이런 요구 자체가 애초에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어긋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식의 요청에 대해 ‘이 기도문으로 하세요.’라고 답하는 것이 오히려 바른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자가 좋을 대로 기도를 하라고 답한 거예요. 물으라고 해서 물었는데 답변을 그런 식으로 하면 어떡하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것이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합한 대답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할 때는 질문자가 좋을 대로, 엿장수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 민주정치가 추구하는 다양성으로 인해 극단주의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극단주의는 다양성을 저해합니다. 이런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 부처님은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가르침도 설하셨는데, 올바른 삶의 방향을 도출하였다는 것은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닌가요?

질문에 답하다 보니 법회를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 수행법회 시간에 또 대화를 나누기로 하고 12시가 다 되어 수행법회를 마쳤습니다.

3층 설법전을 나온 스님은 지하 공양간으로 이동하여 대중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오후 2시에는 손님들이 찾아와서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손님들이 돌아간 후 스님은 오후 내내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다가 5시 30분이 되어 다시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국회의원이 찾아와 스님과 저녁 식사를 한 후 차담을 했습니다. 국민 통합을 위한 정치인의 역할과 더불어 정치, 외교, 통일, 안보 분야의 위기 극복 방안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 저녁반 수행법회 생방송을 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50여 명의 대중이 자리하고, 정토회 회원들은 온라인 화상 회의 방에 접속한 가운데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오전처럼 경상북도 산불 피해 이재민들을 돕는 구호 활동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는 수행자의 자세를 이야기한 후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청년특별지부에서 많은 회원들이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찾았습니다. 현장에서 한 명이 질문하고, 온라인에서 세 명이 질문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아들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남편이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남편이 너무 괴로워합니다.

“25살 된 아들이 설 명절을 열흘 앞두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은 취업을 준비하며 학교 근처에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평소 말수는 적지만 부모에게 자주 안부 전화를 하던 속 깊은 아이였습니다. 특히 저와는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아들에게서 잡곡밥이 몇 개 남지 않았다는 전화를 받았던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챙겨 주러 갔을 텐데, 명절 장을 보러 가느라 하루를 미뤘습니다. 다음 날 전화가 닿지 않았지만, 시험을 앞두고 바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불이 꺼진 아들 방의 문을 열어보니 침대 아래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저는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때 시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12년 전 친정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몇 년을 울면서 살았습니다. 친정엄마를 통해 인간이 병들어 죽는 과정을 지켜보았는데, 이번에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었습니다. 다행히 정토회를 만난 덕분에 수행자로 살기로 마음을 정리했고, 이번에 모둠장 소임도 맡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아직도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고, 그 슬픔이 가시 돋친 말로 저를 향합니다. 그러다 문득 12년 전 제가 친정엄마를 잃고 남편에게 했던 행동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남편도 너무 힘들어서 그렇구나.’ 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대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저를 많이 의지하고 있고, 서로 다독이며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소임으로 바빠서 남편이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 걱정됩니다. 스님의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잘하고 있는데 제가 또 무슨 도움을 주겠어요. 질문자는 지금 정토회 활동을 조금 줄이고 남편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은 것 같네요. 그런데 아들은 어떻게 죽은 거예요?”

“부검 결과 사인은 심장마비였습니다.”

“심장마비가 오면 통증이 아주 심하다고 알고 있어요? 아니면 그냥 자는 듯이 죽는다고 알고 있어요?”

“제가 현장에 갔을 때 몸부림친 흔적이 있어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긴 시간 동안 고통스러웠을까요? 아니면 그저 몇 분이었을까요?”

“잠깐이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아들이 갑자기 내 곁을 떠나서 섭섭한 것이지 아들은 편안하게 죽은 거예요. 이제 나의 과제는 ‘섭섭한 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입니다. 아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건 없습니다. 아들은 편안하게 잘 갔습니다. 일부러 죽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아들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만 잘 살면 됩니다.

보통 자식을 잃으면 정신을 차리기 힘듭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친정엄마를 먼저 보내본 경험도 있고, 정토불교대학에 다녀서인지 담담하게 잘 극복하고 계시네요. 하지만 남편은 처음 겪는 일이잖아요. 부모를 먼저 떠나보낸 경험도 없고, 자식을 갑작스럽게 잃었으니, 충격이 훨씬 클 수밖에 없습니다.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고 하잖아요. 그만큼 아픔이 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슬퍼한다고 자식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자식은 자기 삶을 살다가 떠난 겁니다. 내가 죽인 게 아니라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이의 운명입니다. ‘그때 내가 옆에 있었더라면…’ 하는 후회는 끝이 없습니다. 옆방에 있어도 ‘왜 그때 방문을 한번 열어보지 않았을까?’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쉬움을 붙잡으면 끝이 없어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는 것이 교통사고나 병으로 인해 오랜 통증을 겪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일어난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필요합니다.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쏟아진 물이에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봐야 합니다. 아들이 비록 짧게 살다 갔지만 친구들에게 좋은 친구로 기억될 정도로 보람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오래 산다고 꼭 좋은 인생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서른셋에 돌아가셨고, 최제우 선생도 마흔에 생을 마감했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살았잖아요. 길게 산다고 해서 꼭 잘 사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을 평가할 때 자꾸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를 기준으로 보려 합니다. 그러나 인생을 잘 살았는지 아닌지는 생의 길이로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첫째, 아들이 짧게 살다 간 것이야 안타깝지만, 자기 방식대로 나름 충실히 살았다는 점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나 역시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곧 아이를 위하는 길이고, 남편을 위하는 길입니다.

둘째, 남편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가족이 죽는 경험을 처음으로 한 것이잖아요. 그것도 갑작스럽게 아들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그러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따뜻하게 등을 두드려 주고, 안아도 주고, 함께 밥을 먹는 것이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됩니다. 괜히 위로한답시고 ‘원래 사람은 다 죽는 거야.’ 하는 말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 말보다는 그냥 울 때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아픔도 조금씩 치유가 되어서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질문자가 정토회 활동으로 바빠서 남편의 외로움이 깊어진다면, 정토회 활동을 좀 줄이고 남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정토불교대학을 같이 다니거나 봉사활동을 같이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일상생활이 바빠지면 그만큼 과거의 아픔을 잊게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모든 일을 손 놓고 아들 생각만 계속하면 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생각이 자꾸 증폭되어 더 힘들어집니다. 남편이 때때로 아들 생각에 울 수는 있지만, 그럴수록 다른 일에 마음을 쏟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 108배는 해보니까 큰 도움이 되었는데, 1,080배는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저는 어릴 적 아버지의 폭행으로 긴장 속에 살았는데, 그 영향으로 지금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듭니다. 사춘기 아이들과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을까요?

  • 저는 입에 발린 소리를 곧잘 하고, 상사가 하는 지시에 속으로는 못 할 것 같지만 겉으로는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 역시도 거짓말에 속하는가요?

네 명과 대화를 나누고 나자 수행법회를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참석자들은 모둠별로 마음 나누기를 한 후 밤 10시가 다 되어 수행 법회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74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에서 반야심경 3강을 하고, 오후에는 대한 불교 조계종 총무원을 방문하여 산불 재난 및 문화유산 복구 지원 기금 전달식을 한 후, 저녁에는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16강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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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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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3 12:44:07

순선

스님 존경합니다 감사드립니다

2025-05-03 12:27:43

견오행

늘 함께 합니다.감사합니다.()()()

2025-05-03 09:5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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