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10.2 수행법회, 선문대학교 초청 강연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정토회 회원들 모두가 매주 정기 수행법회를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오전 10시 정각에 서울 정토회관 방송실에서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가운데 지난 한 주 동안 정토행자들의 활동을 영상으로 본 후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순간순간에 연연해하지 말고 조금 길게 인생을 바라보면

“오늘 아침은 날씨가 시원하다기보다는 약간 춥다고 느껴질 만큼 기온이 급강하했습니다. 이제 정상적인 가을 날씨를 회복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짧게 보면 올해는 가을이 안 오려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길게 보면 약간 차이가 있었을 뿐 가을은 역시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순간순간을 보면 영원히 지옥에 사는 것 같거나 영원히 천상에 사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지옥 같은 인생도 지나놓고 보면 추억이 되고, 극락 같은 인생도 지나놓고 보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순간순간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고 조금 길게 보고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해 나가는 게 필요합니다. ‘이런 일도 있구나!’, ‘저런 일도 일어나네!’ 이렇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항상 많은 교훈을 줍니다.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살아가다 보면 조급해지기 쉽고 생각에 사로잡히기가 쉽습니다. 한 생각 내려놓고 좀 더 자연적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되면 괴로울 일 없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자연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많은 실패도 길게 보면 인생살이에서 하나의 경험이자 연습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좋은 가을에 여러분과 법담을 나누게 되어 참 좋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세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정토회에서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분인데, 남편의 반대가 심하다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싶은데 남편의 반대가 심합니다

“저희 가정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바뀐 환경입니다. 차근차근 사회 일도 하면서 수행자로서 입재와 회향을 거듭하며 조금씩 수행 과정을 밟아오던 중 갑자기 정토회에서 봉사활동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아서 참다운 수행과 봉사가 무엇인지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디어 뱅크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몸을 안 사리고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남편이 ‘돈도 안 되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고, 일 시키는 게 다른 곳에 비해 너무 심하다!’ 하면서 막 성질을 부립니다. 정토회에는 새벽같이 나가면서 남편이 하자는 일은 안 한다며 ‘정말 당신 짜증 나!’ 하며 굉장히 화를 냅니다. 저도 순간 화가 올라와서 ‘수행을 꼭 그렇게 얘기해야만 해?’하며 짜증을 내면 곧바로 집안 분위기가 묵언 수행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제가 정토회 활동만 다녀오면 남편의 투정과 앙탈이 너무 심합니다. 저는 앞으로 전법 활동도 하고 싶고, 수행 법회도 참석하고, 평일에도 봉사를 하고 싶은데, 이런 투정쟁이를 어떻게 살살 달래가며 활동을 해야 할까요?”

질문자는 ‘울고 싶어라’ 하고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웃으며 답변을 시작했습니다.

“까부는 거 보니까 이혼을 당하겠네요. (웃음) 아주 재밌게 잘살고 있네요. 첫째, 정토회 활동은 그만두고, 매일 아침 일어나서 정진하고 수행법회에 참가하면서 봉사는 회원 자격이 상실되지 않는 수준에서 하면서 가정을 화목하게 유지해 나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수행에 어긋나는 길도 아니에요. 우리가 수행 정진을 하는 이유는, 첫째,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둘째, 가정을 편안하게 하고, 셋째,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일에 도움이 되라고 정토회 활동도 하는 겁니다. 혼자 살면 몰라도 결혼해서 같이 살면 서로 맞춰야 합니다. 배우자의 의사도 존중해서 ‘네’ 하면서 서로 맞춰서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로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을 가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둘째, 우리가 태어나 자라면서 직업을 갖거나 결혼을 하거나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는 내가 더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기 위함입니다. 물론 스무 살까지는 혼자의 힘으로 살 수가 없으니 부모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남의 도움으로 살고 있는 동안은 모든 권리를 내 마음대로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권리를 부모에게 위임해서 부모의 허락을 받고 나서 최종 결정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스무 살이 넘으면 스스로 자립을 해야 합니다. 더 이상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해서도 안 되고, 부모에게 내 권리를 위임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무 살 이전에는 내 의견을 내더라도 결정은 부모가 한다면, 스무 살 이후에는 부모의 의견은 하나의 의견일 뿐 결정은 내가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인의 의미는 성체, 즉 어른이 됐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모와의 관계를 좋게 하는 건 좋지만, 효도한다는 이유로 부모가 하자는 대로 순종을 한다면 그 사람은 어른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어린애에 불과합니다.

역사적으로 자기 인생의 결정권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바로 종입니다. 종은 주인이라는 존재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런 결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무조건 누가 시키는 대로 해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옛날 복종의 문화입니다. 지금은 복종의 평화가 아니라 서로 합의해서 평화를 만들어가야 하는 시대입니다. 즉,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되어야 합니다.

집에서 어린애가 엄마를 기다리듯이 남편은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어린애가 ‘엄마!’ 하면서 찾듯이 애타게 기다리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되니까 남편은 불만을 갖게 된 거예요. 그래서 화를 내는 남편을 이해해야 합니다. 질문자가 짜증을 낼 필요가 없어요.

‘내가 늦게 들어와서 아이가 엄마를 찾듯이 남편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이렇게 남편을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남편을 이해해서 어린애 달래듯이 달래는 방법이 있고, 둘째, 가능하면 안 기다리도록 일찍 들어가는 방법이 있고, 셋째, 남편과 대화를 해서 푸는 길이 있습니다. 남편에게 이렇게 대화를 하는 겁니다.

‘화가 나는 당신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제가 노름하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바람피우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옛날보다 화를 적게 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수행하러 다니는 거예요. 그것이 또 고마워서 봉사를 하는 겁니다. 돈을 받지 않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봉사활동을 그만둘 수는 없지 않을까요? 부부가 살면서 꼭 돈만으로 얘기할 수는 없잖아요. 나하고 당신 사이에도 장사처럼 돈만으로 얘기할 수 없듯이 이 세상에는 돈만으로 얘기할 수 없는 일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봉사도 좀 하면서 살아가면 어떻겠느냐고 남편에게 제안을 해보는 겁니다. 남편이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물건을 집어 던지더라도 나는 그런 남편을 이해하면서 차분하게 대화로 갈등을 풀어나가는 길도 있습니다.

제일 쉬운 길은 내가 봉사활동을 그만두고 남편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겁니다. 그 방법이 제일 빨리 갈등을 푸는 길입니다. 그런 선택을 질문자가 자발적으로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렇게 살아가지느냐입니다. 나를 탁 내려놓고 그렇게 살아가지면 그것도 하나의 길이에요.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내가 수행이 덜 된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종만이 평화의 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서 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제가 출가를 했을 때 어머니가 울면서 죽겠다고 하셨는데, 그때 제가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는 것만이 올바른 인생의 길이었을까요?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하고, 자식은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야 됩니다. 물론 대화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문제가 해결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는 부모 자식의 정을 끊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하고, 실제로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질문자도 그 과정에서 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할 때 ‘내가 이혼을 당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지금 질문자의 말투는 마치 ‘내가 정토회에 다니다가 이혼당했다. 그러니까 정토회가 책임을 져라!’ 이런 식이에요. 이것은 비주체적인 자세입니다. 수행하고 봉사하는 것도 골프를 치거나 헬스클럽에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선택입니다. 골프를 치러 가거나 다른 남자를 만나서 연애를 하는 것도 모두 자기 선택이잖아요. 그럴 때 남편이 비난을 하면 그 선택을 포기하는 방법도 있고, 내 생각에는 이 선택이 바르다면 나는 남편의 노예가 아니고 주인이기 때문에 내 길을 갈 수도 있는 거예요. 내가 내 길을 가기 위해서는 합의를 파기하는 이혼도 감수해야 하고, 부모와 의절하는 것도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내 길을 가는 데 있어서 발생하는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나 상대를 미워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어야 하지만, 성년이 되어서도 계속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아이의 자립을 위해서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죠. 인생이란 서로 타협해서 조정해 나가는 것입니다. 특히 결혼해서 부부가 되었다면 헤어지거나 관계를 변경하는 어떤 선택을 할 때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안 됩니다. 어느 정도 합의를 해나가면서 가야 하고, 합의가 도저히 안 되면 서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해약을 하면 됩니다. 함께 어떤 일을 하기가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면, 언제든 해약할 수도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해약할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중에 어떤 길을 갈 것인지는 차분하게 자기가 선택해서 결정을 내리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화를 마친 후 스님이 닫는 인사를 했습니다.

“다음 주 수행법회는 한국에서 방송을 하지 못하고, 튀르키예에서 방송을 하게 됩니다. 튀르키예-시리아 접경 지역에 지진 피해가 컸는데, JTS에서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해 학생 4천 명이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새로 지었습니다. 다음 주에 또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수행법회 생방송을 마치고 나니 11시 30분이 넘었습니다.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 1시 30분에 서울을 출발하여 충남 아산으로 향했습니다. 선문대학교에서 오래전에 스님에게 강연을 요청했는데 오늘 시간을 내어 강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차로 2시간을 달려 선문대학교 아산캠퍼스 본관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차에서 내리자 선문대학교 문성제 총장님과 한국종교협의회 이현영 회장님이 반갑게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학교 내에 건물 배치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총장실로 이동하여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먼저 총장님이 학교 소개를 해주었습니다.

“저희 학교는 건학 이념이 세계 평화이다 보니까 다양한 국적의 다양한 종교를 가진 학생들도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무슬림 학생들도 있고, 각 종교마다 기도실도 있어서 다양한 종교를 가진 학생들이 각자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유학생들이 많이 와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유학생들의 상황이 어떠한지 궁금해하며 총장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채식 식당이 많이 없어서 외국인들이 살기에 많이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자이나교에서는 계란이나 우유도 안 먹는데 한국에 오면 밥을 먹을 데가 없다고 해요. 요즘은 무슬림 사람들이 한국에 많이 오는데, 할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 한국에는 없잖아요.”

“저희 학교에서는 할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습니다.”

“유학생들은 지원이 많이 필요하겠네요. 저도 캄보디아 바탐방에 있는 왕립 불교대학에서 여학생 기숙사를 지어달라고 요청해서 얼마 전에 준공식까지 하고 왔거든요. 학비가 무료라고 하더라도 생활비까지 학교에서 지원을 하기는 어렵거든요. 특히 시골에서 온 여학생들은 더 사정이 어려워서 기숙사를 지원한 겁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강연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 함께 강연이 열리는 선문대학교 원화관 아트홀로 이동했습니다. 어제와 내일이 공휴일이라 오늘 휴강을 한 강의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쉽게도 학생들이 많이 참석하지는 못했습니다. 120여 명의 대학생과 교직원, 지역 주민들이 자리한 가운데 큰 박수와 함께 스님이 무대 위에 올랐습니다.

먼저 스님이 즉문즉설의 취지에 대해 소개한 후 청중석에서 자유롭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 손을 들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아홉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자는 아이에게 화를 자주 내게 되는데 어떻게 하면 화를 내지 않는 아빠가 될 수 있는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 아빠가 되고 싶어요

“저는 지금 아이들을 키우는 데 있어서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문제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가 문제 있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저도 좀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좀 문제가 많은 삶을 살아오긴 했습니다. 그러다 간신히 지금의 아내를 만나서 아이도 낳고 살고 있는데요. 저는 다섯 살과 일곱 살이 된 아들과 딸을 키우고 있는데, 아이들한테 화를 자주 냅니다. 어떻게 하면 화를 내지 않으면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요?”

“질문자는 어떨 때 아이들에게 화를 냅니까?”

“아이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할 때 화가 납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이들에게 게임을 좀 시켜 주고 있었는데요. 아이가 잘 모르고 버튼을 자꾸 눌렀는데 그게 현금 결제가 되는 거라서 적지 않은 금액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섯 살과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돈이 지급되는 게임을 시켰어요?”

“아이들이 좋아해서요.”

“아이들이 좋아하는데 돈이 좀 나가면 어때요?”

“돈이 너무 많이 나갔습니다.”

“게임에 쓸 수 있는 돈의 한도를 가르쳐주거나 그런 게임을 시키지 말아야지, 그런 게임을 하게 해 준 질문자의 잘못이 아닌가요?”

“누르면 돈이 나가니까 누르지 말라고 가르치긴 했습니다.”

“질문자를 보니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한다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다섯 살, 일곱 살 먹은 아이에게 돈이 많다 적다는 개념이 있을까요?”

“아이들은 아직 그런 개념이 없죠.”

“아이들은 돈이 십만 원이 나가는지 백만 원이 나가는지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그저 이 버튼을 눌러봤다가 저 버튼을 눌러봤다가 하는 것뿐이에요. 아이들은 한번 가르쳐서 아는 게 아니라 여러 번 경험해 가면서 그걸 터득합니다. 질문자도 다섯 살 때나 일곱 살 때 한 번 가르쳐 주면 단번에 딱 알아들었어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걷기 시작할 때도 단번에 걷는 아이는 없습니다. 서지도 못하다가 겨우 섰다가 넘어지고, 기둥을 잡고 섰다가 넘어지고, 혼자 섰다가 넘어지고, 또 걷다가 넘어지기를 수백 번 거듭하면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것처럼 열 번 가르쳐 줘서 안 되면 열한 번 가르쳐야 하고, 백 번 가르쳐 줘서 안 되면 백한 번 가르쳐 줘야 하는 게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그런 과정이 성년이 되는 과정입니다.

질문자가 잘못해서 생긴 문제인데 아이한테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겁니다. 왜 그것도 모르냐고 아이를 나무라는데, 알면 왜 아이라고 하겠어요? 우리 말에 ‘어린 백성’이라고 할 때 어리다는 뜻이 뭐예요? 어리다는 말은 순수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어리석다’, ‘모른다’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여러 번 반복해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운전을 가르치면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문 운전 강사한테 배울 때는 열 번 가르쳐도 모르면 열한 번을 가르쳐 주는데, 남편은 두 번만 가르쳐 주고도 모르면 손이 먼저 올라가거나 화를 내어서 결국 부부싸움을 하게 됩니다. 부모가 아이를 가르치거나 형이 동생을 가르치는 것도 효과가 별로 없습니다. 열 명 중에 여덟 명은 실패합니다. 그 이유가 아이가 모르면 화를 먼저 내거나 손이 먼저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문 강사에게 맡기면 그 사람은 가르치는 것이 직업이기 때문에 열 번 모르면 열한 번을 가르쳐 줍니다.

첫째, 아이는 모르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질문자는 천재라서 다섯 살 때부터 한번 가르쳐 주면 다 아는 존재였는지 모르지만, 질문자의 아이는 지금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의 성질에 안 맞게 키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하게 교육을 하라는 게 아니라 한번 가르쳐서 모르면 두 번 가르쳐야 하고, 열 번 가르쳐서도 모르면 열한 번 가르쳐 줘야 한다는 겁니다.

부모가 화를 내면 아이의 심리가 불안해집니다. 아이가 불안한 심리를 갖게 되면, 어떤 일을 시켜도 잘못합니다. 잘못하면 아버지가 야단칠까 봐 망설이게 되어서 나중에 크면 자기도 모르게 결정장애를 갖게 됩니다. 질문자는 아이가 나중에 결정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도록 지금 만들고 있는 거예요. 야단을 치려면 그런 게임을 가르쳐주지 않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결제되는 걸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아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잖아요? 그걸 시작한 것 자체가 아이에게 총 쏘는 법도 알려주지도 않고 총을 먼저 주는 것과 같습니다. 선택도 잘못했을 뿐만 아니라 모른다고 고함을 치는 건 아이의 성장에 많은 장애를 줍니다. 지금은 야단치고 끝나지만, 아이가 성장하면서 어떤 결정을 할 때 아이의 무의식 세계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야단을 많이 맞으며 자란 아이들은 어떤 결정을 잘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를 말하기 이전에 질문자는 지금 아이의 성질을 잘 모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순간적으로 화가 나는 건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그 과보를 받아야죠. 나중에 아이가 커서 심리 불안이 생기든지 발달장애가 생기면 질문자가 그걸 부담해야 합니다.”

“화를 억누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화를 억누르면 안 됩니다. 화날 일이 없어야 합니다. 아이가 모르는데 왜 화를 내요? 알아야 하는데 모를 때 화를 내는 건 이해하는데, 아이는 모르는 존재잖아요. 이미 화가 났는데 아빠가 화를 참고 있으면, 비록 때리거나 고함을 치지 않더라도 아이는 심리적으로 긴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화날 일이 없어야 합니다. 화가 나려고 하면 ‘아빠 잠깐 나갔다 올게’ 하고 화장실에 가서 화를 내든지, 밖으로 나가 버려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이를 악다물고 참는 건 아이한테 더 큰 불안을 줍니다. 아이는 벌써 ‘틀리면 어떡하지’ 하면서 가슴이 조마조마해집니다. 아이가 해 달라는 대로 해주면 버릇이 나빠지고, 아이를 야단치면 심리적 불안이 생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대부분 우선 야단부터 쳐서 심리적으로 억압이 생기게 하고, 나중에 해 달라는 대로 해줘서 버르장머리도 나쁘게 만듭니다. 심리적 억압이 생기면 반드시 사춘기 때 저항을 하게 됩니다. 아이가 사춘기 때 엄마 아빠한테 저항하면 왜 이렇게 버릇이 나쁘냐고 화를 내면 안 됩니다. 그럴 때마다 ‘어릴 때 심리적 억압이 있었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심리적 억압을 풀어주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다음 질문자는 스님의 다양한 사회 실천 활동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며 스님이 생각하는 이상 사회의 최종 모습은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스님이 사회 실천을 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요?

“스님께서는 사회운동, 환경운동, 난민 구호 운동에 남북통일 운동까지 아주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요. 스님께서 목표하시거나 이루고자 하시는 이상 사회의 모습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최종 목표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첫째, 저는 가능하면 자연이 있는 그대로 보존됐으면 좋겠습니다. 난개발 혹은 과잉 개발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개발하는 사람들을 욕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자연이 그대로 보존됐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저는 사람들이 아주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별로 안 합니다. 그러나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기본 요건은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저생계가 보장이 안 되면 내 형제나 내 나라 사람이 아니라도 도와야 합니다. 굶주림이라든지, 병을 얻었는데 치료를 못 받는다든지, 이런 일은 이 세상에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서도 최소한 초등학교는 다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를 못 다닐 형편이면 최소한 글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몇 개월 학습이라도 해야 합니다.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할 수 있는 산수는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학교를 못 다녀도 책을 통해 학습이라도 할 수가 있고, 또 산수를 할 줄 알아서 장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초등학교에도 못 보낸다는 것은 굉장히 가난하다는 얘기예요.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의 공부를 안 가르치려고 하겠어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아이 공부는 뒷전이 되는 겁니다. 그럴 때는 우리가 책임을 지고 그 아이들이 배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자연환경이 너무 황폐화하지 않도록 보존해야 하고, 누구든지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나야 하고,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전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갈등을 하더라도 폭력적으로 문제를 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내 아이니까 때려도 된다는 식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라도 자식을 때리면 안 됩니다. 또한 선생님이라도 학생들을 때리면 안 됩니다. 주인이라도 종을 때리면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주인이 노예를 때리던 습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옛날에는 아이가 부모의 노예와 같았고, 학생은 선생님의 노예와 같아서 늘 폭력이 앞섰던 것인데, 이제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저는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뿐 그 외에는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크게 없습니다. 사람은 태어남에 의해서 차별받아서는 안 됩니다. 태어나 보니 얼굴이 검거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 밑에서 자라다 보니 무슬림이 되었거나, 태어나 보니 한국 사람이거나, 태어나 보니 여자라거나, 나도 모르게 성인이 되고 보니 내 성향이 동성애거나, 이런 것은 하느님의 벌도 아니고 전생의 업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움입니다. 자연스러움은 있는 그대로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으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선택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도만 이루어지면 괜찮은 사회이지 않을까요?

하지만 사회는 이런 정도조차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것들이 현실에서 안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이루어지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저는 천국이 있다 해도 내 발로 지옥으로 가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는 일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옥에는 너도나도 도와달라고 할 테니 일거리가 많습니다. 그러니 저와 같은 사람은 자발적으로 지옥에 가길 자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하는 짓은 지옥 갈 일을 해 놓고 늘 천국에 가고 싶어 하니까 혹시 천국에 못 갈까 싶어 늘 조마조마하고 불안한 거예요. 저는 하는 짓은 천국에 갈 짓을 해 놓고 천국에 보내준다고 해도 ‘싫다. 지옥에 가고 싶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끔 기독교인이 십자가를 들이밀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렇게 강요해도 저는 웃으며 대답합니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지옥에 가려고 그럽니다.’

그러니 관점을 어떻게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저는 어떤 특별한 기준이 없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기준이 서로 차이가 납니다. 윤리, 도덕, 종교적 기준이 다를 때 저는 항상 자연 생태계로 돌아가서 자연 생태계는 어떠한지를 봅니다. 어미가 새끼를 보살피는 것은 자연생태계의 동물들도 하는 행위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악(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새끼가 부모를 보살피는 것은 자연 생태계의 동물들이 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만약 인간이 그런 행위를 하면 선(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악(惡)은 멈춰야 할 일이고, 선(善)은 선택해야 할 일입니다. 선한 행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데 자기가 선택해서 하는 것입니다. 악한 행위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멈춰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악은 멈추고 선은 닦는다는 뜻에서 ‘지악수선’ 이렇게 표현합니다.

가능하면 악행은 하지 말고, 가능하면 선행을 하면 좋지만, 선행을 안 한다고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선의 기준이 다 다를 때는 그 기준을 자연 생태계로 두고 판단해야 합니다. 이것은 종교와 관계가 없습니다. 종교적으로도 조금씩 기준이 다르고, 윤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기준이 다릅니다. 같이 살 때는 각자의 기준을 접어두고 자연생태계에 기반해서 이런 행위는 하지 말자든지, 이런 행위는 가능하면 권유하자든지, 이렇게 해나가야 합니다.

저는 개인사에 대해서는 별로 간섭을 안 합니다. 종교에 대해서도 간섭을 안 하고, 윤리와 도덕에 대해서도 별로 간섭을 안 해요. 그러나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살 때는 ‘이렇게 살자’ 하고 정한 게 있잖아요. 제가 속한 정토회에서도 이렇게 하자고 정해진 규칙이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저도 물론 간섭을 하긴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함께 지키자고 정한 약속이니까요.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남의 인생에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질문자와 저는 같이 약속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자의 행동에 대해서 저는 일절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이런 가치관을 갖고 지금까지 삶을 살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 외삼촌이 고독사로 돌아가시고 바로 화장을 해서 허망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대비하고 살아야 할까요?
  • 일어나는 욕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어떻게 다스릴 수 있나요?
  • 신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스님은 어떤 기준으로 결정을 하나요?
  • 이번 주말에 템플 스테이를 1박 2일 동안 할 예정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임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 미얀마에서 온 유학생입니다. 여동생이 17살인데 고등학교 졸업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부모님이 속상해하시는데, 동생에게 어떻게 조언을 해야 할까요?
  • 옛날 생각이 많이 나서 괴로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양한 질문들에 대답을 하다 보니 약속한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강연을 준비한 학교 측 관계자들과 무대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선문대학교, 파이팅!”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내어 준 스님에게 참석자들은 학교 밖까지 따라 나오며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6시 30분에 선문대학교를 출발해 다시 서울로 향했습니다.

차로 2시간을 달려 8시 30분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한 후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서울시 교육감 후보가 평화재단을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고, 오후에는 우리말을 우리말로 풀이한 ‘푸른 배달말집’을 책으로 펴낸 최한실 선생님의 초청 강연에 참석하여 인사말을 하고 축하의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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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미

어디에서도 듣기 힘든 인생의 바른 스승님의 이런 말씀을 대학생이 듣게 된다면 그 마음이 어떨까. 그 자리에 앉아있는 학생처럼 감명깊게 들었습니다. 들어도 들어도 새로운 말씀이 오늘도 저를 돌아보게 합니다.

2024-10-13 19:25:47

장지인

스님의 즉문즉설이 나의 하루 일과가 되었습니다.
늘 감사드려요.

2024-10-07 15:53:03

임무진

아이가 모르는 건 당연한 것인데 잘 모르고 못하면 화가 나고 밖으로 표현하기 까지 했네요. 아이는 심리가 억압돼 무슨 일이든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합니다. 못한다고 또 야단맞을까 겁을 내는 게 당연하네요. 일단 자리를 피하든지 하겠습니다.

2024-10-07 13:3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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