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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보름 동안의 안거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스님의 하루 연재도 오늘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안거 기간 동안 스님은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900여 명의 대중과 함께하는 온라인 명상수련을 진행한 후 봉화 정토수련원으로 이동하여 50여 명의 공동체 대중과 안거 수련을 했습니다.
오늘은 보름 동안의 안거를 마무리하며 회향식을 하는 날입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50여 명이 큰 원을 그리고 둘러앉아 마지막 종합 토론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3일 동안 수행, 빈곤퇴치, 평화, 환경 등 각 부서에서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 성과와 쟁점을 발표하고, 이후 방향에 대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종합 토론 시간에는 부서와 상관없이 제안하고 싶은 내용을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스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제안한 내용이 실현가능하려면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하는지 예리하게 짚어 주었습니다.
하반기 일정을 함께 점검한 후 그룹별로 마음 나누기 시간을 끝으로 하안거 수련을 마무리했습니다.
대중 모두가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회향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보름 동안의 시간을 돌아보며 부지런히 탁마한 대중을 격려한 후 2차 만일결사를 시작하고 나서 지난 1년 6개월을 돌아보며 앞으로 정토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2주 동안 잘 쉬셨습니까?”
“네.”
“우리는 지난해에 1차 만일결사를 끝내고 2차 만일결사를 새로 출발했습니다. 2차 만일결사의 과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중심 인력의 세대교체가 잘 이루어질 수 있느냐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둘째, 질적 변화와 확산이라는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이런 과제를 이루기 위해 1차 만일결사를 마무리하는 무렵에도 많은 논의를 했지만, 별다른 변화 없이 우선 2차 만일결사를 시작했습니다. 좋은 점이라면 우리가 1차 만일결사에서 잡은 수행, 빈곤퇴치, 평화, 환경이라는 방향이 비교적 바람직했기 때문에 3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수정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쟁점이 되었던 부분은 ‘1차 만일결사에서 잡았던 빈곤퇴치라는 과제를 조정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환경문제는 우리가 더욱 힘써야 할 과제이지 조정해야 할 과제는 아닙니다. 평화 문제도 1차 만일결사를 시작할 때보다 세계 분쟁이 더 심해졌습니다. 각 나라 안에서의 사회 갈등도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개인의 고뇌나 방황도 더 심해져서 수행을 확산시켜 나가는 과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즉, 지구환경 파괴, 공동체 붕괴, 개인의 자아 상실 문제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인류의 절대빈곤 문제는 좀 해결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UN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현재 세계 80억 인구의 약 10퍼센트인 8억 명이 아직 절대빈곤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30년 전에는 세계 인구가 약 60억 명이었는데 당시 절대 빈곤층이 약 12억 명이었으니 약 20퍼센트가 절대 빈곤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세계에는 아직 절대 빈곤층이 많이 있지만 30년이 흐르면서 일부 개선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활동하는 인도의 둥게스와리 지역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인도에 갔을 때는 현지 노동자들의 인건비가 1달러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5달러 수준으로 올랐습니다. 이런 변화를 보면 절대빈곤 문제는 인류에게 점점 더 확대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빈부격차가 점점 심해지는 상대적 빈곤 문제를 과제로 삼을 것인가? 또는 개발구호 활동으로 전환할 것인가?’ 하는 논의를 해왔습니다. 그러다 결론을 내지 못하고 2차 만일결사로 넘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부탄에서 시범 사업을 진행하게 되면서 개발 구호가 더 이상 논쟁거리가 되지는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속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개발 구호 사업을 시범적으로 해보면서 절대빈곤 문제와 개발구호 문제를 동시에 푸는 돌파구를 새로 열었기 때문입니다.
‘지속 가능’이라는 목표를 설정한 이유는 환경 문제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에 따라 개발하는 난개발을 지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부탄에서 시범 사업을 시작하면서 환경적인 지속 가능성에 더해서 ‘자립성’과 ‘자발성’을 추가했습니다. 어떤 문제를 외부에서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 해결해 나간다는 측면에서 ‘자립형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추가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탄에서 지속가능한 개발 사업을 하게 됨으로써 개발구호 활동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된 것 같습니다. 부탄 한 개의 주에서 시범 사업이 성공하면, 그 경험과 성과를 부탄 전역에 확산할 수 있으며, 부탄의 경험을 갖고 전 세계로 확산을 해나갈 수도 있습니다. 현재 부탄 사업은 JTS와 부탄 정부가 협력해서 한 개의 주를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다른 주에도 확산이 가능합니다. 나아가 캄보디아나 스리랑카 등 여러 나라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해 볼 수 있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사업이 성공하면 정토회라는 작은 단체도 세상에 좋은 일을 크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됩니다. 만약 대한민국이 국가 수입의 1퍼센트라도 이런 방식으로 국제개발구호 활동에 사용한다면 아마 아시아 전역의 절대빈곤 퇴치도 어려운 문제가 안 될 겁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국가 위상에도 굉장히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대중문화 분야에서 일어난 한류 열풍은 소비문화 측면에서 세계 사람들의 선망이 되었지만, 이런 개발구호 활동은 일반 주민들에게 도덕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이런 방식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토회라는 작은 단체의 활동만으로도 국제사회에 굉장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부탄에서의 경험을 통해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해 나갈 수 있으며, 그러면 시행착오를 반복할 일도 적어집니다. 주택 개선이든, 마을 공동시설 개선이든, 농업 지원이든, 학교 지원이든,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지속가능한 개발 모델을 확대해 나갈 수 있습니다.
현재 인도 둥게스와리에서 하고 있는 마을 개발 사업도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이 보일 겁니다. 지금까지는 식수 공급을 위한 핸드펌프 설치 사업 외에 별다른 사업을 해보기 어려웠는데 부탄 시범 사업의 경험으로 다른 실험을 더 해본다면 우리가 가진 자원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토회 내부 자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자원을 활용하는 길도 있을 것이고, 다른 단체와 연대하는 길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런 방식은 좀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많은 NGO 단체들이 사업 방향을 잡을 수 없어서 자원을 낭비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이 방식은 그들과 연대하기에도 좋습니다. 확산도 쉽고 성공할 가능성도 매우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정토회 회원들도 각자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물론 젊을 때부터 세상을 향해 봉사하며 사는 길에 나서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젊을 때 이런 꿈을 잠시 꾸었다가 그 길을 가지 못하고 결혼해서 평범하게 삽니다. 그렇게 한 30년을 살고 인생을 돌아보면 결국 자기 가족을 돌본 것 외에 사회를 위해 한 것이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누가 좀 더 잘 먹고살았느냐 하는 차이는 좀 있겠지만, 어떠한 꿈도 제대로 실현해 보지 못하고 그냥 개인사에 국한되어 인생이 끝나는 겁니다. 물론 꿈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런 삶이 만족한 삶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큰 꿈을 가져보았던 사람은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아왔나?’ 하며 후회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의 50대와 60대의 중년층은 198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 있었던 학생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세대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젊은 시절의 꿈이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제 그 꿈을 다시 되살려야 합니다. 직장에서는 퇴직했고, 부모님은 돌아가셔서 부양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자식들도 성년이 되었으니 더 이상 돌볼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가족들에게 더 이상 얽매지 않고 젊은 시절의 꿈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쓴다면 사회적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겁니다. 생활은 퇴직금으로 검소하게 살면서 앞으로 10년 내지 20년 정도는 각자 가진 에너지를 꿈을 실현하는 곳에 쓴다면 이것은 하나의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내는 운동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JTS는 빈곤 퇴치를 하기 위해 주로 인도에서 활동을 많이 했는데, 여름에는 무더운 날씨 때문에 활동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지속가능한 개발 사업을 동남아시아 국가들로 확산하면 여러 나라에 갈 수 있으니 날씨로 인해 겪는 어려움도 많이 해소될 겁니다. 특히 중장년층은 대부분 어릴 때 시골에서 부모가 농사짓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구경한 세대입니다. 그래서 개개인이 특별한 기술이 없더라도 사업에 대해 조금만 설명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각자 살아온 인생 경험이 많기 때문에 현지에 가면 어릴 때 추억들이 많이 떠오를 겁니다. 어릴 때 경험한 추억들은 현지 구호 활동에도 매우 유용하며, 그것은 그분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이 될 것입니다. 물론 청년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일도 매우 필요합니다. 하지만 중장년층도 제2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매일 108배하고 명상하는 것만 수행이 아닙니다. 각자가 세상에 조금이라도 잘 쓰이는 삶의 길을 가는 것은 수행에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현장에서 구체적인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어떤 학자의 이론에 의한 사업 설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장 경험을 기반으로 한 사업 설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실제로 주민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주택이나 농지는 어떻게 개선되었는지, 이렇게 구체적인 변화를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변화는 부탄의 한 지역에서 국가 전체로 퍼질 수 있고, 다시 아시아로 확산이 될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남미와 아프리카로도 확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새로운 개발 모델입니다. 정부 주도의 새마을 운동이 아니라, 지역 주민이 중심이 된 자발적 마을 개발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기후 위기 시대에 인류의 문명 전환을 위해 스님의 마지막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고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세를 가져보면 좋겠어요. 무엇을 하든 두세 번 하면 식상해하거나 지루해하기보다는 항상 탐구하고 개선해 나가는 자세를 갖고 본인의 삶을 적극적으로 바꾸어 나가보면 좋겠습니다.
사업을 하는 방식도 가능하면 중앙 집권적인 방식보다는 개인은 개인별로, 동네는 동네별로, 지역은 지역별로 자발성에 기초한 운동을 해야 지속적으로 확산이 될 수가 있습니다. 중앙에서 기획을 해서 내려가는 방식은 초기에는 확산 속도가 빠르지만, 나중에는 속도가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 생태계를 봐도 모든 생명체가 자발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생존력이 강한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수렴하고 축적해서 한 단계 도약을 하려면 모든 정보가 한 곳으로 집중이 되는 컨트롤 타워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정토회는 온라인으로 전환을 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정보를 한 곳으로 모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획은 정보가 모이는 중앙에서 해나가고, 실천 활동은 네트워크를 형성한 지역에서 자립적으로 해나가는 새로운 조직 운영 방식을 우리가 개척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문제까지 고려한 새로운 설계를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정토회가 법륜 스님을 중심으로 모든 활동을 개척해 왔는데, 이 방식도 앞으로의 지속성을 위해 변화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법륜 스님이라는 한 개인이 뛰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법륜 스님의 뇌에 축적되어 있는 정보의 양이 많기 때문에 어떤 정보가 들어오면 비교적 빠르고 정확하게 방향을 잡을 수가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빅 데이터가 법륜 스님에게 많이 축적되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살려서 법륜 스님 중심으로 계속 운영이 되면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먼저 육체적인 한계가 있고, 그리고 연속성에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법륜 스님이라는 개인에게 너무 의존이 되어 있으면 나중에 법륜 스님 사후에 공백이 발생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법륜 스님이 개척을 하고 방향을 잡아 왔는데, 이제는 여러분들이 직접 사업을 추진해 나가면서 시행착오를 겪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은퇴를 하게 되면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면서 여생을 마무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정토회가 지향해 온 검소한 삶의 기준을 실제로 시골집에 살면서 실현해 보는 거죠. 아침에 기도하고 나서 사람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느티나무 밑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이렇게 있으나 마나 한 노인네가 되어서 여생을 보내면 어떨까 해요. 그랬을 때 정토회가 하고자 하는 소비 멈춤 운동의 돌파구도 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중 운동을 하기 위해 대단위의 수행 처소를 마련하고, 거기에 큰스님이 큰 방을 하나 갖고 있고, 이런 방식이 대부분이잖아요. 이런 방식으로는 권위주의가 없어지기 어렵습니다. 물론 정토회도 대중이 수련을 하려면 문경수련원을 비롯하여 지역마다 으뜸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큰 수행 처소는 모두 법사님들과 대중들이 운영하고, 저는 시골에서 검소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야 미래에도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개척을 해나가는 측면에서는 법륜 스님의 역할이 더 필요한 요소도 있고, 미래를 생각했을 때는 이제 법륜 스님이 빠져야 되는 요소도 있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2차 만일결사의 초반기에는 교통정리가 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토회가 2차 만일결사를 이미 시작했지만 아직 2차 만일결사의 방향성이 명확하게 잡힌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1차 만일결사의 연결선 상에서 2차 만일결사를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새로운 방향을 함께 모색해 나가야 합니다.
지난 보름 동안 수련하느라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또 시간 날 때 깊이 있게 대화를 나눠봅시다.”
큰 박수와 함께 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2024년 안거 수련을 모두 마쳤습니다.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모두 차에 올라탔습니다.
춘양면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한 후 스님은 저녁에 생방송을 해야 해서 곧바로 두북 수련원으로 이동하고, 대중들은 각자의 처소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차로 세 시간을 달려 오후 5시 30분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7시 30분부터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41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가볍게 인사말을 했습니다.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시는지요? 저는 이번 주에 경북 봉화에서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하안거 수련을 하며 보냈습니다. 어제와 그제는 정말 더웠죠. 그러나 제가 머문 곳은 산골이다 보니 에어컨 없이 생활을 해도 땀이 좀 나긴 했지만 견딜만했습니다. 여기저기 기후 변화로 인해서 폭염주의보가 내리고, 폭염으로 인한 환자들도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다 괜찮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입추가 지나면서 더위가 한풀 꺾인 느낌도 듭니다. 낮에는 여전히 덥지만 새벽 온도는 많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제가 있는 시골은 아침 기온이 21도까지 내려가 창문을 열어놓고 자면 아침에는 약간 쌀쌀한 기분이 듭니다. 아직 말복이 지나지 않았으니 무더위가 8월 말이나 9월 초까지 이어지겠지만 밤에 열대야가 되는 일은 앞으로 한두 번 정도에 그칠 겁니다. 계절적으로는 더운 날씨지만 하늘 저 위에는 벌써 찬바람이 불어 가을이 다가오기 시작한다고 해서 ‘입추’라고 합니다. 입추가 지났으니 이제 큰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사전에 네 명이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결혼 후 낳은 아이가 희귀 난치성 질환을 앓고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아가게 되었다며 막막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어릴 때 엄마 아빠가 이혼하지 않고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당연히 좋았을 겁니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러나 그런 환경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돌연변이로 인해 어떤 장애를 갖게 되었다면 그것도 아이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처럼 질문자가 태어난 가정에서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것도 질문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어른이 돼서 주위를 돌아보면 부부지간에 싸우고 이혼하는 것은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까?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냥 보통 일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이혼하는 게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30년 지난 지금은 이혼하는 부부가 절반 가까이 되잖아요. 미국은 절반이 훨씬 넘어요.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이혼도 드물었지만, 이혼을 한 여성들이 재혼을 하는 경우도 드물었어요. 남자는 재혼을 하지만, 사별하거나 이혼한 여성들은 애들을 데리고 대부분 그냥 혼자 살았어요. 그런데 앞으로는 어떨까요? 뜻이 안 맞아서 이혼을 하게 되면 여자도 재혼할 확률이 훨씬 높아질 겁니다. 미국은 재혼한 가정이 초혼 가정보다 많아요. 그럼 당연히 한 가정에 양쪽 애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남자와 재혼을 한 여자는 그 아이를 키워야 될 것이고,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여자와 재혼을 한 남자는 자기가 낳지 않은 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미국에서는 일반적입니다.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대통령도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은 특별한 게 아니에요. 만약에 질문자가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랐다면 질문자와 같이 사는 게 다수이기 때문에 평범하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게 아닙니다. ‘평범하다’, ‘평범하지 않다’ 하고 말하는 기준이 뭐예요? 소수인지 다수인지 차이일 뿐입니다. 질문자가 자랄 때는 그게 소수였기 때문에 본인이 평범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앞으로 미래에는 그게 다수가 되니까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제는 ‘평범하다’, ‘평범하지 않다’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질문자가 살아온 것은 그냥 인생살이일 뿐입니다.
그리고 질문자의 아기가 돌연변이를 일으켰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보면 약 10만 분의 1 정도의 확률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번에 인도에서 한 여성이 애를 낳았는데 머리가 2개이고 팔다리가 8개였습니다. 이것은 옛날 같으면 ‘세상에 어떤 재앙이 일어날 징조다’, ‘신의 저주이다’ 이렇게 평가할 일입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보통 수정란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일란성쌍둥이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분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런 현상이 생길 수가 있다고 합니다. 분리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이거나, 팔다리가 각각 따로 달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현상은 천만 명당 한 명, 약 0.001%의 확률로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이런 경우가 많은 이유가 뭘까요? 인도의 기후 환경이 이상해서 그럴까요? 아니에요. 인도는 14억의 인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만 명당 하나의 확률로 발생한다 하더라도 인도에서는 140명이나 발생할 수 있잖아요. 중국도 인구가 14억이지만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라서 통제가 되기 때문에 바깥으로 알려지지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뉴스는 대부분 인도에서 나와요. 인도의 인구는 유럽과 미국을 합친 인구보다 많습니다. 왜 인도에서만 이런 일이 발생하느냐고 생각하는데, 인구가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다른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질문자가 그런 아이를 낳은 것도 자연 생태계적 입장에서 보면 특별한 일이 아니에요. 단지 확률 안에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 것일 뿐이에요. 질문자가 지금 암이 걸렸다 하더라도 그것도 특별한 게 아닙니다. 암은 100명 중 1명에게 일어날 수 있는 확률에 해당되는 병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지, 그 일이 일어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교통사고가 난 것이 신의 저주는 아니잖아요. 교통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확률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추석에 천만 명이 이동한다면 교통사고로 5명에서 10명 정도가 죽을 확률이 있습니다. 추석 때마다 사람이 많이 이동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사고를 좀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시스템을 개선하면 사망자를 10명에서 5명으로, 5명에서 3명으로 줄일 수는 있지만 사고를 완전히 없애는 건 어려운 거예요. 사람이 많으면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돌연변이가 다른 사람한테 일어나지 않고 왜 하필 내 아이한테 일어났느냐고 따지면, 이 일이 특별한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 전체를 놓고 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신생아 중에는 수십 수백 명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러니 단지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난 것일 뿐입니다. 이런 현상은 저주도, 징벌도, 팔자도 아니고 그냥 길 가다가 돌멩이가 떨어져서 다치는 것처럼 자연생태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확률 중 하나가 나에게 일어났을 뿐입니다.
이럴 때 수행자라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보다 오히려 나한테 일어나는 것이 낫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겁니다. 만약 이런 일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을 때 그들이 얼마나 놀라고 괴로워했을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기독교 신자라면 모든 자연현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겠죠?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다짐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받아들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불교의 관점에서는 ‘이런 인연이 나에게 도래했다면 내가 기꺼이 이 과보를 받겠다’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자꾸 생각하기보다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옥상에서 떨어진 간판에 머리를 맞았을 때 '왜 앞에 가던 사람도 아니고, 뒤에 가던 사람도 아니고, 나만 맞았냐?' 하고 따지다 보면 신비주의로 빠지기 쉽습니다. 일단 다쳤으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일단 치료를 받은 다음에 왜 간판이 떨어졌는지 조사해 봐야 합니다. 공사 현장이기 때문인지, 간판이 떨어진 이유가 바람인지, 간판이 낡아서인지 따져보고,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태풍이 불 때는 조심한다든지, 낡은 간판은 정부에서 전부 교체를 하게 한다든지, 공사할 때는 보호막을 쳐서 행인이 다니는 데는 건축물 잔해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한다든지, 이렇게 개선을 할 수 있으면 전화위복이 되는 겁니다. 이게 단순히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런 개선점이 안 나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장애를 가진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첫째, 내가 직접 돌보는 게 아이에게 최선이라면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돌봐야 됩니다. 둘째, 내가 아무리 아이를 돌보고 싶어도 이런 장애를 가진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는 전문 의학 지식을 가진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밥을 먹거나, 배변을 하거나, 교육을 받거나, 응급 상황에서 치료를 받거나, 이런 활동을 집에서 비전문가가 하기에는 아이에게 위험할 수 있어요. 이런 경우에는 훈련된 전문가들이 아이를 돌보는 게 낫습니다. 내가 아무리 아이와 떨어지는 것이 힘들어도 아이를 위해서 전문 교육기관이나 전문 보호시설에 맡겨야 합니다. 나를 기준으로 '내가 보고 싶다', '내가 힘들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아이를 기준으로 아이에게 어떤 것이 더 좋은지를 봐야 합니다.
아이를 전문 교육기관에 맡기는 것이 아이에게 더 좋은데도 내가 아이를 못 떼놓고 계속 안고 있으면 아이가 자립하기 어려워요. 그리고 내가 키우다가 힘들어서 뒤늦게 교육기관에 맡기면 집에서 살던 버릇이 굳어져서 아이가 적응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육기관에서는 엄마처럼 대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이를 끝까지 돌보기 어렵거나 전문가의 의견이 보호시설에서 아이를 돌보는 게 좋다고 하면 보호시설에 맡기고 정기적으로 방문을 하면서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없더라도 아이가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됩니다. 또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치료를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이것은 보호시설에 아이를 버리는 게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팽개치는 것과는 성격이 달라요. 질문자는 아이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전문가와 의논해서 아이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런 아이가 있는 나도 행복하게 살아야 되고, 이런 몸을 가진 아이도 행복하게 살아야 될 거 아니에요? 이런 아이가 있는 부모는 죽을 때까지 우울하게 살아야 된다는 법은 없어요. 질문자가 지금 생각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질문자의 어린 시절도 평범한 삶이었고, 지금 일어난 일도 평범한 일입니다. 다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아이를 기준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내가 돌보는 게 아이의 미래에 가장 좋다면 내가 힘들어도 돌봐야 되고, 전문가에게 맡기고 내가 후원을 하는 게 좋다면 아무리 내가 가슴이 아파도 아이를 위해서 전문기관에 맡겨야 됩니다.
또 나는 내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를 전문기관에 맡기더라도 떳떳하게 내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이런 애를 두고 내가 행복하게 살아도 될까?'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아픈 아이를 키우는 일에 너무 빠져 있지 말고 아이를 케어하면서 저 스스로도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질문자가 웃으면서 애를 키워야 애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엄마가 늘 우울하고 인상 쓰고 조마조마해하면 애가 정신적으로 밝아질 수 있을까요?”
“제가 웃으면서 잘 케어를 해야 아이가 밝아집니다.”
“아이를 잘 키우려고 너무 애쓸 필요가 없어요. 질문자가 행복하게 살면 아이는 저절로 잘 큽니다. 자기는 불행하게 살면서 아이는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이치에 맞지가 않습니다. 스님이 늘 근심 걱정이 많고 우울해하면서 여러분한테는 '행복하게 사세요' 이렇게 말하면 설득력이 있겠어요? 스님부터 이렇게 밝은 얼굴로 사니까 그나마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설득력이 있는 겁니다.”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남자 친구가 결혼을 부담스러워해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부담스러워 떠난 사람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2년 차 수험생입니다. 제 능력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스스로 심한 비난을 하였고, 우울감이 깊어져 폐인처럼 지냈습니다. 다시 시험 준비를 시작했는데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진리를 얻고자 신부가 되기 위해 들어간 신학교에서 동기들과 트러블을 겪으며 쫓겨났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대화를 나누고 나니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오늘은 질문한 분들의 소감도 충분히 들은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농사일을 한 후 오후에는 통일의병대회를 온라인 생방송으로 진행하고, 저녁에는 서울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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