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02.02. 인도성지순례 13일째 델리 박물관, 인도 교민 즉문즉설
“수행은 남이 아니라 나를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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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제33차 성지순례 마지막 날입니다. 순례단은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고 스님은 델리에 남아 인도 교민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새벽 4시, 상카시아를 떠나 델리로 출발했습니다. 델리로 가는 길에 잠깐 차를 세우고 아침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야외에서 먹는 도시락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델리가 가까워지니 도로가 넓어지고 높은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상카시아에서 출발한 지 8시간이 지나 낮 12시에 델리 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인도는 인더스 문명이 발달한 곳입니다. 히말라야에서 빙하가 녹아내린 물이 서쪽으로 흘러 아라비아 해로 들어가는 인더스강과 동남쪽으로 흘러 뱅골만으로 들어가는 갠지스강이 있습니다. 인더스강 유역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중요한 문명 중 하나인 인더스 문명이 발달한 곳입니다. 지금은 파키스탄의 펀잡주와 신드주, 그리고 인도의 구자라트주에서 주로 인더스 문명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도시는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예요.

이 문명을 만든 민족은 드라비다족이었어요. 그들이 이룬 문명은 4천 년에서 5천 년 전인데도 무척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도시를 이루고 신전을 짓고, 하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어요.”

델리박물관 1, 2실은 인더스문명의 유적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스님의 안내는 계속되었습니다.

“기원전 1500년 경부터는 아리안족이 북쪽에서 내려와 드라비다족을 정복하고 갠지스강 유역 힌두스탄 평지에 아리안 문명을 형성했습니다. 아리안 문명은 베다 시대, 종교 시대, 우파니샤드 철학 시대를 거쳐 쇠퇴기로 이어졌습니다. 쇠퇴기에는 많은 사문과 신흥 사상가들이 출현한 시기였는데, 붓다는 이 시기에 등장했습니다.

300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불멸 후 약 200년 무렵에 아쇼카 왕이 전 인도를 통일했습니다. 이는 마우리아 왕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는 불교에 대한 조각도 나왔는데, 아직은 부처님을 사람 모양으로 묘사하지 못하고 보리수나 법륜마크, 부처님 발바닥으로 상징했습니다.”

박물관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도 모셔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델리박물관에서 가장 주요하게 볼 유물은 삐쁘라하와에서 출토된 진신사리입니다. 조용히 참배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 차례에 나누어 박물관 안내를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델리 한국문화원으로 이동했습니다. 한국문화원에 도착하니 원장님과 그 직원들이 스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오후 4시부터는 한국문화원에 방송 시설을 세팅한 후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했습니다. 한국 시간으로 저녁 7시 30분이 되자 스님이 시청자들에게 인사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 인도 델리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성지순례를 보름 동안 한 뒤 조금 전에 마쳤습니다. 그리고 델리 교민들을 위해서 즉문즉설 강의를 해주려고 델리 한국문화원에 도착했고, 강의하기 전에 여러분들과 즉문즉설을 하게 됐습니다. 인도성지순례에 참가한 500명의 순례단은 15일간의 출가 수행자 생활을 마치고 발우와 가사를 반납한 후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갔습니다. 한 분도 중간에 돌아간 분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환자가 차량별로 몇 명씩 생겼고, 다리 골절상을 입어서 깁스한 사람도 생기긴 했지만 큰 사고는 없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지난 보름간의 성지순례 모습이 담긴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여주며 20분 동안 순례의 여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설명을 마치고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네 명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뒤이어 교민 강연이 있어서 5시 30분이 되기 전에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오늘 질문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먼 곳에서 즉문즉설을 하다 보니 화면과 음질이 시청하는 데 불편했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오후 5시 30분부터는 한국문화원 지하 대강당으로 이동하여 델리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작년에는 제가 아시아 지역 12개국을 방문했습니다. 이들 국가 중 현재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나라는 미얀마와 스리랑카인 것 같습니다. 미얀마는 군부 쿠데타와 내전이 일어나서 사회도 혼란스럽고 경제도 어렵고, 스리랑카는 국가 부도가 나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나라는 첫 번째가 베트남이었고, 두 번째로는 인도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고, 세 번째는 인도네시아가 현재 사회가 안정이 되고 경제도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시아 지역은 세 나라가 한국의 뒤를 이어서 앞으로도 계속 성장해 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20년 전에 ‘앞으로 중국 다음으로 인도가 경제대국이 될 것이니 한국에 가서 취직하지 말고 인도에서 사업해라’ 하고 몇몇 분들에게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다 가버렸는데, 요즘 인도를 다녀보면 건설 붐이 엄청납니다. 마치 20년 전에 중국을 갔을 때 하고 비슷해요. 하루 자고 일어나면 빌딩이 하나 서 있고, 하루 자고 일어나면 도로가 하나 만들어져 있듯이 속도가 빠릅니다. 곳곳을 파헤쳐서 도로를 놓아서 이번에 성지순례를 할 때도 다니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옛날에는 외길이라서 다니기 힘들었고, 그다음은 2차선 공사를 한다고 해서 힘들었고, 2차선 공사가 끝나서 이제 다닐만하다 싶으니까 이제는 4차선 공사를 한다고 파헤쳐서 다니기 힘들어졌습니다. 이런 변화가 좋은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기후 위기 시대에 인도까지 개발을 하게 되면 지구가 살아남겠나 싶습니다.

그래서 내일부터 저는 부탄을 답사합니다. 부탄을 가는 이유는 소비 수준을 줄여서 검소하게 살지만 행복하고 지속가능한 삶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작년에 부탄을 두 번 방문하여 부탄 국왕을 만나 협의를 했습니다. 가난하더라도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고, 절대빈곤은 퇴치하지만 무분별한 개발은 삼가는 지속가능한 개발을 해보기 위해 부탄의 한 개 지역을 선정해서 한번 시도해 보려고 계속 논의하는 중입니다. 어느 지역을 선정할지 결정하기 위해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현장 답사를 할 예정입니다.”

이어서 누구든지 손을 들고 궁금한 점을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는데요. 그중에 한 명은 한국불교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질문했습니다.

한국불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저는 한국불교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한국불교의 현재 상황은 어떻고, 스님께서 보시기에 지금의 한국불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한국불교의 어떤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잘 몰라서 여쭙습니다.”

“한국불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종교로써의 역할로만 보면 한국불교는 특별히 문제 삼을 게 없습니다. 종교라는 게 원래 복을 비는 사람이 있고, 또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있는 거잖아요. 백 원어치의 일을 하고 백 원어치의 대가를 받는 것은 정당한 대가입니다. 그러나 복을 빈다는 것은 백 원어치의 일을 하고 천 원어치의 대가를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남을 때리기도 하고,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성추행도 했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이 죽어서 극락이나 천당에 가고 싶다면 그걸 좋은 심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타인을 해치는 나쁜 인생을 살았더라도 죽어서는 극락이나 천당에 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종교가 해 온 일입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도 그랬고, 기독교도 그랬습니다. 종교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백 원을 보시하면 만원을 돌려받게 해 주겠다고 하는 것인데 그게 사실이라면 솔직히 말해서 중간 수수료를 좀 내야 하잖아요. 도박장에서도 수수료를 내는데 복 빌어준 사람에게 수수료를 내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걸 복 빌어준 사람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복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을까요?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왜 빌어준 사람 탓만 합니까?

예전에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스님, 복전함에 돈을 넣으면 정말 복을 받습니까?’ 하고요. 이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지금 복전함에 천 원을 넣으면 이천 원어치 복을 받을 수 있느냐는 얘기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정말 그렇다면 저부터 넣겠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천 원을 투자해서 이천 원이 되려면 은행 이자로 계산하면 최소 십 년은 걸립니다. 그런데 복전함에 천 원을 넣으면 금방 이천 원으로 돌려받을 수 있다고 하니 저부터 그걸 하지 왜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어요? 이런 허황한 얘기는 사람들이 너무 살기 답답하고 힘드니까 통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런 허황한 얘기가 좋으시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술에 취하고 도박을 일삼는 사람들도 있는데, 복 좀 비는 사람들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건 세상의 여러 삶 중에 하나일 뿐이에요.

요즘에는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게 법에 어긋나면 불법이 되고, 법에 어긋나지 않으면 합법이 되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가상화폐야말로 정말 허황한 얘기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 시스템을 믿고 돈을 계속 넣는다면 그것도 투자가 되는 겁니다. 가상화폐도 종교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믿으면 시장이 생기고, 믿으면 계속 투자금이 들어오니까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비판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사람은 하면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의문이 좀 들어요.

‘저렇게까지 해서 돈을 벌고 싶을까? 누군가에게 빌어서 대학에 합격하고, 사업이 잘 된다면 공부는 왜 할까? 사업은 왜 열심히 할까? 그냥 빌고 말지. 결혼해서 같이 살 사람을 부처님한테 왜 구해달라고 할까? 자기가 고르지.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고 살아야지 왜 자꾸 그걸 다른 것들에 책임을 미루고 살까?’

지구에 사는 사람이 80억 명 정도 됩니다. 이 중에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수백에서 수천 명은 되겠죠? 그러면 이분들의 사주를 보면 다 똑같이 나올 텐데 그들의 삶이 모두 같을까요? 옛날에는 남녀나 신분에 대한 차별이 심했습니다. 양반으로 태어나면 평생 편하게 사는데, 여자나 천민으로 태어나면 평생을 노력하더라도 고생스럽게 살았죠. 그래서 ‘나는 왜 이럴까?’ 하고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당신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다’, ‘하느님께 벌을 받아서 그렇다’, ‘사주가 나빠서 그렇다’ 하는 얘기들이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을 보면 저는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종교는 복을 구합니다. 복을 구하는 사람은 백 원을 내고 만 원을 받길 원하는데 만 원을 받도록 빌어준 사람에게 중간에서 좀 가로챘다고 난리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백 원 투자하고 만원을 벌었으면 수수료를 9천 원은 내야 하지 않을까요? 백 원을 투자하고 9백 원을 돌려받더라도 아홉 배를 번 것인데 그 정도면 굉장한 것 아닌가요? 사람들이 종교를 자꾸 비판적으로 보는데 그런 얘기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습니다. 종교란 게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그래서 ‘한국불교는 문제가 있다’ 하는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어떨까요? 지금 서양에서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도 점점 신뢰를 잃으면서 신자가 줄어들고 있고요. 요즘 젊은이들은 종교를 거의 믿지 않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보면 인연을 지어 받은 과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어떤 관광지에 관광객이 줄어들고 있는데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몰려들 때 가격을 높여버리니까 인심을 잃어서 이제는 가격을 낮추어도 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번 실망하면 다시 잘 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연과보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나부터 잘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 남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관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늘 남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남의 눈의 티끌은 보고 내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한다’라고 하셨잖아요. 우리가 불자이든 불자가 아니든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남편이 술을 마신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남편을 내가 어떡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술은 많이 마시지만 돈을 잘 버니까 데리고 살 것인가, 돈을 아무리 잘 벌어도 나는 술 마시는 사람은 싫으니 헤어질 것인가? 이것은 나의 문제이지 남편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람을 가끔 피우지만, 돈도 잘 벌고 평상시에 나한테 잘한다면 그 복을 왜 발로 찹니까? 좀 수용해 주고 이익은 내가 취하면 되죠. 그러나 천금을 벌어와도 나 아닌 다른 여자가 좋다는 남자는 싫다고 한다면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고 화낼 필요도 없고 ‘나 말고 다른 여자가 더 좋아? 그래, 그럼 나는 간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 가버리면 됩니다. 그걸 저한테까지 찾아와서 물을 필요도 없지요. 그런데 저한테 묻는 것은 어떤 심보일까요? 돈은 갖고 싶고 바람은 못 피우게 하고 싶으니까 ‘스님, 그런 방법이 없습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질문하면 ‘양다리 걸치고 있구나’ 하고 속을 꿰뚫고 봅니다.

마음의 본질을 딱 꿰뚫어 보는 것을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합니다. 어제도 어떤 분이 집에 있으면서 남편을 보면 가슴이 답답한데, 인도성지순례를 와서 다니다 보니 남편이 너무 불쌍해서 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집에 돌아가면 어떻게 이 깨달음을 계속 유지할 수가 있냐고 물었어요. 이렇게 볼 때는 좋아 보이고 저렇게 볼 때는 나쁘게 보이는 그 마음은 둘이 아니라 똑같은 마음이에요. 여러분은 누구나 다 어떤 때는 선심(善心)이 일어나고 어떤 때는 악심(惡心)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세속에서는 선심이 일어나면 복을 받고 악심이 일어나면 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해탈의 길인 수행은 선심이든 악심이든 모두 경계 따라 마음이 이렇게 일어났다 저렇게 일어났다 하는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선심과 악심을 둘로 보지 않고 경계 따라 일어나는 마음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지금 남편과 떨어져 있어서 선심이 일어났다면 집으로 다시 돌아가면 악심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지금 남편과 떨어져 있어서 선심이 일어날 때 그 본질을 꿰뚫어서 구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서 악심이 일어날 때도 그 본질을 꿰뚫어서 구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때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해탈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늘 선심만 일어나는 것을 일심(一心), 즉 한마음이라고 알고 있다면 불교를 전혀 모르는 겁니다. 마음의 성질 자체가 항상 한결같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죽 끓듯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이것을 ‘관심무상(觀心無常)’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하면 무상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심이 어디 있어요? 그것은 관념일 뿐입니다. 마음이란 늘 경계 따라 이랬다 저랬다 제 멋대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선심이든 악심이든 의미가 없습니다. 마음이 이렇게 일어나든 저렇게 일어나든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면 경계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일심(一心)’이라고 부릅니다.

마음공부를 할 때는 이렇게 본질을 꿰뚫어서 보아야 공부가 쉬운데 늘 눈을 감고 더듬고 있으니까 공부가 어려운 거예요. 인생을 쉽게 살자고 수행을 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수행까지 어렵게 하려고 합니까? 마치 ‘아침 5시에 일어나야지’ 하고 시계를 맞춰 놓고는 아침에 시계가 울리면 이불속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이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노력이라고 생각하세요? ‘일어나야지’ 생각한다는 것은 일어났다는 거예요, 아직 안 일어났다는 거예요?”

“아직 안 일어났다는 겁니다.”

“딱 일어나 버리면 ‘일어나야 한다’ 이런 생각이 필요 없습니다. 일어나 버리면 더 이상 아무런 노력할 것도 없고 각오할 것도 없어요. 여러분들은 늘 ‘가야지’, ‘일어나야지’ 이런 식으로 마음을 먹기 때문에 나름대로 애쓰지만 몸은 그대로 누워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일어나고는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이렇게 말해요. 몸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몸이 말을 안 듣는 게 아니고 싫은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일어나야지’ 하는 것은 지금 일어나고 싶다는 거예요, 일어나기 싫다는 거예요?”

“일어나기 싫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그것을 하고 싶어 한다고 착각을 해요. ‘일어나야지’ 하는 노력은 이제 그만두고 그냥 벌떡 일어나 버리세요. 내일 아침부터 해보세요. 왜 매번 인생을 결심하고 살려고 해요? 할 일 있으면 하면 되고, 갈 일 있으면 가면 됩니다. ‘일어나야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지금 싫은 마음에 사로잡혀 있구나’ 하고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합니다. 본질을 꿰뚫어야 싫은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탁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선(禪)에서는 이것을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일어나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을 지금 내가 노력하고 있으니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번 헤매게 되는 거예요.

만약 여러분들이 인도인 가정부나 종업원을 고용했는데 골치가 아프다면, 이것은 고용한 그 사람의 문제일까요? 내 문제일까요? 다 내 문제입니다. 돈은 적게 주고 싶고 일은 잘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에요. 본질을 꿰뚫어서 이 문제가 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걸 딱 볼 수 있어야 그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종업원이 한번 가르쳐서 딱 알아듣는다면 계속 종업원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옆에 자기 가게를 차려버리지요. 한국 사람을 데려다가 종업원으로 삼으면 금방 일을 배워서 옆에 가게를 차려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 번을 가르쳐줘도 종업원이 제대로 못 알아듣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래야 그가 옆에 가게를 내지 않고, 내가 계속 그 사람에게 사장 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열 번 스무 번을 가르쳐도 일이 늘지 않는다면 그때는 그 사람을 내보내도 되고, 아니면 그 정도 돈을 주고 그에 맞는 성과를 얻으면 됩니다.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이지 그 사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 여러분들이 인도에서도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인도에서 내내 다른 사람 욕을 하면서 지내면 본인만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늘 경계 따라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서 그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자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불교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너무 생각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더 탐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약속한 한 시간 반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스님은 주인도 대한민국대사 관저로 이동했습니다. 장재복 대사님이 스님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여러 영사님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대사님에게 인도-네팔 국경을 통과하는데 도움을 주신 데 대해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그루가온으로 가서 스님께 인사를 하고 싶어 하는 한 기업가를 만난 후 다시 델리로 돌아왔습니다. 숙소에 도착하니 밤 12시 30분이었습니다. 짐 정리를 하고 새벽 1시 30분에는 델리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내일은 부탄으로 가서 정부 관계자를 만나 답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지속가능한 개발 프로젝트를 위한 답사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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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늘 선심만 일어나는 것을 일심(一心), 즉 한마음이라고 알고 있다면 불교를 전혀 모르는 겁니다. 마음의 성질 자체가 항상 한결같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죽 끓듯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이것을 ‘관심무상(觀心無常)’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하면 무상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심이 어디 있어요? 그것은 관념일 뿐..

2024-03-26 16:20:31

보리왕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

2024-03-12 09:04:40

서은희

스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2024-02-27 11: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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