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5.6. 영어불교대학, 정토불교대학, 경전대학, 부처님오신날 점등식
"상대에게 맞춰주려고 하다 보니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요"

▲ 스님의 하루를 오디오로 듣고 싶으신 분은 영상을 클릭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한 달 동안의 해외 답사 기간을 마치고 새벽 5시 30분에 인천공항으로 귀국했습니다. 어젯밤 델리 공항을 출발하여 밤새 비행기 안에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새벽 6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한 후 잠시 휴식을 하고, 오전 8시부터 외국인을 위한 영어 불교대학 학생들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외국인들은 불교대학 수업을 듣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먼저 지난 한 달 동안 공부를 해 본 소감이 어떤지 소감을 들어 보았습니다.

"I'm in Group A in the United States, and I'm loving the class for the course. I love not only the introspection for myself, but also experiencing what comes up from the lessons through other people's eyes."
(미국의 A 그룹에 속해 있는데, 저는 이 수업 과정을 정말 좋아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내적 탐구뿐 아니라, 수업에서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도 함께 체험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I look forward to every Tuesday night because of the sharing of experiences in our group and also because of this course. The homework doesn't even feel like homework because I'm truly learning something. One week is like a couple of days.”
(저희 조원들과 나누기와 수업 내용 때문에 매주 화요일 밤을 기다리게 됩니다. 숙제조차도 숙제 같지 않고 진짜로 무언가를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일주일이 겨우 며칠 같아요.)
...

세 사람의 소감을 들어본 후 스님이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지난 한 달 동안 동남아시아 지역과 튀르키예 지진 피해 지역을 답사하고 온 소감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정토불교대학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었습니다. 저도 지난 한 달 동안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여러분과 대화하기 전에 저의 경험을 좀 나누고 싶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이민자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사람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 본 지역 외에도 더 많은 어려운 지역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 등 그들을 지원할 수 있는 많은 나라는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모든 관심이 그곳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방문했던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라든지 시리아 난민들에 대한 관심은 많이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또 작년에는 파키스탄에서 엄청난 홍수 피해를 입었는데 세상으로부터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보면서 ‘왜 우리는 이렇게 괴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살펴야 합니다. 저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보는 기간 중에 델리에서 열린 세계불교 정상회의(GBS)에 참석했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세계불교 지도자들이 많이 참석했지만, 대화의 주제는 불교 성지를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 불교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불교문화를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 이런 주제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주제가 설정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고통받는 인간의 삶과 현실에 접근해서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먹고 입고 자는 것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물질적인 부를 더 갖는 방식으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부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다른 데에 있다는 관점에서 우리는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이 없고 먹을 음식이 없고 살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모든 괴로움은 네 마음에 있다. 그런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지 말라' 하고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것을 전생의 죄라든지 하나님의 벌이라든지 사주팔자가 나쁘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욕망을 부추기지 않는 지속 가능한 개발

저는 지난주에 부탄에 갔었습니다. 부탄은 가난하지만 기본적인 생활이 어느 정도 갖춰진 나라였습니다.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물이라든지 식량이라든지 집이라든지 전기라든지 간단한 치료시설이라든지 학교라든지 이런 기본적인 것은 갖춰져 있었습니다. 기본적인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는 그것을 갖추는 일정한 개발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계속 욕망을 더 추구해 갑니다. 여기서 빈부격차가 생겨나고,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부를 서로 가지려는 갈등과 투쟁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생활은 영위할 수 있으면서도 그 이상의 지나친 욕망을 부추기지 않는 지속 가능한 개발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이것이 오늘날 우리 인류가 해결해야 할 큰 과제입니다.

부탄에서는 물질적인 부의 축적을 기준으로 삼는 GNP나 GDP 개념이 아닌, 개인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지표로 삼는 GNH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습니다. 부탄에서도 시골의 생활환경은 열악하고, 도시의 젊은이들은 점점 개발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탄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빈부격차가 비교적 작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을 갖춘 바람직한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탄 정부나 사회 지도층을 만나 부탄에서 가장 열악한 지역의 생활환경을 좀 더 살기 좋게 개선하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지나친 욕망을 추구하지 않는 사회로 발전시켜 나가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그동안 인류는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말만 해왔을 뿐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사회의 모델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여유를 가지고 갈등 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사회의 모델을 부탄에서 한번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부탄의 사회 지도층에게 전달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런 꿈은 어쩌면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현실에서는 화나고 짜증나고 괴로울 수밖에 없어도 부처님의 법을 공부하며 괴로움이 없는 삶을 추구해 나가듯이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저 하나의 종교나 철학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배우고 체득해 나간다는 관점을 갖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마음공부를 강조하는 이유는 물질을 부정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이 대부분이 마음의 어리석음과 욕망에서 빚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좀 길었네요. 지난 한 달 동안 제가 경험한 것에 대한 소감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어서 세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불교대학 수업을 들으며 궁금했던 점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For those who have attained enlightenment, are there any best practices that they can share that helped them succeed with their practice?”
(깨달음을 얻은 분들 중 그분들이 성공적으로 수행을 완성하는데 도움이 된 최상의 실천 방법이 있을까요?)

“Would you consider the idea of enlightenment (nirvana) a moving goal, and What Would You Tell Your Younger Self about enlightenment?”
(깨달음은 점차적으로 발전하는 목표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에게 깨달음이 무엇이라고 말해주고 싶으신가요?)

스님은 밤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피곤한 상태에서도 질문 내용에 대해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곧바로 10시부터는 지난 4월에 입학한 정토불교대학 학생들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생방송을 시작하자 스님은 한 달 동안 해외 답사를 다녀온 내용을 소개하고 나서 학생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는 세계 전 지역에 걸쳐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난한 나라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더욱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한 달 동안 주로 가난한 나라들을 위주로 둘러보고 있습니다. 특히 가난한 나라 안에서도 유독 어려운 사람들, 더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생활이 어느 정도로 어려운가, 우리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가 무엇을 함께 나눌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해서, 이번 여행은 가장 저렴한 방식으로 진행했고, 최대한 그들의 생활수준과 같이 하는 조건에서 답사를 했습니다.

우리들이 겪는 괴로움이 정말 괴로워할 일인가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을 다니다 보면 ‘우리들이 겪는 괴로움이 정말 괴로워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여러분도 꼭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고, 경전을 읽지 않고, 이런 법문을 듣지 않아도, 이런 지역에 직접 가서 생활을 해보면 ‘내가 그동안 고뇌했던 문제가 정말 괴로워할 일인가?’ 하는 걸 저절로 자각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걸 직접 체험하지 않고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괴로울 일이 없다’ 이렇게만 들으니까 마음속에서 반발심이 생기기도 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인류를 위해 무슨 큰일을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보면 우리가 참으로 가진 것이 많고, 남을 돕기에 우리의 능력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불교대학을 공부하면서 여러분의 존재가 결코 작지 않음을 알아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자기 삶을 살아가기가 힘든 겁니다. 결국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고요. 자기를 괴롭히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으면 남의 도움이 필요 없고, 오히려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해도 물질적인 면을 보면 우리는 이미 많이 갖춘 상태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직도 자신의 괴로움이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고, 돈이 조금만 더 있으면 괴로움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나라 국민 소득이 지금보다 10배 더 늘어나서 세계에서 가장 선진국이 된다고 해도 오늘 여러분이 겪는 고뇌는 하나도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사는 건 물질만 갖춘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경제 문제만 해결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사회제도만 바꾼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즉,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잘 이해하게 되면 같은 상황을 두고도 지금보다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의 병을 잘 진료하여 좋은 약 처방을 하면 병이 나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마음을 잘 관찰하고 이해하면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실천적 불교사상 과목을 4주째 진행한 후 실천활동을 1회 진행한 상태입니다. 그동안 수업을 들으며 궁금했던 내용에 대해 다섯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위해 맞춰주다 보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며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상대에게 맞춰주려고 하다 보니 나만 손해를 보는 것 같아요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럴 수 있지 하면서도 상대방의 행동이나 말을 인정하면 내가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듭니다. 같이 사는 세상에서 서로 맞춰야지 왜 나만 이해해줘야 하나 하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편안해질 수 있을까요?”

“좋은 질문입니다. 물론 상대도 나한테 맞춰주면 좋죠. 그리고 꼭 나만 맞춰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핵심은 상대가 안 맞춰주는데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물이 필요할 때 비가 오면 좋죠. 물이 필요할 때 비가 오면 좋다는 건 누구나 동의를 할 거예요. 그리고 때맞춰 비가 와주면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그때 비가 안 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거냐 이게 문제입니다. 그때 신을 원망할 거냐, 아니면 비가 안 오는 것에 대비해서 행동을 취할 것이냐를 두고 선택하는 겁니다.

또, 비가 적절히 오면 좋은데 며칠 전처럼 300미리씩 한꺼번에 쏟아지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필요한 만큼만 오면 좋겠지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 또 그때는 어떻게 할 거냐는 거예요. 그때도 신을 원망하면서 살 것이냐, 아니면 폭우로 인한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할 것인가, 이게 우리에게 주어진 공부거리입니다.

상대방이 나한테 맞춰주면 좋다는 건 맞습니다. 남편이 바람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먹고, 일찍 들어오라고 할 때 일찍 들어오고, 가사 일을 도와달라고 할 때 도와주고, 그러면 좋죠. 그것이 좋은 줄 누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살 거냐는 거예요.

이럴 때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길은 두 가지입니다. 평생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같이 사는 길과 아예 헤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헤어지고 나서 혼자서는 잘 살아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혼자서 살아보면 또 외로워서 못 살아요. 그래서 다시 같이 살면 똑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합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에는 사람이 괴로워하면서 사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가 오면 좋지만 비가 안 오면 지하수를 파고 물을 끌어다 써야 합니다. 또, 돈이 많이 들더라도 댐을 만들어서 물을 가둬놓고 필요할 때 가져다 써야 해요. 이렇게 비가 오지 않는 상황에 대비를 해야지, 그 상황에서 ‘왜 나만 이렇게 일해야 하느냐?’, ‘왜 신은 도와주지 않느냐’ 하고 얘기해 봐야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비가 알아서 적절한 양만 내리면 좋은데, 막상 폭우가 쏟아지면 둑을 쌓아야 해요. 때로는 둑을 쌓았는데도 둑이 터지는 일이 발생하는데, 그러면 또 새로 둑을 쌓아야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누가 대신 둑을 쌓아주지 않습니다. 둑을 쌓고, 댐을 만든다고 해서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건 아니에요. 때로는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또 쌓는 것이지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것처럼 상대방이 안 맞춰줄 때도 헤어지거나, 그래도 같이 지내거나, 둘 중 하나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이 때 헤어지기로 했다면 더 이상 질문 거리가 없겠죠. 그런데 막상 헤어지려고 해도 헤어지지 못하잖아요.

회사에서 상사가 알아서 잔소리를 안 해주면 좋죠. 그걸 몰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상사가 잘해주지 않고 잔소리를 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는 거예요. 우선 직장을 때려치우는 길이 있겠죠. 그런데 어렵게 직장을 구했는데 이제 와서 그만두기가 힘들잖아요. 게다가 이 직장 말고 다른 곳에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우니까 그만두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상황은 여의치 않고, 그렇다고 관두기에도 힘들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입니다.

상대방이 맞춰주면 좋은 건 다 압니다. 스님이 몰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정작 상대방이 안 맞춰주는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때 ‘왜 나만 맞춰야 되느냐? 너는 왜 안 맞추냐?’ 이렇게 미워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하면서 사는 게 나은지, 다른 방법이 있는지, 살펴봐야 하는 거예요. 물론 안 살고자 하면 안 사는 방법도 있습니다. 36계인 도망가는 방법이 있는데, 이렇게 질문하는 것을 보면 지금 도망가는 것도 쉽지 않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같이 살아야 하는데, 어차피 같이 사는 길 밖에 없다면 상대를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괴롭게 사는 것보다는 내가 맞추고 사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같이 안 살 거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같이 살 것이라면 괴로워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내가 맞춰져서 괴롭지 않게 사는 게 낫지 않겠냐는 거예요.

그러니 맞추고 살라는 말은 질문자가 여자니까 맞추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 괴로우면 같이 살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상황은 다른 좋은 면도 많이 있으니까 못 떠나고 같이 살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어차피 같이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괴롭게 사는 것보다는 내가 맞추면서 괴롭지 않게 사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을 하는 겁니다. 스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말귀를 알아들었어요?”

“네, 알아들었습니다.”

“밤이 먹고 싶으면 밤송이를 까야합니다. 그런데 밤송이를 까자면 손가락이 찔려요. 이때 찔리기 싫으면 숫제 밤을 안 먹으면 됩니다. 그냥 안 먹으면 되지 여기서 ‘왜 밤에는 가시가 있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가시가 싫으면 밤을 안 먹으면 되고, 밤이 먹고 싶으면 조금 찔려가면서 밤을 까야하는 거예요. 대신 덜 찔리려면 가죽 장갑을 끼든지 방법을 연구해야죠. 스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어요?”

“네, 이해했어요.”

“그럼 할 말이 더 있으면 해 보세요.”

“다 해결됐습니다.” (웃음)

“스님은 상대방한테 무조건 맞춰라, 여자니까 맞춰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맞추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거예요.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그렇게 그만둬도 될 때가 있지만, 그만둘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직장생활도 그렇고, 부부생활도 그렇고, 부모 자식 간에도 그래요. 왜냐하면 나쁜 점도 있지만, 다른 좋은 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못 그만둘 때는 무슨 의리가 있거나 착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익이 되는 것들이 있어서 못 그만 두는 거예요. 그러니 못 그만두는 것도 다 내 문제입니다. 다른 좋은 게 있어서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면서 마치 자기가 착해서 그런 것인 양 꾸밀 필요도 없습니다. 좋은 점이 있어서 그만두지 못한다는 사실도 자각해야 해요.

그렇게 좋은 점들이 있는데 나쁜 점 때문에 확 버리려고 하니까 막상 좋은 점까지 없어지는 게 아까워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겁니다. 질문자는 지금 나쁜 점만 딱 사라지면 더 좋을 텐데 싶죠. 그걸 누가 모르겠어요. 자기가 그동안 무슨 좋은 일을 했기에 모든 게 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겠어요. 지금 그 정도의 복을 타고난 것도 아니잖아요. (웃음)

인생은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만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좋은 점만 갖고 나쁜 점은 버리려고 하지 말고, 좋은 점을 누리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이런 마음을 가지라는 게 아니에요.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억울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데 상대방을 미워할 일이 뭐가 있어요.

그 사람은 무조건 좋은 사람이다,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뭐든지 그 사람에게 맞춰라, 그저 자비심을 내라, 스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옛날 스님들은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스님은 좀 영리하게 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우선 손해가 나거든 그만두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손해가 난다고 해서 나중에 더 큰 이익까지도 버리는 바보 같은 짓을 하면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되니까 한 번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만두지 못하고 이왕 같이 살 거면, 괴로워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내가 맞추면서 괴롭지 않게 사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을 하는 거예요.”

“제가 상대에게 맞추는 것에만 집착을 했는데, 스님께서 가시가 있는데도 밤을 먹겠느냐는 말씀을 하셨을 때 해결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마음 알아차리기를 거듭할수록 내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감정을 표출한 상황이고, 알면서도 감정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수행을 해야죠?
  • 무엇이 욕망인가요? 오늘 저녁에 고구마를 삶아 먹고 싶은 마음도 욕망일까요? 수행을 하고 싶은 것도 욕망일까요? 욕망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인가요?
  •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장 내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됩니다. 헤쳐 나갈 방법이 무엇일까요?
  • 무아와 무상을 배웠습니다. 실제 하는 내가 없다면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요? 나란 본질은 없는 건가요?

학생들은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동안 궁금했던 내용들을 하나씩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질문한 학생들과 대화를 끝내고, 스님은 불교대학 과정을 끝까지 해볼 것을 독려하며 법문을 마쳤습니다.

“불교대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해보는 겁니다. 중간에 출석일수를 못 채워서 설령 졸업장을 못 받더라도 공부는 끝까지 해야 해요. 삶이 변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지, 꼭 졸업장을 받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공부는 항상 끝까지 해야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불교대학 과정은 스님이 직접 수없는 경험을 통해서 얻은 걸 엑기스로 짜서 마련한 과정이니까, 일단 코스가 짜여진 대로 한번 해보세요. 그러면 도움이 될 겁니다.”

연달아 생방송을 마치고 스님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잠시 휴식을 하고 오후 2시부터는 정토 경전대학 즉문즉설 생방송을 이어나갔습니다. 경전대학 학생들도 새로 수업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는데요. 지금은 금강경에 대해 배우고 있어서 금강경에 대한 질문이 많이 나왔습니다.

여섯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두 한 후 스님은 다음 한 달 동안에도 부지런히 수업에 참여하고 수행 연습을 해나가 줄 것을 당부하고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방송실을 나온 스님은 곧바로 평화재단으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4시부터는 외국에서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을 했습니다. 6시에는 손님들과 저녁을 함께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손님들을 배웅하고 나니 해가 저물었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불기 2567년 부처님오신날 점등식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2차 만일결사를 시작하고 나서 처음 맞이하는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점등식은 매년 부처님오신날 전날 했지만, 올해는 예년보다 3주 빨리 했습니다. 바로 다음날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준비하는 활동가들의 어려움을 고려하고,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모자이크 붓다를 실현하기 위한 염원을 담아 정토행자 2백여 명이 3층 설법전에 자리했습니다. 각 지부, 지회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정토회 회원들과 가족분들, 연등 모연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온라인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점등식을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대표님의 인사말을 들은 후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을 청하자 스님이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점등식을 하는 의미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를 위해서 세상 사람들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고통을 듣고, 그들의 고뇌를 해결하는 일에 종교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위해서 종교가 있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국가가 있고, 사람을 위해서 제도가 있고, 사람을 위해서 이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국가가 우선이고, 제도가 우선이고, 법률이 우선이고, 종교가 우선입니다. 사람을 그저 하나의 통치 대상, 세금을 내는 대상, 전쟁에 소모되는 대상으로 여긴다면, 국가가 왜 필요하고, 종교나 제도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이미 2600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저 하늘 위의 신들도 아니고, 이 세상의 브라만이나 왕들도 아니다. 살아있는 생명 하나하나가 가장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연등을 켜는 이유는 바로 그 작고, 고통받고, 소외되고, 버림받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환하게 비춰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보고 알기 위해서 연등을 켜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길이 어두워 오시지 못할까 봐 연등을 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앞에 고통 받는 중생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들이 이 세상에 없는 줄 압니다. 그래서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눈을 떠서 그들의 고통과 삶을 보라고 연등을 켜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의 존재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이 있어야 세상이 돌아갑니다. 부처님오신날에 연등을 켜는 이유는 부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듣기 위해서 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이 사라질 때 우리의 고통도 사라집니다. 그들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으면 우리의 고통 또한 사라지지 않습니다.”

스님은 지난 한 달간 만나고 대화 나누었던 열악한 지역의 사람들이 떠오르는 듯, 법회 내내 눈을 감고 법문을 이어갔습니다.

연등을 밝히는 이유

“오늘 점등식을 하기 전에 우리가 왜 연등을 켜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는 볼거리를 위해서 또는 가진 자들의 문화생활의 일환으로 연등을 켜왔습니다. 문화적으로는 좋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관점에서 연등을 켜는 이유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고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제가 여러분의 눈을 대신해서 보고, 여러분의 입을 대신해서 말하고, 여러분의 손발을 대신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정토행자 여러분도 눈을 떠서 등불을 하나씩 밝혀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들의 아우성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고통이 사라지는 일을 우리가 함께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연등을 켜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여인이 켠 등불의 공덕이 한량없다’ 하는 말의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곳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처음으로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합니다. 법회도 하고, 현관 앞마당에서 연등도 밝힙니다. 전국 각 으뜸절에서도 연등을 밝히고, 연등을 모연 하고,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이 연등을 켜는 도리를 안다면, 모연 한 돈을 갖고 절을 짓는 데에 사용하거나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데에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그 소리를 들었다면, 조금이라도 그들의 삶과 고통을 개선하는 데에 그 돈을 사용해야 합니다. 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으로 돈을 모아야 합니다. 적어도 부처님오신날에 연등을 밝히는 의미를 안다면, 모연을 한 돈으로 우리의 생활을 더 윤택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고, 잘 곳이 있고, 사는 데에 어려움이 없더라도, 마음이 탐진치 삼독에 물들면 괴롭습니다. 이 괴로움은 나의 무지인 욕망과 진애와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어리석음을 밝힘으로써 나의 괴로움이 사라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등을 켜는 또 다른 이유는 어리석은 중생을 깨우쳐 괴로움이 없는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뜻을 알고 오늘 점등식에 모두 기꺼운 마음으로 참여하여 연등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법문이 끝난 후 회관 1층 앞마당으로 이동하여 점등 행사를 이어나갔습니다. 스님의 선창으로 보살의 서원을 낭독한 후 생방송 화면을 통해 전국 으뜸절에서 점등식을 했던 모습들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으뜸절에 등불이 모두 켜지자, 화면은 다시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사회자의 선창을 시작으로 대중도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탑과 대등에 불이 켜지자 탑을 둘러싼 3백여 명도 저마다 연등불을 밝혔습니다. 이윽고 머리 위에 연등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행복의 등불로!”
“온 세상을 밝게!”




형형색색의 등불 아래에서 온 세상에도 이와 같이 밝은 빛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염원했습니다. 온라인 생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정토회 회원들도 각자의 방에서 함께 등불을 밝혔습니다.

이어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탑을 돈 후 찬불가 ‘연등’을 함께 불렀습니다. 다음은 스님이 부처님의 수기 낭독을 해주었습니다.

이 작은 등불은 워낙 보잘것이 없어 있는 둥 마는 둥 보이지도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등불들이 하나둘씩 꺼져갔다. 시간이 지나 다른 등불은 다 꺼졌는데도, 여인이 밝혀 놓은 그 등불만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등불이 다 꺼지기 전에는 부처님이 주무시지 않을 것이므로 부처님 시자인 아난존자는 불을 끄려 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손으로 끄려 해도 꺼지지 않았다. 가사자락으로, 부채로 끄려 했으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부질없이 애쓰지 말아라. 그것은 가난하지만 마음 착한 여인의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켜진 것이기에, 비록 작은 등불이지만 결코 꺼지지 않으리라. 그 여인은 그 등불을 밝힌 공덕으로 앞으로 30겁 뒤에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수미등광여래’라고 할 것이니라.’

마지막으로 스님이 참석한 대중 모두를 위해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어둠 속에 불이 켜진 연등처럼 밝아진 정토행자들의 얼굴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스님의 축원으로 2차 만일결사를 시작하는 다짐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점등식이었습니다.

오늘 정토행자들이 한 발원은 문경 수련원과 전국 으뜸절에 켜진 다양한 색깔의 연등 속에 담겨서 밤새도록 밝게 빛났습니다.

사홍서원으로 점등식이 끝나자 스님은 참석한 분들과 인사를 나누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대중은 한 달 만에 만난 스님을 반가워하며 이렇게 화답했습니다.

“스님, 좀 쉬셔요.”

스님은 귀국하자마자 하루 종일 생방송 강연이 이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휴식을 못했습니다. 밤 10시가 넘어서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외국인을 위한 영어 즉문즉설을 하고, 행복특별본부 리더십 연수를 생방송한 후, 오후에는 서원행자 수계식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94

0/200

드림하이

“불교대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해보는 겁니다. 중간에 출석일수를 못 채워서 설령 졸업장을 못 받더라도 공부는 끝까지 해야 해요. 삶이 변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지, 꼭 졸업장을 받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공부는 항상 끝까지 해야 결과가 나타납니다.

연등이 환하게 밝혀진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

2023-08-15 17:27:43

정명옥

저도 연등을 켜고, 주위에 계시는 분들도 함께 연등을 켜도록 하겠습니다^^

2023-05-20 06:45:04

감동

너무너무 감사합니다_()_

2023-05-19 15:08:06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