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4.1. 행복학교 특강, 청춘톡톡, 평화재단 통일의병 농사체험
“고급 외제 차와 큰 집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오전 10시에 행복학교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행복학교 참가자들이 수업과정 중에 생긴 궁금증을 해소하고 다음 과정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시간입니다.

행복학교 특강

유튜브 라이브 스트리밍을 시작하자 3,2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스님이 환한 웃음과 함께 두북 수련원의 봄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제가 지내는 곳은 시골이라서 요즘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온갖 꽃들이 앙상한 가지에서 아름다운 색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나뭇가지에서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나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꽃을 볼 때 ‘저 꽃들이 어디에 있다가 나오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곳은 남쪽지방이라서 벚꽃은 이제 지기 시작했고, 대신 복사꽃이 아주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번 주말에 근교에 나가 꽃구경도 하시고, 바깥에 핀 꽃과 봄만 느끼지 마시고, 자기 마음의 봄도 행복학교를 통해 마음껏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참가자 중에는 마음편, 관계편, 심화편을 공부하는 분들도 있고, 행복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행복시민으로 활동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각자 마음공부를 하면서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거나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다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네 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마음이 불편하다며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불편한 사람이 있는데 계속 마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될까요?

“저는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합니다. 이럴 때마다 마음 알아차리기를 실천하고 있는 중인데, 현재는 혼자 살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자주 볼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의 마음을 개선하는 데 마음 알아차리기가 충분한 방법인지 아니면 조금 더 적극적인 방법을 생각해봐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마음 알아차리기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늘 연습할 수 있는 수행 방법입니다. 버스를 기다릴 때 버스가 제시간에 안 오면 불안하다든지, 또 버스가 제시간에 오면 만족한다든지, 이럴 때 처음에는 버스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결국 ‘내가 왔으면 좋겠다 할 때 오면 기쁘고, 안 오면 불안하구나’ 이렇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뭐든지 내가 원하는 대로 되면 만족감을 느끼고,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면 마음이 부정적으로 작용합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내가 약속시간 30분 전에 도착을 했고 상대방은 5분 늦었다고 해봐요. 그러면 ‘왜 이렇게 늦었어’하고 내가 문제제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5분 동안 기다리는 게 아주 지루합니다.

반면 내가 약속시간에 10분 늦게 도착을 했는데, 그때까지도 상대방이 안 오고 상대방은 나보다도 10분 더 늦게 도착을 하면 상대방은 많이 늦었다고 생각하고 ‘아이고 늦어서 미안합니다’ 이렇게 사과를 하는데 정작 나는 ‘괜찮아요, 늦을 수도 있죠’하고 대답을 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약속시간보다 20분 늦게 온 것인데도 그때는 성인군자처럼 대답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걸 보면 상대방이 늦게 오고 안 오고의 문제도 아니고, 5분 늦고 10분 늦고의 문제도 아니고, 내가 상대방이 일찍 오기를 바랄 때 상대방이 늦게 오면 마음이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이고, 내가 상대방이 늦게 오기를 바랄 때 마침 상대방이 늦으면 마음이 만족스럽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마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부부지간에도 남편이나 아내가 훌륭하고 안 훌륭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상대방에게 100을 기대하는데 상대가 70을 하면 부족한 사람이 되고, 내가 50을 기대했는데 상대가 70이면 만족스러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이치를 알면 인간관계를 보는 시각도 달라집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늘 상대방이 나한테 더 잘해서 나의 만족도를 채우기를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건 상대방이 나한테 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에 성공확률이 높지 않습니다. 반면 상대방에 대한 나의 기대를 조금만 낮추면 만족스럽게 됩니다. 그리고 그건 상대방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2시에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자꾸 ‘그래도 사람이 10시에는 들어와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그 사람과 매일 저녁에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그래도 우리 남편은 자정 전에는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쩌다가 한 번씩 늦지 거의 대부분 제시간에 들어오는 꼴이 됩니다. 여기서 기대를 더 낮춰서 ‘그래도 우리 남편은 잠은 집에 와서 잔다’ 이렇게 정하면 새벽 2시에 들어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 말은 질문자에게 그저 ‘다 양보해라’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양보의 문제가 아니에요. 사람을 고치는 건 대화를 통해서 노력을 할 순 있지만 일반적으로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나도 나를 못 고치는데 어떻게 남을 고치겠어요. 그러니 상대방을 고치려고 할 게 아니라,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훨씬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만약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같이 늦게 들어오는 사람하고는 같이 못 살겠다고 하면 상대방의 인물이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안녕히 계세요’하고 떠나면 됩니다. 그냥 내가 선택을 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늦게 들어오는 것만 문제라면 ‘세상에 이 정도 흠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하고 확 수용을 해버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 결정을 내가 하는 거예요.

내가 주인이 돼서 이 경우에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자꾸 ‘그 사람이 문제다’ 이렇게만 바라보면 결국 이 문제의 결정권이 나에게 없는 것입니다. 늘 상대방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늘 상대방이 이렇게 해주도록 기다리고, 늘 상대방이 저렇게 해주도록 기다리니까, 결국 상대방에게 매여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게 곧 노예생활입니다. 나름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는데 결국 그게 노예생활을 하게 되는 거예요. 상대방이 어떤 결정을 하든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이고, 그 경우에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질문자가 아버지와 같이 있을 때 심리가 불안해진다고 하면 어릴 때 야단을 맞았다든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거예요. 이렇게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고 연구하는 것은 심리학자가 하는 일입니다. 당사자는 그런 원인 규명까지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비유하자면, 자동차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를 전문적으로 아는 사람은 기술자입니다. 그런데 운전자는 그냥 시동을 걸고 운전을 할 줄만 알면 됩니다. 그런 것처럼 수행자도 심리가 어떠한 원리로 움직인다는 것까지 알면 학자가 되고, 그걸로 강의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직접 인생을 사는 당사자는 ‘지금 불안하구나’하고 알아차리기만 해도 됩니다. 즉, ‘내가 왜 불안하지?’ 이런 연구까지는 안 해도 돼요. 그런데 심리가 불안하다는 건 좋은 걸까요, 안 좋은 걸까요?

안 좋은 거겠죠. 그러니 여기서 ‘불안하구나’하고 알아차린다는 건 ‘마음이 불안하구나’와 ‘불안한 건 좋은 게 아니다’를 결합해서 안다는 말이기 때문에, 불안을 알아차린다는 건 곧 불안이 가라앉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만약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으면 실험을 자주 해보면 됩니다. 아버지를 자주 만나서 아버지와 있을 때 불안한 걸 관찰하는 거예요. 아버지 하고 조금 떨어지면 괜찮고, 아버지와 가까이하면 불안하고, 다시 아버지 하고 조금 떨어지면 괜찮고, 아버지와 가까이하면 불안하고, 이걸 보면서 아버지와 아무 관계도 없는데 왜 불안할까를 살펴보는 거예요.

이는 꼭 밤에 어두울 때 생기는 두려움을 관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이 일어나면 전기 스위치를 쥐고 실험을 해보는 거예요. 스위치를 끄면 두려움이 일어나고, 스위치를 켜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다시 스위치를 끄면 두려움이 일어나고, 또 스위치를 켜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럴 때 그저 불이 켜지고 꺼질 뿐인데 왜 두려움이 생겼다가 사라졌다가 하는지를 살펴보는 거예요. 이걸 탐구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 하고 탐구하면 불안이 사라져 버립니다.

아버지를 가까이하면 불안하고, 멀리 떨어지면 괜찮고, 또 가까이하면 불안하고, 그게 반복되면 아버지와 가까이 있는 게 연습하기가 더 좋겠죠. 수행은 안 맞는 사람과 있는 게 공부가 더 빨리 됩니다. 그만큼 연습기회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불안한 사람은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별 문제가 없으니까 해결된 줄 알고 살아가는데, 다음에 가까이하면 또 불안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떨어져 있는 건 그 자리를 피해서 자기를 보호하는 방법이고, 만나서 해결해 버리는 게 진정한 자유입니다.

이렇게 마주해서 해결하는 게 도저히 안 될 정도로 증상이 심할 때는 우선 피해서 안정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몸이 아플 때도 면역력이 약하면 우선 격리해서 치료를 해야 하잖아요. 대신 면역력이 강해지면 균이 있어도 이겨냅니다. 그런 것처럼 면역력이 생긴 다음에는 아버지가 있는 속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면서 불안한 마음이 일어나면 ‘지금 불안하네’, ‘아버지와 같이 있으면 불안하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래서 문제다’가 아니라 ‘왜 불안하지?’ 이런 정도로 관찰을 해나가면 좋아집니다. 이렇게 연습을 많이 하면 금방 좋아져요. 여기서 좋아진다는 건 불안한 강도가 차츰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도저히 거부반응이 일어나서 가까이 가기도 싫었는데, 이제는 아버지와 같이 지내는 게 곧 연습하는 시간이니까 불안해도 괜찮은 거예요. 막상 가서 안 불안하면 다행이고, 불안하면 연습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불안하든 불안하지 않든 상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원인을 규명하면 제 괴로움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제가 제 나름대로 원인을 규명을 해도 사라지지가 않아서 오히려 더 생각하는 것에 빠진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원인을 규명하는 것도 좋은데, 원인을 규명할 때 탐구를 해야 하는데 우리가 원인을 규명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꾸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원인 규명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원인 규명에 너무 빠지면 자꾸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번뇌가 늘어나는 거예요.

괴로울 때 그 괴로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내가 왜 괴롭지?’하고 탐구를 해야 합니다. 탐구를 하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90% 이상이 자꾸 생각을 해요. 그래서 명상을 할 때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탐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다릅니다. 탐구는 마치 과학자가 어떤 원인을 규명하듯이 따져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탐구한다, 화두를 참구 한다고 표현합니다. 반면, 생각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해서 이런저런 걸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에서 생각은 망상이라고 합니다. 탐구하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걸 ‘망상 피운다’고 합니다.”

이어서 세 명의 질문을 더 받은 후 대화를 나누고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청년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인 ‘청춘톡톡’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청춘톡톡

유튜브 라이브가 시작되자 청년들 8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인사말에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여섯 명이 먼저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 저는 우울감이나 불안도가 높아서 3년 전부터 치료를 받고 있지만 약만 먹는다고 치료될 것 같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이 더 안정될 수 있을까요?
  •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출근을 하고 있는데 일이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인내를 갖고 버텨야 할까요?
  • 출산 후 비교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에 괴롭습니다. 부유한 집에 시집가거나 경제적 능력이 좋은 남편을 만난 친구들이 부럽습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 직장에서 불공정하고 부당한 일이 많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회사 생활을 해야 할까요?
  • 스님은 왜 스님이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떤 의미이죠?
  • 원하는 곳에 취업했지만 상사들 중에 남성분은 성희롱을 하고, 여성분은 대놓고 죽으라고 일을 시켜서 많이 외롭습니다. 이것도 욕심일까요?

대화를 마치고 나서 시간이 남게 되자 현장에서 즉석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 명이 번쩍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고급 외제 차와 큰 집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저는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직업 특성상 돈이 많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편입니다. 올바른 가치관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데도, 그 사람들이 타는 고급 외제차나 큰 집을 보면 저도 괜히 가슴이 설레고 ‘나도 돈을 많이 벌어서 저런 곳으로 가야겠다’ 이런 생각이 계속 듭니다. 이런 것에 대해 제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궁금해서 질문드립니다.”

“좋은 차나 집이 부러우면 돈 벌어서 나중에 가지면 됩니다. 그런데 저는 큰 집을 보면 우선 ‘아이고 청소하려면 힘들겠다’ 이런 생각부터 먼저 들어요. 집이 큰 게 뭐가 좋아요? 방이 큰 집이 좋으면 여기 와서 교실에서 자면 됩니다. 그러니 집이 큰 게 별로 좋은 게 아니에요.

우리가 정토회 활동을 하면서 환경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데, 지구 80억 인구 모두가 그 사람들처럼 가족 두세 명이 살면서 그렇게 큰 집에서 살면 지구가 안 남아날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사는 모습이 사실은 다 타인의 희생 위에 사는 인생입니다. 남을 짓밟고 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현재 법적 기준, 도덕적 기준이 이런 삶을 허용할 뿐입니다.

이는 마치 한국에서 도박을 하면 불법이라고 해서 잡아가면서, 같은 행위를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하면 그곳에서 세금을 내기 때문에 오락이라고 합법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환경에 기준을 두면 그렇게 큰 집에 사는 건 사실 모두 범죄입니다. 지구를 생각한다면 그런 집은 모두 압수를 해서 철거시키고, 엄청난 벌금을 매겨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가진 자 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걸 자랑스러워하는 겁니다. 옛날에 출신성분으로 사회를 나눌 때는 왕이나 귀족들이 사유물을 다 가지고 전횡을 일삼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제도를 모두 철폐했습니다. 아버지가 왕이라고 해서 아들도 왕이 되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으로 인해 신분제가 폐지된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재벌이라고 해서 아들이 재벌 되는 것도 철폐되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는 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데, 지위 세속은 부정하면서 왜 재물 세속은 인정합니까? 이것도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안 해야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남아 있는 재물은 모두 사회로 환원하고, 불로소득을 얻지 못하도록 제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런 걸 부러워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꾸 낭비하며 사는 삶을 부러워하기 때문에 아무리 평등을 이야기하고 아무리 지구환경을 이야기해도 실제로는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댐 건설은 반대하면서 막상 집에 와서는 물을 펑펑 쓰는 것과 같고, 원자력 발전은 반대하면서 집에 와서는 낮에도 불을 항상 켜놓고 전기를 낭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무리 돈을 많이 만져도 은행에 있는 돈은 자기 돈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매일 돈을 만지면서 거기에 흑심을 품으면 그 사람은 결국 부정을 저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은행 직원이 돈을 아무리 많이 만져도 그건 종이조각이지 내 돈이 아닌 것처럼, 질문자도 고객이 아무리 부자라도 그게 질문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그냥 고객일 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중심을 잡고 살고, 또 질문자가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언젠가 돈을 벌어서 그런 집이 필요하면 사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현재 그런 집을 부러워하는 것은 현실성도 없고 결국 자기 심리만 위축시키고, 또 그것이 잘 안 되면 나중에 그 사람들을 욕하게 됩니다. 스님은 그런 사람들을 욕하지도 말고 부러워하지도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자기들이 그렇게 살겠다는데 그 사람들을 욕할 것까지야 없죠. 그러나 나까지 그렇게 살겠다고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저도 스님의 생각에 너무 공감을 하고, 평소에 그렇게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제 마음속에 있는 욕망이 떠오를 때마다 알아차리려고 하는데, 아무리 알아차리려고 해도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쉽지 않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이런 가치관으로 살았기 때문에 제 무의식에 강하게 박혀 있어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늘 그렇게 교육받고 살았기 때문에 소비주의와 욕망에 대한 중독성이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중독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냥 따라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그런 욕망을 따르는 삶은 우선 전 인류를 생각했을 때 바람직한 일이 아니고, 또 내 개인적인 삶을 생각할 때도 좋은 삶이 아닙니다. 욕망을 따라가는 삶은 인생을 늘 헐떡거리면서 괴롭게 살아야 하고, 늘 열등의식을 갖게 하고, 심리적으로 위축되게 살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살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이렇게 자각이 되면 여전히 그렇게 중독된 부분과 습관은 있지만 그걸 따라가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욕망을 따르는 삶이 좋아 보이면 그냥 따라가도 됩니다. 스님은 그런 사람을 절대로 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이 사람을 설득해서 어려운 사람을 돕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연구를 하죠. 또, 넓은 공간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그들을 욕할 필요도 없고, 부러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만약 그런 곳에 누가 초대를 하면 하루쯤은 잘 수도 있겠지만, 그런 곳에 살라고 하면 당연히 사양을 하겠죠.”

“오늘 스님과의 대화가 너무 좋았고,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결국 꾸준한 마음공부, 정진만이 답이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후 4시가 되어서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곧바로 작업복을 갈아입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평화재단 통일의병 농사 체험

평화재단 통일의병들이 오늘부터 1박 2일 동안 농사 체험을 하기 위해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스님이 연이어 강연을 하는 동안 의병들은 1시부터 앞밭에서 콜리플라워 모종을 심고, 잡초매트를 깔고, 지주 대와 그물망을 치고 있었습니다.




의병들이 각자 맡은 역할을 잘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스님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밭 끝에 난 잡초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두면 이 풀들이 걷잡을 수 없이 자라요.”

스님이 밭 끝에서부터 입구까지 잡초를 다 뽑고 나자 의병들도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뒷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밭 변두리에 저절로 자란 달래를 캤습니다.

“스님 이게 뭔가요?”

“달래예요.”

도시에서 오신 분 중에는 달래를 처음 본 분도 있었습니다. 의병들이 뒷정리를 하는 동안 스님은 밭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달래를 캐주었습니다.


농막에 사용했던 도구를 다 정리하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할 일이 아주 많아요.” (모두 웃음)

“자주 오겠습니다.”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곧 해가 산 너머로 졌습니다.

저녁 7시부터는 통일의병들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큰 박수 소리와 함께 스님과의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누구든지 손을 들고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통일의병들이다 보니 사회 문제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리더십이란 무엇이고 지금은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가요?

“사회 각계각층의 리더분들과 그분들의 리더십을 배우려고 말씀을 나눠보면, 그분들도 자기에게 영감을 주고 영향을 준 누군가의 의식과 소양을 그대로 받아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저희가 어떤 리더로 성장하기를 바라시는지, 왜 평화재단에서는 평화 리더십이란 용어를 사용하는지, 지금은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지 궁금합니다.”

“저는 필요한 일을 하는 게 미래의 리더십이라고 생각합니다. 밭에 일하러 나갈 때는 밭일을 잘하는 것이 리더십이고, 점심을 같이 해먹을 때는 음식을 잘 차리는 것이 리더십이고, 청소할 때는 청소를 잘하는 게 리더십입니다.

사람들은 늘 자기가 필요한 걸 해주는 사람을 좋게 느낍니다. 과거에는 카리스마가 있는 리더십을 주로 이야기했는데, 이런 건 대부분 지배 기술로서의 리더십입니다. 결국 사람을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나온 리더십의 개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미래의 리더십은 더 이상 위에서 아래를 이끄는 게 아니라, 사람의 필요를 알아서 그것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등산을 간다면 등산에 대해서 적절한 필요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겠죠. 이건 리더가 모든 걸 다 해결한다는 관점이 아니라, 모임과 활동의 성격에 맞는 어떤 요구를 수행해 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빗자루를 쓰다가 빗자루가 다 닳거나 자루가 부러져서 못 쓰게 되면 옛날 사람들은 ‘명이 다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용도가 끝났다는 의미죠. 결국 명이 있다는 건 필요에 의해서 쓰여지는 것입니다. 필요에 의해 쓰여질 때는 살아있는 것이고, 필요에 대응할 능력이 없으면 그게 곧 명이 다한 것이니까요.

아무도 그 빗자루로 방을 쓸지 않으면 그건 빗자루라는 도구와 이름은 남아 있을지 몰라도 더 이상 빗자루가 아닌 거예요. 빗자루로써의 명은 다한 거죠. 마찬가지로 걸레라는 이름은 있는데 그걸로 아무도 방을 안 닦는다면 그 걸레는 죽은 것입니다. ‘빗자루가 방을 안 쓸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좋고, 걸레도 안 쓰이면 때를 안 묻혀도 되니까 좋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름이 뭐라고 붙던 먼지를 쓸어내지 못하면 그건 더 이상 빗자루가 아니고 때를 닦아내지 못하면 그건 더 이상 걸레가 아닙니다.

원래 ‘살았다, 죽었다’는 말 자체가 용도가 있으면 살았다고 표현하고, 용도가 폐기되면 죽었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의 삶도 이러한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생명만을 가지고 ‘생명 존중’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이 육체적인 생명은 늘 바다의 파도처럼 나고 죽고를 반복하는 하나의 흐름에 불과하기 때문에 육체적인 삶을 중심에 놓는 건 지나치게 생물학적인 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평화리더십은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위험한 게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기후위기, 교육문제 등도 우리가 풀어나가야 하는 문제 이긴 하지만, 현재 한반도에서 일어날 가능성도 높고, 일어났을 때 피해의 강도가 가장 심한 것은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후위기도 우리의 어려움이고, 수출이 부진한 것도 우리의 어려움이고, 경제성장이 둔화된 것도 우리의 어려움입니다. 그렇지만 그중 가장 어려운 과제는 전쟁의 위기입니다.

혹자는 ‘어느 나라든 전쟁은 다 위기이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전쟁은 큰 위기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가령, 일본에서 전쟁이 일어날 확률은 아주 낮습니다. 만약 일본에서 전쟁이 난다면 그 피해는 막심하지만, 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굉장히 낮습니다. 반면 한국은 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실제로 현재도 전쟁 상태입니다. 또, 옛날에는 남북이 싸우더라도 미국과 중국이 협력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큰 전쟁은 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대신 연평도 해전과 같은 국지전은 터질 수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미중이 대결을 하고 있는 국면이기 때문에 남북 사이에 조그마한 불장난이라도 일어나면 진정이 안 되고 바로 확전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주장을 강하게 하면 부화뇌동하기가 쉽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이곳에서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평화리더십이라고 모일 때는 ‘한반도의 평화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에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평화리더십 모임에서 나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 뜻에 동조하는 사람은 한반도에는 많은 위험이 있고,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그중 전쟁 위험이 우리에게 주는 피해가 가장 크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통일의병은 전쟁을 하더라도 통일만 하면 된다는 통일대박론을 따르는 것도 아니고, 평화만 지켜주면 통일을 안 해도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를 딛고 통일로 나아간다는 입장입니다. 대신 통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전쟁을 통한 통일은 원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너무 내세우면 분단확정론으로 치우칠 위험이 있고, 통일론만 지나치게 내세우면 북한붕괴론으로 치우칠 위험과 전쟁으로 나아갈 위험이 매우 큽니다. 이 둘을 상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평화가 전제되고, 그 평화를 딛고 통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은 전쟁의 위기가 높기 때문에 평화에 힘을 더 실어야 하고, 이 갈등 구조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우리는 다시 통일에 힘을 실어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통일론은 준비는 우리가 하되 상대의 동의를 얻어서 통일을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내가 너를 사랑해서 집도 마련하고 내가 뭐든지 마련하겠지만 결론은 네가 승낙을 해야 한다는 입장과 동일합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강제로 결혼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되면 설령 결혼을 하더라도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북한과의 합의 통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출산 문제, 경제 위기,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패권경쟁, 대만과 중국의 갈등 등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 30분이 넘었습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사홍서원으로 즉문즉설 시간을 마쳤습니다.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 스님은 곧바로 두북 수련원을 출발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차로 4시간을 달려 새벽 1시 30분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한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오늘도 긴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인도 불교협회 사무총장과 조찬을 하고 오전에는 외국인을 위한 영어 즉문즉설과 정토불교대학 입학식을 합니다. 오후에는 화엄반 행자님들의 법사교육 입재식에 참석해 법문을 하고, 저녁에는 일요명상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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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덕

스님계신곳이어딘가요 ?
가보고싶은대 길도 주소도 몰라요 .
가르처세요

2023-04-08 12:12:03

일심행

괴로울 때 그 괴로운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내가 왜 괴롭지?’하고 탐구를 해야 한다. 탐구를 하면 괴로움이 사라 진다. 탐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탐구는 마치 과학자가 어떤 원인을 규명하듯이 따져보는 것. 괴로움에 집착하는 건 망상,생각이다.왜 괴로운가? 라고 의문을 갖는 건 탐구이며 참구이다. 괴로운 상태해결 방법은 왜?라는참구군요.

2023-04-05 22:22:10

일심행

현재에 필요한 일을 하는 게 미래의 리더십
밭에 일하러 나갈 때는 밭일을 잘하는 것이 리더십이고, 점심을 같이 해먹을 때는 음식을 잘 차리는 것이 리더십이고, 청소할 때는 청소를 잘하는 게 리더십

미래의 리더십은 더 이상 위에서 아래를 이끄는 게 아니라, 사람의 필요를 알아서 그것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

좋은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2023-04-05 22: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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