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11.26. 고추밭 정리, 금요 즉문즉설
“딸이 엄마인 저를 너무 싫어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서울 정토회관을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도량석 소리가 울리자마자 짐을 챙겨 차에 탔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산 너머로 해가 떠올랐습니다.

8시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한 후 작업복을 입고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말에 고추밭 정리하는 일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지지대 사이를 연결한 줄을 푸는 동안 스님은 지지대를 하나씩 뽑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에 지지대를 뽑다가 팔을 다쳤는데, 오늘은 조심해야겠어요.”

역시 이번에도 아무리 힘을 써도 지지대가 뽑히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주전자에 물을 담아 와서 지지대가 꽂힌 자리에 부었습니다.

“물을 미리 부어놓으니까 한결 수월하게 뽑히네요.”

물을 붓고 나서 지지대를 손으로 흔들면서 하나씩 뽑아 나갔습니다. 그래도 지지대가 안 뽑히는 것은 곡괭이로 통통 두드린 후 뽑았습니다.

뽑은 지지대는 고랑 사이에 모아 두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묶어서 내년에 사용할 수 있게 비닐하우스 측면에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춧대를 뽑았습니다. 땅이 바짝 말라 있어서 손으로 잡아당기면 금방 뿌리째 뽑혔습니다. 고춧대를 쑥쑥 뽑아서 이랑에 눕혀 놓은 후 고추밭 정리는 봉사자들에게 맡기고, 스님은 농막으로 향했습니다.

엊그제 수확한 고추를 건조기에 넣어 말렸는데 막상 꺼내 보니 아직 덜 마른 게 있었습니다. 바짝 마른 고추는 가루로 빻기 위해 비닐에 담고, 덜 마른 것만 선별해서 다시 건조기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확한 고추를 물에 깨끗이 씻어서 건조기에 넣었습니다.




“수고했어요.”

오후 4시부터는 전국 법사단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법사단은 지난주 지부장회의에서 의결한 안건에 대해 심사한 후 온라인 정토회 운영과 관련하여 궁금한 점에 대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시도별 밴드를 통해 23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이제 낙엽이 지고, 저희들 농사짓는 것도 이제 마무리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영상으로 지난 한 주 동안의 농사일을 함께 보았습니다.

▲ 영상 보기

오늘은 세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 어머니가 힘들게 혼자 일하시는 동안, 아버지는 바람도 피웠고, 평생 무직에 가부장적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저희 세 자매를 길러 주시고 집안일까지 다 해주신 분은 친할머니입니다. 아빠는 할머니가 무슨 말만 하면 소리를 지르고 폭언을 합니다. 저는 이런 아빠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 저는 어려서부터 중증 아토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잠을 편히 자는 게 소원이고, 고통 없이 지내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며 지낸 지 36년째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견뎌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질문자는 딸이 엄마인 자신을 너무 싫어하는 것이 고민이라면서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딸이 엄마인 저를 너무 싫어합니다

“딸이 엄마인 저를 너무 싫어하는 것이 고민입니다. 3년째 저와 말하고 싶어 하지도, 연락하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딸이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고 아들이 전해주네요. 이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저도 딸을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작년에 결혼했다는데 저는 모르고 있다가 아들에게 들어서 알았어요. 아이는 현재 유럽에 살고 있고 저는 작년에 귀국했습니다. 제가 올해 12월에 일 때문에 유럽에 가는데, 아이에게 연락해서 만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아이가 저를 싫어하는 마음이 누그러져 저를 만나고 싶어 할 때 만나는 것이 좋을까요?”

“그거야 두 가지 다 시험해보면 되죠. 질문자는 마치 만나고 싶으면 딸을 만날 수 있고, 만나고 싶지 않으면 안 만나도 되는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질문자에게 그런 선택권이 없는데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라고 묻고 있습니다. 관점이 잘못 잡혀 있어요. 본인은 딸과의 관계에서 갑이 아니고 을입니다.”

“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딸을 만나고 싶으면 전화를 해 보면 되죠. 전화를 안 받으면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요. 만약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좋아해서 만나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전화를 안 받으면 그 여자가 나쁜 사람이에요? 질문자는 딸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할 위험이 있어요. 누구를 만나든 안 만나든 그건 그 사람의 자유예요. 연락을 하고 안 하고는 내 자유지만 만나고 안 만나고는 상대의 권리입니다. 딸이든 남편이든 아들이든 그 사람의 권리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질문자는 엄마라는 이유로 독재를 하는 거예요. '엄마가 보자고 하는데 네가 감히 안 만나?' 이런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엄마가 유럽을 가더라도 딸이 싫다 하면 내 볼일이나 보고 오는 거예요.

‘보고 싶은데 연락을 할까요, 말까요?’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연락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상대가 연락을 받아서 보자고 하면 보면 되고, 연락을 안 받으면 안 만나면 돼요. 딸은 이미 성인이 됐기 때문에 엄마를 만나든 안 만나든 그건 딸의 자유예요.”

“혹시 엄마를 미워하는 것이 딸에게 앞으로 나쁜 영향이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아이가 엄마를 안 만나겠다면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지만, 혹시 엄마가 보고 싶은데 연락해 주길 아이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저만의 착각일까요?”

“100프로 착각이죠.”

“네.”(웃음)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으면 오늘이라도 전화해서 확인해보면 됩니다. ‘엄마는 네가 보고 싶다. 사랑한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딸이 싫어하면 ‘아, 내 착각이었구나.’하고 알면 돼요. 딸이 ‘엄마,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요? 그러면 만나요.’라고 하면 고맙다고 하고 만나면 됩니다.

질문자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자식을 위해 부모가 있다고 생각해요, 부모를 위해 자식이 있다고 생각해요?”

“자식을 위해 부모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자식이 부모가 필요해서 만나자면 만나고, 필요 없어서 안 만나자면 안 만나야죠. 내가 보고 싶은데 네가 안 만나 주냐고 안절부절못하는 건 '내 괴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네가 아무리 괴로워도 내 요구를 들어라.'라는 심보예요. 이건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있다는 관점입니다. 질문자는 마치 애인이 보고 싶은데 못 만나는 것과 똑같은 관점을 갖고 있지, 부모의 관점을 가진 게 아니에요. 부모는 자식이 원한다면 아무리 힘들고 돈이 없어도 빚을 내서라도 만나러 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애간장이 타도, 자식을 안 만나는 게 도움이 된다면 옆집에 있어도 안 만나야 해요.

이치를 알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이건 질문자의 문제입니다. 질문자가 외로우면 남편을 만나든 다른 남자를 만나면 되지 왜 싫다는 사람을, 그것도 결혼까지 한 성인에게 집착을 해요? 일종의 스토커예요. 자식이라는 이름만 다를 뿐이지 무슨 차이가 있어요? 부모와 자식은 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허구적 관념이에요. 성인이 되면 누구를 만나고 안 만나고는 본인의 자유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지켜야 할 의무는 자식이 성인이 되기 이전에 문제예요. 질문자의 딸은 성인이잖아요. 질문자는 인생을 보는 관점이 안 잡혀 있어서 고민이 되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말해도 잘 안 되는 게 인생입니다. 꿈을 깨듯 관점이 잡혀 버리면 아무런 고뇌가 없습니다. 병원에 가서 돈을 많이 들여 검진을 했는데 결과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봐라, 내가 검진 안 한다고 했는데 괜히 해서 돈만 버렸잖아.’ 이왕 검진했는데 결과가 좋으면 좋은 일이잖아요. 왜 좋은 일에 불평을 해요? 또 병이 발견이 되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잖아요. 발견하려고 돈을 많이 들였으니 발견해야 할 거 아니에요? ‘아이고, 잘 발견하셨습니다.’ 이러면 돼요. 이처럼 다 큰 자식이 엄마한테 돈 달라 뭐 달라 요구하는 게 고민이지, 자기가 알아서 살겠다는데 그게 뭐가 걱정이에요?”

“네, 맞습니다.”

“한국 같으면 결혼하면 부모에게 집 사 달라, 아이 낳으면 아이 봐 달라고 난리인데, 딸이 알아서 결혼을 하고 집 사 달라, 아이 봐 달라 요구도 안 하는데 이보다 더 효자가 어디 있어요? 아무 걱정거리도 아닌 걸요.”

“네, 알겠습니다.”

“오늘 질문하신 세 분이 내용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아요. 첫 번째 질문자는 부모님이 싸우지 않으면 좋겠는데 내 요구를 안 들어준다고 괴롭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자는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괴롭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질문자는 내 자식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괴롭다고 했어요.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경중이 다르게 느껴지지만 근본적으로는 다 자기 원하는 대로 안 돼서 생기는 문제예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괴로움을 이용해서 종교가 성립합니다. 종교를 믿고 빌면 원하는 일이 다 이루어진다는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주는 거예요. 부처님은 지푸라기를 주는 게 아니라 관점을 바꾸라고 합니다.

'인생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 없습니다. 되면 다행이고, 된다 하더라도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좋은 일이 나중에 더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원하는 대로 안 됐다면, 더 해보면 됩니다. 그래도 안 되면 그만두면 됩니다.'

출가자들이 밥을 얻어먹는 이유는 한 끼 배를 채우는 것만 해도 감사할 줄 알기 위해서입니다. 옷을 얻어 입는 이유는 내 몸 가릴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할 줄 알기 위해서입니다. 나무 밑에서 자는 이유는 눈 붙이고 잘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할 줄 알기 위해서예요. 이런 관점이 딱 잡혀 버리면 천하 무슨 일을 당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고 괴로워할 일도 없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게 돼야 한다는 것 때문에 늘 전전긍긍해요. '남편도 나 원하는 대로 안 된다, 부모도 자식도 직장도 나 원하는 대로 안 된다, 날씨도 내 맘대로 안된다. 모종 심으려고 했는데 비가 안 오고 햇빛이 났다.' 이렇게 한 평생 자기 원하는 것에 집착해서 평생을 전전긍긍하며 사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나는 돈이 백만 원이 없어서 괴로운데 내 친구는 일억이 있는데도 괴롭다고 합니다. ‘네가 뭐가 괴롭냐.’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사람은 십억을 원하니까 괴로운 거예요. 천억을 갖고 있는 사람도 조를 원하면 괴로워요. 이 괴로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지금은 요것만 이루어지면 좋을 것 같죠? 그다음에 또, 그다음에 또 바라는 것이 생깁니다.

괴로움이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집착 때문에 생깁니다. 그 집착을 놓아버리면 괴로울 일이 없어지고 감사할 일만 있습니다. '살아있어서 감사합니다, 자식이 돈 달라고 안 해서 감사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서로 싸우면서도 나를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제 이야기가 너무 현실에 안 맞는 얘기 같아요? 지금처럼 살면 여러분은 죽을 때까지 괴로워만 하다가 죽게 됩니다. 이치를 딱 깨달으면 바로 오늘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어요. 이치를 체득하려면 많이 겪어봐야 합니다. 이치는 머리가 좋다고 체득되는 게 아니고 직접 경험해보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나이가 좀 들어야 겨우 '아, 살아보니 그렇구나' 이렇게 알게 돼요.”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질문자에게 한 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딸이 할 수 있는 영역과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가 자식의 스토커가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그 나라에 다시 가야 되는 일이 있는데, 제가 전화를 안 하고 오면 아이가 혹시라도 섭섭해하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스님, 답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은 다시 한번 질문자가 관점을 바르게 잡을 수 있게 자각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아직 자기 생각에서 못 벗어나고 있네요.”

“이제는 안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웃음)

“말로만 알아들었다고 하는 거 같아요.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내 돈을 떼어먹은 사람을 미워하다가 시간이 흘러서 잊어버렸는데, 우연히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면 옛날 기억이 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나겠지요. 질문자가 평소에 잘 살다가 마침 유럽 간다니까 그 생각이 나는 것과 아무 차이가 없는 겁니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가슴에 맺힌 한이 경계를 만나서 다시 살아난 겁니다. 그러니까 알아들었다고 하고 또 변명하는 것을 반복하는 게 집착입니다.

지금은 알아들은 것 같지만 무의식에 있는 욕망은 내려놓기가 참 어렵습니다. 세속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만나겠다는 게 너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은 이렇게 너무 당연한 것으로부터 생깁니다. 그러나 꿈 깨는 소식, 눈 뜨는 소식의 관점에서 보면, 강도에게 쫓기는 꿈을 꾸면서 괴롭다고 아우성치는 사람을 깨어 있는 사람이 보면 잠꼬대하는 걸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잠을 편안하게 자지를 못하고 왜 저렇게 잠꼬대를 하나 싶은 것과 같습니다.

눈을 떠버리면 아무 일도 없습니다. 윤회란 죽어서 소나 말로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고락이 반복되는 삶이 윤회이고, 반복되는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이 해탈입니다. 인간에게는 ‘알아차림’이라는 정신작용이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바깥을 탓하면 벗어날 기회가 없습니다. 안으로 돌이켜서 가만히 살펴보면 스스로 알 수 있고, 이런 자각을 통해 삶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스스로 깨닫는 자각이 알아차림입니다. 아무리 내가 이야기를 해도 자각이 되지 않으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자각이 일어나면 변화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법륜스님이 자신을 변화시켜 줬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 삶의 어떤 부분에도 관여할 수 있는 영향력이 없습니다. 다만 즉문즉설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자각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자각은 저와 대화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싸움을 하다가 자각이 일어날 수 있고, 길을 걷다 가도 자각이 일어날 수가 있어요. 눈을 밖으로 돌리면 자각이 일어나기 어렵고 자기에게 돌이켜 비춰 보면 ‘아, 이럴 수도 있겠네!’ 하는 자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각이 일어나면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다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행복학교는 여러분들이 자각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 만든 학교입니다. 행복학교를 다니면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행복학교에서 대화를 하거나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스스로 ‘어? 내가 화낼 일이 아니네’ 이렇게 자각이 일어나면, ‘천성이 바뀐다, 사주가 바뀐다, 운명이 바뀐다, 업장이 녹는다’라고 말하는 변화가 일어날 기회가 오는 겁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오늘도 유익하고 재미있는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천일결사 기도를 생방송으로 하고, 오전에는 통일특별위원회 리더십 연수를 온라인으로 진행한 후 오후에는 청년들을 위해 청춘톡톡 즉문즉설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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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현미

감사합니다~ 출근길 좋은말씀 들어 기뻤습니다

2021-12-02 07:36:46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1-12-01 17:45:35

이수정

감사합니다.

2021-12-01 06: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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