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11.20 천일결사 기도, 경전대학 즉문즉설, 행복학교 특강
“사실 우리 뇌는 이미 메타버스에 살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4시 30분, 짙은 안개 위로 붉은 보름달이 떠오르고 나서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예불, 삼귀의,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 경전 독송을 차례대로 하고, 스님이 오늘 읽은 경전의 내용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두북 공동체 대중과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친 후 오전 10시부터는 정토 경전대학 학생들을 위한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경전대학 학생들은 입학하고 나서 두 달이 지났고 모두 금강경 강의를 듣고 있는 중입니다.

정토경전대학 즉문즉설

경전대학 학생 7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경전대학 학생 여러분, 공부 잘하고 있습니까? 벌써 입학한 지 두 달이 되었습니다. 금강경 수업 잘 배우고 있어요?

공부를 할 때는 그때그때 의문이 나는 걸 바로 물어보고 답변을 듣는 게 가장 좋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해서 저와 대화하는 시간은 한 달에 한 번씩 기회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금강경을 배우는 과정에서 생긴 의문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는 시간입니다.”

이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사전에 다섯 명이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금강경의 내용 중에 상을 떠난 세계를 어떻게 그릴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사량 분별을 내려놓고 진실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량 분별은 끊임없이 상을 짓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사량 분별로는 상을 떠난 세계를 도저히 그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상을 떠난 세계를 그릴 수 있나요?”

“천하 만물은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자연은 생각을 탁 놓아버리고 살아가는데, 우리는 생각을 짓습니다. 생각을 짓는다는 것은 내 것, 네 것, 나, 너, 이렇게 자꾸 울타리를 치는 걸 뜻합니다. 이렇게 울타리를 치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실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거울 속에 비치는 그림을 하나, 둘 헤아려서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를 파악하고자 하면, 아무리 생각을 오래 해도 전부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멈추어 버린 상태가 되면 삶이 그대로 진실이 됩니다. 이런 상태를 ‘무아(無我)’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공(空)’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겁니다. 반야심경에 이와 같은 말이 나옵니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모든 법이 공한 진실의 차원에서 보면, 생한다고 할 것도 없고 멸한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생불멸입니다. 깨끗하거나 더럽다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이 불구부정(不垢不淨)입니다. 늘어난다거나 줄어든다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이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무언가가 생겨난다 또는 사라진다, 이것은 깨끗하고 저것은 더럽다, 이것이 늘어나고 저것이 줄어든다, 이런 관념들이 모두 다 울타리를 치는 생각에서 빚어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얼음 구슬 다섯 개를 주고 놀라고 하면, 어린아이 눈에는 얼음으로 만든 구슬이나 사기로 만든 구슬이나 모두 다 동그란 구슬처럼 보입니다.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보면 얼음 구슬은 사라지고 그릇 안에 물만 남게 되는데, 그때 어린아이는 ‘엄마, 내 구슬이 없어졌어’ 이렇게 말합니다. 이때 ‘없어졌다’는 건 얼음이라는 고체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얼음 구슬을 주면 ‘얼음이 다시 생겼네’ 이렇게 말합니다. ‘없어졌다’, ‘생겨났다’ 하는 표현은 모두 얼음이라는 고체만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때 어른은 고체인 얼음이 액체인 물로 변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얼음이 없어졌다’ 하거나 ‘물이 생겨났다’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생불멸입니다. 불생불멸은 무언가 영원하다는 뜻이 아니라, 생(生)하고 멸(滅)하는 게 아니라 변화만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무엇과 비교해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생겨났다고 인식하기도 하고, 사라졌다고 인식하기도 하는 겁니다.

등산이나 야영을 해도 이런 이치를 알 수 있습니다. 산 계곡에서 손을 씻을 때는 주로 위쪽으로 가서 씻습니다. 밥을 할 때도 물을 주로 위쪽에 가서 떠옵니다. 윗물이 맑고 아랫물은 더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발을 씻을 때는 주로 아래쪽에 가서 씻습니다. 그런데 밥을 다 해 먹고 산 위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합니다. 결국 나는 산 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발을 씻은 곳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떠온 물로 밥을 해먹은 꼴이 됩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따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위쪽 물은 맑고 아래쪽 물은 더러울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더 맑은 물을 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실제로는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다른 사람이 발을 씻은 곳과 더 가까워지는 곳에서 물을 떠 오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전체를 살피지 못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이것이 시작이다’, ‘저것이 끝이다’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이처럼 단순히 내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머리를 굴리는 것을 ‘사량 분별(思量分別)’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 뇌는 이미 메타버스에 살고 있습니다

사량 분별을 하는 것이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곧 진실은 아닙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가상현실인 메타버스(metaverse)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건물도 만들어서 사고팔고, 명품도 만들어서 사고팔고, 땅도 서로 사고 판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상현실에 접속하는 안경을 쓰면 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렇게 가상현실 속에서 가방도 사고 신발도 사는 거예요. 그러다가 자기가 산 가방이나 땅을 잃어버리면, 울고 불고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바깥세상에 있는 엄마가 그 모습을 보면 ‘왜 갑자기 울고 불고 난리지?’ 하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그럴 때 엄마는 아이를 위해 잃어버린 땅을 찾아줍니까? 컴퓨터를 끄라고 합니까?”

“컴퓨터를 끄라고 하죠.”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누구랑 헤어졌다며 울고불고할 때도 눈만 뜨면 됩니다. 깨달음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이 사람은 내 아내다’, ‘이 사람은 내 남편이다’, ‘이 집은 내 집이다’ 이러면서 살아가고 있잖아요. 이미 뇌 속의 가상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것처럼 부처님에게는 사람들이 내 것이니 네 것이니 따지면서 난리를 치는 것이 마치 아이들이 가상현실에 접속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치거나, 꿈을 꾸면서 울고불고하는 것처럼 보였던 거예요. 한 생각을 멈춘다는 것은 가상현실의 스위치를 끄는 것과 같습니다. 한 생각 멈추면 아무런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꿈을 꾸다가도 눈만 뜨면 아무 일이 없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이런 환상의 세계를 곧 실재 세계라고 착각해서 거기에 빠져 있는 것처럼, 지금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가상현실이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될 겁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컴퓨터로 접속해야 하는 가상 세계이지만 아이들은 가상현실에서 출퇴근도 하고, 사회생활도 하게 됩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어떻게 그 속에서 출퇴근을 하나 싶을지 모르지만, 세상이 이렇게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뀌어 가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것에 사로잡히는 정신 현상도 역시 이와 같다는 사실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살면서 어떤 것에 한 생각이 멈춰서 사로잡히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곧 현실처럼 느껴집니다. 옆에서 아무리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도 그 사람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꿈이 현실처럼 느껴지고, 옆 사람이 잠꼬대한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그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다른 사람과 다투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을 아무리 시비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거기에 탁 사로잡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어떻게 잠꼬대하는 사람의 잠을 깨울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즉문즉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즉문즉설을 지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다 들어주느냐고 하지만, 즉문즉설은 질문하는 사람이 호랑이 꿈을 꾸든, 뱀 꿈을 꾸든, 강도 꿈을 꾸든, 깨우기만 하면 되는 원리입니다. 꿈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은 흔들어서 깨우기만 하면 되지, 호랑이 꿈을 꾸는 사람은 이렇게 깨워야 되고, 강도 꿈을 꾸는 사람은 저렇게 깨워야 되는 게 아닙니다. 눈을 뜨고 ‘아, 꿈이네!’ 하기만 하면 아무 일도 없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여러분도 한 생각 내려놓으면 ‘아, 괴로울 일이 없네!’ 하고 깨닫게 됩니다. 괴로워할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거기서 끝나는 거예요.

이렇게 사량 분별을 버리는 이치를 사량 분별로 설명한 것이 금강경입니다. 제1분에서는 사량 분별을 하지 않는 경지를 설명하고 있고, 제2분에서는 수보리가 한 생각을 일으켜서 사량 분별로 사량 분별이 없는 세계를 설명하려다 보니까 결국 ‘무량(無量)’, ‘무수(無數)’, ‘무변(無邊)’ 이런 표현들을 하게 된 겁니다.

꿈에서 깨는 것은 꿈속에서 천금을 버는 것보다 더 값진 일입니다. 이건 실제로 꿈에서 깨어나 봐야 ‘그렇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천금을 버는 것보다 꿈을 깨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아무리 말해줘도 와닿지가 않습니다. 금강경에서 이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 ‘이 우주를 일곱 가지 보물로 가득 채워서 보시를 하는 것이 꿈에서 깨는 것만 못하다’ 하는 구절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사량 분별로 사량 분별을 넘어서는 이치를 표현하려고 하다 보니 말이 많아진 겁니다. 수보리가 정말로 못 알아들어서 계속 다른 말로 묻고 또 묻고 한 것인지, 미래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을 대변해서 여러 가지로 질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금강경에서는 같은 내용을 표현만 바꿔가며 반복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이치만 따지면 제1분으로도 충분하고, 조금 부연 설명을 붙이자면 제6분까지의 내용만 해도 충분한데, 수보리가 부처님의 설명을 듣고도 자꾸 의문이 들고 의심이 드니까 계속 대화가 길어져서 결국 책 한 권에 해당하는 내용이 나오게 된 거예요.

즉문즉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롭고 힘든 사람이 들으면 감동을 하는데, 별로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들으면 감동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물어야 감동이 있고, 보편성이 생기고, 배울 점이 생깁니다. 혹자가 보면 ‘왜 저런 걸로 괴로워하지?’라고 할 만한 소재를 가지고 대화를 하다 보면 사람들이 그걸 듣고 감동을 합니다. 반면 ‘공이 무엇입니까?’와 같은 질문은 사람들에게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치를 말로 표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동시에 이치를 표현하는 말은 허깨비 같은 줄도 알아야 합니다. 달을 보여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도 필요합니다. 대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때문에 달을 못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지 말라’ 하는 말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손가락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달을 가리키려면 손가락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손가락을 통해서 손가락 너머의 달을 보듯이 이치를 표현하는 말을 통해서 그 너머의 세계를 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량 분별을 버리라는 건 사량 분별을 통해서 사량 분별 너머를 보라는 의미입니다.

금강경을 보면, 이것이라고 했다가, 이것이 아니라고 했다가, 아닌 것도 아니라고 했다가, 그것도 아니라고 했다가, 이런 비슷한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이걸 사량 분별로 생각하면 무슨 말장난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금강경은 비슷한 말을 반복함으로 인해 그 말없는 세계를 직시(直視)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즉 본질이 무엇인지 ‘탁’ 하고 볼 수 있도록 합니다.

말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본질이 무엇인지 직시하는 게 중요합니다. 물론 그 길로 인도하려면 말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질로 인도하는 말 자체를 지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예, 잘 들었습니다. 우리가 뇌의 가상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말씀이 많이 와닿았습니다. 한 생각 멈춰서 가상세계의 스위치를 끄는 수행을 꾸준히 해보겠습니다.”

“가상세계에서 놀아도 괜찮아요. 대신 괴로워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요지를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하면 안 돼요. 부처님의 말씀은 무엇을 하든 괴로워할 이유는 없다는 겁니다. 괴로우면 가상세계의 스위치를 꺼버리면 됩니다. 스위치를 끄면 되지 뭣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영상을 계속 봐요.

정말 괴로워할 만한 이유가 있는지 한 번 살펴보라는 겁니다. 누가 총을 쏘는 데도 ‘나는 수행자이니까 괴롭지 않다’ 하면서 총을 맞으라는 게 아니에요. 그런 상황이 와도 괴로워하지 말고 죽지 않으려면 피하라는 겁니다. 죽으려면 그냥 맞는 길도 있어요. 모두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스님들도 독립운동, 민주운동 등 정치에 참여해도 되는 건가요? 지구 상의 모든 생명들도 다 귀중한데 독립운동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 부처님은 많은 법을 설해놓고 왜 설하신 바가 없다고 하는 건가요? 금강경 전체의 요지가 첫 장에 담겨 있다고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일체 세상이 한 몸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이것도 상을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인지요?
  • 첫 번째 화살은 맞더라도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말라고 하셨는데, 두 번째와 세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일체유심조는 물질 현상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 것인가요?

대화를 다 마치고 12시가 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온라인 수업이 지식으로 끝나지 않고 일상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행복학교 특강

점심 식사 후 오후 2시부터는 행복학교 참가자들을 위한 온라인 특강을 시작했습니다. 행복학교 참가자들이 수업 중에 생긴 궁금증을 해소하고 관계 편과 심화과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연결하는 자리입니다. 행복학교 참가자 27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행복학교란 무엇을 배우는 곳인지 이야기했습니다.

“상대가 변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상대를 보는 관점이 바뀌면 상대는 새 사람이 됩니다. 상대가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하는 건 상대의 행위에도 요인이 있겠지만 여러분이 보는 관점에 따라 좌우되기도 합니다.

관점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

나이 드신 분들에게 자식을 효자 만들고 싶은지 불효자 만들고 싶은지 여쭤보면 다들 효자 만들고 싶다고 대답합니다. 이때 자식이 효자인지 불효자인지는 자식이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내가 하기 나름입니다. 내가 자식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으면 자식은 효자가 됩니다. 내가 기대하는 바가 많으면 자식은 불효자가 됩니다. 상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데 상대가 1만 원을 주면 고마운 사람이 되고, 상대에게 100만 원을 바라는데 99만 원을 주면 기분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하는가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바라보는 지도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만 달려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든 것은 다 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 또한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자 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걸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이라고 하면 염불, 참선, 고행을 떠올리는데, 그건 수행의 형식적인 방법이고,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관점입니다.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 하는 관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연습

행복학교는 부정적으로 보던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연습을 하는 곳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렌즈를 바꾸게 되면 세상이 지금까지 보던 것과는 달리 보입니다. 여러분이 조금만 행복학교 공부를 해보면 부처님처럼 완전히 괴로움 없는 사람까지는 못 되더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스트레스가 적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밥을 굶지 않아도 되고, 잠을 안 자는 수행을 따로 하지 않아도 됩니다. 3000배, 10000배의 절 수행을 하지 않고도 그 정도는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관점만 조금 바꿔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기 습관만 조금 바꿔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전 국민이 지금까지 자기가 주장하고 고집하던 걸 내려놓고, 관점을 조금 바꿔서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곳이 행복학교입니다. 이 길은 기독교를 믿어도 괜찮고, 불교를 믿어도 괜찮고, 종교가 없어도 괜찮고, 남자도 괜찮고, 여자도 괜찮고, 누구나 다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관점만 조금 바꾸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네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 기분이 좋을 때는 기분 좋음을 그대로 만끽하면 되는지, '이러다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겠구나' 하고 덜 좋아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앞으로 행복학교 체계가 주변 교육과 이어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따로 생각해두신 큰 그림이 있으신가요?
  • 대통령 후보자들의 공약을 볼 때 지나치게 내 위주로만 판단하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에게 손해가 나더라도 사회를 위해서라면 그런 공약을 내건 후보를 뽑아야 할까요?
  •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 경험을 했습니다. 진실이 상대에게 상처가 될 것이라고 예상이 될 때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나요?

대화를 마치고 나니 오후 4시가 넘었습니다.

곧이어 오후 4시 30분부터는 2-1차 상임 천일준비위원회와 화상 회의를 했습니다. 다음 만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해 만준위 위원들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1시간 동안 회의를 하고 방송실을 나왔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에는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하고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4박 5일 온라인 명상수련 회향식을 생방송으로 진행하고, 구미 아도 모례원으로 이동하여 새터민들과 함께 김장을 한 후, 오후에는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밭에서 무를 수확하고, 저녁에는 온라인 일요 명상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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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행

메타버스의 세계와 비교한 깨달음의 관점이 정말 와닿았습니다

2021-12-03 09:30:51

윤태훈

분별. 감사합니다.

2021-11-30 07:48:59

관점

스님 법문 감사합니다.

2021-11-29 06: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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