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8.11 수행법회
“얼마 전 조카가 자살을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수행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3시에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서울에서 병원 진료를 받은 후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에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무더위에 잘 지내고 계시죠? 지난 3주 간은 폭염이라고 할 만큼 정말 더웠습니다. 그러나 이번 주부터는 더위가 한풀 꺾인 것 같습니다. 아마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오게 되니까 그런 것 같아요.”

이어서 세계 곳곳에 불어닥친 기후 위기의 징후들에 대해 이야기한 후 이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4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백중 기도를 하고 있는 기간이라 죽음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그중 한 명은 얼마 전 조카가 자살을 했다며 조카를 지켜주지 못한 무거운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질문했습니다.

얼마 전 조카가 자살을 했습니다

“얼마 전 17살 된 조카가 자기 생을 스스로 정리했습니다. 저는 조카가 죽기 2-3일 전에 봤을 때의 말과 행동이며 잠든 모습이 떠올라서 마음이 안 좋습니다. 언니와 형부는 어른들이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어린 조카를 어떻게 천도해줘야 할지 질문드립니다.”

“조카나 자식을 일찍 떠나보냈다면, 그것도 사고나 질병 등이 아니라 자살로 떠나보냈다면 살아있는 사람들의 아픔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이 아픔을 어떻게 치료할 것이냐가 참 큰 과제입니다.

인류는 죽음 앞에서 굉장히 무기력하고 나약합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고 돈이 많고 명예가 높던 사람도 죽음 앞에 서면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다 제 마음대로 주무르는 듯하던 사람도 자기가 죽든 가까운 사람이 죽든, 죽음 앞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음은 돈으로도 해결 안 되고, 권력으로도 해결 안 되고, 명예로도 해결 안 되고, 지식으로도 해결 안 돼요.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좌절하고, 무능함에 좌절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인이 죽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남이 죽는 걸 보고도 깊은 좌절감과 슬픔에 빠지게 돼요.

내 아내가 죽고, 내 남편이 죽고, 내 자식이 죽고, 내 부모가 죽은 슬픔이 얼마나 클지 이해는 합니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이 죽은 사람은 슬픔 속에 계속 살아야 하느냐, 아니면 그 슬픔을 딛고 일어나서 행복하게 살아야 하느냐?’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한 사람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예컨대 자식이 죽은 부모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이 너무 매정한 거 아니냐? 어떻게 남편이 죽었는데 아내가 슬프지 않고, 아내가 죽었는데 남편이 슬프지 않을 수 있느냐?’라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럴 때는 오해를 빚기 쉬워요. ‘저게 장가 한 번 더 가려고 저러나?’, ‘시집 한 번 더 가려고 그러나?’, ‘자식이 죽었는데 어떻게 부모가 저리 멀쩡할 수가 있느냐?’, ‘부모가 죽었는데 자식이 저리 멀쩡할 수가 있느냐? 불효막심한 놈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이런 일이 벌어진 사람은 죽을 때까지 슬픔 속에 살다 죽을 수밖에 없느냐?’ 이게 문제예요. 그때 한 생각에 빠지면 ‘슬플 수밖에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물어보면 대답이 달라져요.

‘그럼 이 사람은 계속 이렇게 슬프게 살아야 하느냐? 아니면 이 사람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느냐?’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슬플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언제까지는 슬퍼해도 되고 언제부터는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 걸까요? 슬퍼한다고 자식이 살아오고, 부모가 살아오고, 아내나 남편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잖아요. 왜 지금은 슬퍼해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까요? 어차피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산 사람은 언젠가 1년이든 2년이든 3년이든 세월이 흘러서 슬프지 않게 된다면, 당장 지금부터 슬프지 않게 살아가면 안 되느냐는 거예요. 지금은 왜 슬퍼해야 할까요? 시간이 지나도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않기는 마찬가지인데, 훗날에 슬픔이 사라진다면 지금 기쁘게 살면 안 되는 걸까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모순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금은 슬퍼해야 한다’고 말하고, 나중에는 또 ‘슬퍼하면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슬픔의 기간은 언제까지여야 할까요? 유교에서는 3년 상을 치릅니다. 3년까지는 슬퍼해야 하고 3년부터는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루 차이로 어제까지는 슬퍼해야 하고 오늘부터는 슬퍼하지 않아도 될까요? 49재를 기준으로 하면, 49일을 기점으로 어제까지는 슬퍼해야 하고 오늘부터는 슬퍼하지 않아도 될까요? 3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3일장을 치르는 날까지는 슬퍼해야 하고 그 이후에는 슬퍼하지 않아도 될까요? 이렇게 정한 근거가 무엇인지 따져보면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슬픈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영원히 슬퍼해야 합니까?’
‘그건 아니죠.’
‘그러면 10년 후에는 어떡해요?’
‘아이고, 10년 후까지 슬퍼하면 어떡합니까? 10년 후에는 저도 살아야죠.’
‘그러면 언제까지 슬퍼해야 합니까?’

그 기간을 어떤 종교에서는 3년까지, 어떤 종교에서는 1년까지, 어떤 종교에서는 100일까지, 어떤 종교에서는 49일까지, 어떤 종교에서는 3일까지로 기간을 정했습니다. 다 자기들 나름대로 근거를 만들어서 이야기하지만 본질은 다 같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오지 않는 이상 슬프지 않을 수가 없다’라면 일관성 있고 논리적으로도 맞아요. 그런데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않아도 우리는 슬프지 않게 살 권리가 있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라고 한다면, 그게 10년 후든 20년 후든 관계없이 당장 지금부터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예요. 굳이 논리를 따지면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류가 내세에 대한 관념을 고안해낸 거예요. 예를 들어볼게요.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사고로 얼굴에 화상을 입어서 그 전보다 못해졌어요. 나는 이렇게 생긴 친구를 좋아했는데 그 얼굴이 변해서 마음이 아프단 말이에요.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그 친구가 성형수술을 해서 오히려 더 예뻐졌다고 합시다. 변화했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더라도 더 예뻐졌다면 못해졌을 때보다 마음이 더 아프지는 않을 거예요. 어쨌든 내가 알던 전의 얼굴이 아니니까 좀 섭섭할 수는 있지만, 한이 맺힐 정도의 아픔은 아니에요. 예뻐졌기 때문에 ‘아, 잘됐다!’하고 좋아할 수가 있는 거예요.

부모들은 자식이 결혼하면, 같이 있다 헤어지니까 슬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결혼을 안 할 것도 아니잖아요. 이처럼 좋은 일이 있어도 아쉬워하는 게 사람 마음입니다. 같이 있다 헤어지려니까 섭섭한 거예요. 그래도 좋은 데 간다고 하면 이 섭섭함이 슬픔으로까지 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별의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죽어서 지금보다 좋은 데 간다’는 관념이 나왔어요. 죽는 것은 헤어지는 거니까 아쉽지만, 더 좋은 곳에 태어난다는 거예요. ‘천당으로 간다,’ ‘극락으로 간다,’ ‘ 다음 생에 더 좋은 곳에 태어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쉽더라도 슬프지는 않은 거예요. 좋은 데 가니까 잘됐잖아요. 이게 종교예요. 이건 위로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좋은 데 간다고 믿는 거예요. 기독교에서는 천국 간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극락 간다고 하고, 인도에서는 다시 태어난다고 합니다. 다음 생에는 좋은 곳에 태어나라고 빌어줘요. 신체장애가 있다면 다음에는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가난하다면 부자로 태어나기를, 천민이라면 양반으로 태어나기를 빌어줍니다. 헤어지는 건 아쉽지만, 좋은 데 갔다고 하면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슬픔이 확 줄어들어 버립니다.

이게 사실일까요? 그건 누구도 확인할 수가 없어요. ‘그게 진짜냐, 거짓말이냐’ 이렇게 접근하지 말고, ‘아, 이렇게 함으로 해서 슬픔을 가진 사람이 위로를 받는구나’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슬픔의 기간이 나오는 거예요. 즉시 하늘나라에 간다고 하면 슬퍼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일부 기독교인들은 안 울고 기뻐하잖아요.

‘아이고, 하늘나라에 갔구나. 헤어지는 건 아쉽지만 하늘나라에 갔으니 잘된 일이다.’

불교에서는 49일 만에 극락 간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이런 처지를 이해해서 49일까지는 우는 것을 좀 봐주겠다. 그런데 49일 넘어서는 울 필요가 없다’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3일장 지낸다, 5일장 지낸다 하는 것도 3일이나 5일까지는 슬퍼하더라도 그 이상은 슬퍼하지 말라는 뜻이 있어요. 100재를 지낸다는 것은 100일까지만 슬퍼하지 그 이상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고, 3년 상을 탈상한다는 것은 3년까지만 슬퍼하지 그 이상은 하지 말라는 것이고, 이처럼 다 나름대로 뜻이 있습니다. 슬퍼하는 것은 현실이지만 언제까지고 계속 슬퍼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이 슬픔을 없애는 데는 ‘좋은 데 간다’라는 말이 위로가 됩니다. 그러면 아쉬움은 있지만 슬픔은 없어요. 그런데 이 슬픔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어느 정도 시간을 정해주고 ‘여기까지는 슬퍼하는 건 뭐 인지상정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 슬퍼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라고 할 수 있어요.

부처님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셨을까요? 부처님 당시에 한 젊은 여인이 어린 자식을 잃었어요. 너무너무 슬퍼서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된 여인이 죽은 아이를 안고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애원했습니다.

‘우리 아이 좀 살려주세요!’

용한 의원도 죽은 아이를 살릴 수가 없고, 종교인들도 좋은 곳에 보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살려줄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도 자꾸 살려달라고 하니 사람들이 하도 안타까워서 부처님께 가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죽은 아이를 안고 부처님께 찾아가서 아이를 살려달라고 하소연을 했어요. 부처님은 아이 잃은 여성의 하소연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여, 겨자씨를 한 움큼 얻어올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어야 하네.’

여인은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라는 말을 부정 타지 않은 집이라고 이해했어요. 사람이 죽어서 장례를 치를 때 장례식에 가면 ‘부정 탄다’라고 표현하기도 하잖아요.

‘아,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겨자씨를 얻어오면 우리 아이를 살릴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자 여인은 너무너무 기뻤어요. 그래서 아이를 안고 나와서 근처 풀숲에 뉘어두고, 사위성 시내에 들어가서 집집마다 겨자씨를 얻으러 다녔습니다.

‘겨자씨 한 움큼만 주세요. 저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다들 겨자씨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물었습니다.

‘혹시 이 집에는 아직 한 번도 사람이 죽은 적이 없습니까?’
‘작년에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안 되겠네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해서 또 다른 집에 가서 물어도 원하는 답을 해주는 곳이 없었어요.

‘얼마 전에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아이가 죽었어요.’

금방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집집마다 다 다녀도 겨자씨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가 지고 사방이 어둑어둑할 때 골목 안쪽에 있는 마지막 집에 다다랐어요. 겨자씨를 청하면서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혹시 아무도 이 집에는 죽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 집 주인이 고함을 질렀습니다.

‘에이, 여보세요!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이 세상에 어디 있소?’

그 순간에 여인이 탁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와 아이를 땅에 묻은 후 부처님께 왔습니다. 부처님이 물으셨어요.

‘여인이여, 겨자씨를 가져왔는가?’

여인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부처님. 더 이상 겨자씨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 죽습니다. 태어났다 죽는 것은 나뭇잎이 피었다 떨어지듯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저는 이제 그 슬픔에서 벗어났습니다. 부처님, 저도 출가해서 수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소서.’

그러자 부처님께서 다른 수행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저 여인을 출가시켜라.’

이것이 부처님의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으로서의 불교예요. 그렇다면 ‘극락에 간다’ 이런 얘기는 불교가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것도 불교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깨우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겨자씨 일화에서처럼 깨우침을 통해서 그 슬픔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고, 죽은 뒤에 좋은 곳에 간다고 위로를 받아서 그 슬픔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위로를 받아서 그 슬픔에서 벗어나는 길이 종교적인 해결책이라면, 깨우침을 통해서 벗어나는 길은 수행적 해결책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겐 왜 이런 괴로움이 생길까요? 이 괴로움에는 종류가 있어요. ‘사고(四苦)’라고 해서 네 가지 괴로움이 있고, 여기에 또 네 가지를 더해서 ‘팔고(八苦)’가 있습니다. 백팔번뇌(百八煩惱)라고 해서 108가지 괴로움도 있습니다. 괴로움도 나누면 이처럼 네 가지 괴로움, 여덟 가지 괴로움, 108가지 괴로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네 가지 괴로움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육체적인 문제에 따르는 괴로움이에요. 여기에 더해서 정신적인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애별리고(愛別離苦)예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입니다. 두 번째가 원증회고(怨憎會苦)예요. 미운 사람하고 함께 살아야 하는 괴로움입니다. 이것도 보통 괴로움이 아니에요. 여러분 중에도 결혼해서 헤어지지도 못하고 원수가 되어서 사는 사람이 많죠. 같은 직장에서 상사나 부하를 안 보고 싶지만 월급에 목매다느라 헤어지지도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게 원증회고예요. 세 번째는 구부득고(求不得苦)입니다. 뭘 얻으려는데 그게 안 얻어져서 생기는 괴로움이에요. 앞의 것 두 가지는 인간관계에 관한 괴로움이고, 세 번째는 물질에 관한 괴로움이에요. 네 번째는 오음성고(五陰盛苦)입니다. 어떤 것이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는데 변해버려서 생기는 괴로움이에요.

이처럼 애별리고는 좋아하는 것과의 헤어짐에서 생기는 아쉬움 때문에 생깁니다. 그 속에 죽음이라는 것도 들어가요. 헤어짐의 한 종류가 죽음이니까요. 결국 괴로움이란 집착에서 생기는 거예요. 좋아함에 집착해서, 괴로움에 집착해서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깨달음의 길은 뭘까요? 집착을 내려놓음으로 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반면에 죽은 사람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보냄으로 인해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이 종교예요. 그러나 불교의 수행 방법은 ‘그 슬픔은 나의 집착에 있다’ 이 사실을 알고 그 집착에서 벗어나버려서 슬픔을 없애는 것이에요. 그래서 천도재 법문을 할 때 스님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영가시여, 살아생전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피부로 감촉하며 머리로 생각하면서 '이것이 나다’라고 했는데, 지금에 이르러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냄새 맡지도 못하고, 맛보지도 못하고, 감촉하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하는데, 어떤 것이 영가의 본래면목입니까?'

이 말은 영가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딱 듣고 ‘이게 집착에서 생긴 거구나!’ 하고 딱 깨우치면 깨우침을 통해서 바로 천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듣고도 무슨 소리인지 막막하고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극락에 보내줄 테니 위로받아서 그 슬픔에서 벗어나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천도재 법문 이후에는 극락세계에 보내는 염불이 뒤이어 진행되는 거예요.”

“스님, 사실은 깨우치고 싶은데 사로잡혀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자책감이에요. 그 아이가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때까지 어른들이 지켜주고 붙들어주지 못했다고 하는 자책감이 많이 듭니다. 그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것도 다 집착이에요. ‘내가 잘못했다’라고 하는 죄의식도 집착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아쉬울 때 우리는 보통 두 가지로 반응합니다. 상대가 미울 때는 내가 잘못해놓고도 ‘네가 잘못했다!’라고 하고, 아쉬우면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마저도 다 내 잘못한 것 같아서 죄의식이 드는 거예요.

백중 기도를 하는 이유

지금 백중기도 주간이죠? 백중기도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왜 백중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느냐!’ 이렇게 따지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아니, 스님이 가르친 내용과 다르지 않느냐? 왜 이런 종교 의식을 정토회에서 하느냐!’ 이렇게 따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후자인 사람들은 자기 가족이 죽어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교리 좀 배워가지고 ‘삶과 죽음이 따로 있나, 다 집착일 뿐이지’ 이렇게 큰소리쳐도 자신의 배우자가 죽거나 자기 자식이 죽으면 그런 생각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슬퍼서 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러니 몇 마디 지식 갖고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면 안 돼요.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거기에 딱 사로잡혀 버리기 때문에 깨우침이고 뭐고 눈에 안 보입니다. 그때 딱 깨달으면 엄청난 깨우침이 생기죠. 예를 들어 자식이 살아있을 때는 최선을 다하지만 숨이 딱 끊어지면 그냥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보고 장례 치를 준비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굉장히 수행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러니 입으로 너무 큰소리치지 마세요.

저도 한때 젊을 때는 불법을 공부하고 나서 ‘생사가 따로 있나!’ 이렇게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다가 숨이 깔딱깔딱할 정도로 고문을 당해보니 ‘생사가 따로 있나’ 이런 소리가 쏙 들어가 버렸어요. 그리고 오히려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아, 정말로 죽음 앞에서도 내가 여여하고 초연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공부를 해야겠다.’

책을 보거나 법문을 듣거나 남의 얘기를 듣고 아는 것이 틀렸다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그것은 아직 내 것이 못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일을 모두 해야 해요. 첫 번째는 최선을 다해서 깨우침을 증득하는 겁니다. 즉문즉설은 다 깨우침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위로를 받고 싶을 때 즉문즉설을 들으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즉문즉설은 깨우침을 중시하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는 백중기도를 해보는 겁니다. 백중기도는 즉문즉설과 다르게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마침 지금이 백중기도 중이니까 질문자가 본인을 위해서 기도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조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조카야, 이번 생은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며 살았다 하더라도 다음 생에는 좋은 데 가서 건강하게 슬픔 없이 살아라. 여기서 이렇게 마음고생하고 사는 것보다 오히려 더 잘됐다’

이렇게 기도해 주세요. 죽음을 합리화하라는 게 아닙니다.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니까 그렇게 받아들이는 게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일부 사찰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천도재를 지내기도 한다는데 의미가 있을까요?
  • 눈물이 많아서 주위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것 같아 고민입니다. 살펴보니 평소엔 감정을 많이 억제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담담하게 지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 정토회에서 요양 시설을 운영하실 계획은 없으신지 궁금합니다. 예비부부와 예비 부모 상담 센터를 운영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대화를 다 나누고 나니 마치기로 한 시간을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곧바로 백중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생방송 화면은 서울 정토회관으로 바뀌고 정성을 기울여 다 함께 천도재를 지낸 후 수행법회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농사일을 하고, 하루 종일 화상회의를 연달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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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근

모든괴로움은 집착하기때문에 생겨난다

2021-08-25 05:13:08

정토회

법문 감사합니다

2021-08-19 17:20:53

이의수

법문말씀 잘들었습니다

2021-08-18 13:5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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