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5.10 전법활동가 법회, 농사일(모종 심기)
“남을 돕고 나서도 비난을 받을 때, 어디까지 도와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전법활동가를 위해 법회를 한 후 오후에는 밭에서 농사일을 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여러 업무들을 처리하고, 오전 10시에 두북수련원 방송실에 자리했습니다. 화상회의 방에는 200여 명의 전법활동가들이 방청객으로 참석하고, 나머지 전법활동가들은 유튜브 생중계로 함께 법회를 시청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주말에 으뜸절에 와서 초파일 연등 달기를 비롯해 봉사를 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지난 일주일은 날씨가 좀 더웠습니다. 그러나 농사짓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였습니다. 어제 저는 장수 죽림정사에 가서 무성하게 자란 정원의 나뭇가지를 솎아내는 작업을 봉사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많은 회원분들이 오셔서 연등도 달고, 도량 청소도 하고, 밭에 모종도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다들 수고를 많이 하고 계셨지만, 코로나19 방역수칙 때문에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는 것 외에 제대로 인사도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함께 식사도 못 하고, 저도 따로 제 도시락만 먹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웃음)

주말에 천룡사와 아도모례원, 문경수련원, 미륵사, 그리고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에도 많은 회원 여러분들이 오셔서 봉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봉사해주신 여러분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이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다섯 명이 사전에 질문 신청을 해서 스님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남을 돕고 나서도 비난을 받을 때, 어디까지 도와야 할까요?

“제 큰딸이 열흘 전에 투신하려는 여중생을 발견해서 보호자가 올 때까지 응급실을 지켰고, 아직도 그 여학생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보낸 조소와 무관심한 반응에 힘들어하면서도 그런 일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의 큰딸이 걱정입니다. 남을 도울 때도 뒷일이 무서워 몸을 사려야 한다는 소리를 듣는 게 요즘 세태인데요. 어디까지가 남을 돕는 적정선인지, 그리고 딸의 마음을 어떻게 다독여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딸이 몇 살이에요?”

“서른둘입니다.”

“성인이에요, 미성년자예요?”

“성인입니다.”

“성인이면 제 인생 제가 알아서 살 거니까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수행자는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괴로움 없는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일 때에는 돌 볼 책임이 부모에게 있지만, 스무 살이 넘으면 성인 대 성인으로 이웃집 사람처럼 대해야 합니다. 옛정을 생각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간섭으로 느낄 만큼 지나친 관심을 보이거나 어린아이 돌보듯 과도한 책임 의식을 갖는다면 죽을 때까지 자녀 문제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 해요. 스무 살이 넘으면 관심도 끊고 책임감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요청받을 경우,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고, 못하면 못한다고 말하면 됩니다. 이렇게 관계를 맺어야 딸이 어떻게 되든, 설령 딸이 죽는다고 해도 죽은 사람은 고이 보내고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소소한 일까지 신경을 쓰고 살면 수행자로서 해탈과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딸에게 집착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때의 원칙

다른 사람을 도울 때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도와달라고 하지 않으면 되도록 돕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딸이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라고 물어오거나 죽음을 앞둔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는 게 당연하지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때는 돕지 않는 것이 기본 관점입니다.

둘째, 도와달라고 하지 않아도 생명에 관계될 때는 도와야 하고, 그 때문에 과보가 따르면 그 과보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데도 도와야 할 상황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딸이 처했던 상황처럼 갑자기 누군가가 자살을 시도하거나 실수로 물에 빠져 허우적대면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아도 도와줘야 합니다.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데도 도와줘야 하는 경우는 생명에 관계될 때입니다. 즉 물에 빠졌거나, 교통사고가 나서 쓰러졌거나, 갑자기 심장마비와 같은 응급상황이 발생했거나, 많이 다쳤을 경우입니다. 사람이 굶주리거나 어린아이가 길을 잃은 경우에도 도와줘야 합니다.

그런데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도움을 줄 때는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물에 빠져 떠내려가는 사람을 구해줘도 ‘내 보따리 내놓으라’ 하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괜히 구해줘서 손해 봤다’ 하고 내 행위에 대해 후회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보따리 값을 물어 주고라도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해야 합니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렸다고 비난받거나 원망을 뒤집어쓸 줄 알더라도 우선 사람을 살려놓고 봐야 합니다.

전쟁이나 재난이 일어났을 때 사람을 구하려다 같이 위험에 빠질 경우도 있잖아요? 그런데도 그 위험 속에 뛰어들어 사람을 돕잖아요. 내 생명을 희생하는 일이 있더라도 도와야 할 일이 있단 말이죠. 비난을 받는 정도는 생명을 위협받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니까 억울하다고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억울해 하려면 아예 하지를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라면 생명이 위급한 사람을 돕는 일은 설령 내가 손해를 입거나 비난을 받거나 위험에 처하더라도 해야 합니다. 그 과보를 두려워한다면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가 도와달라고 할 때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는 것이 좋아요. 그런데 도와준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를 해치는 것보다 상대를 도와줄 때 좋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도우면 반드시 복이 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확률이 더 높다고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도 있지만, 현실에서 그런 기계론적 법칙이 늘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난하는 것보다는 칭찬하는 것이 내가 칭찬받을 확률을 더 높여준다고 할 수 있지만, 칭찬한다고 반드시 칭찬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행위이든 나쁜 행위이든 과보가 따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를 했을 때와 남을 도와주는 행위를 했을 때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나쁜 과보가 올 가능성이 클까요? 훔치는 게 더 나쁜 과보가 올 가능성이 큽니다. 상대가 도움을 요청할 때 도와주면 복이 될 확률이 더 높지만, 재앙이 따를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어떤 행위를 할 때는 항상 과보가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또한 그 과보를 기꺼이 받겠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도와줄 능력이 안 될 때는 과감히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할 수 없는 일로 죄의식을 갖고 미안해하는 것은 자기 능력을 과신하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괴로움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할 수 있으면 과보를 감수하고 하고, 할 수 없으면 기꺼이 거절하면 돼요.

거절하고 나서 후회를 하게 되는 이유는 정말로 할 수 없어서 거절한 게 아니라 하기 싫어서 안 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할 수 없어서 못 한 거라면 후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재벌회사 사장이 부도가 나서 저한테 3조 원을 빌려달라고 할 때는 제가 못 빌려준다 해서 마음에 하나도 거리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급해서 죽겠다고 100만 원을 빌려달라 하는데 못 받을 것 같아서 안 주고 나면 마음에 자꾸 신경이 쓰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정도면 내가 노력하면 줄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도와줬다고 칭찬이 돌아오길 바라면 안 됩니다.

사람을 구해주고 나서 오해를 받는다고 딸이 분노하면, 엄마는 웃으면서 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 좋은 일 했다. 그래도 욕 좀 얻어먹고 한 사람의 생명을 살렸잖아.’

이 말은 기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이 세상에서는 복이 안 되지만 저 하늘나라에 가서는 엄청나게 복이 되는 일인 겁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 품에 가면 백 배 천 배 복이 준비되어 있으니 이 세상에 칭찬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복에 전전긍긍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불교에서는 복이라고 할 것도 본래 없고, 재앙이라 할 것도 본래 없으니, 재앙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가르칩니다. 즉, 내가 욕 좀 얻어먹고 돈 좀 손해 났지만 한 사람이 살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칭찬이든 비난이든 좋게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다 같은 의미인데, 설명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불교는 복이 없는 공의 세계에서 설명하는 것이고, 기독교는 복이 있는 세계에서 설명하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수녀님들은 세상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장애인을 돕기도 하고,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기거하며 평생 돕기도 하잖아요.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엄청난 복이 예정되어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그런 조그마한 복 같은 것은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겁니다. (웃음)

이런 수녀님들의 마음가짐은 결과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마음과 같은 거예요. 그러니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할 때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지만, 도와줬다고 해서 반드시 칭찬이 돌아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비난이 돌아온다 해도 꼭 도와야 할 일

제가 인도에 불가촉천민 마을에서 운영하고 있는 수자타 아카데미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를 지어서 학생들을 가르치면 그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을까요? 인사를 받을 수도 있지만, 원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도움을 처음 받았을 때는 모두가 좋아하지만, 그 도움을 받고 나서 더 도와달라 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대학까지 보내 달라든지 다른 지원을 더 바라게 되는데, 그것을 안 해주면 원망이 생깁니다. 초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은 우리를 해칠 방법이 없지만, 고등학교를 나오거나 대학을 나오면 벌써 해칠 방법을 연구할 수도 있어요. 옛 속담에 비유하면 ‘호랑이를 키웠다’, ‘독사를 키웠다’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해침을 받더라도 아이들은 제때 배워야 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비난이 돌아오더라도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아요. 그런데 보통은 부모들조차도 열심히 키워놓은 자식한테 자기 원하는 대로 안 되면 자식을 원망합니다. 또 남편이나 아내에게도 자기가 좋아서 잘해줘 놓고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미워합니다. 또 이웃이나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해놓고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거나 거기서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배신당했다고 원망합니다. 자기가 한 일을 후회하는 것은 해탈의 길이 아닙니다.

질문자의 딸처럼 자살하는 사람을 구했다면 욕을 좀 얻어먹어도 괜찮아요. 자기는 죽기 위해 엄청나게 준비했는데 다시 살려놓았으니 기분이 나쁠 거 아니겠어요? 깨어나면 당연히 비난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상대가 욕을 하고 오해를 해도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해요.

‘아이고, 사람 살리는데 욕이 무슨 큰 대수냐. 사람 살리는데 오해가 무슨 큰 문제냐. 사람 한 명 살렸으면 됐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셨어요?”

“네,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결 가벼워진 질문자의 웃음을 뒤로하고 다음 질문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한 이후 생겨나는 갖가지 어려움에 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중 한 명은 스님은 늘 자발성을 강조하지만 회원들은 아무리 독려해도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며 어려움을 이야기했습니다. 스님은 확산보다 원칙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자발성을 토대로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정토회의 원칙입니다. 만약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정토회의 발전을 그만큼 늦추든지, 사업 확대를 늦추든지, 사업을 포기하든지 해야 합니다.

‘나에게 권한이 안 주어지니 더는 활동가를 안 하겠다.’

이런 관점은 수행자의 관점이 아닙니다. 수행자의 관점을 가진 사람에게 정토회에서는 권한을 주는 거예요. 혹시 ‘권한을 주면 수행자 그룹에 들어가고, 권한을 안 주면 안 들어가겠다’ 이런 관점을 갖고 있다면 그건 수행자의 자세에 맞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일을 그만큼 못하는 수밖에 없어요.

확산보다 원칙이 더 중요합니다

정토회는 확산도 중요하지만 원칙을 더 중요시합니다. 질이 담보된 확산은 환영하지만, 확산을 위해서 어떤 원칙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는 것은 정토회의 설립 취지에 맞지 않아요.”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한 후 마지막으로 스님이 정리 말씀을 했습니다.

“지금 정토회는 큰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실험이 성공적으로 되면 정토회의 발전에도 기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사회 공헌에도 많은 이바지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인류 문명사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조금 복잡하게 느껴지고 귀찮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물러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조금 더 긍정적으로 보면 어떨까요? 어느 분야든지 창조를 하려면 수많은 실패를 해야 하고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조금 더 적극적인 관점을 가지고 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합장으로 인사를 하고 전법 활동가 법회를 마쳤습니다.

법회 후에 점심을 먹고 바로 작업복을 입고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화단의 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창고 입구 사면이 깨져 있어서 시멘트로 새로 보강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먼저 미장 작업을 할 땅을 괭이로 파내고 흙과 돌을 분리해 돌만 다시 깔았습니다.


“자, 이제 모래를 가지러 갑시다.”

냇가로 가서 거름망으로 돌을 걸러내고 모래를 세 포대 가득 퍼왔습니다.



가져온 모래를 평평하게 깔았습니다.

“알고 보니 시멘트에 모래가 이미 섞인 제품이었어요. 지난번에는 모래가 섞인 줄 모르고 모래를 많이 섞어서 실패했어요. 물만 적절하게 섞으면 됩니다.”

시멘트 가루에 물만 넣고 되직하게 갰습니다.

그리고 모래가 깔린 땅 위에 잘 펴 발라주었습니다. 행자들은 계속 시멘트 반죽을 만들어 공급하고 스님은 두 곳에 순식간에 펴 발랐습니다.




“마를 동안 다음 일을 하러 갑시다.”

다음 작업은 화덕 받침대를 높이는 작업입니다. 작년 여름, 삼척 수해복구를 갔다가 주워온 화덕입니다. 막상 사용해보니 불을 지피는 곳이 낮아서 사용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허리를 숙이고 불을 지피지 않아도 되도록 화덕을 높이기로 했습니다. 화덕을 들어내고 재를 치운 후 받침돌을 주워와 씻었습니다.


받침돌 아랫 부분이 불안정해서 벽돌을 더 보강하고 2단으로 쌓았습니다.


그 위에 철망을 잘라 얹어놓고 아까 미장 작업을 하고 남은 시멘트를 바른 후 받침돌을 한 단 더 쌓았습니다.


세 배로 높아진 받침대 위에 화덕을 다시 올렸습니다.

“이제 여기 작은 의자를 놓고 앉아서 불을 때면 돼요. 철망 위에 장작을 넣으면 재는 아래로 떨어질 거예요. 자, 이제 도로 공사를 하러 갑시다.”

시멘트 반죽을 만들어서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마을 길에 모서리가 깨져 철근이 삐죽 나와 타이어에 구멍이 잘 나는 곳이 있습니다. 누구도 고치지 않은 채 계속 타이어 구멍 나는 차만 늘어서 스님이 직접 미장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철근이 보이지 않도록 시멘트를 두텁게 발랐습니다.


혹시 시멘트가 마르기 전에 차가 지나갈까 봐 큰 돌을 나란히 세워두고 돌아왔습니다.

시멘트가 묻은 도구들은 깨끗이 씻고 이번에는 산밑밭으로 갔습니다.

밭에서 상근자수련 중인 행자들과 모종을 심었습니다.

물주는 사람, 파종기를 땅에 꽂는 사람, 파종기에 모종을 넣어주는 사람, 모종에 흙을 덮어주는 사람으로 일을 나누어 빠르게 모종을 심었습니다.



오늘은 늘 창고에서만 일하는 재활용 유통 담당자도 함께 울력을 했습니다.

“스님, 저는 농사일이 더 재미있어요.”

유통 담당자는 전국에서 가져오는 물품들을 창고에 정리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제안을 했습니다.

“농사 담당자랑 소임을 맞바꿔 줄까요? 그럼 농사 담당자도 안 울고, 유통 담당자도 안 울겠네요.”

“네. 바꿔주시면 저는 땅이 계속 늘어난다고 울지 않고 웃으면서 일할게요.”

스님은 농사 담당자를 부르며 다시 농담을 했습니다.

“잘 들었죠? 한 번만 더 울면, 유통 담당자를 농사 담당자로 바꿀 거예요. 알겠죠?"

"저도 농사일을 재미있게 할게요."

밭이 활기찬 웃음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고추, 가지, 오이, 호박, 단호박, 수박, 콜라비 모종을 심고 마지막 두 두둑에는 땅콩을 심었습니다.


파종기로 모종을 넣으니 순식간에 끝이 났습니다.

“스님, 산아랫밭에도 땅콩을 심어주세요.”

행자들이 모종에 흙을 덮어주는 사이, 스님은 행자 둘과 산아랫밭으로 가서 땅콩을 한 두둑 심고 내려왔습니다.

다시 산밑밭으로 오니 모종에 흙을 덮어주는 일도 끝이 나 있었습니다. 이제 고랑을 평평하게 고르고 잡초 매트를 깔았습니다.

재사용하는 잡초 매트라 크기와 길이가 다 달랐습니다. 고랑의 폭도 일정하지 않아서 좁은 고랑엔 좁은 잡초 매트를 깔고, 넓은 고랑에 넓은 매트를 깔았습니다. 그래도 넓으면 두 개를 겹쳐 깔고 철심으로 고정시켜주었습니다.

사람이 많으니 넓은 밭에 모종을 심고 잡초 매트를 까는 일을 한 시간 만에 다 했습니다.


“자, 이제 저녁 먹읍시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바로 울력을 시작했던 스님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울력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부산 지역 소외계층에게 나눠줄 침구류와 의류를 전달하기 위한 물품 전달식을 JTS 창고 앞에서 한 후 서울로 이동해 오후 내내 평화재단에서 사회활동기구 책임자들과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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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희

관점

2021-05-28 14:24:28

양계홍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고 할수 없는 것은 편하게 거절하겠습니다

2021-05-24 06:13:20

김선화

스님을 비롯해 정토 행자님 모두 수고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2021-05-21 13: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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