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4.19 10-5차 천일결사 영어 입재식
“고통을 해결하는 가장 쉽고 바른 길”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10-5차 천일결사 입재식이 열리는 날입니다.

새벽에 5차 백일기도 1일째 정진을 마친 후 오전 8시에 영어 입재식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두북 수련원 방송실에서 법문을 하고, 전 세계에서 29명의 입재자들은 모두 각자 자신의 방에서 온라인으로 참여했습니다.

지난 1월 4일에 진행된 첫 번째 영어 입재식 참가자에 더해서 13명의 신규 신청자가 늘어서 총 40명이 입재했습니다. 주로 영어 통역 온라인 즉문즉설로 인연이 된 분들입니다.

다 함께 삼귀의를 함께 읽었습니다. 모든 프로그램이 영어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I take refuge in the Buddha. I pay homage and reverence to the Buddha.
I am delighted to learn the Dharma.I vow to practice diligently with the knowledge that everything is the result of my own deeds.
I am proud to be a disciple of the Buddha. I vow to become a bodhisattva, liberating all sentient beings from suffering.”

이어서 수행문을 함께 읽고 지난 백일 동안의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그리고 스님에게 입재 법문을 청해 들었습니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영어 입재식은 마치 30년 전 스님이 한국에서 처음 정토회를 시작할 때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스님은 왜 정토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는지 그때의 첫 마음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지난 백일 동안 정진 잘하셨습니까? 올해 처음으로 영어 천일결사 입재식을 한 후 백일이 지났습니다. 첫 백일 정진은 힘이 들기 때문에 많이 포기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오늘 두 번째 입재식에는 참가자가 더 늘었습니다. 적은 수로 출발했기 때문에 몇 명이 늘어도 몇십 퍼센트 늘어난 게 됩니다. 현재 한국 정토회는 백일마다 5% 늘어나는 것도 힘든데 여러분은 50%나 증가했습니다. 이런 속도로 계속 증가한다면 얼마 안 돼서 한국 정토회를 능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웃음)

30년 전 정토회를 시작할 때 세운 목표

이렇게 여러분이 새로 시작하는 모습을 보니 30년 전에 한국 정토회가 천일 결사를 처음 시작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만일결사 즉, 30년을 목표로 마을마다 사람들 사는 가까이에 수행자들의 모임을 하나씩 만들겠다고 발원했습니다. 이 일을 하는 방식도 담마(Dharma)가 아닌 것을 수단으로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지금까지 진행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종교 공동체나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수행 공동체를 지향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믿거나 의지하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괴로움이 없는 열반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즉, 붓다의 삶, 말씀, 실천을 중심에 놓고 그것을 모델로 정진해 왔습니다.

부처님은 2천6백 년 전 당시 인도 사회에서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고, 어떤 탐구 자세를 가졌고, 무엇을 깨달았고, 그 이후의 삶은 어떠했는가를 연구했습니다. 당시의 주류 세력은 욕망을 충족시켜 얻는 즐거움을 행복으로 여기는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비주류 세력은 욕망을 철저히 억제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고행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젊은 시절에 욕망을 따라가는 즐거움을 추구했지만, 출가해서는 욕망을 억제하는 고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길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욕망을 억제하지도 않으며, 다만 알아차려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제3의 길을 찾아냈습니다. 욕망을 따라 들뜨는 즐거움을 추구하지도 않고, 욕망을 억제하여 긴장하지도 않고, 편안한 가운데 다만 욕망을 욕망인 줄 알아차리는 아주 평화로운 길로 나아갔습니다.

2천6백 년 전 붓다가 가졌던 문제의식

부처님은 문제를 풀어가는 4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첫째, 문제를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즉 해결해야 할 과제가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전생, 내생, 천상의 이야기도 아니고, 부자나 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괴로움의 소멸이 목표였습니다. 둘째, 괴로움이란 것이 전생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고, 하늘이 준 것도 아니라면, 어떤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 것임을 알고 그 원인을 탐구했습니다. 즉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규명입니다. 그 원인을 규명해보니 괴로움은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지로부터 파생된 것이지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란 것을 발견했습니다. 셋째, 원인을 규명하고 나니 괴로울 일이 없었습니다. 넷째, 그럼 어떻게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 실천 방법을 찾아 실천했습니다.

부처님은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이 4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시고 실천하여 깨달음을 얻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났다. 모든 속박과 괴로움이 소멸했다.’

부처님은 아주 편안하고 아주 밝은 마음의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원망, 불안, 슬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좋은 법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한때 자신의 스승이었던 사람들을 생각했지만, 그들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같이 정진했던 도반을 찾아 법을 전하니 그들도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들 다섯을 부처님의 첫 번째 제자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역사가들이 그렇게 기록한 것이지 부처님은 그들을 친구로, 같은 아르하트(Arahat 아라한)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섯 명의 아르하트(Arahat)가 있다.’

그러면 당시에 브라만의 가르침(Brahmanism)과 우파니샤드 철학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브라흐마(Brahma)라는 전지전능하고 청정한 창조신이 있어서 우주의 모든 생명을 창조했고, 모든 피조물 속에는 아트만이라는 브라흐마의 분신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아트만은 변하지 않고 항상(恒常)하는 것이며, 더러움이 없는 아주 청정한 것이며, 여기에는 괴로움이 없고 오직 즐거움만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의 분신인 아트만이 있고, 그것은 항상하는 것이며, 청정한 것이며, 즐거움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트만이 브라흐만(Brahman)과 합일이 될 때 해탈과 열반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트만이라 할 것이 없다. 항상하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청정하다고 할 것도 없다. 항상 즐거움이라고 할 것도 없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고 있다.’

브라만 사상(Brahmanism)에서는 브라흐마(Brahma)가 인간을 창조할 때 신의 입김으로는 브라만(Brahmin) 계급을 창조하고, 신의 옆구리로는 크샤트리아(Kshatriya) 계급을 창조하며, 신의 배로는 바이샤(Vaiśya)를 창조하고, 신의 발바닥으로는 수드라(Shudra)를 창조했다고 하는 4개의 계급 창조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태생으로 청정해지거나 부정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느냐, 즉 행위로 청정함과 더러움이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출생으로 정해진다는 것을 부정하고 그가 선택한 행위로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은 붓다를 비롯해 다섯 가지가 될 수 없다는 오불가설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여성도 수행하면 붓다가 될 수 있다고 했고, 여성이 수행자가 되는 길을 처음으로 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붓다의 근본 가르침을 잇는다는 테라바다(Theravada 소승불교)에서도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오백 년 뒤에 ‘부처님은 여성 출가를 원하지 않았다. 아난존자가 여성 출가를 요청해서 할 수 없이 허락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비구니 제도를 없애버린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제의 일도 집착하지 말고, 내일의 일도 염려하지 마라. 다만 지금에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처님이 전생 이야기를 하고 내생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이것은 붓다 담마(Dharma)가 결국 후대에 인도의 전통사상인 브라만교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교가 종교화되면서 부처님은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수행자인 승려는 브라만처럼 사제 계급이 되었고, 재가수행자는 복을 비는 신자가 된 것입니다. 불교 역시 ‘죽어서 극락에 간다’, ‘죽어서 천상에 간다’ 이런 얘기를 하는 종교로 변해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비판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처럼 종교로서 아주 좋은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철학처럼 아주 우수한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토회가 추구하는 불교는 종교로서의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가 아닙니다.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경지로 나아가는 수행으로서의 불교가 우리의 관심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인 불교를 믿는 게 아닙니다. 종교를 부정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개인의 자유이고, 믿음은 서로 다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토회는 어리석음을 깨우쳐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는 수행을 하기 위해 만든 모임입니다. 이것이 2천6백 년 전의 부처님의 관심사였고 가르침이었습니다. 부처님은 다른 철학에 대해 비판하지도 않았고, 그것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어도 논쟁에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무엇이 문제인가?’ 하고 문제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것이 즐거움이냐, 괴로움이냐?’ 하고 물어서 괴로움이라고 대답하면 ‘왜 괴로울까?’ 하고 원인을 규명해 나갔습니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실천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면 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그 길로 가는 데 도움이 되는 말과 행동의 지침이 계율입니다.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이 선정입니다. 마음이 들뜨거나 긴장하지 않고 고요한 가운데 뚜렷한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 진실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찰력으로 보게 되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괴로움은 인식 상의 오류에 의해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증득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이런 관점으로 했습니다. 아들이 죽은 어머니가 찾아오면 아들의 죽음 앞에서 괴로워하는 것의 본질을 꿰뚫어 알게 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가르치신 부처님이 전생 이야기나 내생 이야기를 하셨겠습니까?

인류의 고통을 해결하는 가장 쉽고 바른 길

2천 6백 년 전에 붓다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지금 우리 인류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도 가장 쉽고 바른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자는 원리주의자가 아닙니다. 그 길이 바른 길이기 때문에 그 길로 가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가기 위해 한발 한발 꾸준히 정진하겠다는 관점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관점을 바로 가져야 수행이 쉽지, 관점을 바로 갖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열반에 이르기 어렵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마하야나(Mahayana 대승불교)를 시작할 때도 이런 관점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종교화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선불교를 시작할 때도 이런 관점에서 출발했지만 역시 종교화로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님이 가신 길을 가고자 합니다. 역사에서 수행을 중시했던 사람들이 몇 번씩이나 간 길, 그래서 낯선 길이 아닌 늘 있던 길, 그 길을 지금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와 갈등이 일어날 일도 아니고, 다른 철학과 논쟁이 일어날 일도 아닙니다. 이것은 당면한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바른 길입니다.

부처님은 이 길을 혼자 시작해서 점차 확대해 나가셨습니다. 한국 정토회도 소수가 시작해서 점점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또한 몇 명이든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꾸준히 정진한다면 나중에 많은 사람이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많고 적음에 관심을 두지 말고 ‘이 길이 정말 나의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길인가?’ 오직 이 관점에 서서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입재 법문이 끝나고 질문하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럼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질문해 보세요.”

온라인 화상회의 방에서 세 명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후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경전 중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내용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구분하는 방법

“Sunim, you were talking about all the Sutras and there are so many of them. And so many were written centuries after the Buddha passed away. So how do we know which ones are in alignment with his original teaching? How do we know which ones are not?”
(스님께서 경전에 대해 해 주신 말씀 잘 들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굉장히 많은 경전들이 있고, 또 많은 경전들이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 몇 백 년 이후에 만들어진 경전들인데요. 어떤 경전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고, 어떤 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명확하게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얘기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고 부합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한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는 것을 부처님께서도 이미 예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구분할 수 있는 한 가지 관점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붓다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는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이나 계율, 이런 것에 의해서 검증될 수 없다.’

부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늘 그런 것을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논쟁했기 때문에 붓다는 그런 것으로 진리를 검증할 수 없다는 관점을 가지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지금의 불교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즉 ‘이것이 전통적인 수트라(붓다가 말한 교법(敎法)을 간단한 형태로 압축해서 정리한 것)이다’ 또는 ‘이것이 전통적인 비나야(삼장 중 계율에 관한 경전을 모은 율장)이다’ 이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진리를 검증할 수 없다는 거예요. 붓다가 남긴 유언에는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내가 열반한 뒤에 ‘나 혼자 부처님께 직접 들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것이 붓다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무조건 붓다의 가르침이라고 수용해서도 안 되고, 기존에 듣지 못했던 내용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해서도 안 된다. 그의 주장을 자세히 들어보고 내가 지금까지 너희에게 설한 가르침과 하나하나 비교해보고 그에 부합하는지를 검토해봐야 한다. 가르침에 부합한다면 그 말을 수용해라.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가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을 수용하지 마라.’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그럼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란 무엇일까요? 첫째, 중도입니다. 중도의 가르침에 부합하느냐를 살펴봐야 합니다. 둘째,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에 부합하느냐를 살펴봐야 합니다. 셋째, 삼법인입니다.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 이 세 가지 관점에 부합하느냐를 살펴봐야 합니다. 넷째, 사성제입니다.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이 네 가지에 부합하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수행의 목표를 해탈과 열반에 두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어제의 얘기도 아니고, 내일의 얘기도 아니고, 지금의 관점에서 말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또한 욕망을 따르는 들뜸의 즐거움에 가치를 두고 있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고행에 가치를 두고 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보면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 후대에 교훈적으로 얘기를 꾸몄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교훈적으로 만들어서 진리로부터 벗어나게 한 것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이 왜 죽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후세에 만들어진 이야기에는 그 사람의 전생 얘기를 하면서 어떤 일로 인해서 누구를 죽였기 때문에 이번에 죽게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내용들이 붓다의 이름으로 테라밧다(Theravāda) 경전에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내용들은 다 교훈적인 얘기로 후대에 꾸민 얘기이지 붓다 담마(dharma, 법)가 아닙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건물 밑으로 지나가다가 옥상에서 간판이 떨어져 다쳤다고 합시다. 그러면 왜 다른 사람이 안 다치고 내가 다쳤는지에 대해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라고 설명하는 것은 담마가 아니라는 겁니다.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내가 다쳤다는 것은 보복의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복을 하는 것은 담마가 아닙니다. 옥상에 있던 간판이 떨어질 때 마침 내가 지나갔고, 떨어지는 간판과 내가 지나가는 인연이 만나서 다치게 된 거예요.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겁니다. 그런 후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른 간판도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1의 화살을 맞을지언정 제2의 화살을 맞지 말라’ 하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이 외에도 두 명의 질문에 더 답변을 한 후 입재 법문을 마쳤습니다.

“설명이 길었네요. 좀 어려운 주제입니다. 여러분들이 한국말을 배우면 제가 쉽게 설명을 해 줄 텐데 통역을 해서 하려니 좀 힘드네요.” (웃음)

마지막으로 질문한 사람들만 소감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I just want to say thank you both for getting understanding of history and clear understanding of the Jungto philosophy. It is very helpful. I’ve struggled with religion, probably most of my life I’ve prayed with more religions than most people have… just exploring. But I always find religion piles a bunch of things on top of just the simple truth until it’s buried and it’s hard to find. And I think this what drew me to Jungto is the simplicity, just touch the point of truth and leave the rest. So this was helpful in that journey, and I really appreciate, Sunim, I love your simplicity and directness. Even if you speak for a long time, it’s elucidating. Thank you.”
(스님, 먼저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불교의 역사와 정토회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저는 살면서 여러 가지 종교를 탐구해 왔습니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종교에 입문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대부분의 종교들은 굉장히 단순한 진리 위에 어떤 부가적인 것들을 막 쌓다 보니 원래 간단했던 진리들이 묻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항상 굉장히 심플하면서도 직접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스님께서 아무리 길게 말씀하셔도 직접적이고 간단하고 쉽게 가르쳐주시기 때문에 충분히 큰 도움이 됩니다.)

스님은 다시 한번 어떤 관점을 갖고 수행을 해야 하는지 강조했습니다.

수행이 이기주의로 흘러가지 않으려면

“이렇게 수행을 하면 나에게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자기에게만 초점을 맞출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이기주의로 흘러갈 수도 있어요. 남을 위해서 베푸는 행위를 항상 하면서 자기 수행을 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행동을 하면서 자기 수행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가면서 자기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수행이 이기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견제할 수 있습니다.

자기 수행을 한다는 사람들이 주변을 외면하거나 사회 정의를 외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바로 수행이 자칫 잘못하면 이기주의
로 흘러가기가 쉽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치우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자기에게 집중하는 수행을 한 후 매일 1달러를 보시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루 생활비가 1달러도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며 1달러를 우선적으로 보시하는 겁니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의도적으로 최소한 한 가지 정도는 남을 도와주는 선행을 합니다. 수행, 보시, 봉사 이렇게 세 가지를 합한 것이 큰 의미에서의 수행입니다. 큰 의미에서의 수행은 작은 의미에서의 보시와 봉사를 포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수행, 보시, 봉사하는 정진을 함께 해나갑시다. 100일 후에 또 뵙겠습니다.”

사홍서원을 영어로 함께 읽고 영어 입재식을 모두 마쳤습니다.

“I vow to build Jungto, a land where no sentient beings suffer.
I vow to end all suffering and emotional afflictions through practice.
I vow to learn all of the Buddha’s teachings.
I vow to attain Buddhahood together with all sentient beings.”

방송이 끝나자마자 스님은 작업복을 갈아입고 농사일을 하기 위해 비닐하우스로 향했습니다. 산에는 연두색 잎들이 하루가 다르게 넓게 번져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생강을 비닐하우스에 심기로 했습니다. 먼저 생강을 더 많이 심을 수 있게 크기가 큰 생강을 더 작은 크기로 잘랐습니다.

“생장점이 최소한 두 개는 있어야 발아를 할 수 있어요.”

잘게 자른 생강이 네 개의 대야에 골고루 담겼습니다.

“점심 먹기 전에 다 심어야 하니까 빠른 속도로 심읍시다. 파종기로 심으면 빨리 심을 수 있어요.”

스님은 며칠 전 감자를 심을 때 사용한 파종기를 들고 왔습니다.

“자, 제가 파종기를 땅에 꽂으면 생강을 던져 주세요.”

파종기 덕분에 아주 빠른 속도로 생강을 착착 심어 나갔습니다.

스님이 생강을 심고 간 자리에는 뒤이어 행자님 한 명이 북삽으로 흙을 덮어 주며 따라왔습니다.

순식간에 생강 심기를 끝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행자님 한 명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흙을 북돋워주고 있었습니다. 스님도 다시 북삽을 들고 흙을 북돋워주는 일을 함께 했습니다.

일을 끝마치니 12시가 되었습니다.

“자, 점심 먹으러 갑시다. 수고했어요.”

오후에는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하고, 저녁 7시 30분에는 사료편찬특별위원회와 화상회의를 했습니다.

내일은 모판에 볍씨 뿌리는 일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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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언수

수행이 이기주의로 흘러 가지 않도록 살핍니다.
[남을 위해서 베푸는 행위를 항상 하면서 자기 수행을 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행동을 하면서 자기 수행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가면서 자기 수행을 해야 합니다]

2021-04-25 22:00:06

박인자

수행 보시 봉사 의 뜻을 잘 이어가겠습니다

2021-04-24 22:15:56

청정화

감사합니다. 핵심적인 말씀이 깊이 와 닿습니다.

2021-04-24 2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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