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2.1부터 12.2까지 자재요양병원과 애광원 방문, 온라인 수행법회, 불교사상팀 회의
“직접 농사지은 배추와 우렁이 쌀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자재요양병원과 거제도 애광원을 방문하여 니와노평화상 상금의 일부와 올해 농사지은 쌀과 배추, 김장김치, 풋고추를 전달하고 돌아왔습니다.

어제 수확한 배추를 트럭에 가득 싣고 아침 8시 30분에 언양에 있는 자재요양병원으로 출발했습니다. 요양병원에는 자원봉사자가 많이 필요한데 코로나 이후 자원봉사자를 받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스님은 조금이라도 위로의 마음을 전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10월에 받은 니와노평화상 상금의 일부도 전할 겸 자재요양병원을 방문했습니다.

“올해 저희가 직접 농사 지은 배추와 우렁이 쌀입니다. 그리고 방금 수확한 풋고추예요.”

“아이고, 스님! 감사합니다.”

“쌀은 우렁이 농법으로 지었는데, 밥을 해보니까 정말 맛있었어요. 전부 유기농입니다.” (웃음)

쌀을 먼저 내려준 후 스님이 직접 트럭 위에 올라가서 배추를 내렸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이 달려 나와서 함께 릴레이로 배추를 날랐습니다.

“배추가 생긴 건 이래도 맛은 있어요. 유기농이어서 배추 이파리 안에 벌레가 꼭꼭 숨어 있어요.” (웃음)

“농약을 안 치셨으니까 당연히 벌레가 있겠죠.”

“큰 배추는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겁니다. 작은 배추는 노지에서 키운 거예요.”

“안 그래도 올해 2500포기를 김장해야 하는데 1500포기 밖에 김장을 못했어요.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배추 230포기를 다 내린 후 병원장인 능행 스님에게도 고춧가루와 현미 한 봉지를 선물하면서 니와노평화상 상금 일부를 직접 전달했습니다.

“니와노평화상 상금을 받았는데 대부분은 동남아 빈곤 여성들과 코로나 방역 지원에 기부했어요. 그 중 일부를 여기에도 기부하려고 갖고 왔어요.”

“아이고, 상금 받으신 걸 저희한테....”

능행 스님은 몸둘바를 몰라하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안 그래도 병실마다 냉난방기에 결로 현상이 생겨서 교체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돈이 부족해서 못하고 있었거든요. 환자들을 위해서 잘 사용하겠습니다.”

잠시 차담을 하며 병원 운영을 하면서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대화를 나눈 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곧바로 거제도 애광원으로 향했습니다. 다시 트럭을 타고 2시간을 달려 거가대교를 건넜습니다.

양쪽으로 쪽빛 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졌습니다.

애광원에 트럭이 도착하자 김임순 원장님을 비롯해 관계자들이 반갑게 스님을 맞이했습니다.

“아이고, 트럭을 타고 오셨어요?”

“원장님, 선물 갖고 왔습니다. 올해 제가 직접 농사지은 고춧가루와 현미 쌀입니다. 우렁이 농법으로 지었어요.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거주인들 모시고 여행을 못시켜줘서 미안해요. 대신에 보시를 좀 하겠습니다. 이번에 니와노평화상 상금을 받았는데 그 중 일부예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큰 돈을 주시고, 저희가 받아도 되는 돈이예요?”

“네, 그럼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코로나 때문에 시골에 내려와서 농사 짓고 살고 있습니다. 거의 농사꾼이 되어서 지내요. 폐교를 빌려서 거기서 살고 있는데, 겨울이 되니까 너무 추워요. 그래서 화목 난로를 설치했는데, 나무 하고, 장작 패고, 일이 엄청나게 많아요. 팔을 많이 썼더니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니까 주먹이 안 쥐어졌어요.” (웃음)

“얼굴이 훨씬 젊어지셨네요.”

“일을 많이 해서 그래요. 저녁에는 아파서 ‘아야야’ 하고는 아침 되면 또 일하러 나가요.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저보고 ‘주지는 못하더니 지주를 하시네요’라고 농담까지 합니다.” (웃음)

서로 안부를 나눈 후 애광원에서 준비한 동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스님과 애광원이 처음 인연이 되었을 때의 사진을 보여주며 당시 김임순 원장님이 한 말로 동영상이 시작되었습니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가 지나가고 애광원에 물이 끊겼습니다. 마실 물이 하나도 없었어요. 수도 파이프고 뭐고 다 망가졌거든요. 그래서 그냥 막 언덕에서 내려오는 물을 마시고 우리 아이들이 설사를 해서 말이 아니었어요. 그때 법륜 스님이 서울에서 회의에 참석하셨는데, 그 회의에서 애광원 소식을 듣고 다음날 새벽에 서울을 출발해서 오후에 거제도에 도착했어요. 법륜 스님이 2리터 들이 생수 4000병과 트럭 3대 분량의 일용할 식료품과 생활용품들을 가져 오셨어요. 스님이 가사와 장삼을 휘날리며 트럭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제가 말했습니다.

‘스님, 여기는 예수 믿는 곳이지 불교 믿는 곳이 아닌데요.’

그러자 법륜 스님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불교 믿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 가리지 않습니다. 어려울 때에 서로 돕고 살아야 하잖아요.’

그렇게 애광원과 스님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영상은 2003년에서 시작해서 2019년까지 스님이 애광원 식구들과 나들이를 다녀온 사진들이 펼쳐졌습니다. 아쉽게도 2020년엔 코로나 때문에 함께 나들이를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이어서 애광원 거주인들이 얼마 전 트로트 경연대회를 한 영상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친구들이 노래는 못 불러도 춤은 잘 춰요. 한번 보세요.”

애광원 옥상 위에서 ‘찐이야’ 노래를 아주 신나게 부르는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영상 속에 출연했던 거주인 몇 분도 옆에 앉아서 함께 박수를 치며 보았습니다.

“찐찐찐찐 찐이야 완전 찐이야 찐하게 사랑할 거야.”

스님은 박수를 크게 치며 “잘한다!” 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거주인들도 수제 케이크를 만들어와서 얼마 전 스님의 니와노평화상 수상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스님, 축하합니다.”


“상금 받은 것은 미얀마 지역에 코로나 방지하는 일과 동남아 지역에 여성 교육 사업에 대부분 기부를 했고요. 일부 남은 상금은 애광원에서 사용하시라고 오늘 가져온 거예요.”

애광원에서도 작은 선물을 준비해서 스님에게 전달했습니다. 거주인들이 자신이 직접 만든 열쇠 고리와 고무신 장식을 예쁘게 포장해서 스님에게 선물했습니다.

기념사진을 함께 찍고 나서 스님은 트럭에서 직접 농사 지은 쌀과 무, 배추, 김치를 내려서 전달했습니다.

“한 포대는 햅쌀이고, 세 포대는 묵은쌀이예요. 밥이 아주 맛있어요.”

애광원을 출발해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오니 오후 3시가 넘었습니다. 늦은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5시부터는 내년 봄에 열리는 행복한 100일 기념법회 추진단과 온라인으로 화상회의를 한 후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다들 수고가 많으십니다. 오늘 논의가 부족하면 다음에 또 회의를 합시다.”

회의를 마치고 나니 두북 수련원의 밤하늘에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 있었습니다.

12월 2일

오늘은 온라인 수행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한 후 오전 10시에 생방송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12월 첫 번째 수행법회입니다. 그리고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곳 두북 수련원은 남부 지방인데도 불구하고 아침 기온이 영하 2도, 3도로 계속 떨어졌습니다. 물이 얼고, 노지에 심은 배추도 잎이 빳빳하게 얼었습니다. 지금은 가을걷이가 끝나도 한해 농사 마무리를 하면서 내년 농사 준비를 하고 있어요.”

인사말을 가볍게 건넨 후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수행법회는 지난주에 열린 전국대의원회의 결과를 정회원들에게 보고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스님은 전국대의원회의 결과에 대해 30분 간 공유해 주었습니다.

“정토회는 만일결사를 시작한 이후 지난 28년 동안 많은 변화를 해왔습니다. 그 가운데 이번 온라인 전환이 제가 보기에는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계획은 2차 만일결사부터 온라인으로 전환하기 위해 준비해 왔는데, 코로나 사태가 나면서 전환 시기가 앞당겨졌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코로나 사태 때문에 어쩔수 없이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온라인으로 전환할 계획이 있었는데 코로나 사태로 인해 그 시기를 앞당기게 된 것입니다.

온라인 전환이 가져올 세 가지 변화

온라인으로 전환이 되면 크게 세 가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첫째, 그동안 우리의 활동 공간이었던 법당이 여러분의 개인 방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지역 법당이 개인 법당으로 이전이 되는 겁니다. 이제 개인 법당에서 수행법회, 정기법회, 특별법회, 명상수련, 아침기도, 교육연수, 사무 업무까지 모두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모둠별 실천 활동은 지역 사회에서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반별 실천 활동은 주말마다 각 지역에 있는 수련원에 모여서 하게 되고요.

둘째, 회원에 대한 규정이 바뀌게 됩니다. 온라인으로 전환이 되면 책임과 의무를 가진 정회원과 각종 수련이나 법회에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광범위한 일반회원으로 회원 체계가 다시 정비됩니다. 즉 정회원이 생산자라면 일반회원은 소비자입니다. 활동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사람은 생산자 역할을 하면 되고, 건강이 안 좋다든지 조건이 안 되면 소비자 역할로 이전을 하면 돼요.

셋째, 의결구조도 바뀌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정회원들이 대의원을 선출해서 대의원들이 의사 결정을 하고, 행정처에서 그 결정을 집행했습니다. 그런데 온라인으로 바뀌면 이런 구조가 번다합니다. 온라인을 활용해서 위아래로 의견 수렴을 활발하게 하도록 하면 훨씬 더 직접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갖출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안건이든 계속해서 아랫 단위의 의견이 직접 반영될 수 있는 구조로 바꾸려고 해요.

지금까지의 불사는 법당이나 건물을 마련하는 불사였다면, 앞으로의 불사는 모든 시스템을 온라인으로 구축하는 일에 많은 재정이 투자되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온라인 상의 정토회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거죠.

오늘 이에 대한 자세한 보고가 있을 예정이니까 잘 들으시고, 여러분도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법문을 짧게 마치고 전국 대의원회 보고가 있었습니다.

자세한 보고를 들은 후 정회원들은 모둠 별로 화상 회의 방에 입장하여 대의원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보고회 이후 각 지역별로 공청회 시간을 더 갖기로 하고 수행법회를 마쳤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1시부터는 공동체법사단과 함께 정토대전을 편찬하기 위한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불교사상서팀과 오후 내내 회의를 했습니다.

불교사상서팀을 이끌고 있는 여광 법사님이 지난 일주일 동안의 경과를 말했습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지난주 회의 때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이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더 찾아보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빨리어인 ‘아닛짜(Anicca)’는 ‘무상’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스님의 점검을 더 받고 싶습니다.”

법사님들은 지난 일주일 동안 아닛짜(Anicca)와 안아따(Anatta)에 대해 조사하고 공부한 결과에 대해 한 명씩 발표했습니다.

긴 시간 동안 발표를 경청한 후 스님이 이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삼법인(三法印)은 원래 일체개고(一切皆苦, Dukkha), 제행무상(諸行無常, Anicca), 제법무아(諸法無我, Anatta), 세 가지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여기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더하여 사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합니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는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편견이나 욕구 때문에 인식상의 오류를 일으켜서 자꾸 항상(恒常)하거나 실체가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무지(無智)입니다. 이렇게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일체개고(一切皆苦)입니다. 그런데 무지(無智)가 깨지고 무상과 무아인 줄을 자각하게 되면 어떤 것에도 집착할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집착을 놓게 되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이게 열반적정(涅槃寂靜)이에요. 이렇게 삼법인의 체계를 설명하는 것이 우리가 가장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착각

그런데 여러분이 새로 찾아온 또 다른 해설에 따르면, ‘아닛짜(Anicca)’는 무상을 뜻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없는데 마치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왜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없느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상의 개념을 가져올 수는 있겠죠. 그러나 어쨌든 새로운 해설의 핵심은 객관적 진실인 ‘무상’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아닛짜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없는데 마치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을 ‘아닛짜’라고 하고, ‘아닛짜’는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괴로운 것을 갖고 참으로 나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거죠.

경전을 읽어보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이런 질문에 부처님은 대답을 하지 않으셨어요. ‘당신은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은 ‘그래, 영원하지 않다’ 이렇게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아트만(Atman, 我)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으셨고, ‘아트만이 없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여기서 부처님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아트만은 없다’라고 대답하셨다면 이것은 아트만과 반대되는 의미인 ‘무아’를 뜻하는 게 되겠죠. 그런데 부처님은 ‘있느냐?’라는 질문에도 대답을 안 하셨듯이 ‘그러면 너는 없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 말에도 대답을 안 하셨어요. 그래서 이 문답에서는 부처님이 전통적 의미의 무아를 말씀하신 건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이 찾아온 새로운 해설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논리를 펼치고 있거든요.

부처님이 침묵을 한 이유

이것이 바로 중도(中道)입니다. 부처님은 ‘신이 있느냐? 신이 없느냐?’ 이런 식의 질문에 극단적인 대답을 안 하셨습니다.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인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있느냐, 없느냐’라고 물으면 그 말 자체가 이미 주관을 객관화시킨 겁니다.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주관의 문제입니다. 주관의 문제라고 인식할 수 있으면 이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있느냐?’라고 물으면 안 되고 ‘너는 신이 있다고 믿느냐? 신이 없다고 믿느냐?’이렇게 물어야 올바른 질문입니다. 이렇게 주관의 문제로 볼 수 있으면 ‘나는 있다고 믿는다’, ‘나는 없다고 믿는다’ 두 가지 대답이 다 공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고, 저 사람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두 사람은 믿음이 다르다’

이렇게 이해하면 아무런 갈등이 생기지 않아요. 그런데 이 주관을 객관화시켜서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질문하니까 밤새도록 토론해도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1000년 동안 논쟁을 해도 해결이 안 됩니다.

부처님이 이런 질문에 침묵하신 것은 대답하기가 곤란했던 게 아니라 ‘너희가 주관을 객관화시켰기 때문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인식했느냐’의 문제인데 그걸 ‘실제가 어떠냐’로 환치시켜서 물었기 때문에 대답할 가치가 없는 거예요.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객관적으로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너는 어떤 작용을 보고 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믿느냐? 없다고 믿느냐?’ 이렇게 봐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나’라고 하는 게 작용하고 있잖아요. ‘내’가 보기에 어떠냐는 거죠. 부처님은 이런 질문들을 모두 인식의 문제라고 보신 겁니다. ‘당신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이렇게 보신 거죠.

이렇게 인식하는 것도, 저렇게 인식하는 것도, 모두 극단적인 인식이에요. 그걸 객관화시켜서 ‘있느냐, 없느냐’로 보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각자 자신이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나는 빨간색이라고 봤고, 상대는 노란색이라고 봤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런 질문에 답하지 않고 침묵하셨어요.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존재는 인연을 따라서 연기(緣起)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연기적 존재를 두고 ‘있냐, 없냐’라고 사물을 인식해서 질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모든 것은 연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있다’라고 얘기할 수도 없고, ‘없다’라고 얘기할 수도 없습니다.

연기로 이루어진 것을 어떤 실체의 개념을 갖고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모든 철학은 이 세상을 단독자의 집합으로 보는 세계관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아론(唯我論)적 세계관이에요. 그런데 부처님은 연기적 세계관을 설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인연소생으로 이루어진다는 연기적 세계관은 사물을 전혀 다르게 봅니다. ‘있느냐? 없느냐?’ 이런 질문 자체가 이미 유아론적 세계관으로 사물을 보고 던지는 질문입니다. 마치 주관을 객관화시켜서 질문을 하는 것과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런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은 사물을 보는 관점 자체가 연기론적 세계관에 기초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꾸 ‘있다’, ‘없다’라고 얘기하는데, ‘있다’라고 보는 것이 유아론이라면, ‘없다’라고 보는 것은 단멸론(斷滅論)입니다.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대상을 인식했다는 얘기이고,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대상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얘기예요. 인식을 해도 그 대상이 텅 비어 있을 수가 있고, 인식을 못 해도 존재하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있다, 없다’라는 기준으로 사물을 봐서는 안 되고 인연소생으로 봐야 해요. 이런 이유 때문에 연기적 입장에서는 존재를 ‘있다, 없다’라는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을 굳이 말한다면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영원하다고도 할 수 없고, 영원하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을 ‘무상(無常)’이라고 합니다.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모두 뛰어넘은 개념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표현들이 모두 이런 방식의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붓다가 침묵한 것에 우리는 더 초점을 맞춰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 당시 사회가 항상론(恒常論)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붓다는 그걸 부정하려고 무상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아트만(Atman, 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걸 부정하려고 안아따(Anatta, 無我)라는 표현을 쓴 거예요. 여기서 부정했다는 표현이 기존과 반대되는 개념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신이 있다고 하니까 ‘신이 있다고 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신이 없다’ 이렇게 단정하는 뜻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런 표현들이 결과적으로는 ‘없다’라는 뜻이 되어버린 거예요. 이렇게 잘못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조금 더 유의해서 글 전체를 다시 봐야 되겠다 싶네요.

연기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윤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윤회를 하느냐, 안 하느냐’라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아(我)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아(我)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질문이 성립되는 것이지, 연기적 관점에서 볼 때는 질문 자체가 아예 성립될 수 없어요. 연기적으로 끊임없이 인연소생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해서도 안 돼요. 죽으면 뭐가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연기적 사고와 모순됩니다. 관계의 연속과 변화의 연속이 계속 이어지는 것인데, 어디 한 군데를 잘라서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윤회를 한다’라는 관점에서 그에 맞게 설명을 할 수도 있어요. 지금 쓰고 있는 이 컵이 결국 언젠가는 깨지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하고, 그 흙이 또 인연을 만나면 다시 컵이나 그릇으로 만들어지겠죠.

정신적인 것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여러분과 제가 다 연관되어 있잖아요. 여러분은 또 여러분의 가족이며 후배로 끊임없이 인연해서 관계 맺고 사라지고 하잖아요. ‘내가 다시 태어나서 무엇이 된다’ 이런 사고는 실체론이에요. 또 반대로 ‘안 태어난다’ 이런 말 역시 실체론이에요. 실체론에 뿌리를 두고 자꾸 ‘태어난다, 안 태어난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존재라는 것은 끊임없이 인연이 맺어지고, 소멸하고, 형성되면서 나아갑니다.

지금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가 중요해요. 부처님이 선한 행위를 하라고 하신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악행을 할 때보다 나한테 더 큰 자존감과 뿌듯함을 준다는 것입니다. 둘째, 미래까지 내다보면 어떤 행위에는 과보가 따른다는 겁니다. 악행을 하게 되면 나쁜 과보가 따라오고, 선행을 하게 되면 좋은 과보가 따라올 확률이 높은 거예요. 그래서 선행을 하면 내 삶이 더 풍성해 지는 겁니다. 이것은 내세가 있고 없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보상 심리를 갖고 영속성 같은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고뇌가 생기는 거예요.”

“정말 어렵네요.”

“어려웠던 내용도 점점 이해가 되어야 하는데, 여러분이 더 어려워하면 어떡해요?”

묘당 법사님은 이해가 다 되었다며 웃었습니다.

“저는 정리가 다 됐어요.” (웃음)

“그래요. 묘당 법사님은 포크레인을 많이 모니까 금방 이해가 되잖아요.” (웃음)

스님의 농담에 모두 함박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어려운 주제의 내용이었습니다.

불교사상서에 대한 토론을 끝낸 후 이어서 사회사상서에 대한 질의응답을 시작했습니다. 최근 한국 사회는 갈등과 분열이 더욱더 커지면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나가는 모습을 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불교적 관점에서 봤을 때 어떻게 해야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나갈 수 있는지 질문이 있었고, 이에 대해 스님의 답변을 듣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스님.”

법사님들은 합장으로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바깥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서 무척 추웠습니다. 스님과 법사님들은 난로 주위에 둥글게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며 몸을 녹였습니다.

“이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니까 너무 춥네요. 추위에 약한 법사님들은 많이 힘들어하세요.”

“하루 종일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있다고 착각하면 괴롭다’고 공부했는데 그런 소리를 해요?”(모두 웃음)

“현실에 적용하는 건 참 어렵네요.”

저녁에는 원고 교정과 여러 업무들을 처리한 후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불교경전팀을 담당하고 있는 법사님들과 하루 종일 정토대전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9

0/200

김민정

감사합니다♡

2020-12-14 17:49:59

인연과보 연기론

스님 말씀 감사합니다.

2020-12-13 10:34:19

이경자

#땡큐,평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사심없이 진심으로 베푸시는 스님과 곁에서 수고하시는 많은 자원봉사자님
선한영향력을 지구상 곳곳에 뿌리시는 그 씨앗 곳곳에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늘 건강하신 가운데 행복하세요♡

2020-12-08 13: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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