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1.28.(오후) 평화재단 통일의병 임명식, 정토경전반 온라인 즉문즉설
“다툼이 생기는 이유”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새벽부터 밤까지 네 번의 온라인 강연을 하고, 강연 사이사이 콩을 타작하고 장작을 정리했습니다.

오전에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 정토불교대학 온라인 즉문즉설을 하고 콩을 타작한 후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평화재단 신규 통일의병 임명장 수여식에 참석했습니다.

교통사고로 입원 중인 백왕순 통일의병 대표는 온라인으로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의병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코로나 대유행 덕분에 정말 어렵다는 온라인 통일의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셨습니다.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

이어서 새롭게 통일의병이 된 80명의 명단을 소개한 후 의병 번호 0번 법륜 스님이 임명장을 수여했습니다.

“귀하는 통일의병 과정을 이수하였기에 새로운 백 년을 여는 통일의병으로 임명합니다.”

임명장은 인터넷 랜선을 타고 전달이 되었습니다.

“제가 ‘임명장을 드립니다’라고 말하면 자기 이름을 대면서 ‘아무개 임명장 잘 받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시겠죠?”

“네.”

“임명장을 드립니다.”

“000, 임명장 잘 받았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박수)

임명장은 집으로 우편 발송해 주기로 하고 통일의병의 다짐을 함께 낭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격려의 말과 더불어 코로나 이후 우리 삶의 변화와 문명 전환, 미국 대선 이후 한반도 정세에 대해 특강을 해주었습니다.

오후 3시 30분에 임명장 수여식이 끝나자마자 스님은 콩을 타작하는 일을 마저 끝내기 위해 다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밭으로 가는데 시골 할아버지 댁에 놀러 온 초등학생 자매가 종이를 들고 스님의 팬이라며 찾아왔습니다. 스님은 종이에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법륜’이라고 적어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스님!”

작업복을 갈아입고 밭으로 가보니 행자들이 검은콩은 다 털어놓았습니다. 부스러기 더미 속에 콩알이 숨어있었습니다.

스님은 다시 갈퀴를 잡고 부스러기 더미를 넓게 폈습니다. 검은콩은 푸른 콩보다 부스러기가 훨씬 많았습니다.

“부스러기가 더 많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체처럼 구멍이 난 상자로 한번 걸러보았지만 콩만 딱 걸러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천을 깔고 바람에 부스러기를 흩날려 보냈습니다.


선풍기 바람이 약해서 탁 트인 옆 밭으로 가져가서 날려보았습니다. 바람이 불었다 안 불었다 해서 상자를 바람을 일으켜보기도 했습니다.

완벽히 콩만 거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부스러기가 많이 없어졌습니다. 남은 콩만 보니 양이 많진 않았습니다. 콩 한 알 먹기까지 참 손이 많이 갑니다.

천으로 콩을 덮어 두고 밭을 내려왔습니다.

붉은 해는 산 뒤로 자취를 감추었지만, 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장작을 정리했습니다. 마르고 썩은 장작을 먼저 쓰기 위해 쌓여있던 장작을 들어내니 기둥이 삭아 바닥에서 떨어져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톱으로 기둥의 밑을 조금 더 잘라내고 납작한 돌을 끼워 단단히 고정시켜주었습니다.


“잘 고쳤다!”

오래된 장작은 아궁이로 보내고 긴 나뭇가지를 전기톱으로 잘랐습니다.

“스님, 이제 법문 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달이 점점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법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경전반 반야심경 즉문즉설

저녁 6시부터는 반야심경 과목을 끝마친 경전반 학생들을 위해 온라인 즉문즉설을 했습니다. 이번 가을 경전반은 모든 수업이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720여 명의 경전반 학생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공부해 보니까 어때요? 어려웠죠? 즉문즉설만 듣다가 머리깨나 아프게 생겼네요. (웃음)

날씨가 좀 추워졌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남부지방인데도 오늘 아침에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서 아주 추운 겨울 날씨였어요. 오늘 저는 강의를 네 번 하면서 중간중간에 콩을 타작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꽤 쌀쌀해진 날씨에 다들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반야심경을 공부하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6명이 화상으로 연결되어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법상(法相)을 내려놓으라고 한 부분이 무엇을 뜻하는지 질문했습니다.

법상을 내려놓으면 행위의 적절함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나요?

“강의에서 여러 상(相) 중에 법상(法相)까지 내려놓으라고 하신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법상까지 내려놓는다면 평소 생각과 행위의 적절함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법(法)이란 진리를 말합니다. 법상(法相)까지 버리라는 것은 ‘이것이 진리다!’라는 고정된 생각도 버리라는 뜻이에요. 이런 가르침이 불교 말고 다른 가르침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불교에만 있을 것 같습니다. 법상도 버리라는 말은 부처님의 이런 말씀과 연결됩니다.

‘내가 타고 온 뗏목도 강을 다 건넜거든 버려라. 고맙다고 해서 뗏목을 지고 가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면 여기서 상(相)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한자로는 ‘모양 상(相)’ 자입니다. ‘상’이란 ‘객관화시킨 것’을 말해요. ‘상을 지었다’라는 말은 주관을 객관화한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꽃을 보고 ‘꽃이 아름답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꽃이 객관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사실대로 내가 알아서 아름답다고 한 걸까요? 아니면 꽃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냥 그것인데 내가 아름답다고 인식을 한 걸까요? 즉 아름답다는 게 객관적 사실일까요? 아니면 아름답다는 것은 나의 주관일까요? 질문자가 보기에는 어때요?”

“아름답다고 보는 건 나의 주관인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 주관을 객관화시켜 버린 것이 상(相)입니다.

다툼이 생기는 이유

여기에 산이 하나 있어요. 산의 서쪽에 사는 사람은 이 산을 동산(東山)이라 부르고, 산의 동쪽에 사는 사람은 서산(西山)이라고 불러요. 그럴 때 각자 부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기에 동쪽이거나 서쪽인 것이지, 그 산이 서산이거나 동산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산은 동산이야’, ‘아니야, 그 산은 서산이야’라고 주장하면 이를 두고 ‘아상(我相)을 지었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동산이라는 상을 짓고, 서산이라는 상을 지은 거예요.

어떤 사람이 ‘저 산은 내가 보기에 동산이야’ 혹은 ‘내가 보기에 서산이야’라고 한다면 우리가 들을 때 ‘아, 저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산은 객관적으로 동산이고, 나는 그 진실을 알았다. 그런데 너는 그걸 서산이라고 하니 너는 틀렸다’

이것이 바로 상을 지은 거예요. 상을 지으면 시비가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닙니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라는 진실은 ‘동산’ 혹은 ‘서산’이라는 상을 지은 오류를 시정해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다. 그러면 이 산의 진짜 실체는 비동비서산(非東非西山)이다.’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라는 말은 동산과 서산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깨뜨릴 수가 있었는데, 다시 이것을 갖고 ‘비동비서산이 진짜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이 산의 이름을 ‘비동비서산(非東非西山)’이라고 규정합니다. 진리가 비동비서(非東非西)가 된 겁니다. 그런데 누가 ‘그 산은 동산이야’라고 하면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너는 틀렸어. 너는 아상에 집착한 거야.’

이렇게 시비가 일어납니다. 누가 서산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시비가 일어나요.

‘이건 서산이야.’
‘너도 틀렸어.’
‘그러면 뭔데?’
‘이건 비동비서산이야!’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내가 옳아!’라는 말과 같아요. 이 산은 동산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동산이 아니고, 서산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서산이 아니에요. 그래서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라는 언어가 생긴 것이지,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산’이라고 이름할 수는 없어요. 비동비서산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다시 시비가 생기게 됩니다.

누구는 동산이라고 하고 누구는 서산이라고 하면서 서로 ‘너는 틀렸어. 내가 옳아!’라고 하는 것이나, 동산도 서산도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너희 둘 다 틀렸어. 진실은 비동비서산이야!’라고 하는 것이나, 시비는 똑같이 일어난 겁니다.

법상도 짓지 말라는 뜻은 비동비서산이라고도 고정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누가 동산이라고 하면 ‘틀렸다!’ 이렇게 접근하지 않고 ‘아, 저 사람이 이 산을 동산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저 동네에 사는구나’ 이렇게 아는 거예요. 누가 서산이라고 하면 ‘아, 이 사람은 이 동네에 사는구나’ 이렇게 알아버리는 거예요. 옳으니 그르니, 틀렸니 맞니, 이런 시비 분별이 안 일어나고 상대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해 버립니다.

‘어, 저 사람은 저 동네에서 왔구나.’
‘어, 이 사람은 이 동네에서 왔구나.’

이처럼 진리를 바로 알고 있으면 다툼이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진리라는 상을 지으면 ‘너는 진리가 아니야!’ 이런 시비가 일어나게 돼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많은 오류를 시정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몇 백 년에 걸쳐 그 가르침이 전해지면서 후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절대화시켰어요. 언어를 절대화시킨 거죠. 이걸 법상(法相)이라고 해요.

기존의 불교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절대화시켜서 오류를 범하고 있으니까 그것을 비판하고 새롭게 일어난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불교인들이 ‘진리’라는 이름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점을 지적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라는 말 들어봤죠? 아(我)라고 하는 것도 없지만 법(法)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겁니다. ‘아상을 짓지 마라’, ‘법상을 짓지 마라’ 이것과 같은 말이에요.

우리는 일상생활을 할 때 부처님이 뗏목의 비유를 들어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태워다 준 뗏목도 강을 다 건넜으면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어요. 이 말은 뗏목만 버리라고 강조한 게 아니라 다른 것도 다 버리라는 얘기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집착하면 안 되는데 하물며 세상의 다른 온갖 얘기는 말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되셨어요?”

“네, 이해가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색(色)을 자세히 보면 텅 비어 있다’라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 분별심이 생기고 화나고 괴로울 때 ‘그 일은 그냥 그것이고 내 생각은 망상이다' 하면서 떨쳐내려 하는데도 빠져나오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집중하여 내 고집 내 망상을 떨쳐내는 연습을 해보려 합니다. 내 고집 내 분별심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무아의 실천인지 궁금합니다.
  • 금강경에서 말하는 공사상과 반야심경의 무아 사상이 서로 같은 것 같습니다. 법문을 들을 때는 이해가 조금 된 듯하다가도 돌아서면 까마득합니다.
  • 스님의 가르침으로 '나'라고 하는 것은 오온의 결합으로 생긴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윤회를 믿지 않으며 업식은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자로 이어진 특성일 뿐 전생은 없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보다 더 열심히 불법을 공부한 선배 도반이 철학관에서 집안 대소사를 묻고 의지하는 것을 보면서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까요?
  • ‘제법이 공하다’는 것과 ‘똑같은 사건도 관점에 따라 다르므로 내 입장에서 좋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의 상관관계가 헷갈립니다.

2시간 동안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한 후 마지막으로 스님은 학생들이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는 공부를 할 것을 강조하며 법문을 마쳤습니다.

지식만 아는 것으로는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좀 어려운 공부인데, 여러분이 그래도 하겠다고 마음을 냈으니 대단한 일이에요. 그런데 경전의 내용을 지식으로 많이 아는 게 중요하지 않고 하나라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부처님이 훌륭하다거나 법륜 스님이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만 번 해봐야 나한테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어느 야구선수가 잘한다, 어느 축구선수가 잘한다고 이야기한들 내 몸이 건강해지는 게 아니잖아요. 내 몸이 건강해지려면 내가 직접 밖에 나가서 운동장을 한 바퀴 돌든지 공을 한 번 던지든지 해야죠.

그런 것처럼, 자기가 직접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선은 수업을 듣기도 해야 하지만 직접 해봐야 해요. 마음 나누기도 해보고, 실천 프로그램도 같이 해봐야 합니다. 그냥 법문을 듣기만 하면 안 돼요. 물론 아예 안 듣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러면 알기만 많이 알고 실제 삶에는 아무 변화가 없어요. 이걸 알음알이라고 해요.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알음알이만 늘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수업에 참가해서 다른 사람은 법문을 어떻게 들었는지 서로 나누고, 실천도 해보고, 그 실천한 경험을 함께 나누면서 공부를 해야 삶에 변화가 생깁니다.”

방송을 마치고 나니 어두운 밤이 되어 있었습니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 매서운 찬바람이 생생 불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겨울 장작을 마련하기 위해 나무를 정리하는 일을 한 후 오후에는 행복시민모임 진행자들과 온라인 간담회를 하고, 저녁에는 온라인 일요명상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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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스님의 즉문즉설을유튜버로만들으면 스님법문에 늘감동받는 열열한펜입니다
스님말씀 너무 감동입니다
저역시 가까운 가족과 그아상때문에 늘다투며 살고 있습니다
스님법문 매일듣고 공부해야 겠습니다

2021-01-15 05:49:17

금강심

정말 너무나도 훌륭한 법문입니다~
그 동안 전 상을 짓고 아상에만 빠져 살았군요ㅜㅜ
그래서 다툼이 있었던거였어요ㅜㅜ
시시비비를 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명약입니다.이렇게 훌륭하신 말씀 책으로 출간되었음 좋겠어요.

2020-12-06 00:27:11

이현경

오늘도 상을 버리지 못해 다툼이 생겨버렸습니다. 늘 배워야하는 어리석음에 또 참회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2020-12-05 13:3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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