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9.1 농사일
“과거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는 방법”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아침에 농사일을 한 후 오후에는 최한실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울력을 나갔습니다. 하늘에 먹구름은 가득했지만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산 아랫 밭으로 가서 울타리 둘레에 가지를 쳐두었던 나뭇가지를 정리했습니다.

“어제 법문이 없다고 하루 종일 울력을 했더니 몸이 찌뿌둥하네요.”

찌뿌둥한 몸을 일을 하면서 풀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울력을 마치고 나니 작업복이 땀으로 젖었습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12시부터 푸른누리 공동체 최한실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이 오늘 대화 주제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주제는 ‘우리말 바로 쓰기’와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최 선생님은 우리말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말들이 전부 우리말인 것처럼 알고 사용하지만, 사실은 우리말이 아닌 말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 겨레는 다른 말들이 섞이기 이전에 아주 뛰어난 말꽃을 피웠는데, 그 뒤에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중국 한자를 들여와서 글말에 쓰다 보니 차츰차츰 우리말 속에 자리를 잡게 된 거예요. ‘강(江)’이라는 한자가 들어와서 ‘가람’이라는 우리말을 밀어냈고, ‘산(山)’이라는 한자가 들어와서 ‘뫼’라는 우리말을 밀어냈습니다. 지금은 전부 한강이라고 말하지 한가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앞산 뒷산이라고 말하지 앞뫼 뒷뫼라고 말하지 않잖아요.”

그러면서 특히 36년 간 왜 종살이(일제 식민지)를 하게 되면서 우리말에 담긴 얼이 얼마나 훼손되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하나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말이 왜 말입니다. 우리의 말글살이는 왜 종살이를 할 때(일제 식민지배를 받을 때) 온통 한자말을 배워 익혀서 쓰도록 틀거리가 지어졌고, 우리는 거기에 갇혀서 아무도 깊이 살펴보지 않고 여태까지 와버린 거예요. 헌법 1조 1항과 2항도 왜 말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문장을 우리말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나라의 임자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고, 모든 힘은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이렇게 우리말로 바꾸면 그 뜻이 훨씬 더 살아나잖아요. 저는 여기에 한 줄을 더 추가하면 좋겠어요.

‘배달겨레는 배달말을 살려 쓴다. 안 살려 쓰면 벌금을 매긴다.’

우리말을 살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모든 시험 문제를 우리말로 내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곳에서 우리말을 배우는 일이 일어날 거예요.” (웃음)

가령 본디 우리말에는 벼에 얽힌 낱말이 열 개가 넘는다고 소개했습니다. 나락, 씻나락, 볍씨, 모, 우케, 쌀, 밥, 죽, 메, 뉘 등 넉넉한 우리말을 재미있게 이야기하자 모두가 신기한 듯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에 집중했습니다.

우리가 평소 잘 몰랐던 우리말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갖고 다음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빨리어 경전에 입각해서 부처님의 말씀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니와노 평화상(THE NIWANO PEACE PRIZE) 수상 연설문 원고를 교정했습니다. 올해 스님은 ‘니와노 평화재단’으로부터 제37회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코로나19가 퍼지면서 시상식이 미뤄졌습니다. 10월 말에 시상식을 하기로 해서 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수상 연설문 원고를 일부 교정했습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금요 정기법회에서 나온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여러분께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

“매일 아침 정진할 때 떠오르는 기억, 감정, 생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궁금합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백중 기도에 참가하면서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참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세부적인 감정과 기억을 소환해내며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정진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또 다른 망상을 지어내면서 틀린 방법으로 정진을 하고 있는 것인지 염려가 되어 여쭤봅니다.”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길은 악몽을 꾸다가 깨어나면 ‘꿈이네’ 하고 눈을 뜨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즉시 자유로워져 버리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거예요. 테이블 위에 계란을 세우라고 하니까 다들 계란을 세우기 어려워했는데, 콜럼버스가 계란을 팍 깨서 세워버렸다고 하잖아요.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무도 풀기 어렵게 매어진 매듭을 풀라고 하니까 알렉산더가 이 끈을 칼로 팍 잘라버렸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누가 그걸 못해!’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처음으로 그렇게 시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의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이라는 게 믿을 게 못 되는 이유

우리들의 무의식 세계에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것들이 저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 즉 간접 경험도 보관되어 있어요. 엄마가 어릴 때 가난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식인 나에게도 전이가 되어서 내가 마치 가난한 생활을 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엄마가 슬픔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이 마치 내가 경험한 슬픔처럼 내 의식 속에 형성되어버립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무의식 세계는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하며 바깥세상과 부딪힐 때 감정이 일어나는 바탕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다른 사람은 굉장히 격렬하게 반응을 하고, 어떤 사람은 웃는 일에 다른 사람은 슬퍼하고, 어떤 사람은 슬퍼하는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은 무덤덤하게 반응하기도 합니다. 이런 차이가 일어나는 이유는 어떤 사람이 특별히 수행을 하고 용기가 있고 잘 나서 그런 게 아니라 감정이 일어나는 바탕인 업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잘 알면 모두 지나간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 마음의 바탕에는 내가 만든 것도 있고,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만들어진 것도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바탕으로부터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원리를 알게 되면 감정이라는 게 그리 믿을 게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것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그것이 자동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무척 힘들어요. 좋거나 싫다는 감정이 별로 의미 없다는 것을 탁 알아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정은 과거의 경험에 의해서 그냥 일어나는 반응일 뿐이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게 못 됩니다. 이렇게 알아버리면 좋은 감정이 일어나도 들뜨지 않고, 나쁜 감정이 일어나도 기분 나빠하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밤에 강도한테 쫓기는 꿈을 꾸었다면, 눈을 떠서 ‘꿈이네!’ 하고 그것이 헛것임을 알아버리면 괴로움이 없어져버리는 거예요. 이것이 ‘단도직입(單刀直入)’, 바로 본질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는 ‘선(禪)’이라고 하죠. 강도에 쫓기는 꿈을 꿀 때 딱 눈을 떠서 ‘꿈인데 깜박 속을 뻔했네’ 하고 눈을 뜨는 즉시 탁 자유로워져 버리는 겁니다.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세심하게 풀어내는 방법

두 번째 길은 ‘왜 이런 꿈을 꿀까’ 하고 연구하면서 그것을 분석하는 겁니다. 분석을 한 결과 자신이 어릴 때 이런저런 경험을 해서 생긴 트라우마로 인해 밤마다 이런 꿈을 꾼다는 것을 알아내서 그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겁니다. 요즘 정신과 치료가 대부분 이렇게 접근을 합니다.

하지만 수행이라는 것은 이렇게 분석하고 위로하지 않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그것이 좋든 나쁘든 간에 의미 부여를 안 해버리는 겁니다. 좋은 꿈을 꾸었든 나쁜 꿈을 꾸었든 눈을 뜨면 모두 똑같은 꿈입니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좋은 꿈이 있고 나쁜 꿈이 있는 겁니다.

명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생각이 떠오를지라도 그건 단지 꿈일 뿐입니다. 의미 부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부처님이 보인다 해도 의미 부여를 할 필요가 없어요. 오직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이것이 현실입니다. 일명 이것을 ‘단도직입(單刀直入)’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명상하는 중에 과거에 대한 온갖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과거의 상처가 생긴 원인을 찾아내어 정신분석학적으로 치유해나가는 거예요.

명상은 이 두 가지 방법 모두를 포함하고 있고, 어느 쪽으로 가든 본인의 선택이지만 적어도 수행이라고 하면 단도직입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좋은 감정이 일어나거나 나쁜 감정이 일어날 때 ‘왜 나는 이런 사람을 보면 좋은 감정이 일어날까?’, ‘왜 나는 저런 사람을 보면 나쁜 감정이 일어날까?’ 이렇게 분석해서 처리하는 방법이 정신분석학적인 방법입니다. 이것은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아주 부드러운 손으로 세심하게 풀어내는 방법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칼로 끊어버리는 방법

그러나 수행은 ‘감정 그 자체가 까르마에 의해서 일어나는 꿈과 같은 반응이므로 의미 부여를 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직시하는 겁니다. 이것은 분석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꿰뚫어 단도직입으로 보는 것입니다. 옛날 생각이 떠올라서 눈물이 나면 ‘내가 지나가버린 영상을 보고 울고 있구나. 지금에 깨어있지 못하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고 지금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자꾸 하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영상이 늘 돌아가게 되지만, 어느 순간 이런 영상들이 하나둘 사라집니다. 이것은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칼로 끊어버리는 방법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에 따른다면, 질문자는 내 안에 있는 슬픔을 직시하면서 왜 이런 슬픔이 반복되는지를 깊이 연구해서 그 상처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아! 내가 그때는 어려서 상처를 입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상대의 의도와는 다르게 내가 오해를 해서 생긴 문제였구나’

이렇게 깊이 탐구하고 분석해서 상처를 치유해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감정에 휩싸여 옛날 생각을 하며 울고 하소연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은 수행과는 거리가 먼 감성팔이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저녁마다 술을 마시고 아침마다 후회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이 나에게 손해가 되는 바보 같은 짓임을 알았으면 다시는 그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살아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회한다고 하면서 똑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는 범부중생의 길을 가죠.

질문자가 백중 기도를 하면서 부모님 생각에 눈물이 나는 이유는 상처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 원인을 분석해서 ‘내가 어릴 때는 어리석어서 상처를 입었구나’ 하고 내 안에서 원인을 찾고 치유해나가면 거기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첫 번째로 이야기한 방법으로 해보는 거예요. 눈물이 날 때 사로잡혔음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래서 호흡을 알아차리거나 화두를 챙기거나 정신을 차려서 바로 지금 여기로 돌아오면 원인을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석하려고 하면 머리만 아픕니다. 명상을 하면서 아무리 감정이 일어나도 호흡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계속하면 점점 좋아질 거예요.”

전체댓글 82

0/200

이름이요

정말 감사합니다.

2021-12-30 18:53:15

도루구찌

스님께선 가능합니다
범부중생은 아직 깨달음이
부족합니다

2021-11-16 09:53:20

김현숙여래심

예쁜 우리말을 사랑하고 널리 상용되어지도록 교육과 언론 방송이 중심 잡아야는데 그렇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2020-09-20 21: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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