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12 인도성지순례 10일째 (카필라바스투, 쿠단, 랑그람, 로히니)
“유독 부처님의 아버지만 깨닫지 못했어요. 그 이유는...”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 지 10일째 되는 날입니다.오늘은 히말라야 설산인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리를 볼 수 있는 탄센의 언덕까지 오르는 산행으로 순례를 시작합니다.

새벽 3시, 버스가 출발했습니다. 스님의 인사로 하루를 가볍게 시작합니다.

“피곤해요? ‘운전하는 기사도 있는데 차타고 조는 우리가 뭐가 문제냐’ 이렇게 생각하면 아침부터 기분 좋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예불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버스에 불이 꺼지고 순례자들은 앉은 채로 잠들었습니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도 깊이 자던 순례자들은 버스가 멈추자 도착한 줄 알고 깨어났습니다.

탄센까지 10Km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산사태가 나서 길이 막혔습니다. 복구를 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복구를 하더라도 운전기사들이 도로가 위험하다고 해서 차를 돌리기로 했습니다.

“부처님 성지면 죽으나 사나 가겠는데 일출 보는데 목숨 걸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돌아가겠습니다. 대신 달이 아주 밝아요. 내려가면서 달구경이라도 하세요.”

아쉽지만 탄센까지 10Km를 남겨두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인도를 다녀보면 늘 다리가 끊어지거나 산사태가 나거나 이런 일이 늘 생깁니다. 그래도 우리는 새벽에 일어나서 하는 데까지 다 했어요. 이런 걸 미리 알고 안 가는 게 나아요, 가서 막히면 돌아오는 게 나아요?”

“돌아오는 거요.”

“그래요. 부처님도 춘다의 공양을 미리 알고 안 드시는 게 아니라 드시고 설사를 하셨잖아요.”(모두 웃음)

탄센을 가지 못해서 아쉬웠던 마음이 금세 사라집니다. 예상보다 일찍 로히니 강에 도착했습니다.

물이 소중합니까, 피가 소중합니까?

로히니 강은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와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고향인 꼴리족의 데바다하 사이를 흐르는 강입니다. 어느 해 가뭄이 심해 석가족과 꼴리족이 서로 농사에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해 싸움이 시작되어 급기야는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두고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아침 7시 30분, 로히니 강변에 자리를 잡고 스님은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카필라 성과 꼴리성, 두 나라가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두고 분쟁이 일어났는데요. 경전에 보면 양쪽에서 서로 물을 대려고 농민들이 돌멩이를 집어던지고 싸웠다고 해요. 도대체 강이 얼마만 하길래 돌멩이를 갖고 싸웠을까 궁금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과연 양쪽에서 충분히 돌멩이를 던져서 싸울만하죠?”

“네!” (모두 웃음)

정말 강폭이 좁아 돌멩이를 던져 싸울 만 했습니다.

“싸움이 벌어져서 사람까지 다치게 되니까 이쪽 사람들도 자기네 관리들에게, 저쪽 사람도 자기네 관리들에게 ‘저놈들이 우리 물을 빼앗아간다. 사람을 폭행했다’ 이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결국은 양쪽 모두 감정이 상해서 서로 ‘용서할 수가 없다.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라고 하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소식을 듣고 ‘이대로 내버려두면 틀림없이 전쟁을 하겠구나. 많은 사람이 죽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셔서 이곳을 방문하셨어요.

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허공에 떠서 양쪽에 말씀을 하셨다고 묘사돼 있습니다. 이것은 중립적이었다는 뜻이에요. 이쪽에 서서 말한 것도 이나고, 저쪽에 서서 말 한 것도 아니고, 강 가운데에서 양쪽에다가 말했다는 얘기예요.

서로 싸우던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오시니까 싸움을 잠시 멈추고 예를 갖추었어요. 부처님께서는 양쪽 대표를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어보셨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은 늘 문답을 통해서 화제를 바꾸고, 그것을 통해 질문하는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 특징이 이 대화에도 잘 나타납니다.

‘사람의 피가 귀합니까, 물이 귀합니까?’
‘어찌 사람의 피를 하찮은 물과 비교하겠습니까? 사람의 피가 훨씬 귀하죠.’
‘그렇다면 여러분, 왜 하찮은 물을 구하고자 귀한 피를 물처럼 흘리려고 합니까?’

전쟁이 나면 곧 사람의 피가 강물처럼 흐른다고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됩니다. 감정에 치우쳐서 서로 싸우던 사람들이 이 설법을 듣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부처님, 저희들이 잘못 생각했습니다’ 하고 반성한 다음, 서로 협력해서 수로를 정비하고 그해 가뭄을 잘 넘겼다고 합니다. 이것이 로히니(Rohini) 강물의 설법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남북한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법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전쟁을 겪었고, 그 전쟁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한 번 더 전쟁을 치러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평화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가 바로 이 로히니 강물에 얽힌 싸움입니다. 부처님은 평화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부처님께 청했던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스스로 전쟁이 임박한 현장에 오셔서 평화를 가져온 사례입니다.”

다함께 경전을 읽었습니다. 경전에는 더 구체적으로 당시의 정황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자
증오 속에서도 증오없이
미워해야 할 사람 속에서도 미움을 버리고
우리 자유롭게 살아가자‘

독송을 마치고 스님은 우리가 왜 부처님의 발자취를 찾아가 보는지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2,600년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지금 우리가 다시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부처님은 그분의 신통력 때문에 위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바른 견해 때문에 위대하신 거예요. 우리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힘들게 다니는 이유는 부처님의 인격을 들여다보기 위함입니다. 당시의 환경과 사회적 분위기와 사건들 속에서 부처님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하나하나 확인하려고 새벽부터 이렇게 다니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할수록 한 인간으로 살았던 부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꼴리족이 세운 진신사리탑, 랑그람 Rangram

다음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랑그람을 참배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진신사리는 8등분이 되어 각 나라에 모셔졌습니다. 그 중 부처님의 외가인 꼴리족이 세운 이 탑은 사리가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탑니다.

노란 가사를 걸친 순례자들이 줄지어 나타나자 동네 아이들이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긴 듯 달려와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순례단은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랑그람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작년에는 공사를 하느라 어수선했는데 올해는 깔끔했습니다.

동산 같은 탑을 한 바퀴 돈 후 부처님을 친견하듯 정성스레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랑그람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아쇼카 왕은 8개의 사리탑 중 7개의 사리탑에서 사리를 꺼내서 부처님의 발자취마다 탑을 세웠어요. 그런데 이 랑그람 사리탑에서는 사리를 꺼내지 못했다고 해요.

전해 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용이 나타나서 ‘이 세상에 나보다 사리를 더 잘 보호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가져가도 좋다. 그렇지 않다면 손대지 마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마 여기 뱀이 많아서 손대기가 어렵지 않았나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가 우기가 되면 이 탑만 남고 물에 잠깁니다. 우기에는 탑에 가려면 마치 섬을 건너가듯이 건너야합니다. 또 이 동네의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이걸 도굴하려고 누가 손을 댔다가는 다 병들어 죽거나 사고가 나서 죽는다고 해요. 그래서 이 동네에서는 이 탑에는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얘기가 전해 옵니다.

이 탑은 원래 벽돌로 쌓은 탑인데, 벽돌이 자연히 허물어져서 이런 모양이 됐어요. 벽돌이 흙이 되고, 그 흙에 나무가 자라서 이렇게 된 거예요. 흙을 걷어내면 옛날 벽돌이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몇 개의 나라를 거쳐 온 사리를 모신 5대 적멸보궁을 가는 것만 해도 엄청난 복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랑그람 사리탑 참배는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큰 복이에요. 성지순례 오는 사람은 대부분 룸비니는 다녀갑니다. 100팀이 오면 그 중에 10팀은 카필라바스투에 갑니다. 100팀 중에 1팀도 여기에 오기는 어려워요. 짧은 기간에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에요. 랑그람에 오신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세요.”(모두 웃음)

스님의 설명을 듣고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을 마치고 앉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도시락을 먹고 출발하려다가 운전기사들이 밥을 먹고 있어서 공부를 더 하기로 했습니다.

“기사들이 우리가 탄센에 오르는 사이에 밥을 해 먹어야하는데 일정이 바뀌면서 아침을 못 먹었어요. 지금 요리해서 먹고 있대요. 밥 먹고 있는데 가자고 하면 안 되잖아요. 우리가 차 주변에 얼쩡거리면 밥 먹는데 불안하니까 공부하겠습니다. 어차피 공부해야 해요.”

스님은 예불문의 의미를 하나하나 설명해주었습니다. 성지마다 예불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불문의 의미를 모르고 예불을 하던 순례자들은 자세한 의미를 알게 되어 기뻐했습니다.

나오는 길에 이 지역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었습니다. 줄 서는 연습부터 한 후 사탕을 차례차례 나누어주었습니다.

출가하기 전 29년, 카필라바스투 Kapilvastu

랑그람 사리탑을 나와 먼지가 푹푹 날리고 덜컹거리는 길을 두 시간 정도 달려 다음 순례지인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성에 도착하였습니다.

스님을 따라 카필라성의 서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벽돌 무더기만 남아있지만, 그 옛날 화려했을 왕궁과 석가족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동궁터를 지나 싯다르타가 늙은이를 만난 동문이 바라보이는 너른 터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스님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카필라성입니다. 고타마(Gautama)는 카필라성의 동쪽 문으로 나가서 늙은이를 만납니다. 우리가 읽는 책자에는 늙은이만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만, 경전에는 병든 이와 죽은 이에 대한 묘사도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늙은이에 대한 묘사만 봐도 늙은 사람이 기침하고, 어지러워하고, 팔다리가 쑤셔서 힘들어하는 상황을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늙은이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늙었을 때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이에 대한 설명입니다. 늙거나 병들면 보호받아야 하는데 보호받지 못하고 팽개쳐진 사람들, 죽은 뒤 시신이 거두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들에 대한 묘사예요. 부처님은 시신을 화장하는 모습을 보고 무상을 느낀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시신이 함부로 버려져 있는 모습을 보고 고뇌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 출가를 한 목적

그리고 남쪽 문으로 나가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병자를 보았고, 서쪽 문으로 나가서 죽어서 버려진 사람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늙고 병들고 죽어서 버려진 세 가지 모습은 모두 당시 노예들의 모습입니다.

노예가 젊을 때는 주인이 노예를 먹이는 데 드는 비용보다 노예가 일해서 창출하는 가치가 더 크죠. 그러나 노예가 늙으면 창출해내는 돈보다 들어가는 돈이 많으니까 버리게 됩니다. 이건 우리가 기계를 사서 쓰는 자세와 같습니다. 기계를 사서 쓰다가 고장이 잦아져서 수리비용이 이용가치보다 더 들게 되면 폐기하잖아요. 마찬가지로 노예도 늙거나 병들면 폐기를 했던 겁니다. 시신도 태우는 데 돈이 들기 때문에 죽은 노예는 그 시신을 숲 속에 쓰레기처럼 버린 거예요.

이처럼 고타마(Gautama)가 고민한 것은 단순히 철학적으로 늙고 병드는 인생에 대한 고뇌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사회적 고통과 결부된 문제였습니다. 경전에도 이런 부분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타마는 그저 사회적 문제만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자신도 그런 일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고타마가 출가하지 않고 세속에 계속 살았다면 다음 두 가지 중 한 가지 길을 갔을 거예요. 본인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었거나, 많은 석가족처럼 본인도 노예로 팔려가거나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붓다는 다른 길을 감으로 해서, 짧게 보면 왕위를 버렸다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석가족(Sakya, 釋迦族) 다수의 운명을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석가족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출가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대다수가 코살라국의 공격으로 인해 학살당했습니다.

사회적 고통을 보고 ‘나도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은 단순히 남을 불쌍하게 여긴 것을 넘어서서 사회적 문제를 자기 문제화했다는 뜻입니다. 그 문제를 내가 꼭 풀어야 할 문제로 삼았던 거예요. 다시 말해, 남의 문제와 나의 문제가 일치한 것입니다. 남의 문제인데 내 문제가 아닌 것도 아니고, 내 문제인데 남의 문제가 아닌 것도 아니라, 남의 문제이자 곧 내 문제였던 거예요.

그렇게 고뇌하신 끝에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곧 젊음과 건강함과 생존의 이면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것이 늘 함께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할 때도 ‘네가 태자로서 편안하게 먹고 살다가 독충과 야수가 우글거리는 들녘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런 생활을 하기 어려운 것은 맞다. 그러나 내가 왕궁에서 계속 살아간다면, 지금 당장 가시덩굴의 고통은 피할 수 있지만 노병사의 고통은 피할 수가 없다. 내가 출가해서 도를 이루면 비록 가시덩굴의 고통은 겪겠지만 삶의 근원적인 고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 부처님이 출가한 목적은 자기 삶의 문제인 동시에 일체 중생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출가한 후에도, 또 수행 중에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중생의 고통을 생각하고 극복하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지만, 중생의 고통을 생각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 내가 그토록 출가 수행자의 길을 원했는데 지금 먹는 것이며 입는 것이 조금 어렵다고 회의감을 가져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자신을 경책하는 장면이 경전에 많이 나옵니다. 부처님은 어떤 좌절이나 절망 때문에 출가를 하신 게 아니에요. 다분히 왕이 될 수 있지만 왕위를 버리고, 능히 돈을 벌 수 있지만 돈을 넘어서고, 능히 지위를 얻을 수 있지만 지위를 넘어서고, 능히 인기를 얻을 수 있지만 인기의 무상함을 알고, 이 모두를 넘어서서 새로운 길을 추구하신 것입니다.

21세기에 경험하는 사문유관, 인도 성지순례

이 세상에서 여성 해방을 가장 먼저 하신 분이 부처님인데, 노예 해방을 가장 먼저 하신 분도 부처님입니다. 태자였을 때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모두 노예인 동네에 가셔서 그들을 모두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경전을 보면 동물을 가장 먼저 해방시킨 분도 부처님입니다. 태자 시절에 동물들의 고삐를 다 잘라서 풀어주라고 하는 내용이 경전에 나오는 걸 보면 특이한 분이셨던 것 같긴 해요. (모두 웃음)

예전에 성지순례를 늘 콜카타(Kolkata)에서 출발했던 이유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왕궁에서 지내다가 왕궁 밖으로 나가서 중생의 비참한 모습을 보셨잖아요. 우리가 미국, 유럽, 한국에서 살다가 인도에 오면 여기 모습이 바로 사문유관(四門遊觀)입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궁성 안의 모습이라면, 이곳 인도 사람들의 모습은 당시 궁 밖의 노예들의 삶에 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지순례를 하면서 부처님이 사문유관에서 받으셨던 정신적 충격을 똑같이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대비가 가장 극명한 곳이 제가 경험한 곳 중에는 콜카타였어요. 콜카타에는 내부 장식이며 집기가 모두 대리석과 금으로 되어 있는 호텔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호텔 문을 열고 나오면 구걸하는 사람들이 즐비해요. 호텔 문을 열고 나올 때의 그 충격이 부처님이 궁전 밖을 나서서 겪은 사문유관의 충격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수 있어요.

이런 사문유관을 직접 경험해 본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내가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무시하고 그냥 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기득권을 버리고 그 고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결국은 자기 살 길을 도모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들을 연민하고 함께 해결하려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정해 나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인도 성지순례에 와서 인생의 방향을 바꾼 사람들도 더러 생깁니다. 인도에 와서 굉장한 불편을 겪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도에 와서 충격을 받고 삶의 진실을 발견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부분이 습관대로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살게 되지만, 때로는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 중에 성인이 출현하기도 합니다. 인도를 아주 혐오하고 더럽게만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고, 반대로 인도를 너무 미화하는 사람들도 있는 겁니다. 여러 가지 모순적인 모습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러한 모순점들 때문에 인도여행은 사람들이 삶의 진실을 자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인도 성지순례를 하면서 여러분 역시 자기 삶에 있어서 어떤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어요. 어떤 분은 한국에 있을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아이만 셋 남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은 남편을 잘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데...’ 하면서 굉장한 열등의식에 휩싸여 살고 있었어요. 그러다 인도 성지순례를 한 후로는 자기가 너무나 큰 부자라는 것을 깨닫고, 돌아가서 아이들을 잘 키우고 떳떳하게 세상을 살아가게 된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곳에 와서 힘든 부분만 생각하지 말고 삶에 어떤 변화를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 보시면 좋겠습니다.”

태자 궁터에 앉아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어떻게 함께 행복할 수 있을까’ 고뇌하던 한 청년의 모습이 다가와 울컥했습니다. 또한 성지마다 마주쳤던 구걸하는 노인, 장애인,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겹쳤습니다.

스님의 설명 뒤에 경전 독송을 했습니다. 어제 룸비니에서 미리 독송했지만, 오늘 탄센을 가지 않는 바람에 여유가 생겨 다시 한 번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경전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유성출가를 하셨다는 동문으로 가 보았습니다. 동문 밖으로 탑 터가 보였는데 스님은 싯다르타가 늙은이를 만난 것을 기념한 탑일 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동문 앞에서 마을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사탕을 받으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줄을 세우고 스님은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탕 먹고 다음 생에 출가해야 하는데 할 수 있어요?”

“네!”

아이들은 이제 무슨 말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사탕을 받기 위해 큰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사탕을 나눠주고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제가 다음 생에는 인도에 태어날 계획을 세웠어요. 그 때 여러분처럼 교화하기 힘들면 안되잖아요. 내 얼굴만 보면 빚져서 제자가 되도록 사탕 한 움큼을 준거예요. 이렇게 만 명의 제자를 만들었어요. 씨앗을 뿌렸는데 얼마나 거둘지는 모르죠.”(모두 웃음)

북문으로 향하는 논두렁 길을 걸어 버스까지 걸어갔습니다.

카필라성 주위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헐벗어 있었고, 구걸의 눈빛을 보내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약삭빠른 아이들은 길바닥에 앉아 부처님 자세를 하고 구걸을 했습니다.

사문유관은 지금도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카필라성에서 싯다르타의 고뇌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부처님을 영원히 아들로 대했던 정반왕. 쿠단 Kudan

마지막 순례지는 쿠단입니다. 쿠단은 출가 후 12년, 성도 후 6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처님을 정반왕이 마중 나온 곳으로 이를 기념한 탑이 있는 성지입니다. 매번 해가 지고 도착해서 탑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는데 오늘은 밝을 때 도착했습니다. 탄센에 못 간 덕분입니다.

쿠단에 세워진 탑에는 옛날 당시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순례자들은 스님을 따라 한 줄로 탑을 살펴 본 후 자리에 앉았습니다.

스님은 옛이야기를 풀어내듯 부처님의 아버지, 정반왕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사위성에 부처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들은 정반왕은 부처님께 사신을 보내 왕궁으로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신으로 간 사람들 모두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후 깨달음을 얻고 출가해 버렸다고 합니다.

유독 정반왕만 깨닫음을 얻지 못한 이유

“정반왕은 대신들을 보내서 부처님이 궁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설득하게 합니다. 그런데 대신들이 부처님을 만나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고는 출가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대표적인 사람이 우다이(優陀夷, Udayi)입니다. 그런데 우다이가 출가 후 카필라성으로 돌아왔을 때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이 우다이에게 물어본 질문은 모두 태자가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입는지, 잠자리는 어떠한지에 대한 것뿐이었습니다. 부처님이 무슨 설법을 했고 우다이가 무슨 설법을 들었기에 출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하나도 없고, 전부 아들이 뭘 먹고, 뭘 입고, 어떻게 자는지에 대한 질문밖에 없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아들을 환영할 준비가 한창인데도 부처님은 여전히 동네에 나가서 걸식을 하셨어요. 그러자 정반왕이 화가 나서 부처님에게 물어봅니다.

‘이렇게 많은 음식을 차려두었는데 왜 성 안에 들어와서 먹지 않고 밖에서 걸식을 하느냐?’
‘이것이 우리 가문의 전통입니다.’
‘석가족 가문에 그런 전통이 어디 있느냐?’
‘이것이 출가사문의 전통입니다.’

부처님은 이미 출가하면서 석가족, 왕위 등 세속적인 것은 모두 버리신 상태였어요.

그 후로도 정반왕은 부처님에 대해 먹는 음식, 입는 옷 등에 대한 것만 궁금해 했습니다. 늘 그런 부분에 대해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부처님에게 생활 상의 문제로 잔소리를 했어요. 부처님이 석가족에게 많은 설법을 하고, 그 설법을 들은 석가족 중 많은 사람들이 출가를 했습니다. 심지어 우파리(德波羅, 우바리)라는 천민도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정반왕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 생각에는 자기들이 존경하는 정반왕이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니까 의아해서 부처님께 여쭤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법에 눈을 뜨는데, 왜 유독 정반왕만 그렇지 못합니까?’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반왕에게는 아들만 있지, 부처는 없다.’ (모두 웃음)

늘 아들로서의 태자만 보이지, 부처님으로는 눈에 안 보였던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하프라자파티(Mahaprajapati) 부인은 조금 달랐습니다. 어머니는 부처님의 설법에 귀를 기울이고 법에 눈을 떠서 훗날 최초의 비구니가 됩니다.

부처님의 귀향이 반갑지 않았던 한 사람

여기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석가족 마을로 돌아오셨을 때 그 입장이 가장 애매한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

“부인이었던 야소다라(耶輸陀羅, Yasodhara) 공주였습니다. 부처님의 부모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든 아니든 아들이 돌아왔으니 환영할 수 있고, 아들도 아버지가 돌아왔으니 환영할 수 있는데, 출가한 승려의 부인은 처지가 조금 애매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관계가 아닌 것도 아니잖아요. (모두 웃음)

또 한편으론 괘씸하기도 했을 거예요. 차라리 부처님이 수행 중에 돌아가셨다면 아들인 라훌라(羅睺羅, Rahula)가 왕이 되고 자기는 왕의 어머니가 되니까 지위가 생기고 편하게 살 수도 있는데, 남편이 출가해서 수행을 하고 있으면 부인이 호의호식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검소하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막상 부처님이 돌아오셨을 때 반갑게 인사하기도 조금 어색하잖아요. 여러 가지로 섭섭한 마음을 가졌으리라 짐작이 되는데, 경전에도 그런 기색이 보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모두 웃음)

라훌라가 태어나자마자 부처님이 바로 출가하셨다고 해도 이때 라훌라가 벌써 12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소다라 공주가 라훌라에게 이렇게 시킵니다.

‘저기 계시는 분이 너의 아버지시다. 가서 인사를 한 후 상속할 물건을 달라고 말하거라.’

부처님은 출가한 사람이니까 물려줄 물건이 없잖아요. 그러니 이 말에서 야소다라 공주의 마음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부처님이 아들과 안부 인사를 나누는데, 갑자기 아들이 상속할 물건을 달라고 했어요. 그러자 부처님이 물끄러미 아들을 쳐다보다가 옆에 있는 사리푸트라(Sariputra, 舍利佛)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이를 출가시켜라.’ (모두 웃음)

출가는 다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라훌라는 자발적으로 한 게 아니라 부처님이 출가시킨 경우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정반왕의 상심이 커졌습니다. 아들이 출가한 것만 해도 상심이 컸는데 손자마저도 출가를 했으니까요. 그래서 정반왕이 부처님에게 ‘미성년자가 출가를 할 때는 반드시 부모의 승낙을 얻도록 해야 하지 않느냐’며 항의를 합니다. 부처님은 그 항의가 일리 있다고 판단하고, 그 후로 미성년자가 출가를 할 때는 부모의 승낙을 받도록 규칙을 정했습니다.

인도는 당시에도 성년의 기준이 20살이었는지, 출가할 때 나이가 20살 이상이면 출가하자마자 바로 비구(比丘, bhikkhu)가 되고, 20살 미만은 출가를 하면 20살이 될 때까지는 사미(沙彌)라고 해서 정식 승려가 아닌 예비 승려의 자격을 줍니다. 그리고 20살 미만이 출가를 하려면 반드시 부모의 동의서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이 계율에 의하더라도 라훌라는 예외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부처님이니까 부모의 승낙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 웃음)

아이에게는 아이 눈높이에 맞게

라훌라는 본인이 스스로 출가를 결정한 것이 아니다보니 출가한 후에도 말썽을 많이 피웠습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에게는 출가 생활이 재미가 없었겠죠. 사람들이 부처님 계신 곳을 물어보면 거짓말로 엉뚱한 곳을 가르쳐주기도 했어요. 그렇게 자꾸 말썽을 일으키다 보니 수행 대중 사이에서 ‘왜 어린아이를 출가시켜서 수행 정진하는 데 방해가 되게 하는가’ 하는 불평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이라도 수행자들의 불평이 계속되면 듣기가 좋진 않으셨겠죠. 저도 자식이 없지만 예전에 북한에서 내려온 아이들을 돌보게 된 적이 있었는데, 절에서 아이들이 말을 안 들으니까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 속에서 불평이 생겼어요. ‘스님은 왜 저런 애들을 데려와서 수행하는 데 시끄럽게 만드느냐’ 이런 불평이 자꾸 들리니까 듣기가 좋진 않았어요. (모두 웃음)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께서 라훌라를 부르시더니 새 대야에 물을 떠오라고 합니다. 라훌라가 물을 떠오자 부처님의 발을 씻기라고 하시고, 라훌라가 발을 다 씻기자 그 물을 마시라고 합니다. (모두 웃음)

라훌라는 더러운 발을 씻은 물이기 때문에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물은 원래 깨끗하지만 더러운 발을 씻었기 때문에 더러운 물이 된 거예요. 그래서 물을 버리고 오라고 합니다. 물을 버리고 오자 이번에는 그 대야를 그릇 삼아 거기에 음식을 담아 먹으라고 합니다. 라훌라가 그릇도 더러워졌기 때문에 그러지 않겠다고 또 거부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마음은 물과 같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물은 마음과 같아서, 본래는 맑지만 거짓말을 하게 되면 더러워져서 아무도 마시려 하지 않고, 그 물을 담았던 그릇도 아무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듯 너 역시 사람들이 너를 비난하고 좋아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교화하실 때 아이에게는 아이 눈높이에 맞게 말씀해 주십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라훌라는 바로 알아듣고 그 후로는 정말 조용하게 정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훗날 ‘밀행제일(密行第一) 라훌라’라고 불립니다. 부처님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정말 조용히 말없는 정진을 계속했기에 라훌라는 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第子) 중 한 사람이 됐어요. 이것이 부처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쿠단에 대해 설명을 마치고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쿠단까지 참배하고 나오며 이 동네 아이들에게도 사탕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조막만한 손에 사탕이 가득찼습니다.

다시 대성석가사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마당에서 저녁예불을 드린 후 7시 30분부터 법회가 있었습니다.

대성 석가사의 총무 보현스님의 인사말씀을 듣고 성지순례를 하면서 궁금했던 점에 대해 질문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 아난존자가 깨닫지 못해서 결집에 참여하지 못할 뻔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깨달음이란 것이 무엇인가요?
  • 싯다르타가 출가하고 첫 공양을 얻어드시고 구토를 하게 되는데요. 그게 몸의 반응일까요, 마음의 반응일까요?
  • 케사리아 탑터 학설이 두 가지라고 하셨는데요. 경전에 보면 출가하고 아노마강을 건넜다고 적혀있는데 그러면 케사리아탑이 출가를 기념한 탑은 아니지 않을까요?
  •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 부처님은 왕자였으니까 출가가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요? 농경제에서 고통받는 농부였다면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마음공부도 어느 정도 먹고 살 기반이 갖춰 진 사람에게 열려있는게 아닐까요?
  • 어떤 과정을 거쳐서 불교가 망하게 됐나요? 불교는 계급사회를 반대하기 때문에 인도에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요?

순례자들은 법회 후에 조별 나누기를 한 뒤 취침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다시 국경을 넘어 인도로 와서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을 참배하고 부처님께서 가장 많은 안거를 지내셨던 쉬라바스티로 갑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전체댓글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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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애

하찮은 물을 구하고자 귀한 피를 흘려선 안된다는 로히니(Rohini) 강물의 설법을 통해 부처님의 바른 견해와 인격의 가치로움을 느낍니다.
깨달은 이의 가족으로서 감내해야 했을 고뇌도
어렴풋이 가늠해봅니다.
사탕을 받은 만명의 꼬맹이들이 출가해
스님의 제자가 될
내세의 그 날을 그려보니 절로 웃음이 나네요~~^^

2020-01-19 12:23:54

심인

감사합니다.

2020-01-18 19:46:35

무량심

생생하고순례 잘 읽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

2020-01-16 06: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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