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하루

2019.11.17 정토불교대학 졸업 수련 2차_인천 경기서부, 대구 경북
“나라고 할 것이 없는데 왜 윤회를 하나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정토불교대학 졸업 수련이 있는 날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인천 경기서부 지역과 대구경북 지역에서 정토불교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문경 정토수련원을 찾아와 졸업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새벽 6시, 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죽비 삼성과 함께 스님과의 대화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잘 주무셨어요?”

"네."

“아침에 눈도 제대로 안 떨어지는데 공부를 하게 돼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이때 밖에 없어서 늘 아침 일찍 공부를 하게 됩니다.

이번 시간은 지난 1년 동안 여러분들이 정토불교대학에서 배운 것들 중에 의문이 있는 것에 대해 함께 대화를 하는 시간입니다. 개인 문제를 다루는 시간이 아니에요. 불교 교리나 세상의 이치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입니다.”

간단히 인사말을 한 후 스님은 곧바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불교대학 학생들은 새벽 6시부터 9시 30분까지 3시간 30분 동안 총 10개의 질문에 대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세 번째로 질문한 분은 ‘무아’의 개념이 헷갈린다며 여러 가지 질문을 연이어했습니다.

스님은 질문자의 의문을 하나씩 해소해주면서 무아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무아(無我)’의 개념에 대해 자꾸 헷갈리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이 인식을 할 때 ‘내가 인식을 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치 인식의 주체인 ‘나’라는 것이 실제로 작용하는 것 같이 느낍니다. 이것은 물이 얼었다가 녹았다가 수증기가 되었다가 해도 물의 성질이 변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마치 물의 성질을 갖는 실체가 있다고 느끼는 것과 똑같아요. 내가 이 상황에서 인식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나’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단독자가 아니에요. 형성된 겁니다. 어릴 때와 어른이 된 지금을 비교했을 때 인식의 주체가 같을까요? 엄격하게 말하면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에요. 결혼하기 전의 나와 결혼한 후의 나는 다른 사람입니다. 5%이든 10%이든 변했습니다. 그런데 연속적으로 작용해오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바뀐 줄을 모르는 겁니다.

여기 소나타 자동차 두 대가 있습니다. 이 차는 내 차이고, 저 차는 네 차입니다. 내 차와 네 차는 서로 다른 차입니다. 자동차의 부속품이 대략 2만 개가 넘어요. 그런데 내 차와 네 차를 하루에 부품 100개씩 교체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100개 교체하는 정도로는 차가 달라진 걸 구분하지 못해요. 그런데 100일이 지나서 이 차의 부품이 다 저 차로 가고, 저 차의 부품이 다 이 차로 왔는데도, 여전히 이 차는 내 차이고, 저 차는 네 차라고 인식합니다. 부품이 100퍼센트 다 달라졌는데도 인식 상에서는 그대로인 겁니다.

이런 작용 때문에 여러분들이 ‘나’라고 하는 고정된 실체가 있는 줄 착각하는 겁니다. 인식의 주체는 형성되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져 있는 게 아니에요. 인식의 주체를 ‘자아’라고 하는데, 이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가 태어나서 만 3세까지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 3세까지는 자아가 정상적으로 형성되도록 부모가 자녀를 잘 돌봐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는 겁니다.

인간의 정신세계에서는 그 근본을 ‘자아’라고 부르지만, 생물에서는 이 ‘자아’에 해당하는 것이 ‘종’입니다. 생물의 근본 종자를 ‘종’이라고 부릅니다. 물질세계에서는 물질의 근본 알갱이를 ‘원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물질세계에서 근본 알갱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어요. 생물학적으로도 유전자가 발견되면서 종이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습니다. 유전자에 의해 생물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 유전자를 바꿀 수가 있습니다. 감자 종자가 따로 있고, 토마토 종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만, 유전자 조작을 하면 줄기에는 토마토가 열리고, 뿌리에는 감자가 열리도록 할 수가 있답니다. 그걸 ‘감토’라고 해요. (모두 웃음)

불교를 과학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부처님은 마음의 작용을 엄청나게 탐구해서 마음이 작용하는 법칙을 발견해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법칙에 따라 우리가 수행을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해질 수가 있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에는 불변하는 단독의 실체라고 할 만한 것은 없고, 다만 작용만 있다. 그 작용의 근본 실체는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관계되어 있고, 그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해간다.’

이런 관계와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짧게 관찰하고, 좁게 관찰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무아’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작용의 실체가 없다’ 이런 뜻입니다. 작용은 하는데 실체는 없다는 의미예요.”

강연을 시작한 지 1시간을 경과하면서 서서히 날이 밝아왔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단풍이 안갯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다음 질문자도 무아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왜 윤회를 하는 겁니까

“무아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이해했습니다.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은 알겠어요. 그런데 왜 윤회를 한다고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육조단경에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라는 말처럼 죄라는 것도 실체가 없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왜 업장소멸 기도를 하는 걸까요. 태어날 때 아기들은 누구나 다 좋은 부모를 만나고 싶어 할 텐데, 왜 서로 다른 상황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종교와 진리의 차이에서 생긴 고민입니다. 진리의 측면에서 말하면, 한국에서 현존하는 불교라는 종교는 인도의 전통사상인 브라흐마니즘 또는 힌두이즘의 믿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한 ‘무아’, ‘무상’, ‘연기’, ‘윤회’, ‘업’ 이런 용어만 사용할 뿐이지 그 믿음의 바탕은 인도의 전통사상에 두고 있습니다.

인도의 전통사상에서는 ‘범아일여설’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우주의 본질을 깊이 탐구하면 브라흐만이라는 ‘범’이 있고, 인간에게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자아가 있는데,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둘이 아니고 사실은 하나라는 겁니다. 이 아트만이라는 것이 지옥에도 가고, 천당에도 가고, 소도 되고, 말도 되고, 개도 된다고 한 것인데, 이 범아일여설을 부처님이 비판한 겁니다.

‘아트만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이렇게 브라만교의 세계관을 부정하면서 거기서 나온 카스트제도도 부정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양반과 쌍놈이라는 종자가 따로 있다는 카스트제도에 대해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인도 전통사회의 믿음, 사회제도, 철학에서 나온 ‘아트만’을 부정하는 데서 ‘언아트만’, 즉 ‘아나뜨’, ‘무아’가 나온 겁니다. 그리고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한 ‘아니짜’, ‘무상’이 나온 겁니다. 항상하다고 하니까 그걸 부정해서 ‘무상’이라고 했고, ‘아’가 있다고 하니까 그걸 부정해서 ‘무아’라고 말한 거예요. 당시 종교와 철학에서 아트만이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겁니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말하니까 그걸 부정해서 지구가 돈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관찰자가 자전하는 지구 위에 있다 보니까 그런 착각이 생긴 겁니다. 그런데 그 용어를 부정하다 보면 ‘아, 태양이 가만히 있고 지구가 도는구나’ 이렇게 이해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태양이 가만히 있다’라고 받아들이면 다음 차원에서는 또 안 맞는 말이 돼요. 태양도 또 은하계를 중심으로 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부정한 것이지 그것이 어떤 특정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아(無我)’는 범아일여(梵我一如)설에서 주장하는 ‘아(我)’를 부정하기 위해서 나온 용어입니다.

윤회라는 말도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 인도 전통사회에서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용어예요. 브라만교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거나 소 되고 말 되는 것을 ‘윤회’라고 표현했다면, 부처님은 우리의 마음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되풀이한다는 것을 ‘윤회’라고 표현했습니다. 윤회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다시는 괴로움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는 ‘해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는 곳을 ‘천상’이라고 말하고, 즐거움은 없고 괴로움만 있는 곳을 ‘지옥’이라고 말해요. 그래서 천상과 지옥을 돌고도는 윤회를 한다고 말하는데, 부처님은 그런 뜻으로 윤회를 말하지 않았어요. 마음이 즐거운 것이 천상이고, 마음이 괴로운 것이 지옥인데, 즐거움도 영원하지 않고, 괴로움도 영원하지 않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계속 돌고 돈다고 말씀하셨어요. 왜 이렇게 즐거움과 괴로움이 윤회하는 걸까요? 이 윤회의 뿌리는 바로 ‘욕망’입니다.

내 욕망이 이뤄지면 기분이 좋고, 내 욕망이 이뤄지지 않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기분 좋음을 행으로 삼고, 기분 나쁨을 불행으로 삼으니까 행과 불행이 계속 되풀이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분리시켜서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기를 원하는데,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즐거움이 있으면 반드시 그 뒤에 괴로움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서 행복하면 헤어질 때는 괴로움이 따르게 되어 있어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고, 만남이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만남의 기쁨이 지속될 수는 없어요.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좋음이 몇십 년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젊을 때 어떤 남자가 나를 끔찍이 사랑해주면 정말 행복한 것 같지만, 늙어서도 계속 나만 쳐다보고 있으면 감옥입니다.

내가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할 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즐거움이지만, 관심을 가져주기를 원하지 않을 때 관심을 가져주면 괴로움이 됩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이렇게 늘 바뀌는 것을 붓다는 ‘윤회’라고 말한 겁니다. 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괴로움이 없어져요. 그러면 동시에 즐거움도 없어집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즐거움을 놓지 못해서 괴로움도 함께 가지고 다녀요. 그래서 윤회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괴로움을 없애려면 즐거움도 놓아 버려야 해요. 그게 ‘해탈’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수행을 하면 실현 가능하고, 증명할 수가 있어요. 도달은 못해도 경험해 볼 수 있고,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는 목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서 소가 되고, 말이 되는 것은 증명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종교의 한 부분은 될 수 있어요. 믿음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주관의 문제입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믿는구나’ 이렇게 인정하면 될 일이에요.

부처님의 가르침과 힌두교를 섞어서 이해하려니까 앞뒤가 안 맞는 말이 되는 겁니다. 불교는 불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힌두교적 믿음과 사상을 갖고 불교를 공부하는 이런 흐름을 개선하기 위해 나온 것이 초기 대승불교의 문제의식입니다. ‘자아’라는 것이 따로 없고 다섯 가지 요소의 결합에 불과하다고 설명하기 위해 나온 것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입니다. 그런데 자아 개념을 그대로 갖고 있는 사람은 이번에는 또 ‘그 다섯 가지 요소 각각은 독립적인 것’이라고 여전히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색에도 독립된 실체가 없고, 수상행식에도 독립된 실체가 없다’라고 다시 설명을 한 겁니다.

‘본질의 차원에서 보면, 색(色)이라 할 것도 없고, 수(受)라고 할 것도 없고, 상(想)이라 할 것도 없고, 행(行)이라 할 것도 없고, 식(識)이라 할 것도 없다.’

이걸 한문으로 표현한 것이 ‘공중무색 무수상행식(空中無色 無受想行識)’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저한테 ‘윤회를 안 할 바에야 왜 좋은 일을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윤회를 한다고 하니까 겁이 나서 좋은 일을 한다는 거예요. 이거야말로 얼마나 비주체적인 생각입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지옥 간다는 협박과 천당 간다는 유혹에 의해서 성립하는 종교적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협박에 굴하지 않고, 유혹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지옥을 가든 천당을 가든 그런 것과 관계없이 남을 헤치는 것보다 남을 돕는 것이 지금 나한테 더 좋다는 것을 압니다. 물에 사람을 빠트리는 게 기분이 좋아요? 물에 떠내려온 사람을 건져주는 것이 기분이 좋아요?”

“건져주는 것이요.”

“진리는 지금 바로 작용하는 겁니다.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더 좋습니다. 남에게 구걸하는 것보다는 남을 돕는 것이 훨씬 더 자신에게 만족스러워요.”

“감사합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는데 왜 윤회하느냐는 질문은 충분히 할 만한 질문이에요. 그런데 그때의 윤회는 사람이 죽어서 소 되고 말 되고 할 때의 윤회를 생각해서 생긴 의문입니다. 그런 윤회는 증명할 수가 없어요. 붓다가 말한 윤회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되풀이된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아주 발달하면 지팡이로 로봇의 머리를 때리면 기분 나빠할 겁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기분 좋아할 겁니다. 그러면 인공지능에게도 자아가 있다고 말해야 하잖아요. 인공지능을 다 해체하면 다이아몬드 같은 게 남아있어서 이것이 인공지능의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아니요.”

“인공지능은 그렇게 반응하도록 프로그램을 짜 놓은 것에 불과해요. 인식의 주체로 작용하는 것이 프로그램입니다. 흰 얼굴은 좋고, 검은 얼굴은 나쁘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그런 것일까요? 그렇게 습관이 들은 것일까요?”

“습관이 든 겁니다.”

“습관이 들었다는 말은 프로그램이 그렇게 짜여 있다는 걸 말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습관이 형성된 겁니다. 그런데 왜 얼굴은 하얀 게 좋다고 하면서 머리카락은 또 검은 게 좋다고 해요? 하얀 게 좋으면 머리카락도 하얀 게 더 좋아야 하잖아요. (모두 웃음)

그런데 여러분들은 검어지는 것은 자꾸 하얗게 만들려고 하고, 하얗게 되는 것은 자꾸 검게 만들려고 해요. 그걸 경상도 사투리로 ‘뒤비 쫀다’라고 합니다. 하얀 게 그렇게 좋으면 머리카락도 하얗게 물들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머리카락이 저절로 하얗게 변해가는데 그걸 검게 만들려고 난리를 피웁니다.

이것은 다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된 프로그램의 문제이지 그 속에 어떤 자아가 있는 건 아니에요. 프로그램이 그렇게 짜여 있으면 그렇게 작동을 하는 겁니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짤 때 ‘야, 이 놈아’ 이러면 하하 웃고, ‘부처님’ 하면 성질을 팍 내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으면, 실제로 그렇게 행동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서양 사람에게 방실 방실 웃으면서 ‘야, 이 놈아’ 이렇게 말하면, 그 사람은 말의 뜻을 모르니까 표정만 보고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 겁니다. 성질을 팍 내면서 ‘너를 사랑해’ 이렇게 말하면 자기를 싫어하는 줄 알 겁니다. (모두 웃음)

이것은 프로그램을 어떻게 짜느냐의 문제이지 본질은 그렇지 않아요. 이것을 발견한 붓다는 정말 위대한 분인 겁니다.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 할 존재의 본질을 발견해 낸 겁니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정신 작용인데, 이것을 없애고 싶다면 없앨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막연히 바라고만 있을 뿐이잖아요.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둘 다 욕구에 대한 반응이라는 측면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욕구에 대한 플러스 작용이 즐거움이라면, 마이너스 작용이 괴로움인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이치를 탐구하는 게 아니라 막연히 ‘천당에 가겠다’ 이런 생각만 합니다. 만약 천당을 간다면 몇 살 때의 얼굴을 갖고 가고 싶어요? 지금 얼굴을 그대로 갖고 가는 게 좋아요? 얼굴을 새로 바꾸는 게 좋아요? 만약 얼굴을 바꾸고 천당에 가면 그게 자기라고 말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은 그냥 막연히 천당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지 그런 바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순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요. 믿음의 문제는 따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무엇을 믿는지는 개인의 자유라고 헌법에도 보장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믿음의 문제를 자꾸 사실의 문제로 생각하고 답을 구하려는 데서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불교대학 학생들은 지금 근본 교리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교리에 대해 묻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 착하게 살아도 못 사는 사람이 있고, 악하게 살아도 잘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주변에서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보를 안 받고 사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과보를 받는 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죽어서라도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 연기법은 영향을 주고받는 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을 한다고 해서 내가 모르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 안이비설신의 감각기관이 받아들인 정보로 ‘나’라는 게 이뤄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또 ‘나’라는 게 없다고 배웠어요. 그럼 육신이 흩어지고 나서 지옥세계로 가는 ‘나’는 또 무엇입니까?
  • 누군가에 대한 신뢰나 믿음도 ‘바라는 마음’에 해당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허수아비처럼 믿음 없이 대화하면 공허하거든요. 법륜 스님과 법사님들의 관계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 법륜 스님이 혹시 부처가 아닌가 생각을 했어요. 맞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 부처님을 철학가로 인식해도 되나요? 불교는 철학과 비슷한 요소가 많은 것 같아서요.
  • 즐겁고 유익한 것과 쾌락적인 것을 어떻게 구분하나요?
  •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있고, 게으른 사람도 있는데, 노력하는 능력도 타고난 재능인가요?

답변을 모두 마치고 나니 벌써 3시간 10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휴식도 없이 계속된 강연 속에서 졸음이 몰려오는 본들은 뒤로 가서 서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붓다가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주었는지 이야기하며 대화를 마쳤습니다.

“붓다는 왕위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길거리에서 얻어먹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나무 밑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렇게 살면서도 온갖 사람들에게 도움만 주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스스로도 편안했고, 남에게도 이익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붓다가 살았던 삶의 조건을 보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 길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지 않아요?

만약 왕이 되어야 이 길을 갈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다 왕이 될 수는 없잖아요. 부자가 되어야 이 길을 갈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다 부자가 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붓다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의 조건에서 이 길을 갔습니다. 물론 가난해야만 이 길을 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에요.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자꾸 핑계를 대지 말고, 죽은 뒤의 걱정은 이제 그만하고, 살아 있는 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갔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가난한 조건 속에서 부처의 길을 이루었다는 말씀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큰 박수와 함께 스님은 법상에서 내려왔습니다.

문경 정토수련원을 나온 스님은 곧바로 선유동 용추계곡으로 향했습니다. 10시 30분부터는 행복시민 과정을 수료한 참가자 220여 명이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체댓글 24

0/200

불수도북

윤회에 대한 사견 잘 들었습니다.
초기경전 읽어보시면 수없이 윤회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현생의 고락이 윤회라는 관점은 단견입니다.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면 수행을 해서 사쌍팔배가 되려는 원도 모두 쓸모없는 일이 되버립니다.
불교적 윤회는 밀린다왕문경을 읽어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겁니다

2019-11-21 17:13:35

김밥

윤회가 없다고 한다면 수행도 필요없어요.

부처님의 가르침의 근간을 해치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2019-11-20 16:36:12

김밥

윤회가 없다고 한다면 수행도 필요없어요.

부처님의 가르침의 근간을 해치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2019-11-20 16:35:51

전체 댓글 보기

법륜스님의 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