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하루

2019.10.5. 평화시민아카데미
"이 컵은 큽니까, 작습니까?"

안녕하세요. 일본에서 돌아온 스님은 가장 먼저 태풍 ‘미탁’으로 피해를 본 수재민을 어떻게 도울지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저녁에는 평화재단에서 ‘모자이크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 - 차별, 대립에서 수용, 공생의 문명으로’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습니다.

2019년 가을 평화시민아카데미에서 우리 사회의 차별을 어떻게 바라보고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기획강좌를 3주 동안 열었습니다. 첫 주에는 난민인권센터 고문 홍세화 님이 난민에 대해, 둘째 주에는 연기자 김여진 님이 남녀차별에 대해, 셋째 주인 오늘은 법륜스님이 어떻게 차별에서 공생의 문명으로 나아갈 것인지 강의했습니다.

주로 수 백 명 앞에서 강연을 하는데 오늘은 30여 명 앞에 섰습니다. 적은 인원이라 더욱 집중된 분위기였습니다. 스님은 한 사람도 수 백 명처럼, 수 백명도 한 사람처럼 정성껏 강의를 합니다.

먼저 존재에 차별이 있는지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두고 ‘좋다’, ‘나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다를 뿐입니다. 검은 강아지, 흰 강아지, 누런 강아지는 색깔이 서로 다를 뿐이지 어느 강아지가 더 좋고 나쁜 것은 없습니다. 오늘은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차별에 대해서 여러분과 대화하려고 합니다.

불일불이(不一不異),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서로 다르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강의 주제는 ‘차별이 아니라 다를 뿐이다’라고 주어져 있지만, 더 근원적으로 얘기하면 다르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존재의 실상은 서로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닙니다. 한문으로 표현하면 ‘불일불이(不一不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참모습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

콩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볼게요. 콩 10개를 꺼내서 자세히 살펴보면 무게나 모양이 10개의 콩 모두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 다릅니다.”

“각각 다릅니다. 색깔로만 비교해도 콩나물 콩은 파란 콩이고, 메주 하는 콩은 노란 콩이에요. 그런데 콩과 팥을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요? 10개의 콩이 종류가 다른 콩이라 하더라도 다 같은 콩이라고 분류가 됩니다.

콩과 팥은 서로 다르다고 하지만, 콩과 팥을 채소하고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요? 같은 곡류라고 분류가 됩니다.

콩과 채소는 서로 다르다고 하지만, 콩과 채소를 돌맹이하고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요? 같은 음식 재료로 분류가 됩니다.

이렇게 똑같은 걸 두고도 어떻게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때는 같다고 말하고, 어떤 때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같다’, ‘다르다’ 하는 차이는 존재에 있을까요? 인식에 있을까요? 오늘 이거 한 개만 알고 가도 철학적으로 엄청난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같으니 다르니 하는 건 존재의 문제가 아니고 인식의 문제입니다. 크다, 작다 하는 것도 존재의 문제가 아니고 인식의 문제예요.

존재의 차이일까요, 인식의 차이일까요?

이 컵을 마이크와 비교하면 작습니다. 그런데 컵 뚜껑 하고 비교하면 큽니다. 똑같은 컵인데, 어떤 조건에서는 크다고 인식이 되고, 어떤 조건에서는 작다고 인식이 됩니다. 그러면 이 컵은 큰 것입니까, 작은 것입니까?

존재 자체는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어요.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존재가 나한테 인식될 때는 인식되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에 따라서 어떤 때는 크다고 인식되고, 어떤 때는 작다고 인식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크니, 작으니 하는 것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예요.

그런데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는 크니 작으니, 좋으니 나쁘니, 빠르니 느리니 이런 인식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존재일 때는 우리의 인식 구조로는 그 존재 자체를 분별해서 인식할 수가 없어요. 우주에서 우주선을 타고 가는데 바깥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별이라든지 다른 무엇인가와 비교가 되어야 자신이 움직인다는 걸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움직이는 지구 위에 있지만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구는 가만히 있고 마치 해가 움직이는 것 같아요. 사실은 지구가 해를 돌고 있는데, 내가 지구를 기준으로 해를 인식하니까 마치 지구는 정지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움직이는 건 지구인데, 가만히 있는 해가 나한테는 오히려 움직이는 것처럼 인식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인식에 오류를 많이 범합니다. 인식에 오류가 생긴 것을 ‘착각’, ‘무지’ 또는 ‘오해’라고 말합니다. 즉 잘못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이와 반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해요. 이 컵을 크다고 인식하거나 작다고 인식하는 건 사실은 다 인식의 오류예요. 실제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똑같은 물체를 보는데도 우리는 서로 다르게 인식합니다. 비유를 든다면 햇빛이 와서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일곱 가지 색으로 벌어지는 것처럼 우리들 각자는 자기 프리즘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이 햇빛이 내 눈에는 빨갛게 보여요. 다른 사람 눈에는 주황색으로 보여요. 저 사람 눈에는 노랗게 보여요. 똑같은 햇빛을 보는데 이렇게 색깔이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각자 갖고 있는 프리즘의 각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업식’이라고 해요.

똑같은 물체를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 이유

마치 각각 다른 색깔의 안경을 끼고 벽을 보고 있는 겁니다. 나는 이 벽이 빨갛게 보이는데 다른 사람은 노랗게 보인다고 해요.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저 사람은 눈도 이상하지, 저게 어떻게 빨게? 두 번, 세 번 아무리 봐도 노란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노랗다 빨갛다 하는 것도 사실은 다 인식의 오류예요. 이런 업식은 어떻게 형성될까요? 전생에 타고난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준 것도 아니고, 사주팔자에 그렇게 형성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자기에게 쌓인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겁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경험의 차이에 의해 업식이 서로 다르게 형성된 겁니다.

우리의 인식 중에는 의식도 있지만 무의식도 있어요. 무의식에서 작동하는 게 감정입니다. 딱 꼬락서니를 보면 기분이 팍 나빠집니다. 어떤 사람은 저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참 잘생겼다’ 그러는데, 내가 볼 때는 ‘이야,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생겼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인식되는 이유는 저 사람 때문일까요? 아니에요. 그건 바로 각자가 가진 업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저 사람 문제로 보이는 거예요. 저 벽이 빨갛게 보이는 이유는 내가 잘못 봐서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어요. 저 벽이 빨갛기 때문에 내가 빨갛게 봤다고 생각해요. ‘내 눈에는 빨갛게 보였다’ 이렇게 말해야 정확한 표현입니다.

기분이 나쁘면 ‘내 기분이 나쁘다’ 이렇게 표현해야 되는데, ‘저 사람은 나쁜 놈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것이 바로 상을 짓는 겁니다. 주관을 객관으로 착각해버리는 걸 철학적으로는 ‘상을 짓는다’라고 표현합니다. ‘내 눈에는 빨갛게 보였다’ 이게 정확한 표현인데, ‘저 벽은 빨간색이야’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상을 지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즉 주관을 객관화한 거예요. 저 벽은 빨간 게 사실이라고 인식하니까 노랗다고 말하는 사람의 주장을 인정할 수가 없어요.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내가 거짓말쟁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에 집착을 하는 거예요. 집착을 놓으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집착이 안 놓아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저 벽은 빨간색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딱 보면 나쁜 놈인데 좋은 놈으로 보라고 하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해놓고도 돌아서서는 ‘그래도 나쁜 놈인데’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는 딱 그렇게 비치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우리는 업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반응이 일어나는 겁니다.

갈등에서 벗어나는 방법

저 벽이 빨갛다고 주장하다가 ‘빨간 게 아니네’ 하고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안경을 한 번 벗어보는 거예요. ‘빨간 게 아니네’ 이 말이 철학적으로 ‘공’이라는 뜻이에요. 빨간 것만 아닌 게 아니라 노란 것도 아니에요. 빨간 것도 아니고 노란 것도 아니라는 것을 ‘공’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서로 갈등하지 않으려면 이 안경을 벗어야만 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처님은 이 안경을 벗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안경을 끼고 살아요. 그런데 안경을 한 번이라도 벗어본 사람은 안경을 끼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왜냐하면 내 눈에 빨갛게 보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벽이 진짜 무슨 색깔인지는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파란색으로 보여도 ‘파란색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내 눈에 파랗게 보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옆 사람이 아무리 ‘저 벽은 빨갛다’라고 주장해도 ‘저 사람의 눈에는 빨갛게 보이는구나’ 이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전혀 갈등이 안 일어납니다.

안경을 한 번 벗어본 사람은 안경을 낀 상태로도 안 싸울 수 있어요. 안경을 낀 상태로도 안 싸우는 것이 바로 오늘의 강의 주제예요. 안경을 벗은 상태에서 안 싸우는 게 아니고, 안경을 낀 상태로도 서로 안 싸울 수 있는 이유는 ‘안경 색깔이 서로 다르구나’ 하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프리즘이 서로 다르구나’, ‘업식이 서로 다르구나’ 이렇게 이해할 수만 있다면 갈등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개는 처음부터 이 수준이 됩니다. 개는 새끼를 낳았을 때 하나는 검고, 다른 하나는 희다고 해서 까만 강아지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개는 새끼를 낳았을 때 암놈과 수놈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동물은 차별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인간은 검은 피부를 열등하다고 하고, 흰 피부는 우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동물도 안 하는 짓이에요. 인간은 인식 기능이 동물보다 뛰어난데도 잘못 인식합니다. 인식 상의 오류로 인해 이런 차별이 생기는 거예요. 기능이 좋다고 꼭 좋은 게 아니에요. 오히려 오류가 생기면 부작용이 더 큰 거예요.

인종 차별을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은 인간의 위대함이 아닙니다. 자연 생태계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에요. 최소한 짐승 수준은 되자는 얘기예요. 짐승 수준도 안 되는 인간들에게 ‘야, 최소한 짐승 수준은 돼야 되지 않느냐’ 이런 얘기입니다. 개도 암과 수를 차별하지 않잖아요. 소나 말도 새끼 낳을 때 암수 차별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아들과 딸을 차별하잖아요. 그래서 이제 우리도 짐승 수준은 되자는 겁니다. (모두 웃음)

나와 다를 뿐이구나

서로 다르다는 말도 사실은 진실이 아니에요. 다르다는 것도 근본적으로 따지면 인식 상의 오류예요. 존재 자체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 흰 건 좋고 검은 건 나쁘다는 차별은 인식 상의 오류 중의 오류입니다. 그래서 안경을 벗지는 못할망정 잠깐이라도 안경을 벗어본 경험을 통해 서로 다름을 인정하자는 거예요. 피부 빛깔, 성별, 성적 취향, 키, 재능, 느낌, 취향, 이념, 사상, 믿음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자는 거예요. 나와 다르다고 폄하하지 않고, ‘나와 다를 뿐이구나’ 하고 인정하는 걸 존중이라고 해요. 높여주라는 뜻이 아니에요. 다름을 인정하는 게 존중이에요.

여성을 존중하자는 건 여성을 남성 위에 두자는 게 아니라 성별의 차이밖에 없지 그냥 다를 뿐이라고 인정하자는 뜻입니다. 신체장애는 그냥 불편한 거예요. 장애는 죄의 과보도 아니고, 전생의 과보도 아니에요. 그냥 신체에 장애가 생겨서 불편할 뿐입니다. 불편한 것은 시정이 가능해요. 한쪽 팔이 없으면 의수를 하면 됩니다. 앞으로 전자 팔을 만들면 그 기능이 원래 팔보다 더 좋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팔을 자르고 전자 팔을 붙이는 사람도 많이 생길 거예요. 그러면 장애가 더 이상 열등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 웃음)

이렇게 불편한 것은 보완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잘못 인식해서 신체장애를 열등하다고 여겼습니다. 열등하다고 여기니까 죽여버리든지, 죽어버리든지,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겁니다. 이렇게 인식을 잘못하게 되면 파괴적인 에너지가 나오게 됩니다. 인종 청소와 같은 일들은 모두 인식 상의 오류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존재에는 본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인식 상의 오류가 생겨서 차별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인식 상의 오류를 시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강의를 들을 때는 이해를 해도 막상 현실에서는 인식 상의 오류가 자동으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인식 상의 오류를 가진 상태에서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냥 다를 뿐이에요. 누가 어떤 말을 해도 ‘아, 저 사람은 생각이 저렇구나’ 하고 인정하면 됩니다. 상대를 무시해서 ‘너는 그렇게 생각해라’ 이러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이해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가진 과거의 경험과 최근에 습득한 정보로는 사물을 그렇게 밖에 인식을 못하는 겁니다.

세상을 사실대로 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주관을 주관으로 아는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꿈을 깨면 가장 좋지만, 꿈을 꾸더라도 꿈인 줄은 알고 꿈을 꿔야 하지 않을까요?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차별은 인식 상의 오류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오류를 시정하는 방법은 ‘서로 다를 뿐이다’ 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존중’입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그래도 쉽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서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이해’입니다.

이해하라는 말은 그 사람이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를 이해하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자꾸 ‘상대가 잘했다’라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요. 남편이 술을 먹고 집에 들어올 때도 남편 입장에서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상대를 이해하게 되면 누가 화나지 않을까요?”

“내가 화나지 않습니다.”

“평화로 가기 위해서는 딱 두 가지만 하면 돼요. 첫째,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가 있겠구나’ 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노가 일어나지 않고, 증오심이 없어지고, 평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그냥 내버려도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안 돼요. 변화가 필요할 때는 화를 내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자비’입니다. 그것이 ‘비폭력 평화’입니다. 그냥 내버려 둬도 되지만, 필요하면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겁니다.

‘당신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나와 다르게 보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니까 그 사람과 대화가 되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당신은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라고 그 사람에게 얘기해 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힘이 없으니까 나에게 화를 낼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 화는 그 사람이 내는 것이지 내가 내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화를 내더라도 ‘아, 저분은 인식 상의 오류가 생겼으니 화가 날 만하겠구나’ 하고 또 이해하면서 대화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을까요? 누가 먼저 지칠까요? 누가 더 꾸준히 할 수 있을까요?

다른 것이 차별로 잘못 인식이 되면 대립과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나 다름을 인정하고 ‘그럴 수 있겠다’ 하고 이해하면 다양성이 있는 사회가 됩니다. 다양성이 있는 사회는 풍요롭습니다. 다양성이 공존할 때 우리는 풍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모두 박수)

1시간 30분 동안 강연을 마치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 조국 사태로 나라가 반쪽이 났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바라보고 다투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차별받은 입장에서 ‘차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았는데 여전히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옵니다. 제대로 자각을 못한 건가요, 무의식을 바꾸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하나요?
  • 사람은 각자 안경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다 다르게 본다고 하셨는데요. 안경을 쓰고도 안경을 벗은 것처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30분 정도 질의응답을 받고, 스님은 한 마디로 특강을 마무리했습니다.

“오늘 강의 요점은 뭘까요? 각자 생긴 대로 서로 어울려서 잘 살자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다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일어서는데 스님이 웃으며 한 마디 했습니다.

“내일 강원도 삼척에 태풍 피해를 입은 수재민들을 도우러 갈 거예요. 시간 되시는 분들은 함께 갑시다.”

열 시가 넘어 봉화 정토수련원으로 출발했습니다. 하늘이 캄캄할수록 달빛이 더욱 밝아 보이듯이 어려울 때 내미는 손길은 더욱 따뜻합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봉화에서 삼척으로 태풍 피해 긴급구호활동을 할 예정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전체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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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11-13 12:37:26

감로향

각자 생긴 대로 서로 어울려서 잘 살겠습니다~~♪

2019-10-11 17:29:22

김혜경

좋은 법문감사드립니다. 딱 맞는 표현입니다. 건강하소서.^^

2019-10-08 12:3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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