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하루

2019.8.25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9일째
“일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마지막 날입니다.

새벽 5시에 환인을 출발해 백암산성으로 향했습니다. 4시간 이상 걸리는 먼 곳입니다. 버스를 타고 가며 부족한 잠을 보충했습니다. 두 시간쯤 지나 휴게소에 내려 함께 몸 푸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시 버스를 탔습니다. 단잠도 자고, 몸도 푸니 한결 개운합니다. 버스 안에서는 어제 작성한 소감문을 발표하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호차, 2호차, 3호차, 차량 별로 한 명씩 돌아가며 송신기를 통해 소감문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창밖 풍경 속으로 지난 8박 9일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흥륜사에서 스님이 기도를 올리면서 선조들에게 ‘너무 늦었다고 노여워 마시고, 어여삐 여겨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잊힌 역사에 대한 아쉬움과 죄송한 마음에 눈물이 났습니다.”

“벌거벗은 민둥산 위에 뙈기밭을 보며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외면했던 제 삶을 반성했습니다.”

“고구려를 중국 소수 민족의 역사로 폄하시키고, 일정 내내 공안의 감시를 받아야 하는 모습을 보며, 서글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몇몇 독립운동가만 알고 있었는데, 이곳 멀리 타지에서 온갖 역경을 견뎌내며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을 보면서 너무나 감사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독립을 위해 치열한 투쟁을 했었음을 알게 되어 가슴이 뿌듯합니다.”

“나라 잃은 설움에 강제 이주당해야 했던 고려인들의 수난을 보고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악착 같이 견디고 살아남아 주었음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자신감이 없는 이유 중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역사기행을 마치는 지금, 저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역사기행이 깊어지면서 전생에 이름 없는 고구려의 아낙이 되었다가, 발해의 소녀가 되었다가, 신한촌의 한인이었다가, 이름 없는 독립군이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이름 없는 통일의병의 길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늪지대를 걸은 끝에 만난 염주성 발굴터에서 발해인들의 역사가 구체적인 사실로 다가왔다.”

“고구려의 산성과 무덤들을 보며 우리는 변방의 작은 나라가 아닌 세계를 호령할 수 있는 기상을 가진 나라라는 것을 느꼈다. 고구려라는 말에 가슴이 뛰었고, 이것을 지켜나가고 싶었다.”

“일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을 말하라면 바로 이번 동북아 역사기행입니다.”

“궂은 날씨에 일정이 자주 변경되었지만, 주어진 상황에 맞춰 청년들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게 기행을 안내하는 법륜 스님의 모습에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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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문 나누기는 2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중간중간 시원하게 노래 한 곡을 들려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표현한 노래부터 시작해서 최신 유행곡까지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이 달리는 버스 안에 다양한 목소리로 울려 퍼졌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표현한 노래 가사가 이제는 단순한 노래 가사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8박 9일 동안 역사의 현장을 보고 듣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참가자들의 소감문을 다 듣고 난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의 소감문 잘 들었습니다. 똑같은 지역을 다녀도 각자 느낌이 다른 게 정상입니다. 그래서 다양성이 중요해요. 그러나 우리가 함께 여행을 다니려면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통일성을 또 기해야 합니다. 통일성을 기하는 가운데 개개인의 다양성도 존중하는 것이 우리가 좀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입니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게 무질서와 혼동돼서 전체 공동체의 발전에 장애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통일성, 일체성, 공동체 발전 등을 너무 강조하다가 다양성이 사라지고 획일화되고 개개인의 행복도가 낮아지는 모순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관건은 ‘이 둘을 어떻게 적절히 조화를 이룰 것인가’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발성입니다. 군대가 질서 정연한 것은 일종의 강제성이지만, 군대와 같은 질서 정연함 또한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발적으로 해내면 통일성을 가지면서도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지도 않게끔 양자를 통합할 수 있어요. 자발적일 때만 그게 가능하다는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둘의 조화를 이루는 핵심은 자발성입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단체 여행도 자발성에 기초하면 보람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는데, 자발성이 없이 강제로 하면 굉장한 고통이 됩니다. 화장실도 잘 못 가고, 밥도 빨리 먹어야 하고, 잠도 늦게 자는 등 여러 가지 불편한 점들이 많으니까요. 불편한 마음이 일어날 때는 ‘자각’이 중요합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힘에 기초할 때 우리는 진정 자유로울 수 있어요. 붓다가 발견한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어진 환경을 우리의 필요에 따라 변화시켜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변화시킬 수는 없어요. 때로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도 해야 합니다. 적응과 변화, 이 둘을 어떻게 적절히 조화시키느냐가 핵심이에요. 변화시키려는 환경에 우리가 적응해버리면 비굴하게 되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을 해야 할 때 무리한 변화를 시도하게 되면 불평과 불만, 좌절과 포기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이어서 곧 도착할 백암 산성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도 해주었습니다.

“고구려는 환인이든, 집안이든, 수도를 백두산 아래 산 깊숙한 곳에 두었습니다. 수도에서 좁은 통로를 통해 이 먼 곳 요동벌까지 나와서 전쟁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요동반도 끝, 지금 대련이 있는 장소에 비사성을 쌓은 후 선양-대련 고속도로를 지나서 선양-장춘, 장춘-하얼빈을 잇는 오늘날 만주 벌판의 핵심 교통로와 비슷하게 성을 쌓아 나갔습니다. 이것이 천리장성입니다. 이 천리장성은 원래 군데군데 있던 성 사이를 성벽으로 연결시킨 겁니다. 그 가운데 여러분도 잘 아는 안시성이 있어요.

전체 천리장성에서 고구려의 요동벌 핵심 요지는 요동성입니다. 요동성의 기본 골격은 고구려가 쌓은 것이 아닙니다. 한나라가 조선 땅을 침략해 지배하면서 처음으로 요동성을 쌓았고, 훗날 고구려가 한나라 군사를 쫓아내면서 요동성을 다시 장악한 겁니다. 고구려 초기에는 ‘요동태수가 침입해온다’ 이런 기록이 자주 나옵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요동성을 아예 점령해서 이 지역의 핵심 기지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요동성은 완전히 평지에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성벽의 높이가 30미터나 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요동성을 중심으로 그 위와 아래에 성들이 있는데, 안시성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이 난공불락의 요동성을 점령한 사람은 당 태종입니다. 수나라의 백만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요동성은 점령을 못해서 우문중, 우문술이 요동성을 버리고 평양성으로 바로 공격해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당 태종은 중국 최고라고 손꼽히는 황제이자 전쟁의 전문가입니다. 직접 진두지휘해서 결국은 요동성을 점령했어요.

그러나 당 태종이 안시성은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고구려의 권력자인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할 때 양만춘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신하로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양만춘은 연개소문에게 굴하지 않고 대응을 했고, 둘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당 태종은 양만춘이 연개소문과 사이가 나쁘니 쉬이 항복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연 그렇지 않았습니다. 국내 문제로 서로 싸우는 건 싸우는 것이고, 외세의 침입 앞에서는 힘을 합쳐 강경하게 대응했습니다. 그래서 당태종이 요동성을 정벌한 그 힘으로 안시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어요. 안시성은 요동성에 비해서 아주 작은 성입니다. 그런데도 결국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가서 3년 만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천리장성을 따라가다 보면 이런 성들이 쭉 있습니다. 요동반도 제일 끝에 있는 게 비사성인데, 이 비사성도 제가 직접 답사를 가봤더니 산세가 난공불락이었어요. 그런데도 당 태종은 그곳을 점령한 거예요. 비사성도 당태종 때 처음으로 함락이 됐습니다.

이런 걸 볼 때 안시성의 양만춘 장군이 얼마나 뛰어난 전략가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안시성도 답사를 가봤는데, 산세가 좋은 것도 아니고, 성의 규모가 큰 것도 아니었어요. 안시성 전투가 없었다면 그냥 수많은 고구려 성 가운데 하나라고 할 만한 중간급 성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백암 산성은 고구려 요동벌의 핵심 중심도시이며 제2의 수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요동성을 보호하는 산성입니다. 백암산성과 가까운 거리에 ‘요양(뤄양)’이라는 도시가 있어요. 그 ‘요양’이 고구려 당시에 요동성이 있던 곳이에요.

백암 산성은 요동성을 보호하는 산성이기 때문에 규모가 크지 않습니다. 동모산성보다는 좀 규모가 크고요. 백암산성도 동모산성 같은 방식으로 쌓은 성입니다. 동모산성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풀숲이 우거져서 잘 안 보였는데, 백암산성을 보고 나면 ‘아, 동모산성도 이렇게 쌓았겠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산이 낮고, 샘이 겨우 하나 있고, 안에 터가 약간 있는 수준이에요.

산성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해요. 첫째, 적이 멀리서부터 오는 것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유사시에 적을 피해서 방어를 해야 하는 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조건 때문에 백암산성도 동모산성과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습니다.

둘째, 산성은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연 해자가 있으면 좋습니다. 백암산성은 동쪽에 태자하라고 하는 강이 흐르고, 그 동쪽 면이 절벽으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동쪽에는 성벽을 쌓지 않았어요. 반면 가장 파괴되기 쉬운 게 서남쪽이기 때문에 서남쪽은 성벽을 아주 높고 두텁게 쌓았습니다. 북쪽은 아무래도 산 정상에 가까운 쪽이니까 서남쪽에 비해 성벽 높이도 낮고, 성벽 두께도 거의 절반 수준으로 작습니다. 우리는 산성의 서쪽으로 올라가서 북쪽을 지나 망대가 있는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올 계획입니다.

백암산성은 언제 쌓았다는 뚜렷한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547년에 백암산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전에 쌓았다는 얘기겠죠. 그리고 돌궐이 549년에 1만 군대를 이끌고 침입했을 때 백암산성이 막아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산성에 1만 군대가 침공했다고 하면 사실 어마어마한 군사력입니다. 이 요새가 워낙 탄탄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아낼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태종이 요동성을 함락시키자 이곳 성주는 자발적으로 항복을 해버립니다. 아무리 성벽이 굳건하고 지세가 좋아도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사람의 주체역량이 가장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성주가 지략이 있거나 강직하지 못하면 성벽이 아무리 높아도 쓸모가 없어요. 튼튼한 성벽과 같은 물질적 토대와 강직하고 지략이 있는 성주가 함께 갖춰져야 강고한 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인연이 만나야 하니까요. 개중 하나가 빠지면 강고한 성이 될 수 없어요. 물질적 토대가 신통찮으면 사람이 역량이 있어도 그것을 발휘할 수 없고, 아무리 물질적 토대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의 주체역량이 신통찮으면 그런 물질적 토대도 쓸모가 없어집니다.

우리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는 이유는 백암산성의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둘러본 유적들은 설명을 듣고 나서 ‘와’ 이러지, 실제로 아무 설명 없이 보기만 해도 탄성이 나오는 풍경은 아니거든요.

성벽의 높이는 전체적으로 4층 건물 정도의 높이입니다. 게다가 평지가 아닌 산, 그것도 경사면에 쌓은 성이니까 적이 볼 때는 성벽의 높이가 굉장히 높게 느껴졌을 거예요.”

스님의 설명이 계속되는 사이에 저 멀리 나지막한 산 주위에 성벽이 둘러쳐진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산을 가리키며 저곳이 백암산성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저 앞에 절벽이 보이죠?"

“네!”


“산 위를 동그랗게 한 바퀴 돌고 있는 성벽이 서쪽 성벽이에요.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제일 꼭대기가 망대입니다. 그러고 나서 성벽이 다시 내려오는데, 절벽까지만 이르면 절벽 아래로는 성벽을 쌓을 필요가 없어요. 이곳이 백암산성입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자 버스도 곧바로 백암산성의 남서쪽 입구에 멈춰 섰습니다. 입구에는 “연주성 산성”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여기 사람들이 고구려성인지 모르니까 연나라 성으로 알고 지금은 연주산 산성이라고 부릅니다. 이 성은 백암산성입니다. 석회암으로 쌓아서 성벽이 흰색이에요. 그래서 백암산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겁니다.”

스님이 가장 먼저 앞장서서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남서쪽 입구로 들어가서 남쪽 성벽을 잠시 살펴본 후 서쪽 성벽 위를 걸었습니다.

“역사 기행 오고 처음으로 더운 날을 맞았죠?”

햇살이 쨍쨍했습니다. 온몸으로 여름을 느끼며 산성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성벽 위를 앞장서서 걸으며 백암산성의 이곳저곳에 대해 설명을 계속했습니다.

“여기 파괴된 것은 대부분 동네 사람들이 담장 쌓고 집 짓는 데 돌을 써서 그래요. 고구려 성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예요. 첫째, 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개이빨식으로 쌓았고, 둘째, 성문을 방어하기 위해 옹자형과 공자형 성문을 만들었고 셋째,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치를 만들었습니다.

여기 보이는 이것이 ‘치’입니다. 치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죠. 그런데 이 성의 특징은 치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도 있습니다. 안에 치가 있는 이유는 성벽 위에서 방어할 수 있는 면적을 넓히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보세요. 성벽 안에도 치가 있잖아요.

치와 치 사이의 거리는 평균 50~60미터입니다. 적을 향해 화살을 쏠 때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거리가 30미터 정도라는 얘기입니다.”

스님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니 고구려성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간간이 시원한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도 식혀주었습니다.

“이 성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성벽으로부터 한 3-4미터 밖에 나지막한 성벽을 하나 더 쌓았어요. 이것을 ‘덧성’이라고 해요. 산이기 때문에 자연 해자가 없잖아요. 그래서 장애물을 하나 더 만들어서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의 공격을 방어한 겁니다. 자, 이제 선두는 발이 아찔해지는 곳까지 올라왔습니다.”

성벽 위만 걸으면 성벽의 웅장한 맛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스님은 중턱 부근에서 성벽을 내려갔습니다. 성벽 밖으로 나가서 웅장한 성벽을 바라보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자, 지금부터는 성벽의 웅장한 모습을 보기 위해 잠시 성벽을 내려가겠습니다. 여기서 보니까 성벽이 더 웅장하죠?”

“네!”

“성벽을 보면 개 이빨 식이 무엇인지 이해가 될 거예요. 다 무너졌는데, 이 성벽은 그대로 남아있잖아요. 그리고 기초석을 보면 조금씩 안으로 밀어 넣어서 경사지게 쌓았고, 기초석 위로는 거의 직선으로 돌을 쌓았어요. 경사지게 쌓는 이유는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고, 직선으로 쌓은 것은 적이 성 위로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웅장한 성벽을 뒷배경으로 줄지어 오는 순서대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은 후 다시 성벽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번에는 북쪽 성벽을 따라 걸었습니다.

북쪽 성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아주 높은 절벽과 만났습니다. 절벽 앞으로는 태자하라는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기 보이는 강이 태자하입니다. 성벽 끝으로 한번 내려다보세요.”

잠시 넋을 잃고 태자하를 바라보던 청년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백암 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망대에 올랐습니다.

망대 위에 올라서니 사방이 탁 트여 있어서 주위가 한눈에 다 들어왔습니다. 어떤 적군이 침입해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천연의 요새를 선택했던 선조들의 지혜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고구려인의 기상을 더 크게 느꼈습니다.

망대에서 내려와 성벽 안쪽으로 난 길을 통해 입구로 내려갔습니다. 고구려, 발해 역사를 연구하고 싶다는 대학생은 고구려 성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연신 사진을 찍었습니다.

백암산성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선양에 있는 요녕성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버스 안에서 요녕성 박물관에서 주요하게 보아야 할 요하 문명 유물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은 요녕성박물관입니다, 요하문명의 유물은 이 곳 요녕성 서쪽에서 일부가 발견되었고, 더 많은 유물은 요녕성 북쪽의 몽골 자치구 적봉시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연대가 더 오래된 것은 적봉시에 있고, 연대가 덜 오래된 것은 요녕성에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문명이 북쪽에서 점점 남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녕성박물관에는 요녕성에서 나온 유물만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요하문명 전체의 유물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적봉시에서 발굴된 유물은 여기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녕성 서쪽 지역에서 고구려 무덤과 비숫한 거대한 무덤들이 발견되었는데요. 7층까지 단을 쌓은 무덤도 발견되었고, 한 변이 60미터가 되는 거대한 무덤도 발견되었고, 광개토대왕릉의 제전과 똑같은 모양의 제전도 발견되었어요. 이것을 보면 이 문명은 5천 년 전에 이미 고대 왕국의 규모가 되었다고 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배달시대를 전설처럼 생각했는데, 배달시대의 유물이라고 보이는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된 겁니다. 이렇게 오래된 시기의 역사가 남아 있는 곳은 우리 밖에 없어요. 그것이 바로 배달시대입니다. 한족도 그런 스토리가 없고, 몽골, 거란, 여진도 그런 스토리가 없어요. 더군다나 이 요하문명은 황화문명보다 2천 년 앞섭니다.”

박물관에 도착한 스님은 역사 전시관인 3층으로 기행단을 안내했습니다. 28만 년 전 고인류부터 신석기시대, 고대 하상주시대, 진한시대, 수당시대, 원명청시대에 이르기까지 연대기 순으로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차례대로 전시관을 옮겨가며 유물들을 살펴보던 중 요하문명 유물들을 만났습니다.

스님은 이 유물들에 대해 주의 깊게 보라고 하면서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여기서부터 전시된 유물이 요하문명의 유물입니다. 이 유물이 처음 발굴된 곳은 적봉시에 있는 홍산이에요. 그래서 홍산문명이라고도 부릅니다. 신전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서 여신상이 나왔어요. 여신상이 다양한 파편의 형태로 발굴되었는데, 이것이 여신상의 손입니다.

저 얼굴은 여신상의 얼굴입니다. 중국 고고학자들이 이걸 발견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고 해요.

우하량 유적지에서는 피라미드형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발굴 현장을 이렇게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거의 고구려의 무덤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옥기들이 전시되어 있어요. 옥기들이 정말 정교하죠? 지금 써도 괜찮을 정도로 정교합니다. 이것은 용인데 얼굴 모양이 돼지처럼 생겼다고 해서 저룡이라고 합니다.

옥기는 꼭 장식용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도 사용되었어요. 물고기, 매미, 나비 등 모양이 다양합니다. 이 옥기들은 대부분 우하량 유적지에서 발굴되었어요. 모두 5천 년 전 유물들입니다. 옥기들이 무덤 안에 저렇게 놓여있었어요.”

유독 옥기들이 많이 발굴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문명에 대한 역사가 있지만 유물은 없고, 중국은 이 문명에 대한 역사가 없지만 유물이 발견된 것입니다. 한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조사 연구를 하면 참 좋겠다 싶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한 실정이 안타까웠습니다. 이렇게 발굴된 유물만이라도 볼 수 있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며 박물관을 나왔습니다.

요녕성 박물관 앞에서 중국에서 역사기행을 잘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준 중국 스텝들과 기사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요녕성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을 끝으로 제26차 동북아 역사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오후 2시에 선양공항에 도착한 청년들은 곧바로 출국 수속을 밟기 위해 카운터 앞에 길게 줄을 섰습니다. 스님은 출국 수속이 끝난 기행단에게 다가가 차례대로 한 명 한 명 악수를 건넸습니다.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청년들을 보내고, 스님은 중국에 남았습니다. 북한 인도적 지원 문제에 관련하여 논의를 한 후 내일 귀국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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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역사기행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09-14 17:58:37

규원

스님을 통해 살아있는 역사를 보게 되었네요. 꼭 참여할 기회를 가져보길 기원합니다.

2019-09-06 22:01:59

김정임

온갖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않고 맞서 당당히 지켜온 조상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디서도 만날 수 없을 스님의 역사강의 감사합니다 함께한 분들께도 감사합니다

2019-08-28 09: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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