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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통일의병 동북아누비길 다섯째 날,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가는 날입니다.
아침 일찍 눈을 부비며, 청산리 항일전적지인 백운평으로 출발했습니다. 차에서 내려 2km정도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첫 번째 난관을 만났습니다. 다리가 끊어지고, 무릎까지 차는 차갑고 거센 개울물이 우리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어떻게 할까, 우왕좌왕하다가 법륜 스님이 바지를 걷지도 않고 신발 신으신 채로 강물을 가르고 건너셨습니다. 스님의 모습을 본 참가자들도 망설임 없이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고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일행중에서 “역시 스님은 의병장답다”며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스탭과 많은 의병들이 차가운 개울물에 들어가 건너는 의병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도 감동을 주었습니다.
당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던 직소택까지 걸어가 전투중에 희생된 독립군과 양민들의 영혼을 추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역만리 타국에 와서 죽은 일본 젊은 군인들까지도 그 영혼을 천도하여 다시는 이런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원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10여차례 전투가 있었으며, 일제의 야만적인 ‘경신년 대토벌’에 항거하여 일어난 조선민족 무장대결의 첫 장거이며, 또 반일투쟁의 최고봉”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들은 백운평 마을 주민들을 모두 학살하고, 마을 전체를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백운평 마을 터에는 이름 모를 들꽃과 풀들이 우거져 우리를 슬프게 했습니다.
이날 중국공안 2명이 직소택까지 따라와 우리를 감시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공안이 물 건너는 곳까지만 따라 왔는데, 끝까지 쫓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청산리 전투현장을 가슴에 담고, 화룡시 청호리 길가에 있는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 선생, 서일 선생, 김교헌 선생 등 ‘대종교 3인묘’를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제사를 지내고, 일제에 항거한 3인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스님께서는 “나철 선생께서는 죽을 때, 자기 시체를 나라 안에 두지 말고 백두산 밑에 안장해 달라고 유언하였던 바, 그의 죽은 몸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비록 묘소는 초라할지라도 이 세 사람의 묘가 있는 청호리는 만주 지방 대종교의 발상지가 되었습니다.
대종교 3인 묘를 떠나 버스에 오른 우리는 한참을 달려 차를 멈추고, 차창 밖으로 발해의 두 번째 수도였던 서고성을 바라보며 발해의 기상을 새겼습니다. 서고성은 ‘서쪽에 있는 오래된 성’을 뜻하며, 중경 현덕부가 자리 잡은 이곳은 평원지대로 땅이 비옥하고 수원이 충족하며, 기후가 비교적 따뜻하여 농업 생산발전에 매우 유리한 지역이라고 합니다.
다시 차를 달려 용정의 일송정으로 향했습니다. 기념탑을 지나 일송정에 오르니, 멀리 용정과 해란강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곳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고, 독립을 꿈꾸었을 독립 운동가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스님께서는 “‘일송정’이라는 이름은 비암산 벼랑의 바위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푸름을 자랑하며 우뚝 솟아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정자 같았다는 데에서 유래했습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옛날 소나무는 사라지고 지금은 자그마한 소나무가 한그루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소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계속 죽자, 백두산에서 가져온 소나무가 죽지 않고 잘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 “나의 살던 고향은 ~~”
일행은 선구자와 고향의 봄을 목 놓아 부르며, 통일의 의지를 다졌습니다.
일송정을 내려갈 때 어느 청년이 용정 시내를 바라보며 무언가 입속으로 빌며 삼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먼 이국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며 외로이 사라져간 독립투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선구자가 이루어놓은 대한 독립의 완성을 위해서 통일을 이루겠다고 맹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일송정에서 내려온 우리는 점심식사를 연변식 냉면으로 하였습니다. 커다란 그릇에 양이 우리의 한배 반에서 두 배. 시원하게 한 그릇 먹고, 독립운동가의 산실인 ‘대성중학교(용정중학교)’로 향했습니다.
대성중학교는 현재 용정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1921년 용정에는 천도교 계통의 동흥중학교와 유교 계통의 대성중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이 두 학교는 3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였으며, 학생들은 이곳에서 민족해방교육을 받았습니다. 1927년 10월 교사들이 체포되는 등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교에서는 ‘애국가’, ‘권학가’, ‘학도가’ 등 가곡과 조선 역사, 조선 지리를 열심히 가르쳤다고 합니다. 용정 출신의 대표적 인물은 윤동주 시인을 비롯해 문익환, 송몽규 등입니다.
그 사이 스님은 ‘JTS’에서 투자한 중국 현지 옥수수 국수공장과 양로원을 방문하셨습니다.
한국에서 북한에 대한 지원이 막히자 스님은 중국현지에 옥수수 국수 공장을 만들어 중국에서 북한 주민을 지원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고 합니다.
대성중학교를 나온 우리는 봉오동 항일전적지로 향했습니다. 봉오동 전적지 기념탑에서 일행은 먼저 가신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일행은 다시 버스로 한반도 최북단인 온성군을 향해 두만강 하류를 달렸습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북한의 산하 모습은 비슷했습니다. 뙤기 밭에 띄엄띄엄 있는 가옥들. 그리고 한참을 달려 저 멀리 온성군이 보였습니다. 높은 건물도 보였습니다. 바로 이곳이 한반도 최북단입니다.
달리는 버스안에서는 2가지의 두만강 노래가 흘렀습니다. 각각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의 두만강 노래로 제목이 ‘두만강’과 ‘라구요?’입니다.
하나는 분단 전의 한을 노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분단 후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한 맺힌 노래입니다. 스님은 “우리는 왜 이렇게 한이 많을까? 이 모든 한풀이가 뭐라고?” “통일!”
통일이 천년의 역사 속에 쌓여있는 우리 민족의 한을 일시에 풀어줄 것입니다.
우리는 온성군을 뒤로한 채 ‘조중우호’ 다리가 있는 도문으로 향했습니다.
청년들은 한 의병님이 조•중 다리 입장권을 다 사주겠다고 하여 조•중 다리 중간 경계까지 가고, 나머지 일행은 스님과 함께 다리 아래 길을 산책했습니다. 바로 강 건너에 북한 땅이 그야말로 손에 잡힐 듯합니다. 중간에 있는 섬에는 사람이 물을 기르기 위해 내려오는 모습도 보입니다.
스님께서는 “이렇게 직접 와 봐서 북한 주민이 내 눈 앞에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 인도적 지원의 필요성도 간절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부터 견딜 수 있도록 의복과 식량 지원 필요하다고 하는데 실제 북한 주민에게 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스님께서 인도적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북한 땅과 주민을 뒤로한 채 일행은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고, 조별로 식사를 마치고 스님의 마지막 강의를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날 강의는 스님이 짧게 강연하시고, 질의응답으로 이어졌습니다.
청년포럼 출신의 한 청년은 “북한은 가난한데, 중국과 우리나라는 풍족하고 음식도 남아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뭔지 민족이 뭔지 회의가 든다”며 스님에게 국가와 민족이 의미를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입니다. 서로 이익을 주는 사람들이 다수로 모인 공동체가 국가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를 가족이라고 합니다. 국가는 이익공동체의 성향이 더 강합니다. 가족의 경우는 이익공동체의 속성도 있지만 그 정도가 약합니다. 민족은 가족과 같은 성격이 있습니다. 경제적 이익이 부족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산 가족상봉 같은 경우, 경제적 이익은 없지만, 해야 합니다”라고 답변하셨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한 의병이 “평화재단에서 북한주민들을 위한 지원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고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옛날에는 나진선봉의 모든 탁아소의 모든 아이들에게 유아식을 지원했습니다. 하다 보니, 나진 선봉도 어렵지만 북한에서는 그래도 상황이 좀 더 나은 지역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평양과 자강도 제외한 북한 전역의 53개 지역의 고아원와 양로원, 장애시설에 지원하는 계약을 했었는데 정권이 바뀌면서 지원이 끊기게 되었습니다.
올해 강원도 감자가 수천 톤이 썩을 지경이라 해서, 1주일 내에 개성으로 보낼 계획을 세웠습니다. 강원도주민도 좋고, 북한주민도 좋은 일이었습니다. 정치권에서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허락하지 않아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복지법인을 설립해서 중국에서 지원이 되도록 한 것입니다. 중국 조선족의 가난한 이들, 장애인, 양로원을 지원하면서, 북한에 지원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묘목을 보냈더니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쪽에서 반응이 좋아서 다시한번 더 보냈습니다”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세 번째 질문은 또 다른 의병이 “통일운동의 로드맵, 거기에서 통일의병에게 기대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스님께서는 “김정은이나 박근혜를 설득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을 설득하는 게 좋은 방법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통일의병 운동은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효과가 적을 수는 있지만, 없어지지는 않는 일입니다. 효율은 떨어지지만 한만큼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국민의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통일지향의 정당, 통일지향의 지도자를 뽑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통일을 지향하니까 민간외교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외교에 관계되는 일도하고 여러분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것도 티끌모아 태산식으로 해야 합니다. 정치인들에게도 의식을 심어주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핵심은 공공성입니다. 인간이 개인의 욕망을 갖는 것은 이해하지만 최소한 10%라도 공공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것 때문에 우리가 여기 모여 있는 것입니다. 공동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공공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개인적인 의식은 높은데 공공성이 떨어집니다.
여러분의 지향이 분명하려면 과거 역사속에서도 보고, 북한 주민들 입장에서도 보고, 종합적으로 바라보고 통일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관점이 잡혀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정치의식이 있고 정치적 행동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변화를 일으키려면 정치적 변화 없이는 안됩니다.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서 함께 노력합시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스님의 통일의 대한 절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님 강연이 끝나고, 조별 소감문 작성과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각조별로 대표를 뽑아 한명씩 발표를 들었습니다. 대부분 스님의 열정과 노고에 감사했고, 살아있는 역사현장과 백두산 천지의 모습을 가슴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통일의 열정으로 가득찼습니다.
저녁 10시에 일정을 마무리한 일행은 밤새 심양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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