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4.5.21. 수행관 제3,4강 - 대구법당

오늘은 대구법당에서 수행관 제3, 4강이 있는 날입니다. 스님께서는 새벽 5시에 서울에서 대구법당으로 향했습니다.

법회시작 전에 도착해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10시가 되어  3층 법당을 가득 채운 240여명의 도반들이 스님의 법회를 듣기 위해 자리를 하였습니다. 즉문즉설 위주의 희망 강연과는 달리 정토회 회원들의 세계관, 인생관, 수행관 확립을 위한 특강이라 지혜의 증득을 염원하는 분들의 뜨거운 관심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먼저 앞서 강의한 욕망과 계율에 대한 강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주시며 오늘의 주제인 참회와의 연관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욕계 중생인 인간에게 욕구는 삶의 동력인 동시에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므로 욕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데 삶의 동력은 살리고 괴로움을 없애도록 해야 합니다. 욕구 중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는 인간의 권리이므로 반드시 충족이 되어야 하고, 상대적인 욕구는 경쟁을 유발하므로 절제가 필요하고, 중독되어 일어나는 탐욕은 손해되는 지나친 욕구이므로 버려야 하며 스스로 버리지 못하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욕구를 적절하게 조절하고 자제하는 것이 계율입니다. 계율에 따라 선을 행하고 악은 행하지 말아야 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복이 되는 것은 간직하고 해가 되는 것을 버리는 그 울타리가 계율입니다. 계율은 절제하기 때문에 때로는 속박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나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시켜서 괴로움의 과보를 받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면 좋은 데, 계율을 어겼을 때 어떻게 하는가하는 이것이 오늘 3강의 주제인 참회입니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 때문에 계율을 어기면 먼저 과보를 받아야 하는데 과보를 받지 않으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참회를 하려면 먼저 잘못에 대해 자각을 하고 과보를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해야하며 다시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스님께서는 참회를 하려면 가장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이 잘못에 대한 자각인데, 겉으로는 참회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렇게 잘못한 것은 아니라는 마음이 있으면 진정성 있는 참회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회를 하려면 참회의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먼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 수상이 말로는 참회했다고 하나, 속으로는 식민지배를 통해 한국이 이익이 된 것도 많지 않았냐?’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에 통석의 염이니 뭐니 하며 어렵게 억지 사과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다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비슷한 게 있는 데 5.16은 헌정 질서를 중단시킨 군사쿠데타인데 보수세력들은 그래도 박정희 정권 때문에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남아 있어 사과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억울하다고 생각하니 참회가 잘 안되는 것입니다. 참회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5.16은 헌정 질서를 중단한 것이므로 잘못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하고 그래도 경제 개발은 잘 했다고 평가를 해야 진실을 규명한 위에 화해를 하는 화합과 합일점을 찾아 나갈 수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상규명입니다. 왜 이런 사고가 생겼는지, 왜 대응이 늦었는지가 정확히 밝혀져야 재발방지가 가능합니다. 해경을 해체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닙니다. 껍데기만 바뀌지 그 역할은 다른 부서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실의 규명위에 국민의 동의를 구하고 국회의 입법과정을 거쳐서 정부기능을 바뀌는 것이어야 합니다. 국민의 감정에 영합해서 법 절차를 무시하는 것은 포퓰리즘입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권한이 대통령에게 있으니 사소한 것도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집중된 과도한 권력을 분산시켜야 중간에서 책임을 지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라고 말씀을 하시며 대통령 중심의 중앙집권적 방식에서 지방으로 권한을 대폭 이양하는 지방분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회의 기준이 되는 죄 또는 잘못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를 예를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생생하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우리가 힘이 약하니까 일본이 침략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끼리 반성할 문제이지 그것을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은 침략 그 자체에 대해서 진심으로 참회를 해야 우리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일본이 식민지배 과정에서 우리에게 얼마의 이익을 주었다고 해서 침략을 미화하며 변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회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냥 잘못했다고 말한다고 참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인 계율에 따라 참회를 해야 합니다. 다른 생명을 죽이거나 괴롭혀서는 안되는데, 여러분들은 애 말 안 듣는다고 때려놓고 니 잘되라고 때렸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니 잘되라고 때리는 경우는 10명에 1명도 안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일본이 한국에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때리면서 가르쳤으니 니가 이만큼 자랐지라는 것은 불자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때린 것은 잘못 된 것이고, 그것이 우연찮게 효과가 난 것입니다.  니 잘되라고 때렸다는 핑계를 대며 지 성질을 부린 것이므로, 가해자는 합리화 하지말고 진솔하게 반성하고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니 잘 되라고 때렸지는 가해자가 할 말이 아니고 맞은 사람이 자기 치유과정에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정말 아이를 위한다면 자기 종아리를 걷고 아이한테 때리라고 해야 너 잘되라고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일본처럼 가해자는 항상 이런 입장으로 자기를 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피해자는 피해이상의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고, 가해자는 자기를 합리화를 하므로 진실을 객관적으로 밝히고 피해자는 치유를 하고 가해자는 진실하게 반성하고 과보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회의 기준이 되는 직접적인 원인과 그에 따르는 간접적인 요인들을 대중들이 알기 쉽게 일본의 침략과 5.16쿠데타, 성추행 문제등을 예로 들면서 피해자가 치유의 과정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간접적인 원인을 직접적인 원인인 양 합리화 하면서 진실되게 참회하지 않으므로 해서 생기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많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참회의 가장 기본인 잘못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에 대한 자각에 많은 시간을 보내시면서 가해자가 간접적인 요인을 마치 직접적인 원인인 양 합리화하면서 생기는 진정성의 결함에 대해 많이 강조를 하셨습니다.

이어서 참회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셨습니다.

참회란 먼저, ‘내가 잘못했구나.’ 라고 알아차려 잘못을 인정을 하고, 과보를 기꺼이 받겠다는 수용하는 자세, 그리고 다시는 이런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하는 다짐을 하는 이런 과정이 참회입니다. 이미 잘못을 저질렀을 때 반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중생은 잘못을 또 저지르게 되므로 업이 끝이 없이 이어지므로 참회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이나 우리 현실은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으므로 조금씩 오류를 시정해가는 데 있습니다.”

 

더불어 참회의 기준이 되는 기본 계율 5계와 간접적인 계율인 3계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계율은 첫째, 남을 때리거나 해롭게 하지 말고 둘째,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 말고 셋째, 남에게 괴로움을 주지말고 넷째, 남을 괴롭히는 말을 하지 말고, 다섯째, 술을 먹고 취해서 남을 괴롭히지 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 계율인데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직접적으로 남에게 해를 주는 것입니다. 간접적인 계율로는 첫째, 몸에 장식을 하지말라. 둘째, 춤추고 노래하며 즐기지 마라. 셋째, 높은 자리에 앉지 마라입니다.”

     

참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고 회란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잘못했다는 말만 있고 다시 안 하겠다는 다짐이 없으면 참회가 아닙니다.

참회를 해도 잘못을 다시 저지르게 되는 데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것은 아니더라도 오랜 업식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짜증을 내게 되면 방에 들어가 108배 절을 하며 참회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과보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되돌아오는 게 약해집니다. 계율을 지키면 옛날에 지은 인연의 과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나 새로운 나쁜 인연을 짓지 않으므로 미래의 과보를 받지 않으므로 확대생산이 아니라 축소 생산을 해서 언젠가 종결이 되는 것입니다. 참회란 계율을 지키는 가장 낮은 단계의 수행법입니다.”

     

더불어 참회 정진을 하면서 꼭 필요한 절에 대한 의미를 말씀하시며 아침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참회를 할 때 절을 해야 하는 데 반드시 절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회의 핵심은 마음에서 알아차리고 다시는 안하겠다고 맹세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몸이 건강하다면 그것에 대해 표현을 하고 책임을 져 줘야 합니다. 과보를 받아주는 것이 절입니다. 내가 옳다 잘났다 할수록 몸이 점점 세우게 되고 고개도 들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 알았음을 자각하면 고개가 숙여지고 몸이 낮춰지고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게 됩니다. 절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고 자기가 옳다는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절은 참회의 의미도 있고, 극기훈련의 의미도 있습니다. 절 횟수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지만 마음만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의 삶을 돌아보고 업식 때문에 저지른 잘못을 아침마다 절을 하며 참회하는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참회의 의미를 정리하시면서 오늘 저녁에 강의하실 관법수행에 대해서도 연관지어 설명을 하셨습니다.

오늘 저녁 강의는  계율을 어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한 것으로 계율을 어기지 않도록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관법입니다.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에 알아차리면 욕망으로 이어지지 않아 계율을 지킬 것도 없습니다. 공부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좋고 놓치면 계율을 지켜야 하고, 계율을 어겼으면 잘못한 줄을 알고 참회를 하는 것입니다. 계율을 어기지 않도록 참으면 스트레스가 되므로 참지 말고 마음이 일어날 때 알아차리는 것이 관법 수행입니다.”

     

스님께서는 참회 정진을 통해 이치를 깨달아 가는 지혜를 증득하기를 당부하시며 특강을 마무리 하셨습니다.

특강이 끝난 후 용성조사님 탄생 150주년 기념식과 기념음악회 참석을 당부하셨고 64일에 치르지는 지방선거에 대해서 권력은 투표를 하지 않는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찍을 사람이 없다.’며 기권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하라. 이마저도 아니라면 최악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하라.’ ‘최악과 차악 중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다면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다.’고 말씀하시면서 오전법회를 마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점심공양을 드신 후 용성조사 탄생 150주년 행사와 관련한 원고 점검등의 업무를 보시고 저녁 강의에 들어가셨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오늘도 간절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 눈을 감고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극락왕생을 빌어보았습니다.

     

참회정진에 앞서는 것이 관법입니다. 인간의 감각에는 여섯 가지 감각이 있습니다. 촉각, 미각, 후각, 청각, 시각, 지각이 그것입니다. 인간의 감각 중 가장 발달한 것이 시각인데 정보의 90% 이상을 시각에 의존합니다. 그래서 바르게 보는 것(정견)이 바로 바르게 아는 것(정지)과 같습니다. 볼 견() 이나 볼 관()자는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법은 이치, 존재를 뜻합니다. 그래서 관법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윤리적 계율을 어겨 죄가 되는 것은 실제 그 행동이 바깥으로 드러났을 때입니다. 하지만 선정을 닦는데는 계율을 어길 마음만 먹어도 장애가 됩니다. 명상할 때 제일 처음 하는 것이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호흡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화두를 가지고 고요한 가운데 집중하는 것을 소소영영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보면 쉽지가 않아요. 고요해지지가 않습니다. 어쩌다 고요해지면 잠이 오거나 멍청해집니다.

     

  깨어있으면 멀리 있는 작은 소리도 들리고 멀리서 피우는 담배 냄새도 맡습니다. 고요할수록 알아차림이 깊어지고, 알아차리면 마음이 더욱 고요해지고. 이런 선순환이 되면 좋은데 마음이 고요해지면 쉽게 잠이 와서 알아차림을 놓치게 되고, 그러면 마음의 고요가 깨지게 되는 악순환이 됩니다. 선순환이 되도록 항상 연습을 해야 합니다.

첫째는 호흡을 가지고 연습을 합니다. 명상할 때 시간이 흘러 숨이 고요해지면 알아차림을 놓치게 되어 대부분 졸게 됩니다. 알아차리면 더 고요해지고, 더 고요해지면 더 집중해야하고, 더 집중하다보면 더 고요해지고, 또 더 집중하고. 이렇게 됩니다.

     

욕심을 내면 몸에서 열이 나고 호흡이 가빠집니다. 열이 나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들어 바로 호흡이 거칠어집니다. 아주 고요한 상태에서는 금방 감지가 됩니다. 따라서 첫 번째로 욕구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림이 계속 유지되는 것을 지켜본다 라고 합니다. 담배가 피우고 싶을 때 담배를 피우는 것은 욕구에 끌려가는 것, 피우지 않으려 하는 것은 욕구를 억압하는 것입니다. 욕구는 충족시키면 놓아집니다. 그런데 욕구를 참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커집니다. 그래서 나중에 참다 참다 터져버립니다. 하지만 이를 가만히 지켜보면 욕구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제풀에 꺾입니다. 배고픔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어도 욕구가 사라지지만 지켜봐도 욕구는 사라집니다.

     

참는다는 것은 곧 긴장한다는 것입니다. 참지 말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를 꽉 깨물어 참아서 욕구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도수행이고 관법입니다.

     

욕심에 눈이 어둡다는 것은 알아차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나서 알게 되면 참회를 해야 합니다. 바로 지금 알아차리면 행동하기 전에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참아서 계율을 지키면 계율을 지키는 그 자체가 고통이고 작심삼일이 되기 쉽습니다.

     

관법은 선정의 하나입니다. 앉아서 명상을 하는 것도 선정이나, 평소 생활하면서 그때그때 알아차리는 것도 선정을 닦는 것입니다. 즉 지금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나누기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생각을 내놓아요. 생각이 복잡하니 말이 길어집니다. 지금 여기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내어놓는 것이 마음나누기입니다.  마음나누기에 대한 스님의 가르침을 듣고 다들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는 평소 호흡을 못 알아차릴 정도로 정신없이 삽니다. 그러니 호흡할 때는 조용히 앉아서 호흡을 알아차리고 경계에 부딪힐 때는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욕구는 업식으로부터 오게 되는데 업식과 욕구 사이에 느낌이라는 하나의 단계를 더 거치게 됩니다. 부싯돌로 불을 킬 때 불은 반짝! 하고 끝나는데, 그 불이 옮겨 붙으면 지속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우리의 느낌은 부싯돌의 불과 같이 반짝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옮겨 붙으면 지속되는 갈애가 됩니다. 우리가 누구를 미워할 때도 순간 기분이 나쁘면서 계속 싫어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찰나의 반짝하는 느낌을 알아차리려면 굉장히 고요한 마음의 상태가 되어야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마음 알아차리는 것도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의지로 이러면 된다, 안 된다하며 감정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억누르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경상도사람들은 애정표현을 잘 못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남자가 대범해야지, 여자가 감정을 드러내면 안된다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왔어요. 이에 비해 서양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편안하게 잘 표현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수행을 같이 해보면 서양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보다 훨씬 더 잘합니다.

     

찰나의 느낌을 알아차리면 느낌이 감정으로 가기 전에 멈춥니다. 그러면 욕망까지 가지 않습니다. 느낌이 좋다, 싫다로 가기 전에 멈춰지면 갈애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람이 욕망이 없을 수 있나라고 생각하지만, 느낌을 알아차리면 욕망까지 가지 않습니다. 업식이 없으면 수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업식이 소멸 되었을 때의 얘기이고, 업식이 있더라도 잘 알아차리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법수행입니다.

  

호흡 알아차리기는 호흡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자기가 자기 상태를 모르는 것을 농사에 비유하면 자기 밭에 잡초가 무성해서 길가는 사람들이 다 지적을 하는데 본인만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범부중생, 즉 온 동네 사람도 다 아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이지요. 수행을 조금만 해도 자기 자신을 알게 됩니다. 남이 나를 아는 만큼 나도 나를 알게 됩니다. 그 다음 단계는 욕망이 일어났을 때 딱 알아차려서 행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억눌러서가 아니라 알아차려서 안하는 것입니다. 남은 모르는데 자신만 아는 것이지요. 남은 지나가면서 내 밭의 잔풀을 못 보지만 나는 알아요.

     

종교인들이 일반인보다 평균적으로 욕심은 적습니다. 욕심이 적으면 맑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의 얼굴이 대체로 맑은 편입니다. 욕심이 가득하면 눈빛이 탁하고 얼굴이 어둡습니다. 아이들의 눈이 맑은 이유가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교인들은 일반인보다 평균적으로 사명감이 더 크기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종교인들은 쉽게 죄책감을 느낍니다. 몸에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인 듯 합니다. 부부싸움은 하루 가고 나라싸움은 30년 가는데 종교싸움은 1000년을 가요. 이는 옳고 그름이 너무 강해서 그렇습니다.

     

따라서 첫째 욕심이 없고 마음이 맑아야 하고, 사명감은 너무 무겁지 않게 가벼워야 합니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참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을 통해 참을 것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알아차림보다 참기가 더 쉬워요. 그러니 먼저 고요히 앉아서 미세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에 번뇌가 많아도 그것도 공부의 과정입니다.”

     

스님께서는 마지막에 긴 강의의 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연습하다보면 우리의 행복과 자유가 성큼성큼 다가올 것 같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스님께서는 특별히 용성조사님 탄생 150주년 기념식에 많은 참석을 당부하셨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이런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은혜로움을 찾아 올라가다보면 스님의 스승님의 스승님의 스승님이신 용성조사님이 계시겠지요. 용성조사님께서 그토록 이루려 애쓰셨던 뜻을 이어받아 정말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남을 지켜봅니다.  스님께서는 또 참석해야 할 중요한 행사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6.4 지방선거입니다.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530일과 31일 전국 어디에서나 투표를 할 수 있는 사전투표제도가 있으니 잘 활용하라고 하십니다. 최선이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차악이라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투표율이 90%까지 높아야 국민이 무서운 줄 안다는 말씀을 하실 때는 스님의 답답해 하시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말씀을 다 마치시고 스님께서는 용성조사 탄생 150주년 기념 홍보 동영상을 함께 보셨습니다. 뿌리가 깊은 가르침을 잘 새겨들어 열심히 수행정진 해야겠습니다.

     

저녁법회까지 모두 마친 스님께서는 내일 오전 730분에 종교인 모임이 있어서 바로 서울로 이동하셨습니다.


2025 9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7

0/200

김양우

법문정리
감사합니다.

2014-05-25 05:14:12

미미

알아차림. 명심하겠습니다.

2014-05-24 06:24:45

무애

알아차림 .

2014-05-23 23: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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