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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7시부터 조찬 모임이 있었습니다. 오늘 새벽에 도착해서도 스님께서는 그제 속리산에 갔다 온 후 몸이 너무 피곤해서인지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서 잠을 거의 주무시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조찬 모임으로 이동하기 전 INEB 스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습니다.
INEB 스님들께서는 발우공양후 그동안 한국에서 법륜스님과 동행하고 다닌 소감에서 “법륜스님이 즉문즉설을 할 때 어떤 질문에도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고 웃으시며 답변하는 모습이 감명 깊었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편안하게 앉아서 듣고 스님은 계속 서서 얘기하는 풍경은 정말 낯설었어요. 저희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입니다. 법륜스님이 그렇게 자신을 낮추시는 모습에 감동받았습니다. 또 음식물을 남기지 않고 고추가루까지 닦아 먹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신구세대가 함께 하는 모습도 인상 깊었습니다. 돌아가서 정토회에서 배운 것들을 저희들 사회 전체에 전파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전 10시부터는 한겨레 하니 TV의 촬영이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이어 2번째로 ‘곱게 늙어가는 법’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며칠전부터 계속 몸이 좀 힘들다고 하신 스님께서는 속리산 등반이 무리가 되었는지 결국 오늘은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오후 2시부터 진행되는 용성스님의 탄생 149주년을 맞아 용성스님의 사상과 실천 활동을 조명해보는 심포지엄에 참여하셨습니다. 심포지엄은 ‘시대의 스승, 용성조사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천도교 박남수 교령, 불교TV 대표이사 성우스님, 정세균 민주당 국회의원 등 내외빈 인사들을 모시고 불자, 천도교, 정토회 신도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열렸습니다. 정토회 중앙사무처에서 많은 분들이 행사를 위해 수고해 주셨습니다.
박남수 천도교 교령님께서는 행사전 차담에서 이 건물은 3.1독립자금을 모은 것으로 이 건물을 지었는데, 독립운동가 중 한분인 백용성 기념 심포지엄을 여기서 하게 되니 역사적인 날이라고 덕담을 해주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인사말에서 용성스님의 일생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시며 오늘 행사의 취지에 대해 안내해주셨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젊은 시절에는 오직 깨달음을 위해서 용맹정진을 하셨고, 나라가 일본에 빼앗긴 후에는 산에서 내려오셔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그리고 불교의 지성화와 대중화를 위해서 한평생을 몸바치셨습니다. 이렇게 탄생 149주년을 맞이해서 용성 조사님의 그 사상과 그 실천 활동을 오늘 우리시대에 다시 한 번 새겨보는 것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100년 전처럼 지금도 우리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또한번 요동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대처하면 우리의 숙원인 통일한국을 이루어서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일어설 수 있지만, 여기서 우리가 잘못 대응하면 오랜 기간 분단이 더 지속되고 미중 양국의 하위 변수로 전락해 대립과 갈등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런 중요한 분기점에 우리가 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조선말기에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수운 최제우 선생님의 뜻을 계승한 그리고 3.1독립운동의 골간이 되었던 천도교의 본부 이곳 수운회관에서 용성조사님의 사상과 실천활동을 새롭게 조명해 보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뜻 깊은 일인 것 같습니다.”
이어서 세 분의 학술 발표가 있었습니다. 김재영 동방불교대학 교수님은 주제발표를 통해 “지금까지 우리 불교는 입으로 거창하게 내세우는 구습에 길들여져왔다” 며 “용성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불교도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현장 불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임형진 경희대 교수님은 “용성스님의 불교경전 한글화 작업과 불교 대중화를 통한 독립운동은 그 시대 한국 민족주의의 전형이었다”며 “스님이 여전히 존경받고 탐구되어야할 대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빨리문헌연구소장 마성스님은 “일제 당시 불교지도자들의 개혁안은 오히려 승단의 세속화를 가중시켰지만, 용성스님은 승단의 청정화를 통해 조선불교의 전통을 고수하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화활동을 전개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특히 마성스님께서 “용성스님의 대각교당은 이후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제자들이 모두 떠나고, 일부 제자는 스승의 원고를 불태우기도 하고, 결국 이것은 대각교의 해체를 뜻하게 되었다" 라고 안타깝게 절규하셨는데, 이 부분에서 많은 청중들이 아쉬움과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발표하신 분들이 다들 “시간 부족으로 발표준비가 미흡했다”고 언급하셨는데, 스님께서는 “앞으로 1년 간 시간을 더 드릴테니 15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더욱더 많은 준비와 연구를 부탁드린다”고 해서 청중들 모두 크게 웃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세 분의 발표를 경청해 들으시고는 닫는 말씀으로 이렇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불교의 지성화,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생활화 이 3가지 지침을 내리셨습니다. 조선시대 이조 5백년 동안 불교는 극심하게 탄압을 받았습니다. 스님들을 다 속퇴 시켜버리고 도시에 있는 절은 다 없애버렸어요. 승려가 되겠다 할 때는 신분을 천민으로 강등을 시켜 8번째 천민으로 스님들을 규정해 버렸어요.
산속에 있는 큰 절들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다 임진왜란 때 불탔어요. 그 이유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마을이 왜군한테 짓밟히자 주민들이 산속으로 피난왔는데 그들을 절에서 보호해 주었어요. 더 많은 주민들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떨 수 없이 스님들이 창칼을 들고 왜군과 싸우게 되었고, 그러다보니까 일본군들이 절을 다 불 질러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산속에 있는 절들은 다 임진왜란 때 불타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가 그렇게 불교를 탄압했는데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니까 스님들은 나라를 위해서 싸웠고 민중들을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금지시켰는데 오히려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도성출입을 해제시켜 줬습니다. 용성 스님이나 한용운 스님 같은 분들은 독립운동을 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아 70-80%는 거기에 휩쓸려 갔던 것이고, 그런 속에서 지조를 지키고 조국을 지키고 조선 불교를 지켰다는 것이 위대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 배경을 알아야 ‘불교의 지성화’ 라는 용어가 왜 나오는지를 알 수가 있어요.
누구든지 출가하게 되면 천민으로 강등될 위험이 있으니까 출세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불교를 못 믿었습니다. 출세와 관계없는 천민이나 평민이나 여성들만 절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예요. 스님들은 산속에 들어가서 문자를 배워서 불법을 알았지만, 신도들은 문자를 모르니까 오직 기복적 신앙 외에는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법이 없는 불교를 5백년 간 지속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불교가 짊어진 무거운 전통의 짐입니다.
법이 없는 불교를 하다보니까 불교가 샤머니즘이나 민속신앙과 별 차이가 없는 게 되어버린것이죠. 그래서 불법의 위대함을 다시 세워야 하는 게 바로 ‘불교의 지성화’입니다. 불법을 알아야 된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자, 이것이 우리 불교가 가지고 있는 큰 과제입니다. 이것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가 짊어진 큰 무게로 남아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정법에 귀의하자, 바른 법을 믿자, 바른 법에 귀의하자 이런 얘기입니다.
아무리 불교가 바르다 하더라도 대중이 문자를 몰라서 그 불교를 알 수 없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냥 승려들의 전유물이지요. 그래서 두 번째로 나온 것이 불교의 대중화입니다. 불교의 대중화라는 것은 진리를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경전의 번역이죠. 한문을 공부하지 못한 사람들이 쉽게 불법을 공부할 수 있도록 경전을 한글로 번역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쉬운 불교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용성스님 당시에는 번역해주는 정도만 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번역 해주는 정도 갖고는 안 됩니다. 다시 생활용어로 정리가 되어서 누구나 다 불법을 알 수 있는 이런 불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아무리 불교의 진리가 좋고 그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안내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상 삶과 유리된다면 그것은 우리 삶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밥 먹고, 똥 누고, 직장 생활하는 거기에 불법이 늘 그대로 작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용성스님이 말씀하신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갖고 있는 삶의 고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리여야지 고뇌와 진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고뇌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 즉 열반과 해탈이 불교의 최고 이상인데 우리는 지금 열반과 해탈을 이상으로 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목적은 열반과 해탈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들의 직장과 가정 속에서 불법을 늘 생활화하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용선 진종 조사의 원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씨앗을 뿌려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가꾸고 어떻게 꽃피우고 어떻게 열매 맺을 것이냐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용성스님께서는 불법을 통해 교화하는 것만이 아니고 불법을 넘어서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당시에 이 땅의 중생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였습니다. 그래서 용성스님은 나라의 독립에 한평생을 바치셨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나라의 독립과 같은 것은 바로 분단된 나라를 통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평화를 가져오는 방법이고 북한에 고통 받는 2천만 민중을 구제하는 방법이고, 우리들의 왜곡된 사상, 왜곡된 역사, 일제 식민지 지배의 상처를 온전하게 치유하는 길입니다. 우리 힘으로 통일했을 때만 우리가 이런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미중의 세력 다툼 속에서 통일한국을 건설하지 않고는 우리의 어떤 국가적 비전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용성스님께서 혼신의 힘을 다했던 독립운동이 우리에게는 통일운동으로 이어나가야 합니다.”
스님께서는 심포지엄이 끝나자 곧바로 대전으로 이동하셨습니다. 평화재단 청년포럼에서 준비한 새로운 백년 북콘서트가 대전 충남대학교 백마홀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퇴근시간이라 길이 막힘에도 불구하고 겨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은 차안에서 죽으로 해결했습니다.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와 함께 진행된 오늘 북콘서트는 청년 약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오연호 대표는 지난 대선 후 마음의 평정을 찾기 어려웠는데, 스님은 어떠셨는지라는 질문부터 유럽의 복지가 잘된 나라들 사람들은 왜 행복할까하는 고민부터 현재 대한민국에는 전쟁의 위기가 돌았는데, 왜 그럴까, 역사문제등 질문을 던지면서 스님의 답을 구했습니다.
젊은 청춘들은 통일이 되어서 뭐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통일을 하려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중일의 역사인식이 다른데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통일은 1+1=2가 아니라 3또는 4가 되도록 해야하지만, -1이 될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등 ‘새로운 백년’의 북콘서트라서 그런지 청년들의 질문도 주로 통일문제, 남한내의 갈등문제가 많았습니다.
대전의 북콘서트 후 스님께서는 내일도 아침 7시부터 조찬모임부터, 춘천, 울산의 강연이 있기 때문에 서울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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