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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만에 다시 밟은 보은 땅, 덜컥 내려앉은 하늘에서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금치에서 물러나 후퇴를 거듭하던 우리는 11월 25일과 26일 이틀간 전라도 원평과 태인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또다시 패배하여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 통령이 연합부대를 해산했다. 터지고 찢겨나간 살가죽에 솔잎을 짓찧어 붙인 채 태인에서 정읍으로, 입암으로, 순창 임실 장수 무주 황간 영동을 거쳐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용산 청산을 지나 보은에 돌아왔다.
돌아온 보은에는 관군들이 부숴버린 장안마을 폐허의 초막들과 살갗을 저미는 매서운 추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문을 부수고 보은 관아를 점령한 우리 부대는 일본군과 민보군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는 척후병의 전갈을 받고 북실마을로 이동했다. 날이 저물고 눈보라가 더욱 거세지자 모닥불을 지피고 얼어붙은 몸을 서로서로 기댄 채 온기를 아꼈다. 끝없이 쏟아지는 폭설과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흰 어둠이 온 마을을 뒤덮었다.
비 예보가 있지만, 오히려 해가 쨍쨍하지 않아 역사기행 하기에는 '딱 좋다'라고 생각하며 2시간 30분을 달렸습니다.
첫 행선지는 '삼년산성'입니다.
마침 주차장에서 만난 활동가의 안내로 삼년산성 입구에 오르자 대전충청지부 회원 100여 명이 줄 맞춰 서서 이승용 국장님(평화재단 역사연구개발팀장, 좋은벗들 사무국장)의 설명을 듣고 있었습니다.
10시 시작인데 기행 참가자들이 모두 도착한 터라 설명이 일찍 시작된 듯합니다.
조금 늦은 듯한 리포터들은 부랴부랴 줌에 접속하여 취재를 시작합니다.
삼년산성을 향해 지회 순으로 줄을 맞춰 걷습니다.
'북문'이라 쓴 표지판을 지나 좁고 가파른 산길을 오릅니다.
북문에 도착했습니다.
현존하는 2,000여 개의 산성 중 유일하게 축조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삼년산성은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려 그 이름이 붙여졌다 합니다.
동문으로 이동하는 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각자 챙겨온 우산을 펼치고 줄지어 걷습니다.
나긋한 해설과 토독토독 빗소리가 어우러져 특별한 역사기행을 만듭니다.
해설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동문은 성벽이 아주 웅장하게 잘 남아 있습니다. 동문에서 봐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성벽의 높이와 구조입니다. 성벽이 높기도 하지만 동문의 구조로 신라인들의 지혜를 알 수 있습니다. 동문은 복도를 지그재그로 만들어 바로 통과할 수 없어 그 성벽 위에서 신라군들이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성벽 제일 아랫부분에 물이 빠지는 배수구입니다. 성을 만들 때 제일 중요한 것은 풍부한 수량입니다. 물이 없으면 싸울 수가 없지 않습니까? 여기 오목한 곳이 물을 저장하는 연못이었습니다. 물을 저장하고 보관했다가 식수로 썼습니다. 물이 많을 때는 물이 넘쳐 성이 엉망이 되지 않도록 배수구를 통해 바깥으로 내보냅니다. 성벽 제일 아랫부분에 배수구 받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받침이 있어서 폭포처럼 받침으로 떨어집니다. 성벽으로 물을 흘러내리면 성벽의 윗부분이 물의 흐름으로 침식되어 성벽이 무너집니다. 배수구의 구멍을 보면 바깥 물 빠지는 곳까지 일직선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이 약간 굽이쳐서 속도를 살짝 줄여주도록 만들었습니다.
동문, 남문을 지나 서문으로 향합니다.
옆에 보면 넓은 연못 형상이 보입니다. 실제 연못입니다. 이 연못 이름은 ‘아미지’ 긴 눈썹이라는 뜻입니다. 이 성에 몇백 명이 살아도 이 연못에 물이 가득 차면 다 살 수 있었습니다. 삼년산성의 튼튼한 방어막과 함께 풍부한 물이 산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안에 떨어지는 빗물이 다 모여서 서문을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가서 여기는 매우 가파릅니다.
이 정도 완만한 곳은 달려와서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길은 최근에 만든 것입니다. 옛날에는 저쪽으로 올라와서 저 성벽 밑으로 길을 나와서 들어가야 했습니다. 적들이 성을 공격하려면 성벽 위에 있는 신라군들의 공격을 받으며 여기까지 와야 하니 뚫기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성을 공격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신라군들이 돌을 집어 던지고 화살 쏘고 뜨거운 물을 들이붓고 하는데 어떻게 뚫고 가겠습니까? 어렵사리 뚫었다 해도 또 연못입니다. 연못에 빠져 죽기도 했겠지요.
신라는 삼년산성을 쌓고나서 이 성이 자랑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신라가 나당연합군을 만들어서 백제를 먼저 물리치고 태종무열왕은 신라와 당나라가 함께 승전 잔치를 벌이기로 하는데요. 승전 잔치한 장소가 바로 이곳 삼년산성입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물리친 곳은 부여였는데 승전 잔치를 여기서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신라는 당나라가 지금은 동맹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까지 공격해 올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성을 가지고 있으니 절대 당나라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라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의미가 컸을 것입니다. 승전 잔치를 한다고 신라 사신을 따라 보은까지 온 당나라 지휘관은 이 성을 보고 ‘신라인들 만만치 않구나’ ‘이 산성에 이런 성을 쌓았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신라로서는 당나라 지휘관을 데리고 와서 일종의 무력시위를 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삼국 중에서 국가로서 가장 뒤늦게 출발하여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150년 정도 늦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신라는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보은에 삼년산성을 쌓았습니다.
왜 신라는 수도 경주를 보호하기 위한 경상도 부근이 아닌 '보은'에 산성을 쌓았을까요?
보은은 고대뿐 아니라 조선 후기, 불과 150년 전에도 굉장히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상주를 통해서 경상도로, 충주 방향으로 청주와 서울로, 대전을 통해서 전라도로 갈 수 있습니다.
통일에 숙원을 가지고 있던 신라는 한반도 중심지에 한강으로 가는 배후 기지를 마련하고 백제와의 접경 지역에 든든한 요새를 두어서 공격에 전진 기지를 확보하려는 요량이었습니다. 5세기 후반, 통일 200년 전부터 전략적 요충지에 거대하고 견고한 산성을 준비한 것입니다.
다시 산성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량으로 다음 행선지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으로 이동합니다.
늙으신 부모님을 남겨두고 집을 떠나온 지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청산에서 기포령이 내리던 날, 집 떠나기를 망설이던 나에게 단호히 말씀하시던 아버님의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쟁쟁하다.
"나라가 무너지고서야 어찌 부모 형제가 있겠느냐. 어서 채비하여 집을 나서라. 네 아우도 데려가라. 가서, 저 무도한 왜놈들과 서양 오랑캐들, 서울의 권귀(權貴)들을 물리쳐서 이 나라를 반석 위에다 두고 장차 만백성이 저마다 하늘님이 되는 세상을 열거라."
이인과 웅치 효포전투를 시작으로 우리는 우금치 능선을 오르내리며 관군, 일본군과 밤낮없이 혈전을 벌였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쏟아지는 왜놈들의 포탄과 총탄에 머리통이 꿰뚫리고 가슴팍이 찢기고 팔뚝이 떨어져 나간 동학농민군의 주검들이 골짜기마다 겹겹이 쌓여갔다. 찢긴 깃발 나부끼는 겨울나무 가지 사이로 게걸스럽게 날아드는 숱한 까마귀 떼, 까마귀 떼를 뒤로 한 채 우리는 피눈물을 흘리며 후퇴를 거듭했다.
갑오년(1894년) 11월, 무명 동학농민군
역사기행 참가자들이 동학농민혁명군 위령탑 앞에 동그랗게 반원을 그려 섰습니다.
그 앞에서 동학의 창시부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까지 자세한 설명을 듣습니다.
"1800년에 정조 임금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부터 60여 년 동안 조선은 안동김씨, 안동권씨, 풍양조씨 세 집안이 정부의 중요한 자리를 다 차지하고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중요한 자리를 뇌물을 주고 올라가니 그 자리에 있을 때 엄청나게 재물을 착복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백성들이 먹고살기 힘들었던 1800년대 초반부터 평안도에서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1800년대 중반부터는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또 기후 변화로 동아시아 지역에 대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우리나라 백성들은 1860년대부터 조선을 떠나 두만강 압록강으로 건너가 타국을 전전하던 것이 150년 전 역사입니다.
동학 창시자 최제우는 200년 전 명문가인 경주 최씨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인내천’ 곧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동학사상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때 농민들에 대한 수탈도 가중되었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을 바꾸겠다, 내지는 정부를 뒤집겠다는 세력과 연결되어 동학농민운동으로 동학농민혁명으로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 동학농민항쟁이었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최제우는 13글자로 된 주문을 만들었습니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천주를 모시면 세상이 모두 조화롭게 되고, 이것을 영원히 잊지 않으면 만물의 이치가 다 이해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천주는 천주교, 개신교의 하느님이 아니고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섬겼던 옥황상제를 말하니 거부감도 없었습니다. 또, 얼마나 쉽습니까? 나라가 점점 망해가고 외세가 밀고 들어오던 때에 이 13글자 주문을 열심히 외우면 모든 액운이 다 피해 가고 구제받을 수 있다고 하니 조선 백성들에게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2대 최시형은 같은 경주 사람으로 최제우의 사상을 배우며 제자가 되었습니다. 최제우가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누명을 쓰고 죽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습니다. 이 지역 저 지역을 숨어다니며 교세를 확장하고 교도를 늘렸습니다. 스승 최제우가 사형선고를 받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의 제자로 알려지면 바로 잡혀가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길어야 한 달 두 달 정도 있다가 계속 처소를 옮기며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당시 서학이라 불리던 천주교는 교도가 늘어서 공인이 된 상태였습니다. 천주교는 신을 숭배하는 종교였습니다. 최제우가 세상 이치를 보니 모든 것이 평등한데 서학은 신이란 존재를 만들어 인간을 억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서학에 반대해서 그 사상을 동학이라 하였습니다. ‘사람은 다 평등하다’라는 사상은 많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져 순식간에 확산되었습니다.
동학이 퍼져 나갈 때 약간 급진적인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최제우 선생님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했습니다. 먼저 공주로 가서 상소를 올렸지만 묵살당했습니다. 손병희를 비롯한 40여 명이 광화문 앞에서 상소를 올렸습니다. 광화문에서 상소를 올리는 것은 도끼로 내 머리를 쳐도 좋다는 각오로 하는 것이라 ‘지부(도끼를 들었다는 뜻)상소’라고도 합니다. 나라에서는 상소를 들어줄까, 약간 고민하던 차에 유생들이 ‘동학교도는 반란군이다’라는 상소를 올려서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버렸습니다.
다시 최시형을 비롯한 수많은 동학교도가 보은에 모였습니다. 이를 ‘보은취회’라고 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서양과 일본을 몰아내자(척양척왜)’라는 구호를 본격적으로 내걸기 시작했습니다. 교조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운동에서 본격적인 반정부 투쟁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무려 2만 7천 명이 모였습니다. 대표단을 관아에 보내서 자신들의 요구를 강력하게 제기했습니다. 나라에서는 어윤중을 대표단으로 파견해서 동학교도들과 협상했습니다. ‘임금님께서 당신들의 충심을 충분히 알았으니 해산하고 생업에 종사해라. 과거를 묻지 않겠다. 그러나 해산하지 않고 무력시위를 하면 강력한 처벌을 할 것이다’ 보은에 모인 경상도, 충청도 동학교도 2만 7천 명은 나라의 약속을 믿고 해산했습니다. 이때 전라도 쪽 동학교도들은 전주 옆 원평 금구에서 전봉준 등 약 1만 명이 모여 집회를 하고 해산했습니다.
전라도 고부군(현 정읍시 고부면)의 군수 조병갑은 탐관오리였습니다. 온갖 수탈을 하더니 멀쩡하게 흘러가는 강에 ‘만석보’라는 둑을 쌓고 물값을 걷었습니다. 더는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항의하러 갔다가 몽둥이찜질을 당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전봉준의 아버지가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세가 컸던 동학과 착취당하였던 농민들이 결합하여 폭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동학농민항쟁입니다.
1차 봉기(1894.1) 때, 동학농민들은 진압하러 온 조선 군인들을 물리쳤습니다. 전라도의 중심이었던 전주성을 완전히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지 못한 조선 조정이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습니다. ‘청·일 양국 군대는 동시 철수하고, 동시 파병한다’라는 천진조약(1885년)을 명분으로 일본 군대까지 들어오자, 외국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은 동학농민들은 조선정부와 타협(1894. 5. 8)을 이루고 자진 해산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를 몰아내고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일본이 청나라를 공격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이 이겼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농민들은 이제는 ‘일본을 몰아내자’라고 2차 봉기를 했습니다. 삼례에서 모인 동학농민군은 전라도를 평정하고 서울로 올라가던 중 논산에서 공주 가는 길에 있는 우금치 고개에서 큰 전투(1894. 11)가 벌어졌습니다. 우금치 고갯마루 위에는 이미 일본 군대가 조선 진압군과 함께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농민군들은 관아를 털어서 무기를 썼는데 기껏해야 화승총이었습니다. 화승총은 한 방을 쏘고 솔을 밀어 넣어 총안에 있는 화약 찌꺼기를 털어내고 새 화약을 붓고, 새 화약이 압축될 수 있도록 종이 같은 것을 쑤셔 다져 넣은 후 쇠구슬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여서 쏘는 것인데 아무리 유능하게 훈련된 사람도 화승총을 쏠 때 최소 30~40초에서 최대 1분 정도 걸렸습니다. 그런데 일본군은 기관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관총은 손잡이로 돌리면 1분에 10발 정도를 쏠 수 있었습니다. 동학농민군들은 총을 다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낫, 도끼, 대나무를 꺾어서 만든 죽창을 가지고 공격을 했기 때문에 화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지고 후퇴했습니다.
2600여 명의 패잔병들은 바로 이곳까지 왔습니다. 보은에 동학교도가 많은 것을 알고 조선의 관군은 보은에 대기하고 있었고, 일본 군대도 따라 들어왔습니다. 김소천의 집에 동학농민군의 본부가 있었습니다. 조선 관군과 일본군이 이 집을 집중사격(1894. 12)하여 농민군 5명 정도가 죽고 지도부들은 다행히 살았습니다. 총소리를 들은 모든 동학농민군은 협공을 시작했습니다. 새벽에 전투가 시작하여 한낮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싸우다 싸우다 안 되니까 일본군들은 포기하려고 했는데, 조선 관군들이 일본군을 붙잡았습니다. 점심이 지나자 동학농민군들의 총소리가 줄어들고 잠잠해져 버렸습니다. 화약이 다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조선 관군과 일본군은 반격을 시작해서 2600여 명이 바로 이 근처 산하에서 다 한꺼번에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척양척왜를 내걸었던 곳도 보은이고, 우금치에서 지고 쫓겨 들어와 패잔병들이 마지막까지 싸웠던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을 만들고 이런 동상을 세웠습니다. 안타깝게 희생되었던 26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의 영혼을 위해 명복을 비는 간단한 묵념을 하겠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항쟁, 동학농민운동 등 용어를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이 사건의 명칭이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 다양합니다. 이번 대전충청지부 역사기행 계획서에는 동학농민운동으로 쓰고, 기행 장소는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입니다. 해설을 맡아주신 이승용 국장님은 동학농민항쟁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동학농민 전적지는 곳곳에 많습니다. 이곳뿐만 아니라 전라도에도 많습니다. 우리 근현대사에 아주 큰 분기점을 그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동학농민항쟁 때 20~30만 정도가 사망했습니다. 그 희생을 무릅쓰고 봉기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서 3·1운동 때 평화적인 만세시위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많은 무장독립투쟁을 할 수 있었고, 6·25 때 학도병을 비롯한 많은 순국선열이 있을 수 있었고, 4·19의거, 5·18 민주항쟁, 1987년 6월 항쟁으로 다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반란의 역도라는 누명을 썼기 때문에 이 산하에 버려져도 시신을 수습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곳곳에 여러 구의 시신이 암매장되기도 했습니다. 방치되기도 하고 이 근처 곳곳에 묻혀 있습니다. 저희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 현장을 지나칠 수 없지 않습니까? 동학농민들이 싸웠던 현장을 차로 쭉 한번 둘러보며 넋을 위로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제가 제일 선두에 있을 테니 소형차들이 먼저 따라오시고 대형 버스는 제일 후미에서 한 바퀴 지나며 가겠습니다."
점심시간입니다. 법주사 근처 조각공원 풀밭에서 도시락을 먹기로 되어 있었지만, 점점 빗방울이 굵어져 각자 타고 온 차량에서 식사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소풍 나온 듯 따뜻한 햇볕을 쬐며 돗자리 깔고 도시락 먹는 그림을 상상하다가 거세진 비에 조금 서운함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세종지회와 대전지회 회원들은 타고 온 버스 안에서 식사했습니다. 어떤 회원은 학창시절 수학여행 버스가 생각나 재미있었다고 합니다. 한 회원이 "비 오는 날은 전인데!"라고 말하자 다른 회원이 "아냐, 비 오는 날은 절이지!"라고 받아치며 버스 안에 한바탕 웃음꽃이 피기도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법주사로 향합니다.
속리산 법주사의 창건 설화를 듣습니다.
신라시대 의신스님이 인도에서 불경을 직접 나귀에 싣고 와 절을 지을 땅을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경전을 싣고 가던 나귀가 더는 움직이지 않아 주변을 둘러보니 산세가 빼어나 이곳에 절을 지었습니다. 절 이름은 부처님의 말씀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로 법주사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법주사는 국보와 보물이 많은 절입니다. 지금의 법주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고 재건한 모습입니다.
금강문을 지나 오른편에 큰 무쇠솥이 눈에 띄었습니다. 3000명분은 족히 넘게 밥을 지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무쇠솥입니다. 이 무쇠솥은 한때 법주사에 3000명 이상의 스님이 머물렀음을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우산을 들고 무리 지어 둘러보기에 다른 방문객들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한곳에 모여 설명을 모두 듣고 각자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역사기행의 마지막 행선지 '정이품송' 앞에 섰습니다.
정이품송의 나이는 약 600살 정도라고 합니다.
'정이품'은 현재 장관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벼슬 이름입니다. 세조가 이 나무의 도움을 두 번이나 받아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기행을 마치며 대전충청지부장 권유숙 님이 마무리 인사말을 나누었습니다.
"국장님이 먼 길 달려오셔서 함께 선조들의 정신과 역사가 깃든 곳을 돌아보며 지역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습니다. 삼년산성부터 길이 가팔라서 회원분들 무릎이 괜찮으실지 걱정했습니다. 그래도 비 오는 궂은 날씨에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가하셔서 오래 써야 하는 다리(웃음) 관리 잘 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음 역사기행에서 뵙겠습니다."
세종지회 실천 담당 조주호 님도 짧은 인터뷰에서 감사함을 전했습니다.
"버스 기사님이 차 안에서 식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또 우리 회원들이 진지하게 역사기행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감사했고요. 오랜만에 오프라인으로 만난 회원들과 웃고 떠들다 보니 해설을 놓친 부분도 있는데, e-실천학교에서 수강하면 더욱 기억에 남는 역사 공부가 되지 않을까 해요."
이어서 대전충청지부 실천활동팀장 심태숙 님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대전충청지부에서 처음 진행한 이번 역사기행은 지회장 회의에서 결정된 연초 계획이었습니다. 이후에 각 지회 실천 담당들과 함께 장소를 정했습니다. 비가 와서 더 좋은 역사기행이었습니다.
60명 정도를 참가 예상 인원으로 잡고 모집했는데, 이승용 국장님이 해설을 해주신다고 하자 신청자가 100명이 넘었어요. 진행에 무리가 없을 것 같아 신청자 모두 받아서 진행했습니다. 줌으로 참여하는 방식이 참 편리했고, 이승용 국장님의 상세한 해설과 안내 덕에 회원들의 만족도가 높습니다. 오늘 역사기행이 참 좋아서 다음에도 또 계획이 세워지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안내와 해설을 맡아주신 이승용 국장님과 짤막한 인터뷰를 했습니다.
"오늘 해설하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보은도 우리 역사에 굉장히 중요한 유적지가 있는 곳입니다. 평소 오기 힘든 곳인데 역사기행 덕분에 방문하게 되어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이 지역 역사를 함께 공부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법주사는 절이라서 회원분들이 친숙하게 찾는 방문지일 것 같습니다만 삼년산성이나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은 일부러 찾아가기 힘든 곳일 것 같습니다. 이 두 곳이 역사기행에 참여하지 못한 독자분들께 좀 더 자세히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신라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세운 국가입니다. 삼년산성 건설 사업을 통해서 국력을 하나로 결집했던 신라에 의해 통일 숙원이 이루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땅 아래 '기필코 눈부신 봄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던진 농민군의 주검이 묻혀있습니다. 내가 누리는 이 봄은 결코 우연히 맞이한 것이 아님을 되새깁니다. 내년 3월 즈음 여기저기 진달래가 피어나면 이제는 눈물에 번져 꽃불로 아른거릴 것 같습니다.
12월 18일 꼭두새벽, 마을을 둘러싼 산자락에서 적들의 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최후의 결전!
골짜기마다 까마귀에게 눈알 뺏기고 심장 파헤쳐진 채 나뒹굴던 벗들이여 형제들이여. 아, 수많은 농민군이여.
우리의 피와 살과 뼈가 흩어진 이 산하에 고이 잠들라.
그대들을 따라 저 쏟아지는 눈보라 뚫고 왜놈들의 총구를 헤치고 이 깊은 역사의 겨울을 넘어가리니.
기필코 눈부신 봄을 맞으리니. 진달래 되어 조선 산하 굽이굽이 꽃불 밝히리니.
-갑오년(1894년) 12월, 무명 동학농민군
글_서기남(서울제주지부 양천지회), 김난희(강원경기동부지부 원주지회)
사진_이승준(광주전라지부 전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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