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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형제 중 둘째로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가게 일로 매우 바쁘셔서 형과 저 둘만 집에 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형은 어린 저를 많이 때렸습니다. 2시간씩 때릴 때도 많았습니다. 형의 폭력으로 집에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 할아버지가 계시는 시골에서 살게 해달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도 형의 폭력을 아셨지만, 저를 이해하지는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형은 연년생 동생인 저 때문에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못 받아서 그랬던 것 같지만 형이 왜 그렇게까지 저를 때렸는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어릴 때부터 어둡고 무거웠습니다.
부모님에게는 착한 모범생이었습니다. 바쁘신 부모님의 심부름도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 20살 이후에 방황을 시작하였습니다. 집이 싫어 집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술 먹고 친구 집에서 자기 일쑤였습니다. 데모하다 구치소에도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구치소에 있던 두달 내내 아버지는 하루도 안 빠지고 면회를 오셨습니다. 그 당시 부모님의 가슴에 못을 많이 박았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이후, 제가 옳다고 믿었던 신념들이 무너지고 친구가 자살하는 일들을 겪으며 희망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길을 잃었습니다. 그 당시는 훤히 밝아오는 아침이 싫었습니다. 기형도 시인의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는 말과 같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랬습니다. 아내는 대학에서 만난 1년 후배였습니다. 10년의 연애 후 결혼하였습니다. 저에 대해 잘 참아주고 너그러운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평탄했습니다. 아이도 4명 낳았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부양의 부담감에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법륜스님의 사진을 올리는 한 청년의 블로그를 통해 스님과 정토회에 대해 처음 알았습니다. 평소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 큰아이와 템플스테이를 자주 다녔습니다. 불교의 여러 가지 개념들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집 근처에서 화계사 불교대학 모집 현수막을 봤을 때는 저도 다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스님의 책 《깨달음》을 읽었습니다. 책 내용 중 ‘나는 길가에 핀 풀 한 포기와 같다.’라는 구절이 크게 와 닿았습니다. ‘자기가 별것이 아닌 걸 알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는 스님의 말씀에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밤을 새워 책을 다 읽고 불교를 배우려고 정토 강북법당에 전화하여 불교대학에 등록하며 정토회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불교대학 다닐 때 수업 시간의 반은 졸았지만, 법당을 나갈 때면 환희심이 몰려왔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배울 때는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해외 출장으로 한번 결석하여 개근은 못 하고 정근을 했습니다. 도반들과 같이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습니다.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정토회 들어온 후 여러 변화가 있습니다. 첫째, 저의 표정이 밝아졌고 잘 웃습니다. 아내도 그 부분이 제일 많이 변했다고 말합니다. 평소 아내가 세상 근심을 혼자 다 짊어진 사람 같으니 얼굴 좀 펴고 살라는 말을 했었는데, 지금은 자주 웃습니다. 둘째, 제 고집을 많이 내려놓았습니다. 고집이 센 저에게 제일 힘들었던 ‘네’ 하고 합니다’라는 명심문 덕분에 집전자 교육도 받았고, 천도재도 배웠고 춤추는 봉사도 했습니다. 셋째, 어떤 일도 가볍고 긍정적으로 대처합니다. 제가 하나에 사로잡히면 그것에 너무 몰입하는 경향이 있는데 요즘은 큰일을 마주쳐도 가볍게 ‘별거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제일 많이 변한 것은 예전엔 문제 삼던 것들에 가볍게 대처하는 것 같습니다. 회사 일이 잘 안 풀려도 예전처럼 직원들을 닦달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지 직원들도 최선을 다했을 거야’라며 넘깁니다. 삼수 하는 첫째 아이의 일도 역시 ‘그럴 수도 있지. 대학은 몇 년 늦게 가도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정토불교대학 담당을 하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한 학생이 수업 중 자기 생각과 다르면 하나하나 다 따졌습니다. 인도 성지순례 영상에 나오는 대중들의 염불하는 모습을 보고는 좀비들이 모여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불편한 마음이 들어 법사님께 질문드렸더니, 법사님은 학생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거라고 답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분별하며 왜 그런 것을 하느냐고 질문하는 그 학생에게 불편한 마음이 계속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따지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그 학생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그 학생과 똑같은 저를 봤습니다. 저와 다른 생각을 하는 그 학생의 생각을 저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옳다는 생각이 강한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제 생각을 내려놓고 숙였습니다. 그 후 그 학생과의 관계도 원만해졌고 그 학생도 무사히 불교대학을 졸업했습니다.
9-5차 천일기도 입재 후 지금까지 1,500일 정도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기도합니다. 알람이 울리면 바로 일어납니다. 기도를 빠지지 않는 이유는 저에게는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편안함을 놓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불교대학과 경전반 다닐 때 저를 이끌어 주셨던 분들 덕분입니다. 모두 수행을 잘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추울 때나 더울 때나 기도 하자고 하면 저도 따라서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따라 했습니다. 2018년 수행일지에 보니 그때의 마음은 여러 가지로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편안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자고 하시니 따라 했고 그러면서 편안해졌습니다.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하시는 주명법사님 또한 저에겐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입니다.
정토회에 들어오기 전에도 5시에 일어났습니다. 언제나 제가 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일찍 일어나 1시간씩 공부하고 출근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저에게는 큰 부담은 아니었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저를 아내와 아이들이 정말 대단하다며 칭찬합니다. 정토회에 들어온 후 퇴근 후 법당에 갈 때 아내와 아이들이 아빠는 왜 집에 돌아온 후 다시 출근하냐고 했습니다. 온라인으로 전환한 후에도 여러 소임을 맡았기에 집에 있으면서도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저를 많이 도와주고 지지합니다. JTS봉사나 정토회 행사에 아이들과 함께 가기도 했습니다. 봉사가 때로는 힘들기도 하지만 제 공부가 되니까 꾸준히 계속하려 합니다.
예전을 돌아보면, 4명의 아이들 양육과 아프신 처가 부모님 일로 아내는 많이 바빴습니다. 아내는 저에게 너그러웠는데, 저는 아내를 이해해주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저의 원칙을 적용해 화를 많이 냈습니다. 지금은 아내와 아이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많이 참회하고 있습니다. 형과의 사이도 나아져서 만나면 1~2시간씩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지금처럼 편안하게 기도하고 봉사하는 삶을 죽는 날까지 하는 것이 저의 서원입니다.
자극적이어야 재미있다는 이상한 편견을 가진 희망리포터가 더 굴곡진 삶을 내놓으라고 채근하는데도 휘둘리지 않고 편안히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 기도 시간이 꿀 같은 시간이라는 말씀에 아침 기도시간의 편안함이 저에게도 느껴지는 인터뷰였습니다. 코로나 시기라는 핑계로 아침 수행을 잘하지 못하고 있는 저도 다시 수행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환한 얼굴처럼 오래오래 행복한 수행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글_오미영 희망리포터 (서울제주지부 성동지회)
편집_최미영 (서울제주지부 서초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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