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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얼마나 많은 마장을 이겨낸 것일까요? 2014년 천일결사 입재 후 단 하루도 기도를 빼먹지 않은 정준채 님. 법륜 스님께서 “으이구, 참 융통성도 없다, 하하.” 하시며 반어법으로 칭찬하셨을 이분은 아니나다를까 2-1차 천일결사 회향식에서 ‘매일기도상’을 받았습니다. 인경지부 부천지회 구월모둠 모둠장 정준채 님을 만나보겠습니다.
누구나 삶을 관통하는 결정적인 장면을 품고 살아갑니다. 저에게는 열 살에 겪은 교통사고가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부모님은 고향 부여에서 서울 흑석동으로 이사와 채소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한창 바쁜 김장철이어서 배추와 무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아버지가 앞에서 끌고 저는 뒤에서 밀며 가고 있었습니다.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택시가 미끄러지며 리어카를 들이받았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제 몸이 택시 밑에 반쯤 들어가 있었습니다. 택시 기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얘야, 괜찮냐?” 하고 묻기에 엉겁결에 “괜찮아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른쪽 허벅지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습니다.

허벅지 뼈가 부러진 골절이었는데, 나이가 어리니 수술 대신 다리를 추에 매달아 허벅지 근육과 뼈를 강제로 늘려 맞추는 치료를 먼저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침대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온몸을 비틀어대는 바람에 다리를 매달았던 줄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의사들은 “이제 수술 외엔 방법이 없다”고 했고, 주위에서는 ‘어쩌면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죽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제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이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결과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또렷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전신마취에서 무사히 깨어났고, 철심을 박은 채 엉덩이부터 허벅지까지 통깁스를 하고 두 달간의 긴 병원 생활을 버텨냈습니다.
이 사건은 제 무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어쩔 수 없는 한계와 상황은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는 삶의 태도를 스스로 체득했기 때문입니다.
퇴원 후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작용을 우려한 선생님들 때문에 체육 시간에 참가하지 못하고 교실에 홀로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몸을 쓰는 일은 하기 어려우니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공부에 흥미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아프리카에서 극심한 기아 때문에 불에 탄 시체까지 먹었다는 기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기호식품 대신 식량을 생산하면 기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세계가 지닌 모순을 실감했습니다. 1979년 10·26 사태를 겪으며 우리나라 역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대학 진학 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으로 이어졌고, 1986년에는 학교를 그만두고 인천으로 가 생산직 노동자로 살았습니다.

노동조합 지원단체에서 활동할 무렵, 한 선배의 소개로 4박 5일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어떤 교육인지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무작정 짐을 싸서 갔는데, 〈깨달음의 장〉이었습니다. 1992년, 저는 그렇게 멋모르고 제13차 수련생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수행을 일찍 접할 수 있었던 귀한 기회였지만, 당시에는 그저 ‘이 프로그램을 노동운동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만 생각했습니다.
그해 가을 결혼하고 1993년 가을학기에 제적당한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마쳤습니다. 이후 대우자동차(현 한국GM) 기획실에 입사하며 본격적으로 대기업 직장인으로 살았습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야근과 회식으로 두 아이의 육아와 가사는 고스란히 아내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던 2007년, 두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아내는 정토회에서 봉사와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저보다 먼저 〈 깨달음의 장〉에서 법륜 스님과 수련했고, 언젠가는 정토회에서 봉사하겠다는 생각을 아이들이 자라자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저는 아내의 활동을 지켜보며 정토회 활동을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회사일로 바빠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정년퇴직을 하면 정토회에서 봉사하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회사에 정시 출근, 정시 퇴근 문화가 정착되면서 저녁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마침 집 근처에 부천법당이 새롭게 문을 열었습니다. 정년퇴직 후 봉사할 곳이라 생각해 미리 정토회 사상과 이념을 배워두겠다는 마음으로 2014년 봄,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입학한 지 3주 만에 천일결사 8-1차 입재식에 참석하면서 인생을 바꾸는 매일 기도의 대장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정토회를 만나기 전에도 이런저런 고민이나 다른 사람과의 갈등은 있었지만 그것이 저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받아들이고, 해결할 수 있는 건 해결하면 된다는 삶의 원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토회 수행을 시작하고 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직장에서 “왜 그렇게 화를 내며 말하세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평소처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목소리 높여 직장 후배에게 말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다른 후배가 제 모습을 지적한 겁니다.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 찾아왔습니다.

늘 ‘토론’이자 ‘강조’라고 생각했던 저의 큰 목소리가, 감정적인 ‘화’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차린 것입니다. 돌아보니, 회사의 절차를 잘 지키지 않고 요구하는 동료들에게 제가 얼마나 자주 언성을 높였는지 비로소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내가 옳다는 강한 집착이 주변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매일 새벽 기도할 때 전날 제가 쏟아낸 말과 행동을 하나하나 낱낱이 들여다보며 참회의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언성을 높이지 않고 대화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오랜 업식이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았지만, 꾸준히 연습한 덕에 화를 내는 일이 줄었습니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내니 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화내며 말하던 업식을 고칠 수 있었던 것은, 천일결사 기도를 시작할 때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장이나 여행을 갈 때도 방석과 염주를 챙겨 어디에서든 무조건 기도했습니다.

한번은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보니 새벽 2시가 넘었습니다. 그대로 잠들면 새벽에 못 일어날 것 같아 옆방에 들어가 천일결사 기도를 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빈소에서 기도를 이어갔습니다. 원칙을 중시하고 절차·규칙·계율은 꼭 지키려는 성향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게 한 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제 마음속 분별심을 키운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제 안의 시비 분별심을 가장 치열하게 시험했던 무대는 27년을 일한 직장이었습니다. 회사에는 저와 성향부터 일하는 방식까지 너무나 다른 동료가 있었습니다. 제 기준에서 그는 철저히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보기 시작하니 해가 갈수록 그 동료에 대한 거부감과 싫은 마음이 깊어졌고, 나중에는 미움으로 번졌습니다. 업무상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예 말도 섞지 않고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철저히 멀리했습니다.

하지만 업무가 바뀌면서 그 동료와 공동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늘어나자 마음이 무척 불편해졌습니다. 일을 충실히 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저는 이 고통을 피하는 대신, 새벽마다 천일결사 기도를 하며 그 동료를 수행의 과제로 삼아 정면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업식과 행동방식도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거듭했습니다.
끈질긴 정진 끝에 마침내 마음에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사적인 감정을 완전히 내려놓고, 그 동료와 제가 서로에게 필요한 역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덤덤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내 기준을 꺾고 상대를 포용하자 관계는 거짓말처럼 원만해졌습니다. 이제는 필요한 일이 있으면 제가 먼저 가서 아무런 부담 없이 편안하게 의논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20년 가까이 묵은 미움이 수행을 통해 완전히 사라진 짜릿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렇게 단단해진 수행력은 2023년 5월 말, 갑작스럽게 찾아온 퇴직의 순간에도 저를 지켜주었습니다. 정년을 불과 1년 10개월 앞두고 희망퇴직을 권유받았고, 수락하지 않으면 후배 밑에서 일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인사팀의 대우에 잠시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 마음을 바꿨습니다. 처음에는 후배 밑에서 일하는 것쯤이야 수행자인 내가 감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계속 근무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작 제 상사가 될 후배가 난처한 상황에 놓일 것 같았습니다. 정년퇴직 후 정토회에서 온전히 봉사하려던 계획을 1년 10개월 앞당긴 것뿐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평온했습니다.
수행자들의 모임이니 정토회 활동은 마냥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저의 업식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수행자라면 이래야 한다’는 ‘원칙주의’ 때문이었습니다. 수행 초기 단계에 있는 일반회원이나 발심행자는 실수를 해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지만, 계위가 높고 소임이 큰 도반이 원칙과 절차, 규칙,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시비분별심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어, 모둠원들의 의견을 기한 내에 취합해야 하는데 계위가 높은 도반이 제때 답을 주지 않아 매번 개별 연락을 해야 하거나 습관적으로 마감을 어기면 답답함을 넘어 그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누구나 부족한 부분과 사정이 있습니다.”라는 기도문으로 새벽 기도를 했습니다. 저마다 자기 업식이 있고 그것은 내가 바꿀 수 없는 부분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연습이었습니다. 내 안의 잣대를 내려놓으니 도반들을 향해 불쑥 솟구치던 시비심이 눈 녹듯 사라졌고 마음은 한없이 가벼워졌습니다.
12년을 매일매일 기도한 덕분에 지난 2-1차 천일결사 회향식에서 '매일기도상'을 받는 영광도 누렸습니다. 주변에서도 “인상이 좀 달라진 것 같다. 훨씬 편안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꿈꾸던 대로 정토회 봉사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습니다. 2-1차 천일결사 첫해에는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진행자로 쓰였고, 둘째 해에는 모둠장 소임을 맡았습니다. 작년에는 백일법문 기간 동안 정토사회문화회관 출입 봉사와 정토불교대학 진행자로, 가을에는 정토불교대학 반담당으로 잘 쓰였습니다. 2-2차 천일결사가 시작된 지금은 구월모둠장과 인경복지 다문화담당 소임을 함께 맡고, 평화재단 연구생 과정에도 참가하며 봉사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제 뜻대로 결정되지 않으면 마지못해 '욕먹지 않을 정도'로만 소극적으로 봉사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흐름을 아름다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기에 결정된 일에는 누구보다 기쁘게 '예' 하고 실행합니다.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물러서는 마음 없이 가볍게 쓰이고 싶습니다. 혹시라도 저에게 아무런 소임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제가 잘할 수 있고 관심 있는 분야를 ‘찾아서라도’ 끝까지 봉사할 생각입니다. 70세까지 전법회원으로 당당하게 쓰이며 전법의 길을 이어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지치지 않고 계속 수행하고 봉사하도록 이끌어준 선배 도반이자 법사님인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부부가 같은 마음으로 한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요즘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겨우 열 살에,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정준채 님은 바위처럼 단단했습니다. “인생이 크게 바뀌는 큰 감동은 없지만 꾸준한 기도로 묵묵히 봉사하는 삶을 사는 이야기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담담히 풀어간 두 시간의 인터뷰는 시간이 짧다 느껴질 만큼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정준채 님은 기도하는 동안 별다른 마장이 없었노라 말했으나, ‘기도하는 삶’을 온전히 받아들였기에 마장의 속삭임에 마음을 내줄 틈조차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꾀 부리지 말고, 하기로 한 것은 그냥 하라는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도반님의 수행담이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글_김옥자 희망리포터(서울제주지부 양천지회)
편집_박선희(강원경기동부지부 수원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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