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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회 직능 모임 중에는 '의료인정토회'가 있습니다. 의료 현장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과 마주하며 수행을 이어가는 분들입니다. 환자를 진료하고 돌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고통을 덜어주는 일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 노력하는 의료인정토회 회원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들의 수행과 삶, 그리고 인연의 여정을 담고자 특집을 기획했습니다. 의료인의 다양한 경험이 의료인 도반들에게 용기를 붇돋우고, 더 많은 의료인이 수행자의 길에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19세 어린 나이에 ‘군함도’에 징용되었다가 그곳에서 해군으로 파견되어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 트라우마 때문인지 아버지는 거의 매일 술에 취해 지냈습니다. 지독히 가난한 시골에서 저는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주걱만한 큰 숟가락을 가슴에 품는 태몽을 꾸고 저를 낳았다는데, 그 때문인지 제가 태어나고부터는 밥이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저는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학업 성적도 좋아 “뭐가 돼도 될 사람”이라는 주변의 기대와 칭찬을 받으며 어엿한 청소년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에서 누군가에게 둘러싸여 매를 맞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누가 때리는지 몰랐는데, 그게 친척들인 것을 알고 너무나 놀라고 심장이 떨렸습니다. 문중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가 친척들에게 맞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에게 큰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그날의 충격은 제 마음속에 뜨거운 불덩이처럼 남았고, 그 속에 갇혀 가끔씩 폭발하고 분노하는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따뜻한 가족이 있어 삐둘어진 마음을 어르고 달래며 성공의 꿈을 키워갔고, 반드시 성공해서 저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자꾸 화가 났습니다. 마음속에 눌러놓은 분노와 열등감을 들킬까 두려워 불안을 안고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마음속 울렁거림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운 좋게도 저를 편안한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였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도 태어났습니다. 불안하던 제 삶에도 서서히 단비 같은 편안함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서초동에서 학원을 운영하며 단란한 가족 울타리 안에서 마음속 울렁임이 잦아들 즈음, 아내의 권유로 가족의 49재에 참여했다가 한 스님을 만났습니다. 성치 않은 한복에 흰 고무신을 신고 홀연히 나타나 법문을 해주는 그분은 막 출가한 듯한 젊은 스님이었습니다. 스님의 투명한 눈빛에서는 당당함과 따뜻함이 느껴졌습니다. 저를 위한 법문이 아니었음에도 법문을 듣는 내내 제 모습을 비추어볼 수 있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기를 살고 있다고 착각했는데, 빠른 성공과 출세를 좇아 조급하게 살고 있는 것이 당시 제 진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굴레에서 벗어나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그전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이었습니다.
마음을 깊이 흔들어 제 정체성과 정신마저 뒤흔들어놓고는, 친필 사인이 담긴 책을 주면서 불교 공부를 계속하라고 권하고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제 인생 최고의 선물인 법륜 스님, 그리고 정토회와의 첫 만남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아내에게 “여보! 나 마음이 참 편안해졌어. 젊은 스님이 완전 큰스님 같은 법문을 하시네. 저 스님은 진짜야. 우리 이번 생은 저 스님만 따라다니자!”라고 말했고, 아내 역시 제 말에 격하게 공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그게 당연한 최선이라 여기며 살아갔습니다. 스스로를 해치는 독인 줄도 모르고 그런 일상을 살아내던 중,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건강 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다 ‘중국으로 건너가 한의학(漢醫學)을 배워 스스로 고쳐보자’는 결심을 했고, 다른 삶에 도전해보기로 하였습니다.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떠나온 중국 유학길이었지만, 성치 않은 몸에 유학생이라고 하기엔 좀 늦은 나이였습니다. 성공을 향한 마음이 앞서 저는 또다시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욕구와 결핍은 학업에 열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성적은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습니다. 성실하고 유연한 태도로 교수들에게 인정받으며 앞날이 창창한 ‘우롱타이(중국어로 오용태를 발음한 것)’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맺은 인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지도교수에게 “중국에서 교수로 자리 잡는 건 걱정하지 말고 넌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학생활이 안정될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헛헛했습니다. 잘못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한과 살면서 저지른 실수에 대한 기억과 원망, 증오, 불안, 좌절 등이 밀려왔습니다. 겉으로는 자리가 잡혀가는데, 실제 제 마음은 안정과는 다른 끝을 향해 달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오던 깨달음의 장(이하 ‘깨장’)에 다녀오기로 결심하고, 깨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인생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성공만을 목표로 삼던 삶에서 벗어나 욕심 없이 살겠다는 의지를 굳게 다지며 베이징으로 돌아왔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깨장에 참여했다가 새털처럼 가벼워진 마음으로 베이징 정토법회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법회라고 해봐야 TV를 통해 스님의 법문 비디오테이프를 함께 본 뒤 나누기를 하고 공양을 하는 게 전부였지만 집에서 법회를 진행하며 마음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 혼자 법회를 하는 날도 있었지만, 어떤 날은 한 명 또 어떤 날은 여러 도반과 함께하며, 행복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함께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법륜 스님은 베이징에 방문하실 때마다 “호텔에서 숙식하는 게 불편하다”며 좁고 지저분한 제 하숙집에서 머물기를 청하셨습니다. 스님이 오신다는 연락을 받으면 저는 부랴부랴 집으로 가서 이부자리를 개고, 미뤄둔 설거지를 하며 집안을 정리했습니다. 그 무렵에는 스님이 한 달에 한 번꼴로 집에 오셨는데, 그때마다 집을 치우면서 법륜 스님이 오실 때와 평소 모습의 차이가 커서 스스로 부끄러웠습니다. 스님 앞에서 한껏 지식 자랑을 하고 있을 때 스님의 촌철살인 한마디에 깨닫기도 하며, ‘앞으로도 스님께 항상 점검받는 마음으로 생활해야 하니, 이 기회에 나도 스님처럼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저의 생활이 달라지자 학교에서는 나이 어린 친구들이 저를 ‘스님’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정토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인연도 깊어졌습니다. 어느 날 중국 공안에 잡혀 있는 탈북자 10여 명의 안부를 확인해달라는 정토회 실무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는 곧장 낡은 배낭을 챙겨 메고 톈진에 있는 국가보위대로 향했습니다. 만약을 위해 다음 학기 학비로 준비해둔 250만 원 정도의 돈도 챙겼습니다.
그러다 문득 한국에 있는 아내와 세 살짜리 아들이 떠올랐습니다. 탈북자를 돕는 활동가로 중국 공안에 알려지면 교수가 되기 위한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은 물 건너가고, 최악의 경우 한국으로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엄습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내 ‘만일 내가 지금 그들이라면 어떨까?’, ‘그때 세상 사람들이 나와 내 아이를 외면하면 얼마나 서글플까?’라는 생각을 하며 용기를 냈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은 시간이 꽤 많이 지난 지금도 상세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때의 저는 그곳에 갇힌 분들을 무사히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원하던 결과를 얻긴 했지만, 그 뒤에는 반갑지 않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전이던 중국은 5가구 감시제가 살아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2박 3일간 국가보위대에 갔다 돌아오니, 누군가 제 집에 들어와 뒤졌는지 현관문이 부서진 채 열려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저는 이전의 촉망받는 ‘우롱타이’가 아닌 감시받는 ‘미운오리새끼 오용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정부와 학교의 감시와 왕따 등 노골적으로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고,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하며 매 순간을 모면하고자 하였으나 한번 찍힌 이상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중의과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베이징에 오신 법륜 스님이 제게 앞으로 진로를 물었습니다. 당시 저는 스스로 최고 실력을 갖춘 의사라고 믿고 있었고, 세상에 제가 고치지 못할 병은 없을 거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발급된 중의사 면허는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하기에 사실상 무용지물이었고, 국가보위대에 찾아간 일로 중국 정부에 찍혀 중국 내 입지도 불안정한 처지였습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스님이 갑자기 진로를 물으니 왠지 모를 오기가 발동해 “술장사나 하면서 살랍니다”라는 답을 내놓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동안 행복한 수행자의 삶을 산다고 해놓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산다고 해놓고, 법륜 스님의 삶을 존경하며 닮아간다고 해놓고 그런 말을 하다니! 스님은 그때 제 마음을 알아차린 듯 뜻밖의 제안을 했습니다. 5년 전에 인도에 지어놓은 병원이 있는데 환자는 많지만 돌볼 의사가 없고, 인도 정부에서도 외면하는 지역이라며 그곳에 가서 진료 봉사를 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스님, 그런 자리는 제가 가야죠”라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2006년, 의사로서 제 인도 생활이 시작됩니다.
2006년 5월 정토회 인도 자원활동가 중 의료팀으로는 처음으로 제가 인도 땅을 밟았습니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폭염에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보드가야로 향했습니다. 목적지인 수자타 아카데미 옆 지바카 병원에 도착하고 보니 그곳이 바로 부처님께서 6년 동안 고행을 하셨다는 그 유명한 둥게스와리입니다. 유영굴을 지나 부처님께서 오르셨다는 전정각산 돌산 위에 올라 아래로 펼쳐진 마을을 보면서 평화로움을 느꼈습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찾아오는 이들은 결핵환자가 다수였고, 그것도 내성이 생겨 치료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바카 병원에서 기르던 개 ‘검둥이’가 코브라에 물린 일이 있었습니다. 몸에 독이 퍼지면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고통스러워하는 검둥이에게 어떤 처치라도 해주고 싶어 침을 놔줬습니다. 그랬더니 검둥이가 정신을 좀 차리는 것 같았고, 이내 다시 의식을 놓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죽었습니다. 검둥이를 살리지는 못했지만, 이를 통해 저는 침술이 의식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깊이 체감했습니다.

스물대여섯 살이지만, 겉모습만 보면 중년 여성처럼 보이는 결핵환자가 있었습니다. 병원 진료를 아주 오랜만에 왔고, 그동안 약도 잘 먹지 않아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다 생각하여 자주 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타박하며 보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환자가 심근경색으로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그 여인은 남편과 시아주버니가 돌아가셔서 친자식과 조카를 포함해 2~3명의 아이들을 돌보며 힘들게 살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신 게 나의 꾸지람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죄책감이 밀려왔고, 환자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심리적으로 굉장히 위축되었습니다. 인간의 생명력이 강인하지만 동시에 참 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며 연구하였고, 진료만큼이나 환자의 삶에 대한 이해를 우선으로 했습니다. 환자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 소통한 결과 제가 결핵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기회로 삼아 결핵에 효과가 좋은 한약 처방을 찾아내는 기쁨도 맛보았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결핵으로 고생하고 있는 둥게스와리의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며 그들이 건강해지는 것을 지켜보니, 모든 존재가 다 이어져 있다는 부처님의 연기설이 떠올랐습니다.
인도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더위에 익숙해지는 일이었습니다. 병원의 진료 체계는 안정이 되어갔지만, 42~44℃까지 치솟는 기온에는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습니다. 하루에 아홉 번 열 번씩 물을 몸에 뿌려봐도 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까지 지쳐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습니다. 칭찬에는 기분이 좋아지다가 누가 불만을 표현하면 금방 분노가 끓어오르곤 했습니다.
어느 날 동료의 실수로 치료실 문이 잠기면서 저 혼자 그 안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진료실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여 주변 사람들을 많이 놀라게 했습니다. 그 후로 새벽마다 500배 정진을 했지만, 원망하는 마음과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인도에 온 지 3개월이 지났을 즈음 거울을 보니 그 속에 비친 제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몸은 깡마르고, 얼굴에는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보겠다고 인도까지 와서 진료했건만 정작 뒤돌아보니 그들은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가진 것에 감사하고 매일 방긋방긋 웃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저보다 더 잘살고 있는 사람들을 고치겠다는 생각 자체가 기고만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 속에서 오히려 저 자신은 행복하지 않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때 비로소 스님이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내가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여기로 오게 됐구나!’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그래, 행복을 배워가야겠다.’

그때부터 저는 그들과 똑같이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동네 일곱 살 꼬마가 소똥을 주물러 벽에 바르다가 저를 보고는 손을 들어 ‘나마스떼! 브라더’라고 인사하며 환하게 웃습니다. 행여라도 반갑다고 소똥이 묻은 채 저에게 달려들어 안길 것을 걱정하여 가까이 가지는 못하지만 저는 똑같이 손을 들어 인사했습니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만나는 사람마다 환한 웃음으로 인사하는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엇에든 ‘상을 짓지 말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돌아보면 미운 사람 투성이지만 내가 행복을 배우겠다고 결심한 이상 일곱 살 꼬마가 저에게 보낸 환한 미소처럼 동료들에게 상냥하게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동료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밉기만 하던 그들이 저와 함께 동행하는 귀한 존재로 보였고, ‘인도에 의사가 없어 힘든 스님을 돕기 위해 내가 기꺼이 스님의 제안을 수용했다’는 오만방자한 마음에서 ‘내 꼴을 보고 스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 기회를 주었다’는 마음이 보였습니다. 모든 것은 나로 시작해 나로 돌아오는 이치를 깨닫고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뾰족뾰족하던 제 성격도 둥글어지고, 매사에 겸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한층 성숙해졌습니다.
2007년, 지바카 병원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인도에 길게 남아 의술을 전할 생각이었지만, 아내와 자식이 있는 상황에서 그 결심을 끝까지 이루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정토회 회원 중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교류하여 의료팀을 구성하고 소임을 이어갔습니다. 입재식에 참여하러 온 정토회원들을 돌보며 그 소임 속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한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중의사 면허를 가지고 환자를 돌본다는 것이 혹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의료인 소임이 아닌 또 다른 소임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후 평화재단의 리더십아카데미 활동, 초창기 통일의병 창립과 교육본부장으로서 소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의 기초를 다지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은 일상으로 돌아와 재가 수행자로서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의사로서 사람 목숨을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인도에서의 경험, 스님의 말씀, 정토회와의 모든 인연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지금에야 과거를 돌이켜보니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제가 너무 분석하고 계산하며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추진력 있게 일을 해나가다가도 문제가 생기면 멈춰버리는 게 저라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묘덕 법사님이 수행을 멈칫거리는 사람들에게 ‘안 가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가는 만큼 내게 유리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정말 운 좋게 법륜 스님 그리고 정토회와 인연이 닿아 남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일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때론 가시밭길이라 느껴지는 외로운 길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걸어온 그 길은 걸어온 만큼 저에게 유익했습니다. 이미 일어난 모든 일은 다 좋은 일이었습니다. 한번 맺은 정토회와의 인연으로 언제든 돌아갈 것이고, 그 자리가 제일 행복한 자리라고 믿습니다.
글_오용태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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