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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하는 내내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습니다. 끝도 없이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양미경 님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느라 손에 땀이 나고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동시에, 이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스쳤습니다. 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다들 안전띠 매시고 뭐든 꽉 잡으시길 바랍니다.

아버지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매일 흰 알약을 먹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정신과 약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외도를 했고, 부부싸움이 잦았으며 딸들에게 비윤리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식사 중에는 자주 밥상을 엎었습니다. 그 시절의 엄마를 떠올리면, 뜰에 엎어진 밥상을 주워 담던 쓸쓸한 뒷모습이 먼저 생각납니다.
평소에는 멀쩡했지만 술을 많이 마시거나 기분이 언짢으면 순간적으로 돌변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어딘가 불안해 보였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습니다. 몇 년 전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책을 읽다가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어머니는 여섯 형제인 우리를 아버지로부터 탈출시키듯,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청도에서 부산 친할머니 집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아버지와는 대화를 나눈 기억도, 특별히 떠오르는 추억도 없습니다. 술을 마시면 분노에 찬 우울한 눈빛으로 벽을 노려보시던 모습만이 기억납니다.

저는 영어 통역사로 일했습니다. 인천공항을 지을 당시 해외 엔지니어들의 통역을 맡았습니다. 일하는 것은 좋았지만 아버지를 닮은 사람을 대할 때면 머리가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남자들과 일하며 업무 강도가 높은 통역 일을 하다 보니, 남자들에 대한 대인 기피증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틀에 갇힌 듯 답답했고, 그런 제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져 자책을 많이 했습니다.
인천공항에서 일할 때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나중에 정신과 의사가 제가 결혼한 것이 신기하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의 자상한 성격이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딸이 태어난 후, 남편에게 간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간염은 죽을병이었습니다. 남편의 병은 모계 쪽에서 유전된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외사촌이 젊은 나이에 간염으로 세상을 떠나자, 저는 겁이 났습니다.

이후로는 제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간염을 숨기고 결혼한 남편에게 사기 결혼을 당한 것 같아, 짜증과 화를 많이 냈습니다. 딸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6년간 왕따를 당했습니다. 왕따를 당하는 딸아이를 지켜보는 일은 제 삶에서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급기야 저는 갑상선암에 걸렸습니다.
수술 후 통역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남자들에 대한 기피증 때문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아버지들은 오지 못 하게 했습니다.
대인기피증으로 누군가와 어울리기보다는 늘 혼자 있기를 좋아하던 제가, 딸아이의 왕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 대문을 활짝 열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딸은 저와 달리 매우 활동적인 성향인데, 제가 늘 공부로 억압하고 화와 짜증을 냈더니 아이가 예민하고 불안해했습니다. 아이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마침 동네에 철학 수업이 있어 어떤 수업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가 먼저 수업을 들어 보았습니다. 그러다 철학의 매력에 빠져 주민들과 함께 10여 년간 공부했습니다.

철학 교재 중 달라이 라마의 《한 원자 속의 우주》를 읽고, 불교를 종교가 아닌 과학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흥미가 생겼습니다. 당시 오빠가 정토회에 다니고 있어서 저도 2022년 3월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불교대학 수업 중 스님의 법문을 한 글자 한 글자 전부 옮겨 적었습니다. 그만큼 간절했고, 괴로움의 근원이 궁금했습니다.
불교대학를 마치고 경전반에 다니던 중 〈깨달음의 장1〉에 참가했습니다. 그곳에서 한 도반을 만났습니다. 가족사로 힘든 어린 시절을 겪었지만, 너무나 씩씩해 보였습니다. "스님께 야단 좀 맞으면 어때? 정신과 다니면서 약 먹어. 나도 다니면서 약 먹고 있어"라며, 그 도반은 제게 정신과에 가서 약을 먹고 스님께 즉문즉설도 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결국 자기 삶에 보탬이 되도록 바꿔 온 듯한 사람과의 만남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위축된 삶을 살고 있었고, 제 문제를 푸는 데 너무나 소극적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도 해 보자는 용기를 냈습니다. 돌아오는 날, 법사님의 “양미경 님은 힘과 에너지가 있습니다. 앞으로 법을 깨달아가는 기쁨을 만끽하세요”라는 말은 제게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습니다.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설 용기가 생깁니다.
정신과에 다니면 소문이 나 과외를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스님께 질문하면 야단맞을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스님께 질문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즉문즉설 공개 석상에서 제 과거와 트라우마를 모두 쏟아냈습니다. "참 힘든 인생을 사셨습니다"라는 스님의 첫 마디에 제 문제가 가볍지 않음을 깨달았고 '앞으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나를 보호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옳고 그름이 없다'는 법문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여기저기 질문했지만 시원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2025년 백일법문 때 스님께 직접 질문했습니다.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제가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절대화하여 저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동네에서 정신이 온전치 못해 보이는 젊은 남자를 보면 '내 아버지도 젊을 때 저랬겠구나, 저런 사람에게 내가 '옳다, 그르다'라는 잣대를 들이댔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더 이상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양꾸러미2 봉사를 하며, 온 집안이 쓰레기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방에서 초등 3~4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이 나오는데, 가슴이 서늘했습니다. 그 아이에게서 어린 시절의 아버지가 보였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태어나자마자 다른 여자와 도망갔습니다. 할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할아버지가 도망갔다며, 아무 잘못 없는 아버지를 학대하며 키웠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배다른 형제들을 찾아가 행패를 부렸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동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행동이, 영양꾸러미 봉사에서 만난 그 아이를 보고 나서야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도 이런 환경에서 자라 어쩔 수 없었겠구나. 아버지도 참 힘든 인생을 사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그토록 오래된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대인기피증도 거의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많이 편안합니다. 평생 이명증으로 고생했는데 명상하며 많이 좋아졌습니다. 얼마 전 남편에게 "신혼 초에는 가진 건 없었지만, 그때가 좋았지?"라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아니, 나는 지금이 제일 행복한데? 그때는 당신이 나를 엄청 구박했잖아"라고 했습니다. 제가 편안해지니 남편과 딸도 마음의 안정을 찾은 것 같습니다.
불교대학 진행자 소임을 하면서 저와 같은 마음의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더 이상 남을 탓하며 괴로워하는 업식에 끄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인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고 싶습니다.

한때 저도 해탈과 열반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 적이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고 의무감으로 일을 하면서, 일상의 알아차림은 희미해지고 어느샌가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는 삶이 목표인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정토회와 수행의 끈을 놓지 않은 건 그저 사부작사부작 지금보다 덜 괴롭고 조금 더 행복한 삶을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양미경 님이 "불교의 최고 경지인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양미경 님과의 만남을 마치고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습니다. 제게도 희망이 찾아왔습니다. 다시 용기가 났습니다. 소임이 복입니다.
글_홍정배 희망리포터 (서울제주지부 송파지회)
편집_최미영 (국제지부 한국호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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