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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고 맑은 인상을 주는 김태림 님과 줌으로 만났습니다. ‘어떻게 살면 저런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정토회를 만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중국에서 8년 왕비처럼 살았던 삶도 있었다는 김태림 님의 이야기 시작합니다.
2013년 평소 알던 스님과 인도 성지순례를 간 적이 있습니다. 여행 첫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여기는 배낭 메고 역사 기행을 꼭 다시 해야겠다’라는 마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정토회는 제 기대에 맞는 제대로 된 성지 순례를 하고 있었지만, 정토불교대학을 졸업해야 신청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20여 년 다니던 절이 정토법당과 가까운 지역에 있어 선뜻 법당을 옮기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던 중 사고로 발목이 부러졌습니다. 다니던 절은 집에서 조금 멀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집 근처 생활체육관에서 스님의 즉문즉설이 열린다고 해 반가운 마음에 다리를 절뚝거리며 가보았습니다.
‘행복학교’ 홍보 현수막을 보고는 눈이 번쩍 뜨여 바로 입학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정토불교대학이 온라인으로 바뀌었기에, 이건 ‘나를 위한 거다!’라며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 기다리던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법륜스님과 함께 한 인도 성지순례는 감동적인 추억으로 가득합니다. 인도 비자를 캐리어 안에 넣고 짐을 보내버린 후, 비행기 안에서 걱정하며 델리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입국 심사 시 비자 서류를 내지 못한 상황이었으나 인도 직원들이 웃는 얼굴로 호의를 베풀어 입국 심사를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법륜스님의 30년 인도 성지순례 덕을 보는구나!’ 하고 감사한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인도 성지순례에서 버스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지만, 성지에 도착하면 에너지를 받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제따바나(제띠안)에서는 평화 행렬을 했습니다. “가섭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 절하며 법의 종자를 심어 놓았습니다.”라는 경전을 독송할 때 왠지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무엇보다 감동이었던 것은 수자타 아카데미에서의 환영과 학생들의 맑고 순수한 모습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자연 속에 태어나 살았던 것이 큰 복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동네는 작지만 햇살이 가득하고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안동 김씨 집성촌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종갓집이었고, 할머니는 그 시절에도 아흔 살까지 사실 만큼 장수했으며 문중을 잘 이끌었습니다.
제 위로 언니가 네 명, 밑으로 남동생이 두 명 있습니다. 제 밑으로 남동생들이 태어났다고 해서 저는 집안과 동네 어르신들의 예쁨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아, 나의 단단한 자존감은 어릴 때 형성 됐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초등학교는 산 고개를 두 개 넘어가야 했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다리를 건널 때면 언니들이 양쪽에서 저를 잡고 가야할 정도로 몸이 약했습니다. 아버지는 엄한 호랑이 같았습니다. 안동 밖에 다녀오면 우리를 앉혀 놓고 “딸들은 공부할 필요 없고 시집가서 잘 살면 된다”라는 유교식 교육을 했습니다. 셋째 언니가 “막내만큼은 학교에 가야 한다”라고 주장해 저는 중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는 언니가 일하던 부산 공장의 산업체 부설 학교에 다녔습니다.
유교식 교육을 받았던 덕에 어릴 적부터 그 먼 학교를 꼿꼿한 자세로 다녔던 것 같습니다. 어른이 뭐라 하면 무조건 “예!” 아니어도 “예!” 했습니다. “아니요”라는 글자가 세상에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 덕분에 정토회에서 “예, 하고 합니다“라는 수행은 크게 노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조금 하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돈은 살아가면서 벌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집에서 살림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도급을 준 업체가 부도가 나면서 남편도 하루아침에 빚쟁이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 끝에 월급을 받아서는 빚을 갚는 게 불가능하니 사업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경리를 맡고 남편과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수동 기계를 자동으로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고, 빚 독촉 전화에 시달리면서 김칫국만 먹고 살아도 빚을 갚겠다는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자재가 없어 일을 못 할 때도 있고, 기름 값이 없어 출근을 못 할 때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용 거래를 못 했는데 2년 정도 지나니 “저 집은 돈이 없어서 못 주지, 있으면 준다”라는 신뢰가 생겨 외상 거래가 가능했습니다.
빚을 갚는 과정에서 법원에도 가 보고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니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꼬박 10년이 걸렸습니다. 저의 젊은 시절 10년을 빚 갚다가 보냈습니다. 남편이 바로 부처였습니다. 남편 덕에 엄청난 세상 공부를 했습니다.
빚을 거의 다 갚을 무렵, 남편은 사업장을 그대로 둔 채 중국 주재원으로 갔습니다. 저는 공장을 팔아 정리한 후 남편을 뒤따라 갔습니다. 2년을 예정하고 갔는데 8년을 중국에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빚쟁이로 10년 동안 빚을 갚으며 살았는데, 중국에서는 왕비처럼 살았습니다.

중국에서 ‘공부를 할까’, ‘여행을 할까’ 하며 망설였을 때 여행을 선택한 것이 지혜로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행하며 오로지 ‘자유인이 될 거다’라는 생각만으로 겁날 것이 없었습니다. 중국어가 능숙하지도 않았는데 중국 4대 성지를 전부 걸어 다녔습니다.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게 도와준 보이지 않는 인연이 고맙습니다.
결혼 전에는 가족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제가 결혼할 당시에는 ‘친정이 잘 살아야 한다’는 관념이 있어 똑똑한 조카딸을 붙잡고 “우리 가문을 일으켜 보자”라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힘들어지니 제가 전부라고 믿고 있던 것, 유교식 교육으로 주입된 관념이 깨졌습니다. 유교적 관념의 껍데기 안에서 죽을 만큼 힘들어하는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정토회에서 마음공부를 하니 남편을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말은 안했지만 ‘남편도 잘 살아보려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 얼마나 당황했을까?’, ‘어릴 적부터 고향에서는 주목받던 사람이었는데 사업에 실패하고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동생 둘을 이해하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가까이 살다 보니 남동생들이 저보다 더 잘 사는데도 제가 여러 모로 챙겼습니다. 받는 것에 익숙해 당연하게 여기는 동생들의 태도를 보면 어릴 때부터 형성된 습관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래도 순간순간 섭섭함이 올라오면, ‘동생들도 피해자네’ 하고 생각합니다. 깨닫고 또 깨달으며 점점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콜센터 봉사를 하면서 제가 전화 받는 일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남편과 함께 일하면서 전화 받는 일에 단련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고마운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모르는 게 많아 힘들었는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재미를 느끼고, ‘체력이 약해도 이 일은 정년 없이 봉사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행복합니다.
정토행자로 살면서 보람을 느낄 때는 남편과 딸이 정토회에서 마음공부를 한 일입니다. 경전대학 진행자도 즐거운 마음으로 했고 행복학교, 모둠장 소임도 무조건 “예, 하고 합니다”라는 마음으로 했더니 마음의 힘이 커졌습니다.
한 번은 ‘정토행자의 서원’을 듣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뭔지 모를 전율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이후로는 새벽 공동정진을 빠지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정진하지 않으면 오히려 몸이 이상합니다. 고요함 속에서 정진을 마치면 도반들의 나누기를 제 몸의 세포들이 다 알아들은 듯하고, 제 안의 에너지를 새롭게 느낍니다. 꾸준히 수행해서 자유인이 되겠습니다.

김태림 님과의 인터뷰는 같은 길을 가는 도반으로, 같은 여자로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더 밝아지고 넓어지는 걸 느낍니다. 정토행자들이 정토회를 사랑하는 이유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김태림 님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어 행운입니다. 수행 선배님을 잘 따라가는 도반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뭉게뭉게 올라왔습니다.
글_김선화 희망리포터(광주전라지부 서광주지회)
편집_이경분(서제지부 관악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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