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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회 둔산 모둠 류연순 님은 모둠장 소임을 다섯 번째 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이 70세, 만 나이 68세이지만 오늘도 현역입니다. 봉사는 마음만 내면 되는 일이라 힘들지 않다고 합니다. 매출을 올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압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를 모르면 배워서 하면 되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 되지 않냐, 편안하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사장님에서 모둠장이 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저는 6남매 중 둘째입니다. 위로 오빠와 두 살 터울의 동생이 4명입니다. 9살 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돌아가셨지만, 어린 시절에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농사지을 땅도 있고, 일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강하고 긍정적이었습니다. 혼자 자식 6명을 키우며 혼낸 적도 없었습니다. ‘자식들은 내가 책임진다.’라는 마음으로 남부럽지 않게 키웠습니다. 어머니에게 배운 굳건한 태도 덕분에 저도 두 아들을 큰 어려움 없이 키웠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양재를 배웠습니다. ‘내가 옷 만드는 일을 잘할 것 같다.’라는 어머니의 말로 시작했습니다. 학원에서 배우고 실습하는 기간이 보통 수년이 걸리는데 저는 2년 만에 마쳤습니다. 의상실을 하겠다고 하니 어머니가 큰돈을 마련해주어, 20대 초반에 고향 서산에서 의상실 사장이 되었습니다. 5년 동안 의상실을 하며 주로 학생들의 교복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여자가 결혼하면 일을 하지 않던 시절이라 남편의 직장인 대전으로 이사를 가 잘 되던 가게를 정리했습니다.
신혼 초, 남편의 넷째 여동생이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습니다. 시골보다 대전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면 좋을 것 같아 우리 집으로 오라고 했더니, 한 살 아래인 다섯째 시누이가 "언니만 가면 되느냐? 나도 좀 데려가라"라고 해 시누이 2명과 10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내가 도와주면 시누이들이 직장을 구하기도 결혼하기도 쉽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스레인지가 없던 시절로 연탄불이나 석유풍로에 음식을 했습니다. 두 시누이의 도시락을 하루에 4개씩 쌌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자기 식구만 살면 되지, 시누이는 왜 오라고 해서 고생하느냐?"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좋아서 한 일이라 힘들지 않았는데 남들에게는 힘들어 보였나 봅니다. 대가를 바라면 오래 못했겠지만, 바라는 마음 없이 편하게 했습니다. 훗날 시부모님이 아팠을 때 저는 사업으로 바빴습니다. 같이 살았던 시누이가 병원에 모시고 다녀 저는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자라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화장품 매니저를 하다 기회가 되어 대리점을 인수했습니다. 집은 대전인데 대리점은 울산에 있어 주말부부를 5년 정도 했습니다. 저는 영업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사람 관리를 잘했습니다. 매일 조회가 끝나면 매니저들을 교육했습니다. 매니저들이 자리 잡고 매출을 올리면 저도 돈을 벌었습니다. 판매원이 100여 명이 되는 규모로 성장했고, 전국 20여 개 대리점 중 제가 운영하는 대리점 매출이 제일 높았습니다.
회사가 사업을 확장하며 ‘중국에 공장을 짓는다.’ ‘주식을 준다.’라며 투자금을 모았습니다. 대리점 사장들은 대출까지 받아 투자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회사가 초창기에 같이 일했던 사람들을 쫓아내고, 운영 방식을 마음대로 바꿔 회사와 대리점 사장들 사이에 마찰이 생겼습니다. 저희가 사업 확장에 관해 확인하고자 중국에 가보니 공장은 없고 창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주식도 투자한 돈을 받지 못하고 손해를 보았습니다.
갈등이 커지자 2014년 회사는 변호사를 선임하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저희도 준비 없이 맞소송했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서초동 법원에 갔습니다. 많은 사람과 엮여 있고, 저는 전국 대리점 사장들의 대표를 맡고 있었습니다. 저는 빨리 그만두고 싶었지만, 의리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저 혼자 빠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지 않았던 저는 소송이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화장품 매니저를 하던 시절, 같이 일하던 동료가 법륜스님의 불교대학을 소개했습니다. ‘영상으로 법문을 듣는다.’라고 하여 '법문을 직접 들어도 시원찮은데 화면으로 들으면 무슨 공부가 되겠나?’라는 생각이 들어 관심 두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아들이 수능 잘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 친구 따라 절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절의 스님은 "보시를 많이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라고 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은 다 잘된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 갔습니다. 또 다른 절은 "재를 지내라'라고 해 믿음이 가지 않아 그만두고, 이 절, 저 절을 찾아다녔습니다.
소송으로 힘든 어느 날, 사거리에 붙어 있는 정토불교대학(이하 불대)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전에 들은 거네. 이렇게 복잡할 때 저런 공부라도 해볼까?’라는 마음으로 대전법당을 찾아갔습니다. 낮에는 법원에 가야 해 저녁반을 등록했습니다. 불대를 공부하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회사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에게 손해를 끼친 ‘아주 못된 사기꾼’이었습니다. 분해서 욕도 많이 했습니다. 불대를 공부하며 제가 어리석었음을 알았습니다. 대리점을 인수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때 그만두었으면 얼마라도 돈을 받았을 것이고, 제가 싫으면 "나는 그만하겠습니다. 응원은 하지만 여기서 나는 끝내겠으니 알아서 하시오."라고 하면 될 것을 아무것도 아닌 의리에 붙잡혀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불대를 졸업하고 경전대학에 다닐 때, 회사에서 소송을 그만두고 합의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소송에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고, 소송비도 계속 들어갔습니다. 이긴다고 해도 처음에 생각한 몇억은커녕 몇천만 원 겨우 받을 뿐, 소송에 들어간 비용을 건지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빨리 끝내자고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이길 가능성이 큰 한 사람은 소송을 끝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변호사비를 줄 테니 같이 끝내자고 설득하여 2년에 걸친 소송이 끝났습니다. 대리점을 차리는데, 들어간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으니, 몇억이 손해났습니다. 돈 벌었다고 큰소리 뻥뻥 쳤지만, 결국 투자하느라 대출받았던 빚을 남편이 갚아주어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소송은 끝났지만 분해서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다 털어먹었구나!’ 경전대학을 마치고 불대 진행자를 할 때도 이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잊은 듯하다 다시 생각나고, 생각과 함께 분한 마음도 일어났습니다. 정토를 일구는 사람들(이하 정일사1) 300배 정진 후 회향 수련에서 법사님께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법사님은 “시간과 돈을 바꿨다고 생각하세요. 돈은 손해를 봤지만, 시간을 벌었으니, 그 시간을 잘 쓰면 되지 않겠어요? 계속 고민한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딱 깨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소송을 계속하면 시간을 계속 투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1년이 될지 3년이 될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돈을 안 받는 조건으로 소송을 끝냈으니, 시간은 확보된 것이구나. 남은 시간을 보람 있는 일을 하며 잘 사는 것이 낫겠구나. 어차피 끝난 것인데 고민할 필요 있나?’라고 관점을 바꾸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붙잡고 있어 머리 아프고 속상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돈도 많이 벌어보고 잃기도 했습니다. 제가 좋아서 했지만, 고생하며 돌아다닌 10년이 제자리였습니다. 바꿔 생각할 수 있는 지혜를 얻으니 그날 저녁부터 분했던 마음이 싹 없어졌습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방송통신대학 가정학과를 졸업하고, 사업 할 때 열정을 끌어올리는 방법, 임사체험, 음악 명상 등 여러 가지 교육을 받았습니다. 배울 때는 말도 잘할 것 같고, 열정이 생기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잊어버리고 내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효과는 일시적일 뿐 결국 습관대로 했습니다.
하지만 정토회에서 배운 것은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저는 59세에 정토회에 왔습니다. 그때는 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70대가 되어 갑니다. 불대와 경전대학을 졸업한 후 불대 진행자, 경전대학 진행자, 모둠장 소임을 하며 10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10년은 후회스럽지도 않고 제자리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빨리 돈을 벌어 잘 먹고 잘 써야겠다.’라는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전에는 시간이 없어 옷도 한 번에 몇 벌씩 사며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지금은 옷도 법복 몇 벌이면 되고 전에 있었던 옷을 고쳐 입으니 새로 살 일도 없습니다. 저는 고치는 것을 잘하니, 예전 옷이 너무 긴 것은 잘라내고, 짧은 것은 늘려서 입습니다. 많이 사고 싶다는 욕구가 줄어드니 살기가 편합니다. 사고 싶은 것을 못 사면 불편하겠지만, 욕구를 따라가지 않고 검소하게 사는 삶의 의미를 알아 떳떳합니다. 돈의 관점이 바로 잡히니 껄떡껄떡 돈을 찾던 마음이 싹 없어졌습니다.
돈 버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을 하는 것이 성장입니다. 소임을 통해 누군가에게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안내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못한다.’ ‘저래서 못한다.’ 하는 도반을 안내하였습니다. 불대를 졸업하고 경전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보면 보람을 느낍니다. ‘새벽정진을 못 하겠다.’라는 도반을 챙겨 그 도반이 새벽 정진에 들어오는 것을 볼 때 보람을 느낍니다.
전에는 ‘나, 우리 식구, 내 주변이 잘 살아야지’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주변 사람은 챙기지만, 주변을 벗어나면 남의 일처럼 느꼈습니다. 지금도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이나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성장하였습니다.
남편에게 "내가 잘하는 것, 내가 잘못하는 것이 뭐야?"라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말을 안 하더니, "고집이 세지. 한번 정한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계속 고집하잖아"라고 합니다. 제가 고집이 센 줄 몰랐습니다. 돌아보니 제 고집이 보이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하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옳다'라는 생각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상대의 다름을 알아차리고자 연습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상대가 제 생각과 다르게 얘기하면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속으로 기분이 상했습니다. 지금은 ‘그 상황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라고 돌이킵니다. 잘 안되지만 계속 연습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름을 인정하자.’, 지금은 ‘내 의지대로 되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만족한다’라는 명심문으로 연습 중입니다.
나이가 있어 앞으로 전법 활동가보다 일반회원으로 잘 쓰이고 싶습니다. 제가 하고 싶다고 계속 머물러 있으면 민폐라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 도반들이 모둠장을 맡아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정토회에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보리수 활동을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일거리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도시에 있는 삼촌 댁에서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숙모님도 도시락을 4개씩 쌌습니다. 인터뷰 내내 숙모님과 류연순 님이 겹쳤습니다. 바라는 마음 없이 나눠 준 삼촌과 숙모님 덕분에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인연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입니다.
글_서기남 희망리포터 (서울제주지부 양천지회)
편집_최미영 (국제지부 아태지회)
정일사정토회를 일구는 사람들의 준말로 정토회 활동가들을 위한 수행 프로그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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